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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사이렌) 세속주의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 마이클 호튼 --- 2
(몰렉) 자유주의 신학은 영적 간음이다. 성적 난잡을 불러온다/ 프란시스 쉐퍼 ------- 3
우리 시대는 예레미야 시대와 같고 더 악하다/ 프란시스 쉐퍼 -------------------- 4
참 교회에 속한 회원들은 작은 양떼 즉 그 수가 매우 적은 무리이다/ 존 라일 ------ 5
거룩한 삶이 하나님과의 연합의 끈이다/ 존 칼빈 ------------------------------ 6
현대 자유주의는 기독교와 전혀 다른 하나의 자연종교이다/ 메이첸 --------------- 7
조엘 오스틴의 형통 복음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마이클 호튼 ------------------ 8
가짜 회개에 속지 말라/ 조셉 얼라인 --------------------------------------- 9
왜 심리학은 반기독교적인가(프로이드,융)/ 옥성호 ----------------------------- 10
레이 윤겐의 '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를 읽으며/ 강대식 --------------------- 13
사막의 교부들/ 레이 윤겐 ------------------------------------------------ 14
행크 헤네그라프, “바벨탑에 갇힌 복음”(베니 힌, 론다 번) --------------------- 16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에 대한 나의 회고/ 강대식 ----------------------- 20
왜 우리는 청교도의 길을 가야 하는가?/ 강대식 ------------------------------ 22
청교도아카데미 독서목록1(수정5, 2015-04-14)/ 강대식 ------------------------ 25
(사이렌) 세속주의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 마이클 호튼
고전 서사시 오디세이에서 호머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절반은 여자이고 절반은 새인 이 여신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뱃사공들을 꾀어서 죽였다) 섬을 지나서 귀향해야 했다. 거부할 수 없는 멜로디로 선원들에게 최면을 걸어, 사이렌들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을 자기들의 소굴로 유혹해 들였다. 자기들이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곧 자기들에게 저항할 만큼 충분한 힘이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 사실을 알고 오디세우스는 자기 선원들에게 자기를 그 배의 뱃기둥에 묶어 달라고 부탁하고, 그 선원들의 귀를 왁스로 막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배는 무사히 그 섬을 지나면서도 사이렌들의 노래에 저항하고 다음 무대로 전진해 나갈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사이렌의 노랫소리는 세속주의다. 세속주의란 세속화 과정에서 비롯된 오늘날의 삶의 조건, 삶의 상태(condition)이다. 세속주의는 크게 두 가지 운동의 결과이다. 첫째가 근대성(mordernity)이다. 이 근대성은 계몽주의에 뿌리박고 있다. 계몽주의는 기적, 구원, 계시 등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을 거부하고, 오직 자연의 법칙, 도덕적 개선, 진보, 이성과 같은 자연주의만을 인정했다. 둘째는 탈현대주의(postmodernity 혹은 후기 현대성)이다. 이 사조는 경험을 이성보다 앞세우며, 영혼의 내적인 실질을 객관적인 외적 세계의 실재들보다 더 강조함으로써, 근대성(모더니티)과 합리주의의 무미건조한 개선주의에 대해 여러 면에서 저항하고 있는 사조다. 둘 다 세속적 운동이지만, 크리스천들은 종종 무의식적으로 이 과정에 승복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양보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이 그냥 이 시대의 정신에 천천히 영합하고 있다.
오늘날의 보수적인 크리스천들은 20세기의 주류 교단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자신들에게 충분히 있다고 과신한다. 즉 자기들은 교회도 잘 다니고 있고, 자체적인 음악과 예술과 행사와 각종 회의와 책들과 방송을 지니고 있는 복음주의적 저변 문화에 깊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사이렌들이 노래하고 있는 섬을 안전하게 지나 항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 개개인은 자기들의 교회와 복음주의적인 저변 문화에 더 많이 참여하면 할수록, 세속주의의 최면의 힘에 이미 정복당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세속주의에 대한 우리의 위기에 대한 구제책은 (비록 기독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땅에 근거를 두고 있는 운동을 부흥시킴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비전을 회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 구제책은 주님의 가르쳐 주신 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에 담겨 있는 그런 회복이다. 그리고 그 한 문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인격적인 측면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주권에 대한 초월적이며 영원한 관점 사이의 균형을 발견한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인격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오늘날 자유주의, 보수주의를 불문하고 크리스천이 너무 자주 장난처럼 들먹이고 있다.
-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pp 170-172
(몰렉) 자유주의 신학은 영적 간음이다. 성적 난잡을 불러온다/ 프란시스 쉐퍼
영적 간음과 육체적 간음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 간음을 범하고 딴 길로 가면 그 다음 세대는 곧 육체적 간음을 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세대는 넘치는 힘으로 이것을 증명한다.
영적 간음을 방치하면 얼마가지 않아서 그 땅에 육체적 간음이 독버섯처럼 솟아 오른다.
1930년대에는 자유주의가 미국의 전 교회를 거의 장악했고 1960년대의 우리 세대는 난잡한 성행위 때문에 골치를 앓는다. 난잡한 성행위는 영국에도 그러했고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적 간음과 육체적 간음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적 그리스도로부터 떠나면 하나님의 눈에는 그것이 불신자의 극악한 혼인의 경우보다 훨씬 더 가증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의 탈선은 신랑과 신부의 가장 중심된 관계의 사실을 망쳐버리기 때문이다.
영적 간음인 배도는 그것보다 훨씬 더 악하다. 자유신학은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또 신성하신 역사적 그리스도를 부인한다. 자유신학은 성경이 언어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부인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도 부인한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인도주의이론(人道主義理論)을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내신 말씀보다 더 높인다. 그들은 신(神)이 아닌 그들 자신들의 관념을 신으로 만든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옛 몰렉을 섬기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하다.
몰렉에 관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 힌놈의 골짜기에 있던 몰렉은 유대인들이 섬겨서는 안 된다고 계속 경계를 받은 이방 신이었다. 그는 초산아(初産兒)를 제물로 받는 신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동우상(銅偶像)의 등에는 구멍이 있는데 거기에 불을 피워놓고 모든 부모들은 벌겋게 달아서 펴진 몰렉의 팔에 그들의 초산아를 바친다고 한다. 부모는 감정을 표현해서는 안 되고 아이가 몰렉의 손에서 죽을 때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북을 쳤다고 한다.
우리 문화권 내에는 그 몸에 몰렉에게 화상을 입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세대는 몰렉의 손에 있는 아이들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단순히 예술애호가로서 곁에 서서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도 무익한 공론의 장구를 크게 쳐서 귀를 막아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럴 것이 아니라 우리는 통분하며 행동을 해야 한다.
자유주의신학을 무엇에 비교하면 좋을까? 그것은 잠언 30장20절에 하나님께서 간음하는 여자에 대하여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 하느니라”한 말과 비교할 수 있다. 얼마나 적적한 비유인가?
하나님의 모든 선물을 받고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떠나 몰렉에게 미혹되어 아이를 바치는 부모들보다, 더 파괴적인 것을 경배하는 자유주의 신학보다 더 더러운 음녀도 없다.
- 프란시스 쉐퍼, 『20세기말의 교회』, pp 161-183
우리 시대는 예레미야 시대와 같고 더 악하다/ 프란시스 쉐퍼
우리 세대는 굶주려 있다. 사랑에, 미에, 의미에, 항구적인 도덕과 법에 굶주려 있다. “죽음의 재”가 모든 것을 뒤덮고 있다. 예레미야 시대처럼 풍성한 위로자에 대한 가시지 않는 갈증이 있다.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애1;16). 예레미야 시대 유대인들은 위로자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만족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복음주의와 정통신앙권 안에서는 사람의 목적을 말할 때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라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의 답 가운데 첫 번째 부분을 인용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것으로 끝난다면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람들이 이해한 성경 교훈의 뜻은 완전히 바뀐다. 성경대로 충실히 대답하려면 소요리문답 제1문의 답을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기는 것이다” 하고 완전하게 인용해야 한다. 이 후반부 답이 인생에 대한 관점 전체를 바꾸어 놓는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을 즐기는 것이기도 하다. 사명을 절실히 수행하는 것은 우리가 창조된 목적과 관련된다. 창조된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고, 그분에게 채우심을 받고, 그로써 삶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전인이 채움을 받아야 한다. 즉, 사람이 기쁨으로 충만하여 살 수 있음을 긍정해야 한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유대인들이 진정한 채움으로 향하는 길에서 등을 돌린 모습을 본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애1:18). 히브리 성경에서는 “명령”이 아니라 “입”이다. 좀더 포괄적으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 하나님께서 인생의 진정한 해답,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방법, 그분과 관계를 맺고 사는 방법을 말씀해 주는 명제적 계시- 에 반역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예레미야 때의 시대 상황이나 탈기독교 세계의 상황에 처하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명제적 계시를 외면했다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도덕적 심판 아래 놓여 있다. 이 문화가 성경적인 종교개혁 사상의 터 위에 세워졌는데, 우리 바로 앞 세대들이 그 진리를 외면해 왔으므로 다시 진리로 돌아서는 일이 없이는 도시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게 될 것을 자각하는 일이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레미야 시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것은 그냥 군사나 경제상의 이유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이들이 자기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심판하셨다. 우리 세대도 똑같이 대하실 것이다. 우리의 관점은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이어야 한다. 이 관점을 갖고 있다면 싸구려 해결책들을 내놓지 않을 것이고, 심판이 있다는 사실에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 프란시스 쉐퍼, 『개혁과 부흥』, pp 18-25
참 교회에 속한 회원들은 작은 양떼 즉 그 수가 매우 적은 무리이다/ 존 라일
참 교회는 마지막 날까지 틀림없이 견디는 유일한 교회이다. 그 어느 것도 이것을 깨뜨리거나 부술 수 없다. 이 교회에 속한 자들은 핍박과 눌림을 받으며 투옥되거나 매를 맞거나 참수되거나 화형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참 교회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이 교회는 역경을 딛고 다시 일어난다. 이 교회는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망치를 깨부수는 보루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망치가 이 교회에 부딪혀 깨지고 말 것이다. 이것은 또한 불에 타오르면서도 소멸되지는 않는 가시덤불이다.
참 교회는 그에 속한 자가 아무도 멸망할 수 없는 유일한 교회이다. 일단 이 교회의 회원으로 등록이 되면, 죄인들은 영원히 안전하다. 참 교회는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행하는 교회이다. 그 회원들은 작은 양떼 즉 세상의 아들들과 비교해 볼 때에 그 수가 매우 적은 무리이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 하나 둘, 저기에 두 셋, 또 이 지역에 조금, 저 지역에 조금 있다. 그러나 우주를 뒤흔드는 자 또는 기도로써 자기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자들은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한 나라의 생명의 피이며, 그들이 속한 나라의 방패이자 방어물 그리고 버팀목의 지주가 된다.
참 교회는 만물이 종국에 이를 때 진실로 영화롭게 될 교회이다. 지상의 모든 영광이 사라질 때, 이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에 아무 흠 없이 드러날 것이다. 이 땅의 보좌와 지배력, 권력은 아무 가치도 없게 될 것이다. 위엄과 직위와 천부의 재능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장자들의 교회는 마지막 날, 별처럼 빛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 하나님의 보좌 앞에 기뻐하며 나타나게 될 것이다.
참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참 성직자들이 힘써 일하는 교회이다. 참 성직자에게 그가 설교하는 건물을 꽉 채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에게는 교인들이 “거듭나는” 것 외에는 어느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 또 회심하여 그리스도께 이끌려 오는 영혼이 없다면, 또 세상에서 나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참 교회에 속하는 자들이 많아지지 않는다면 그에게 이 모든 일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 참 교회는 인간이 구원받으려면 꼭 속해야만 하는 교회이다. 이 교회에 속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된 영혼과 똑같은 존재이다. 우리에게 신앙의 형식과 껍데기는 있으나 그 안에 실체와 생명이 담겨 있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다! 사람들은 그들이 이 교회 혹은 저 교회에 합류하여 성찬식에 참석하고 또 어떤 특정한 형식을 거치기만 한다면, 그들의 영혼에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미혹이다. 이것은 엄청난 잘못이다.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자마다 모두 다 이스라엘인 것은 아니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는 자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느 교회에 속한 충실한 교인이라 할지라도, 참 교회에는 속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자.
- 존 라일, 「오직 한 길」, 10장 교회, pp 367-369
거룩한 삶이 하나님과의 연합의 끈이다/ 존 칼빈
중생의 목표는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와 조화를 이루고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양자가 된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도록 하는 데 있다(갈4:5,벧후1:10). 성경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레19:2,벧전1:15-16)고 가르치는데, 과연 이보다 더 확실한 근거가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였다는 사실을 들을 때마다 거룩함이 그 연합의 끈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우리의 거룩함이 공로가 되어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어야 그의 거룩함이 우리에게 가득 차게 되고, 그가 부르시는 곳으로 따라가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이 악이나 부정과는 어떠한 교제도 나누지 않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므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는 당연히 거룩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거룩함을 목표로 삼고 바라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사35:8). 만일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줄곧 악과 부패 속에 뒹군다면, 우리를 그 속에서 건져 구원해내신 목적이 도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성소가 마치 더러운 흙이 가득한 마구간처럼 된다면 그것이 과연 온당한 일이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구속의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 주께서는 오로지 한 가지 조건, 즉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낸다는 조건으로 우리를 그의 자녀로 받아들이셨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의를 위하여 우리 자신을 드리고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배신으로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 자신을 저버리는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아버지로 계시하셨으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의 자녀임을 드러내어야 마땅하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하나님께 배은망덕한 일일 수밖에 없다(말1:6,엡5:1,요일3:1).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씻으셔서 우리를 정결케 하셨으므로, 우리가 다시 우리 자신을 더럽힌다면 그것은 정말 가당치 않은 일이다(엡5:26,히10:10,고전6:11,벧전1:15,19).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몸에 접붙여 주셔서 우리가 그의 몸의 지체들이 되었으니, 흠과 티가 없도록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마땅하다(엡5:23-33,고전6:15,요15:3-6). 우리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리우셨으니, 이 땅의 것들에 대한 사랑을 뒤로 제쳐두고 전심으로 하늘을 사모하는 것이 합당하다(골3:1).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께 성전으로 드리셨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며, 죄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도록 경계해야 마땅하다(고전3:16,고후6:16).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장차 하늘에 속한 썩지 않는 영광에 들어가 쇠하여지지 않는 빛난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므로(벧전5:4), 주의 날까지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순결하고도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도록 힘써 노력해야 할 것이다(살전5:23,빌1:10). 이것들이야말로 올바른 삶을 세우는 가장 확실한 토대가 되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지식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삶에 있다. 그런 지식은 오직영혼 전체가 그것에 사로잡히고 내면의 깊은 마음에 그 진리가 자리를 잡아야 비로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교리는 반드시 마음속으로 들어가 우리의 일상 생활에 전해져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나야 하고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196-202
현대 자유주의는 기독교와 전혀 다른 하나의 자연종교이다/ 그레샴 메이첸
현대 자유주의가 기독교의 전통적 용어를 자유롭게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와는 상위한 일개 종교일 뿐만 아니라 전혀 별개 종류의 종교에 속하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자가 기독교의 교리를 하나씩 순차로 그의 적에게 양도한 후에 남아 있는 잔여물은 결코 기독교가 아니고 별종의 범주에 속하여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하나의 종교이다. 그 근원은 자연주의이다.
복음적 교회의 교직자 중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대군(大軍)이 있다. 전통적 용어의 이중적 사용에 의하여 또한 견해의 상위를 단순히 성경해석상의 상위에 불과한 것처럼 표현하는 것에 의하여 신앙의 토대 바로 그것에 대적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침입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시련을 당하고 있는 학대보다 더 암흑한 시대에 있어서도 교회를 인도하였다. 우리는 이교주의가 기독교의 명칭하에 교회 중에 침입하였음을 보고 있다. 제2세기에 있어서도 동일한 싸움이 있었고 또한 그것은 승리로써 종결하였다.
새로운 기독교 단체가 형성될 수도 있는 일이다. 어딘가에 반드시 구속함을 받은 남녀성도가 있어서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겸손하게 단합하여 그의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선물로 인하여 그리스도에게 감사하여 그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에게 경배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 단체만이 홀로 영혼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 현재의 연합들은 주에게 반항하는 세상과의 연합을 의미할 때가 많다. 평화의 매는 줄로 이루어진 성령의 참된 연합과는 얼마나 상이한 것인가!
현재와 같은 투쟁의 시대에 있어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식탁의 주위에 충심에서 집합하는 회중이 있다. 진실로 목사다운 목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회중은 발견하기 어렵다.
세상의 투쟁에 피로한 나머지 사람들은 영혼의 안식처를 구하여 교회로 나온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을 발견하는가? 슬프다. 그들은 거기에서도 역시 너무나 빈번히 이 세상의 요소를 발견한다. 설교자는 명상과 능력의 은밀한 장소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의 설교를 풍부케 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도 없이 인간의 지혜와 심대한 죄의 문제에 대한 안일한 해결책으로 그의 설교를 채운다. 세상의 싸움이 하나님의 전당에까지 침입하였다. 그리하여 평화를 구하려 교회를 찾아 나온 사람들의 마음은 진실로 비참한 것이다.
투쟁으로부터 피할 곳은 없는가? 사람이 영생의 싸움을 준비할 수 있는 휴식처는 없는가? 세상의 투쟁들을 다 망각하고, 십자가의 발 아래 차고 넘치는 감사의 희열 속에서 연합하기 위하여 2인이나 3인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일 수 있는 곳은 없는가? 만일 이러한 장소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집이고 천국의 문이다. 그리고 그 집의 문지방 아래서는 피로한 세계를 소생시킬 강물이 흘러 나올 것이다.
-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pp 229-233
조엘 오스틴의 형통 복음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마이클 호튼
수정교회의 설립 목사이며 빈센트 필의 가장 유명한 제자인 로버트 슐러는 이 순수한 미국적 복음을 복음주의 진영에서 더욱 성공시키는 데 기여했다. 『자존심: 새로운 종교개혁』, 『자아 사랑』, 『당신을 믿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라』 그리고 『행복의 태도』 등 슐러의 저서들은 그의 텔레비전 사역의 힘을 받아 베스트 셀러가 됐다. 어떤 세속적 자기계발 스승도 이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믿음의 말씀 운동(Word of Faith movement) 으로 알려진 적극적 사고방식의 오순절주의적 버전이 땅 끝까지 형통복음(prosperity gospel)을 확산시키고 있다. 제3세계에서 기독교의 팽창을 자축하는 것은, 자제 되어야 한다.
신학자들은 형통의 메시지와 고대 영지주의 사이에 놀랄만한 유사성이 있음을 지적하곤 한다. 믿음의 말씀 메시지는 마치 저 고대의 이단처럼 영과 물질을 날카롭게 구별하는 이원론을 당연시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영역의 비밀스러운 원리를 습득함으로써 인간이 처한 외적인 환경들을 지배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창조 세계 자체는 타락했지만, 내적 자아는 신성하다고 이 교설의 교사들은 주장한다. “당신 안에 사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케니스 코플런드, “당신이 신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일부고 하나님의 한 조각이다.”
조엘 오스틴의 화려한 성공보다 미국판 교회의 포로 상태를 더 잘 보여 주는 사례는 찾기 힘들 것이다. 조엘 오스틴의 메시지는 펠라기우스주의의 자기계발과 영지주의의 자기 신성화가 접목된 형태를 보여 준다. 오스틴은 케니스 코플런드와 베니 힌의 “입으로 시인하고 믿음으로 얻으라”의 철학을 주류의 반열에 올려놓는 의아한 성공을 거뒀다.
오스틴은 오늘날 미국 대중 종교를 특징짓는 도덕론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을 다소 덜 극단적인 형태로 다양하게 제시한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당신과 당신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신다. 하나님에게는 어떤 법칙과 원리가 있어서,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려면 이것들을 사용해야 하고, 당신이 그것들을 준수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선언만 하라. 그러면 형통이 당신을 따라온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일하는 구매 대리인이다.
미국인들에게 주는 매력은, 조엘 오스틴의 베스트 셀러인 『긍정의 힘』과 『잘 되는 나』에서 거둔 숨이 막힐 정도의 성공에서 여실히 입증된다. 오스틴이 보여 준 전대미문의 매력은 미국제 복음의 단순하고 부드러운 샘플과 연결되어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기독교와 문화적 요소의 혼합물이다. 지금은 컴팩센터의 소유주며 휴스턴에 있는 레이크우드 교회의 그 목사가, 자가용 비행기와 요트를 타는 초상류충 복음 전도자이면서도 늘 멋진 말을 하는 옆집 아저씨같은 이미지를 우연히 지닌 것은 아니다. 오스틴의 가르침은 대부분의 대형 교회, 그리고 다른 구도자 중심의 사역과 구별하기가 힘든 용어들과 고급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전달되고 있다.
- 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pp 93-98
가짜 회개에 속지 말라/ 조셉 얼라인
기독교를 믿는다는 고백이 회개는 아니다. 단지 이름뿐인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4:20). 이런 것이 회개라면, 사데교회나 라오디게아교회 사람들은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살았다 하는 이름’(계3:1)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단지 이름만 있었기 때문에 주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고, 그들을 토하여 내칠 수도 있다고 경고하셨다(계3:14-16).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불의에서 떠나지 않고(딤후2:19), 말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한다(딛1:16).
회개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죄 안에 사는 것이 정말 회개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신앙고백이라는 것 등으로 회개가 입증되는 것이라면 어리석은 처녀들이 쫓겨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마25:11,12). 그리스도를 전한 설교자들이나 기적을 행한 자들도 악을 행하기 때문에 쫓겨날 것이다(마7:22,23).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회개한 것이 아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리고 마술사 시몬도 다른 사람들처럼 세례를 받았다. ‘세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속기도 하고 속이기도 한다. 회개와 세례가 동일한 것이라면, 이 세상을 떠날 때 세례증서만 챙기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천사들이 그 증서만 있으면 천국문을 열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받는 것이 곧 회개이고 중생이라는 주장은, 마태복음 7장 13,14절을 비롯한 수많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이런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마7:14)라고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구원의 문은 아주 넓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은 넓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구원의 문이 그토록 넓다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들 중에서도 오직 남은 자만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가르쳐서는 안 될 것이다(롬9:27).
세례 때 무엇을 받았든 간에 이후의 삶이 거룩하지 못하다면 그는 철저한 변화를 통해 확실히 새로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갈6:7). 당신이 거룩하고, 참되고, 자신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구원받을 수 없다(히12;14, 마15:14).
한 번 비췸을 얻는 것, 죄책감을 느끼는 것, 피상적 변화, 부분적 개혁이 회개는 아니다.
양심의 가책이 곧 회개라면 아벨을 죽인 가인도 회개한 사람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지금 돌이켜라! 죄인이여, 내 말을 들어라! 살려거든 들어라! 죄인이여,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결국 죽어서 지옥에서 뒤늦게 눈 뜨는 것보다는 지금 내 말을 듣고 깨닫는 것이 낫다. 당신 자신을 속이는 거짓된 소망을 붙들지 말라. 철저히, 신속하게 돌이키겠다고 결심하라!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잃어버린 사람이 될 것이다.
- 조셉 얼라인, 「돌이켜 회개하라」, pp 18-29
왜 심리학은 반기독교적인가
심리학의 모든 중심은 인간을 향하고 있다. 인간으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난다. 성경의 모든 중심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기독교는 원천적으로 인간의 자존심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종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기독교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본성과 전혀 맞지 않는다. 이런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가 자기 사랑과 자기 수용을 위해 하나님까지도 수단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심리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1)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중심적이라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
심리학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이다. 그리고 기독교 심리학은 인간의 이 행복 달성을 위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보여 주는 가장 큰 증거이자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주장한다. 달리 표현하면 기독교 심리학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근거로 내가 나 자신을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과 다름없다.” pp. 118-9
“나 자신의 가치를 깨닫기 위해 발버둥치는 심리학과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더 작아지는 나 자신을 목격하는 기독교가 얼마나 다른가? 이 두 가지의 가치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p.120
2)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본성의 선함 혹은 중립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
3) 왜 심리학이 반기독교적인지를 알려면 심리치료의 창시자인 프로이트와 융을 알아야 한다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가장 큰 업적은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이 ‘무의식’이라는 개념이 사실상 인간 심리를 설명하는 데에 중심이 되도록 한 점이다.
“프로이트는 꿈, 농담, 실수 행위 등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무의식’의 존재를 일반에게 각인시키고, 인간의 성적 본능의 발전 과정을 추적하면서 유아 성욕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주장하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계속해서 정신 분석학을 이론적으로 규정하고 정신분석의 방법을 종교, 사회, 문명, 예술들의 영역에 응용하는 데 힘썼다.” 123-124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평가
1) 프로이트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큰 영향을 받아 과학 발전이 이루어 낼 미래를 믿으며 영적 세계를 부정했다. 프로이트와 칼 마르크스는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이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종교란 하나의 환상 또는 환영이라고 보았다. 또한 죽지 않는 영혼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장과정 중에서 진화의 흔적을 찾아냈다.
2) 무의식의 발견은 인간 행복을 향한 중요한 시발점이 아니라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인간 실종의 시작이다. “인간의 본성 속에 들어 있는 열망은 근친상간에의 열망, 잔혹 행위와 살인에의 열망이다.”
프로이트는 상습적으로 코카인을 사용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답을 모르는 사람이 인류의 문제에 대한 답을 주겠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카를 융
오늘의 기독교가 융에게 직, 간접으로 받은 영향
1) 융이 기독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영적 세계를 인정하고 기독교의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2) 프로이트는 기독교를 부정한 반면 융은 기독교를 신화화했다.
융의 집단 무의식 이론
융은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무의식 속에 억압된 채로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망각된 기억들과 욕망들을 중심으로 그의 이론을 전개한다. 그는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을 구분했다. 집단 무의식은 개인 무의식보다 더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마다 상이한 개인 무의식과는 달리 인류 보편적인 성격을 띤다.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하기 이전 인간이 동물일 때부터 이어 내려온 잠재된 기억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을 파악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인류의 각종 신화들, 종교들, 의식들, 상징들 그리고 꿈과 환상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결국 융에게 기독교는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집단 무의식의 잠재된 기억들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단서일 뿐 그 이상도 아니었다.
강신술에 접촉된 융의 성장 배경
스위스의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융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는 다른 영적인 경험을 하면서 성장했다. 외할아버지도 개신교 목사였지만, 사실상 그가 가정에서 받은 영향은 바른 의미의 기독교 가르침이 아니었다. 그 외할아버지는 죽은 융의 할머니와 대화하기 위한 강신령(seance)을 정기적으로 열었던 사람이었고, 그의 두 번째 외할머니는 자기 집에 방문하는 영들을 위해 방에 특별히 ‘영들이 주무시는 침대’를 놓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융은 이미 세 살 때 자기 속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인격체를 느끼고 있었다.
영적인 존재와 접촉하며 저술 활동을 한 융
융이 1902년에 출판한 박사 논문이 강신령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융은 그 논문을 위해 조카를 최면 상태에 놓고 그 조카의 죽은 조상들과 조카가 접촉케 하는 실험을 자기 논문의 주제로 삼았다. 융은 어린 시절부터 영들과 접촉했지만, 후에는 그가 원형(archetypes)이라고 부른, 육체가 없는 영들의 실체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아 저술 활동을 했다.
융이 평생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영, 필레몬
융은 1916년 그 영 가운데서 평생에 걸쳐 그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영적 존재인 필레몬을 만난다. 융은 처음에는 그 필레몬이 자신의 무의식이 투사한 자기 자신의 일부로 인식했다. 그러나 나중에 필레몬이 자신의 일부가 아닌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환상 속에서 만났던 필레몬과 다른 존재들은 사실은 내가 나의 정신 세계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던 가상의 존재가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 존재하고 자신들의 생명을 갖고 있는 독립적인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필레몬은 내가 아닌 하나의 독립된 힘이었다. 나는 환상 중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고 그는 내가 무의식에서조차도 결코 알 수 없는 일들에 대해 나에게 알려 주었다.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말하는 주체는 내가 아닌 필레몬이라는 사실을. 심리적으로 말하면 필레몬은 어떤 우월한 영감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는 나에게 실로 신비스런 존재였다. 어떤 때는 그의 존재가 내게 너무 생생해서 마치 그가 살아 있는 인격체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 정원을 산책할 때면 그는 내게 마치 인도 사람들이 ‘구루’라고 부르는 영적 지도자와도 같았다.”(그의 책, Memories, Dreams, --P 55)
융이 얼마나 영적인 존재들과 접촉하고 살았는지는 다음의 글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죽은 자들의 영혼들이 너무 생생해서 융은 때때로 자신이 그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고 자신이 그들의 ‘담당 목사’라고 느낄 정도였다. 영들로 가득 차 있는 집에서 영들의 요구와 영들이 주는 영감에 의해 영들에게 설교를 한 놀라운 경험에 대해 융은 ‘영들에게 한 일곱 편의 설교는 그냥 나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3일 밤에 걸쳐 나는 그 설교들을 기록했다’라고 말했다. 그 설교들은 융에게 핵심이 되는 작업이었다. 그 죽은 자들의 영혼들은 융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답을 하도록 강요했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의 성품, 우주 그리고 인간에 대한 문제 등이다. 그 때 그의 대답들이 향후 융이 심리학의 연구를 진행하는 데에 이론적 뿌리가 되었다. 그로부터 4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후 융의 자서전이 마침내 완성되었을 때에 그 자서전을 출판하는 미국의 출판사는 그의 자서전 <기억들, 꿈들, 회상들>에서 이 ‘영들에게 한 일곱 편의 설교’ 부분만은 뺐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이 사건이 융의 삶 자체를 너무도 믿지 못하게 만든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융이 그의 이론들을 형성하는 데 가장 뼈대가 되는 사건이었다.”(Dave Hunt 외의 책, p 112)
와이즈잭커는 융이 정신 분석이 과학이 아닌 종교적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최초로 이해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융은 신을, 위에서 설명한 집단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어떤 실체로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자기 자신의 ‘신’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융은 신화, 종교적 상징, 꿈들을 이용해 개인의 정신 속을 파고들어가 밝히는 것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 자신 속에 있는 신의 존재를 깨워 내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런 장치 중의 하나로 융은 기독교와 기독교 역사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상징을 매우 유용한 수단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융이 모든 인간 속에 존재하는 신적 존재를 깨우기 위해 사용한 다양한 방법과 그 방법들이 지금 기독교 속에 어떻게 들어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의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p. 143
- 옥성호,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pp 115-143
레이 윤겐의 '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를 읽으며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에도, 제시펜 루이스의 ‘십자가의 도’에도,
귀용 부인의 영성에도, 신비 사상이 많이 깃들어 있다.
그들이 만난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령 체험들이 과연 진짜인지 의심스럽다.
삶의 현장과 관계를 떠난 구도, 신비의 추구 자체가 벌써 귀신을 불러 들인다.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으로 사람을, 현장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가는 사역이셨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힘입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법도와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다.
거기에 참된 영성이 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인 예배이다.
신비 사상은 말씀을 도외시한 채 가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다.
참된 영성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섬기는 사람 답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품과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우리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따르지 않으면’ 멸망의 길로 간다.
토저의 책들도, 교회사에서의 잘못된 경건주의 전통도, 깊은 것 같지만
이런 신비사상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미국, 대각성의 시기의 주역이었던 탁월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정서론」을 읽음으로,
참된 성령의 역사와 신비주의의 미혹의 영의 역사를 분별하여야 한다.
로이드 존스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십시요!” 라고 강조한 말씀을
그리스도인들은 경청할 필요가 있다.
사막의 교부들
중세 초기 중동 지역의 광야에 은자들이 살았다. 이 은자들은 역사상 ‘사막 교부들’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다. 이 은자들은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고립된 작은 마을에 기거했다. 관상 운동은 만트라를 기도 도구로 권장한 이 수도사들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 한 명상 학자는 아래와 같이 말함으로써 둘의 연결 관계를 밝혔다.
이 초기 기독교 수사들의 명상법과 생활규칙은 동방의 몇 개 왕국에서 볼 수 있는 힌두교와 불교 고행 수행자들의 기법과 상당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 초기 기독교 수사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채용한 명상 기법들은 동양에서 빌려 온 것이든지 아니면 자발적인 재발견일 것이다.
비밀 종교의 신비 수련을 통해 하나님께 도달하려는 시도는 결국 재앙으로 이를 수밖에 없다. 이집트의 사막 교부들은 신에게 획기적으로 다가가기 위해 당시 상당히 위험한 지형에 모여 살았다. 사막 교부들이 이렇게 한 이유에 대해 한 신학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기독교의 명상 수련의 지적, 철학적 그리고 신학적 기반의 상당 부분 역시 헬레니즘과 로마와 이집트의 신학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이 다양한 영지주의적인 사변과 접촉한 곳이 알렉산드리아였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많은 학자는 영지주의적인 사변의 뿌리가 동방, 아마도 인도였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 사막 교부들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진지한 이상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 어떤 것도 동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힌두교도들이 그들의 신에 다가가기 위해 썼던 방법이 있다면, 기독교 만트라도 예수께 나아가기 위해 쓰일 수 있다. 그들의 말이다.
오늘날 활짝 열린 성령 연합 운동의 입장에서, 우리는 겸손히 특정 동방 종교에서 배워야 한다 -- 특정 수련을 기독교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 기원이 아니라 의도다 -- 우리의 영적 자원을 너무 협소하게 정의함으로써 그것을 빈곤하게 하려는 기독교인들 앞에서 이 점은 중요하다. 우리가 인류라는 가족을 하나님의 영 가운데 있는 하나로 본다면, 이런 역사적 상호는 놀랄 일이 아니다 -- 동방의 영성 수련에 선택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활짝 피어나는 기독교적인 삶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기독교인들이 오직 성경에만 근거를 두고 기독교를 추구한다면, 자신의 영성을 빈곤하게 만들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막 교부들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관상기도를 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경고를 하셨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마6:7)
만트라 명상 혹은 거룩한 기도의 말이 “중언부언”에 해당하는 것이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려는 바로 그 의미에 정확히 걸림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이럼에도 기독교적인 신비주의는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져 있기에 다른 형태의 신비주의(동방 혹은 비밀 종교 등)와는 다르다는 말을 함부로 뱉고 있다. 여러 면에서 사막 교부들은 가인과도 같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은 있었지만 교훈을 순순히 듣고 옳은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늘날 “영적 훈련” 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교회 안으로 고대의 신비적인 수행들이 소개되고 있다. 이 책, 「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는 동양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신비주의가 토머스 머턴, 헨리 나우웬, 리처드 포스터 등을 거쳐 최근의 이머징 교회까지 침투해 들어온 과정을 파노라마식으로 보여 준다. 미혹의 영들은 동양적인 신비주의 수련을 도입함으로 기독교를 자기 마음대로 다시 만들고 있다.
기독교 쿤달리니
쿤달리니는 힌두교 영성에 저류로 흐르는 신비한 능력 혹은 힘이라는 용어이다. 힌두교에서 쿤달리니는 보통 뱀의 힘을 말한다. 약물중독 전문 상담가이고 열성있는 가톨릭 평신도 사목위원인 성 로메인은 ‘쿤달리니 에너지와 기독교 영성’이라는 책을 썼고, 그는 정신을 개입한 기도를 “비생산적인”것으로 매도하면서 마음의 작용을 끊고, 자신이 정신적인 수동성이라고 지적한 상태로 기도를 정의한다. 그가 맞부딪친 변화는 냉수를 들이킨 심정으로 우려하게 만든다.
그때 빛이 내게로 왔다! 그 순간 금빛 소용돌이가 더 심하게 치는 것을 보았다.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나를 사로잡아버린 형상으로 금빛 소용돌이는 변했다 -- 이런 소용돌이가 언제나 네 다섯번 일어났다.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하나가 쏟아졌다. 빛은 더 밝아지고 눈이 부셨다. 나는 한참 동안 침묵에 잠겼다.
이런 일이 일어난 후 성 로메인은 “지혜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고, “다른 이에게서 메시지를 받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또한 이 침묵의 기간에 신체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정수리가 “따끔거렸고” 그때 “에너지가 쑤욱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이런 감각은 며칠 동안 계속 됐다. 성 로메인이 체험한 신비 경험의 극치는 불 보듯 뻔하다. 당신이 기독교 요가 혹은 기독교 선을 하면 성 로메인처럼 기독교 사마디로 끝날 것이다.
많은 사람은 성 로메인이 경건한 기독교인이라고 믿는다. 성 로메인은 자신이 예수를 사랑하고 구원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교회에서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다. 그러나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 로메인의 감각이다. 그는 말한다.
내면의 충고자의 승낙 없이 나는 어떤 결정도 나 자신을 위해 내릴 수 없다. 충고자의 목소리는 내가 필요할 때 너무도 또렷하게 내게 말한다.-- 어떤 내면의 눈이 내 두 눈을 통해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또렷하게 든다.
이러한 수련은 이미 가톨릭과 개신교 주류 교단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리고 이제는 영역을 넘어 보수적인 교단에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가 전하시는 메시지는 내재신론이 말하는 구원론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사마디, 선, 쿤달리니 혹은 관상적인 침묵이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이다!
미국인들이 실제로 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놀랄만한 결과가 나왔다. ‘영성과 건강’이라는 잡지에서 이름난 여론조사 기관과 계약을 맺고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4퍼센트가 신이 “어디 누군에겐가”가 아니라 “어디에나 그리고 모든 것 안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 말은 이제는 내재신론이 좀 더 인기 있는 신관이라는 것이다.
- 레이 윤겐, 「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 pp 63-81
행크 헤네그라프, 「바벨탑에 갇힌 복음」
믿음운동의 거성들이 기독교에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케년을 대중화시킨 해긴은 그의 오류를 확대했고 덧붙였다. 차악에서 최악으로의 개악은 케네스 코플랜드와 베니 힌과 같은 유포자들로 인해 계속 진행되고 있고, 이제는 제이크스 그리고 조이스 마이어 같은 “믿으면 다 된다”는 믿음운동 주창자들의 설교와 실천을 통해서 한층 더 심각해지고 있다.
론다 번의 ‘시크릿’,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등이 베스트 셀러로 팔리고 있다.
성경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문화적 변혁의 일꾼이요 주창자에서 추종자와 모방자로 변질되고 있다. 대중문화가 조금만 움직여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덥석 미끼를 무는 어리석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성경적인 신앙의 모범은 늘어만 가는 요망스런 유행들과 공식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영적 훈련을 받고자 하는 성경적인 열망이 오히려 믿음신학의 견고한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
론다 번이 그녀가 찾은 ‘삶의 비결’, ‘플라톤, 세익스피어, 뉴턴, 베토벤, 링컨, 에머슨, 아인슈타인 등 역사의 위인들’ 중 1퍼센트 만이 알았다는 삶의 비결을 알리자 전 세계가 주목했다. 출간 수 주 만에 ‘시크릿’은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문화 현상으로까지 자리 잡게 되었다. 오프라 윈프리는 ‘시크릿’을 ‘삶을 변화시키는’ 책이라 추켜 세웠다.
‘시크릿’은 ‘끌어당김의 법칙’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들은 끌어당김의 법칙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법칙이라고 말했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창조의 법칙이다. 양자물리학은 온 우주가 생각에서 나왔다고 가르친다. 당신은 생각들 그리고 끌어당김의 법칙을 통해서 자기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다. 역사 이래 이 법칙은 당신과 모든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 쭉 작용해왔다.’
시크릿에서 사용된 창조 과정은 신약성경에서 따온 것이다. 이 과정은 간단한 3단계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지침이 되어준다. ‘구하라, 믿어라, 그리고 받아라’.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들과 마주치면 그 사람들을 자세히 보지 말라. 당신의 마음에 즉시 완벽한 몸매를 지닌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도록 하라. 그 결과 나는 지금 53킬로그램이라는 완벽한 체중을 유지하면서도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완전한 생각을 하라. 그러면 결과는 완벽한 체중으로 돌아온다.’
‘긍정의 힘’과 ‘시크릿’의 공통점은 하나님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믿음의 힘을 믿는다는 것이다. 번이 자신의 이야기들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주로 과학을 남용한다면, 오스틴은 성경을 왜곡한다. 내로라 하는 믿음의 말씀 주창자들이 이미 비슷한 기법들을 사용했고, 그 결과 기독교를 유래없는 깊은 늪에 빠트렸다. 20세기 후반에는 케네스 해긴, 로버트 틸튼, 마릴린 히키, 존 아반지니 그리고 모리스 설루로와 같은 믿음의 말씀 선생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21세기 초에는 크레플로 달러, 로드 파슬, 조이스 마이어, 존 해기, 제이크스 그리고 폴라 화이트 같은 새로운 번영신학 설교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부동산 재벌가 도널드 트럼프는 폴라 화이트를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하는 ‘놀라운 여성’이라고 했고, 뉴욕타임지는 제이크스를 ‘차세대 빌리 그레이험’이라고 나팔을 불어줬다.
영적인 독약을 대량으로 살포하고 있는 자들이 교회에서 막강한 강단을 차지하고 있다. 폴 크라우치는 만약 하나님이 ‘이단 사냥꾼들’을 죽이지 않으신다면 자기가 죽이겠다고 한다. 베니 힌은 ‘나를 공격하면 당신들의 자녀들이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고 말한다.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내게 성령의 기관총을 주셨으면 하고 바란다. 그걸로 당신들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싶다.’ 이들을 통해 기독교 텔레비전과 방송국들은 수백만 달러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믿음운동의 핵심인물들
믿음운동이 교회에서 세력을 형성하기 훨씬 전에, 신사고운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큄비는 질병과 고난은 바르지 못한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사상을 퍼뜨렸다. 큄비의 추종자들은 적극적인 긍정의 힘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현실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초능력자들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부와 건강을 마음으로 그린 후 입으로 긍정 혹은 고백하면, 그 보이지 않던 심상이 만질 수 있는 실재로 변한다고 가르쳤다.
말씀·믿음 신학과 신사고 운동의 가르침 사이에 나타나는 유사성은 의미심장하다.
마이크 돌리, ‘생각이 물질로 변한다!’ 론다 번,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미래의 삶을 창조한다. 가장 많이 생각하거나 가장 집중하는 것이 당신의 삶이 되어 나타난다’.
믿음의 신학자들이 ‘마음의 힘’을 ‘믿음의 힘’이라는 말로 대체함으로써 초월적인 개념을 중화시켜 보려고 애썼다.
신사고 초월론과 믿음의 말씀 신학이 놀랍도록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믿음 운동의 본질, 스타일, 그리고 구사하는 전술은 주로 오순절 진영에서 활동했던 신유 치유자들이자 가짜 부흥사들이 보여준 가르침과 활동들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케네스 코플랜드와 케네스 해긴은 자기들의 삶과 사역에 큰 영향을 미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오스본과 윌리엄 브랜험을 꼽는다. 오스본은 케년의 성경을 왜곡하는 방식을 초지일관 따랐고, 브랜험은 마귀에서 나온 것이라며 삼위일체 교리를 비난했다.
베니 힌도 브랜험을 충심으로 따랐다. 믿음 치유가들인 에이미 셈플 멕퍼슨, 케서린 쿨만이 힌의 삶과 사역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힌은 이들의 무덤을 정기적으로 찾아 ‘기름 부으심’을 경험한다. 힌은 에이미의 유골에서 기름 부으심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오럴 로버츠는 번영신학을 외치는 대중적인 설교자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암 완치법을 발견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20층짜리 연구소를 설립하는 프로잭트는 곧 ‘상업적인 목적으로 투자자 그룹에게 매각’됐고 결국 암치료제는 개발되지 않았다. 비슷한 방법으로 앨런은 추종자들의 등을 쳤다. 그는 하나님께 명하여 ‘1달러 지폐를 20달러 지폐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적의 기름을 적신 기도’, 기적들을 보게 하는 ‘기적의 장막 조각들’을 추종자들에게 주기도 했다. 앨런은 음주운전으로 구속된 후 보석금을 내고 풀려 나오자 마자 결국 하나님의 성회 교단으로부터 출교 당했다. 그는 1970년 간경변증으로 사망했다. 베니 힌과 같은 교사들이 그를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추켜세우는 것과 앨런의 사기와 기만적인 말들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베니 힌
“당신은 중생할 때, 말씀이 당신 안에 육신이 되셨다. 그래서 당신은 그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가 된 것이다. 예수를 모셨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은 그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것이다. 이렇게 말하라 ‘내가 내가 내가 내가 내가 예수다’ 당신은 정녕코 결단코 도무지 ‘아프다’고 말해선 안 된다. 당신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어떻게 아플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라 ‘나는 치유 받았다’.
나는 힌의 십자군 집회들에 참석한 후, 사람들이 치유 받을 가능성보다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힌의 발 앞에 쓰러지기 위해서 ‘적자생존’의 천박한 모습으로 우르르 몰려다녔다. 오클라호마에서 힌의 십자군 집회에 참가한 한 여인은 즉사했다. 엘라 페파드는 자기 위에서 성령에 죽임을 당한 누군가에게 짓눌려 허우적거리다가 합병증으로 사망했고, 형사고발이 착수됐다. 이 집회에 휠체어에 타고 참석했던 사람들은 달라진 것 없이 씁쓸함을 삼키면서 집회장을 떠났다. 실망감을 달래주기 위해 힌은 말했다. ‘그날이 오고 있다. 누구도 휠체어에서 휴거당할 사람은 없다. 누구도 병상에서 휴거당하지 않는다. 휴거 전 모두가 치유 받을 것이다.’
힌은 하나님이 1990년에 정기적으로 십자군 집회를 시작하라고 이끄셨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 즉시 질병과 고통을 일으키는 귀신들을 내쫓는 권세를 받았다. 그리고 집회마다 1만2천~1만5천 명이 참석하는 군중들 가운데서 성령께서 하실 일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다. 수 백건의 치유 사례가 나왔고 수천 명의 회심자들이 나왔다. 휠체어에서 일어난 사람들, 목발을 버리고 혼자 힘으로 선 사람들이 포함된다. 몇몇 시각장애자들과 청각장애자들의 눈과 귀가 열리는 것을 목도했다.’ 입증해 보라는 압력을 받자, 이러한 치유 사례들을 기록하는 일을 담당하는 수전 스미스는 이런저런 핑계를 댔다.
성령을 통해 그가 터득했다는 신학은 기만 그 자체다. ‘기름부음’이라고 주장하지만 가당치도 않은 비상식적인 언설들을 일삼았다. 힌은 성령께서 여자들이 원래는 옆구리로 출산을 하도록 되어있다고 주장한다. 힌은 ‘기름부음’을 받기 위해 케서린 쿨만과 에이미 셈플 멕퍼슨의 무덤을 자주 찾는다고 인정한다. 술에 취해서 숙취가 가시지 않아 방금 전 한 예언을 기억조차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힌은 복음주의자 진영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수백만 명에게 그리고 ‘안녕하세요 성령님’,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같은 대형 베스트 셀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강단과 책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그에게 특별하고 신비한 권능을 받았다는 환상을 자아낸다. 은사주의자들에게 주는 그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오늘까지 ‘성령세례’를 경험하고 방언을 하는 것은 많은 것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겨우 그 정도라면, 대단한 게 아니다.’ 기름부으심을 받지 않았으면 아무것도 받지 못한 것이라는 주제를 계속 강화한다.
‘주님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면 기름부으심은 필수다. 기름 부으심이 없으면 성장도 없고 축복도 없다, 승리도 없다.’ 힌은 1992년 8월7일 켈리포니아 애너하임에서 열린 세계 은사주의자 컨퍼런스에서 가장 오싹한 공갈을 쏟아놓았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전능한 권능으로 지적합니다. 잘 들으세요. 남가주에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성령의 기름부으심 아래서 말합니다. 비방을 그치지 않으면 당신들의 자녀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회개하세요’. 힌은 교리적으로 이런 선언을 했다. ‘말이 실제를 만듭니다.’ ‘믿음은 믿음의 말을 할 때 생긴다.’ ‘고백을 공격하는 자들은 마귀편입니다.’
지난 15년 넘게 힌은 허황된 선언들에 관한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는 1999년10월19일에 전 세계인들이 텔레비전 수상기 주변에 관들을 나란히 정렬하고, 죽은 자들의 손을 티비 스크린에 얹어 안수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1990년1월1일 힌은 하나님이 그에게 쿠바의 카스트로와 미국의 동성연애자들의 운명을 말씀으로 알게 하셨다고 했다. ‘성령께서 카스트로가 90년대에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더 이상 권좌에 있지 못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카스트로는 살아있고 그의 정권은 지속되고 있다.) ‘동생연애자들은 불로 멸망시킬 것입니다.’ 1993년 힌은 허황된 공언을 했다. 예수님이 7년 후인 2000년3월29일에 ‘우리의 집회들 중 한 집회에 육체로 나타나실 것이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2010년이 역사의 뒤안길로 넘어가고 있지만 그의 예언은 성취되지 않고 있다.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에 대한 나의 회고
나는 이 책을 1967년도에 전남 목포 인근의 결핵요양소 '한산촌'에서 처음 접했다. 서울신학대학 3학년생으로서 휴학하고 결핵을 치료받고 있을 때였다. 이 책과 함께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를 읽었다. 이 두 권의 책이 내게 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 보수 신학을 깡그리 무너뜨렸고 그래서 나는 폴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이라는 분야를 더 깊이 공부하고자 서울신학대에 자퇴원서를 내고 연세대 철학과로 진학하기까지 했다.
이에 더하여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 등으로 무장하고서 나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나는 교회 밖에서 25년을 살았다. 물론 나중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거치장스런 이름도 떼어버리고 신에게 솔직한 한 인간으로서 살았다. 그 신은 나의 궁극적 관심이었고 존재의 기반이었으며 나는 그 신 앞에 신 없이 살기를 힘쓰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았다.
그런데 1992년 10월 어느 기도원에서 회심하고 보니, 그 25년간의 삶은 흑암과 혼돈과 공허(창1:2)였음을 깨달았다. 그후 그리스도께 헌신하여 목사가 되었고 화성 한 시골 빈집에서 아주 자그마한 목회를 하고 있다. 하나님께 돌아와서도 10여년 동안 주류 교단의 다른 영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따라 헤메었고, 2006년부터 청교도신학을 대하면서 비로소 바른 복음 바른 영 바른 예수를 접하게 되었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는 미국 장로교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이었다. 그러나 유명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신학자들이 하나 둘 씩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면서 점점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물들어 갔다. 그들에게서 배운 신학생들이 졸업하여 안수 받고 목사가 되어 장로 교단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그들이 주류가 되고 대세가 되고 말았다. 총회를 차지하고 프린스턴의 이사진과 교수진을 다 장악하고 말았다. 그들을 반대하던 메이첸 교수는 총회에서 목사직이 면직되고 쫓겨났다. 그와 몇 사람이 주축이 되어 옛날의 프린스턴으로 돌아가고자 세운 대학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이다.
이러한 수순이 우리 나라 보수 주류 교단에서 암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다. 광명의 천사로 행세하니까 웬만큼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으로 무장하고 민감한 사람이 아니면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없다. 그들은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을 설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다. 기독교의 핵심되는 단어들이 자취를 감춘다. 죄와 회개, 성령과 기적, 지옥과 재림 등의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자기들이 배워서 맘에 들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교양과 종교에 맞는 사상들을 성경을 빙자하여 가르치고 설교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 상담학과 심리학의 지식과 방법들이 만연하고, 마켓팅과 경영학 수법들이 그대로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관상기도나 침묵기도 등이 영성훈련의 수단과 기법으로 도입 보급되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그들의 열매들이다. 우선 당장 유용하고 실용적인 가르침과 사상들이 복음과 성령의 이름으로 가르쳐진다. 그것들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저주하고 있는 다른 영이고 다른 복음이고 다른 예수인지를 알기까지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조심하라고 하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인지를 알기까지는, 거짓 선지자들이고 제사장들인지를 알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
성경과 성령을 바로 알고 가르쳤던 종교개혁자들, 청교도들의 신학을 대면하기까지는 이들의 성경 해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이들의 영이 얼마나 잘못된 미혹의 영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그 열매들을 분별하기 위해 책들을 읽어야 하는데 그들의 미혹의 책들이 베스트 셀러를 이루어 가려 버리고 극히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지고 가르쳐지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논리에 의하면, 자기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예언자들이고 선지자들이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기성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돌맞을 각오를 하면서 진정한 신 앞에 그들을 바로 세워주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로 보인다. 신에게 참으로 솔직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보일 뿐이고 그렇게 포장할 뿐이다. 하나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현대인을 위한다는 그들의 공언과는 달리, 그들은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와 멀어지는 군중들을 양산할 뿐이다.
결국은 이들은 자기들의 철학과 인생관을 어떻게든 퍼뜨려서, 동조자들과 아류들을 얻고, 교회를 흩뜨리고 성경을 갈기갈기 찢어 발기고, 하나님을 깊고 깊은 존재의 바닥으로 밀어넣는 ‘왕마귀’들일 뿐이다. 이 ‘왕마귀’라는 말은 90이 다 된 할머니가 신앙생활 잘 하던 딸이 이런 사상들을 접하면서 변질되는 것을 보며 그 원흉 격에 해당하는 철학교수 양반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 딸의 친구들은 한신 계통 또는 민중신학을 구가하는 유명 교수들이었다. 나를 위시해서 많은 순수한 젊은이들이 이 철학교수를 만나고서는 교회와 성경을 멀리하고 결국은 하나님을 멀리하다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망나니들이 되고 말았다.
그들이 구가하는 자유는 사람을 성숙시킨다는 미명하에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죄를 마음껏 짓는 자유로 전락하고, 인생을 어둠과 혼돈과 공허로 채우게 하는 왕마귀(미혹의 영)의 자유일 뿐이다.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유명 대학의 학위를 받아 주류 교단의 신학교의 교수가 되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목사가 되어 오늘날 교회들을 어지럽히고 있다. 교회를 차지하고 있는 세력들이 그래도 형식적으로는 바리새적이고 보수적이기에 거기에 빌붙어 살기 위해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안할 뿐이다. 그들은 겉보기에 신앙 좋고 지적으로 매우 탁월해 보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들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성경해석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의 지혜로 무장한 신학이 아니라, 성령의 지혜로 채워진 신학이어야 한다. 성경을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의 계시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고, 그 진리의 말씀을 내 삶의 기준과 원칙으로 살기를 힘쓰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성경대로 성령의 인도와 조명을 받으며, 성경대로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로빈슨은 신에게 솔직한다고 하는데, 그가 말하는 ‘신’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고,
사탄이고 미혹의 영이고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일 뿐이다.
그는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르고 있다. 귀신의 가르침일 뿐이다.
왜 우리는 청교도의 길을 가야 하는가?
조엘 비키는 청교도들의 작품들이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는 역사를 이렇게 말한다.
19세기의 마지막 즈음에 전혀 다른 사상적 흐름이 대서양의 양편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청교도들의 칼빈주의는 낡은 것으로 여겨졌으며, 청교도주의의 심장이자 핵인 성경에 최고의 권위를 두는 시각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뀌었다. 기독교가 보다 학문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그들은 그들의 불신앙과 배교를 합리화했다. “훌륭한 옛 청교도의 작품들”은 북미와 영국의 출판사에서 출판을 멈추었다. 청교도 작품들은 그 영향력이 쇠퇴하여 읽히지 않아 도서관 서재에 꽂혀져 방치되었고, 중고 서점과 진열대에서 헐값으로도 팔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때에 하나님의 손길로, 런던에서 로이드 존스 박사의 사역이 청교도 작품들에 대한 필요를 재생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수시로 자신의 설교에서 청교도 작품들을 언급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내용의 출처를 궁금해 하도록 했다. 로이드 존스는 그들을 에반젤리컬 도서관(런던 소재)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청교도 작품의 재인쇄본이 발간될 때까지 1950년부터 콘퍼런스를 열어 이를 수년 간 주재했다.
1. 청교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청교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영국에서는, 그들을 핍박한 기득권자들인 국교도들이 만들어 내었고, 미국과 유럽에서는, 마찬가지로 그들을 반대하는 기득권자들이 만들어 냈다. 제임스 패커의 말이다.
“청교도”라는 이름은 애시당초 진흙 구덩이에서 나왔다. 1560년 초에 탄생한 이 이름은 분리주의자들, ‘까탈스럽고 비판적이며 위선적인 작당‘이라는 풍자적인 단어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왕정에 반대하는 ’공화주의 도당‘을 의미했다. 영국에서 반청교도 감정은 왕정복고 시대에 물꼬를 텄다가 그 이후 꽃을 피웠다. 미국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 시대 이후 서서히 꿈틀거리다가 약 100년 전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그런데 지난 50년 동안 학자들은 그 진흙을 말끔히 씻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교도들의 대표적인 저작들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청교도들에게 덧씌워진 진흙 덩어리들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역사를 모르고, 자기 신학에 대한 독단이 빚어내는 산물이다.
나 역시 2006년만 해도 내가 붙들고 있는 보수신학이 최고이고, 전부인 줄 알았다. 청교도들의 대표적인 저작들을 읽고서는, 보수신학도 시대사상으로 접근한 것이고, 순수한 성경적인 해석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청교도 성경해석을 종합했다고 할 수 있는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강해'를 읽어보면,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서 해석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를 알 수 있다. 로마서가 성경 전체의 복음을 가장 체계적으로 잘 정리한 책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로마서 해석이 잘못 되었다는 것은 성경 해석 전체가 잘못된 것이 되고 만다.
청교도는 고약하고 고리타분하고 율법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다. 청교도는 살 수 없는 것들을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이 결코 아니다. 청교도는 이조 시대의 청백리나 도닦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적대 세력들이 청교도를 싫어하여 악한 의도로 만들어낸 이미지 일 뿐이다.
묵은 누룩들과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이다.(고전 5:7)
청교도들은 한 마디로 예수님처럼, 사도와 선지자들처럼 살고자 한 사람들이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300년간 핍박속에 기독교를 세웠던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청교도들도 종교개혁으로부터 300년간 핍박속에 가장 순수한 신앙을 산 사람들이다.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하여 예수를 가장 잘 믿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청교도들은 오직 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성경대로 성령을 따라 믿는 사람들이다. 성경의 진리들을 오직 성경으로 오직 성령의 조명으로 해석하고 교리를 세우고 그 교리를 삶의 기준과 원칙으로 삼고 모든 삶의 영역에 적용하고자 한 사람들이다.
휫트필드는 말했다.
청교도들은 빛 가운데 불타오르는 빛의 사람들이었다. 대로와 울타리와 헛간과 들에서조차 설교할 권리를 박탈당했을 때, 청교도들은 여전히 말씀의 권위를 가진 사람들로서 특별한 방식으로 글을 쓰고 설교했다. 이 시간에도 특별한 기름부으심이 그들을 따라다니고 있다.
2. 청교도들의 특징/ 조엘 비키
1) 청교도들은 성경으로 삶을 형성했다.
그들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으로 살며 호흡하면서, 말씀에 수반되는 성령의 능력을 향유했다. 그들은 성경 66권을 은혜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진 성령의 서제로 생각했다. 그들이 영원토록 신뢰할 수 있는 진리를 주시는 보고(寶庫)로 성경을 바라보았다. 존 플라벨, “성경은 우리에게, 삶에 있어서 최선의 방식과, 고난을 대처하는 가장 고상한 길과, 죽음을 맞는 가장 평안한 방법을 가르쳐 준다.”
2) 청교도들은 지성과 실천을 완벽히 결합시켰다. 그들은 지성을 신앙이 머무는 전당으로 이해했다. 존 프레스턴은 말했다. “회심에 있어서 이성은 고양되기 마련이다.” 코튼 매더도 말했다. “무지함은 경건의 어머니가 아니라 이단의 어머니일 뿐이다.” 청교도들은 지성이 없는 기독교는 뼈가 없는 연체동물과 같다고 생각했다. 반지성적인 복음은 급한 필요나 채우는 텅 빈 혹은 형태 없는 복음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신자와 불신자간에 지성의 차이가 없다면 삶에 있어서도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은 지성을 놔버리고, 믿음신학, 형통의 신학들에 매달리고 있다)
3)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에 집중적 관심을 두었다.
아이작 암브로스, “그리스도를 성경 전체의 본질이자 정수이며 영혼인 동시에 목적으로 여기라,” 청교도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그분의 아름다움에 대해 많은 글을 남겼다.
4) 청교도들은 시련과 시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청교도들은 시련과 시험은 우리를 겸손해지도록 만들기 위해(신8:2), 죄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습1:12),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오도록 이끌기 위해(호5:15)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고 가르쳤다. 로버트 레이튼, “환란과 고통은 천국이 그 보석을 닦아서 빛나도록 다듬기 위한 다이아몬드 가루다.”
5) 청교도들은 두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청교도들은 우리가 이 땅에서의 순례의 길에서 시종일관 “우리의 눈 속에” 천국을 지녀야만 한다고 믿었다. 천국을 향한 “영광의 소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제임스 패커는 “왜 청교도를 알아야 하는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청교도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성숙이다. 청교도들은 성숙이 무엇인가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애숭이에 불과하다. 우리는 영적 난쟁이들이다. 반대로 청교도들은 장대한 거인들이었다. 그들은 위대한 하나님을 섬기는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맑은 정신에서 나오는 치열함과 따뜻한 가슴에서 나오는 열정이 한가지로 있었다. 그들은 위대한 신자, 산 소망, 지칠 줄 모르는 실천가, 그리고 끊임없이 고난당하는 질고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겪은 고난(영국에서는 당국자들이, 미국에서는 조악한 자연 환경이 그들을 덮쳤다)은 그들을 단련시키고 원숙하게 하여 아주 훌륭한 성장을 이루게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편안함과 호사스러움은 성숙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고난과 역경은 성숙에 이르게 한다. 청교도들은 영적 전투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다. 오래 계속되는 압박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명랑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인내하고 순종하며, 희망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거둔 도덕적이고 영적인 승리 때문에 히브리서 11장이 그 현관이랄 수 있는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는 영예를 얻었다.
3. 로이드 존스의 청교도론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정신 구조요 하나의 정신이다.
청교도주의는 철저한 개혁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교회의 교리 전체로 나아간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교리를 중심에 놓지 못하면 참된 청교도의 자세, 청교도의 사고방식, 청교도의 정신, 청교도의 이해를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면, 그것을 붙잡고 그것을 위해서 싸우며 모든 타협을 거절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대가를 요구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모든 유혹, 모든 제안, 모든 아첨, 명예를 주겠다는 속임수를 모두 거절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여 사용되는 간계들을 간파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어떤 직책을 주겠다든지, 어떤 명예로운 지위를 주겠다든지, 승진을 시켜 주겠다든지, 우리 교단의 어떤 자리를 주겠다든지,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을 준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야 믿음과 교회의 순결성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싸울 수 있다.
청교도들의 입장을 알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입장에 입각하여 행동했던 이 사람들을 기념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우리에게 이들의 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소서! ("청교도 그 기원과 계승자들"에서)
청교도아카데미 독서목록1(수정5, 2015-04-14 )
//blog.daum.net/kds2012 청교도의길 //cafe.daum.net/psc-k 청교도연구회
| 저 자 | 책 명 |
| 저자 | 책 명 |
1 | 로이드 존스 | 청교도신앙그기원과계승자들 | 27 | 윌리엄 퍼킨스 | 설교기술,목사의소명 |
2 | 에룰 헐스 |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 28 | 아이작 암브로스 | 예수를바라보라1,2 |
3 | 에드워드 힌슨 | 청교도 신학 | 29 | 스테판 차녹 | 하나님을아는지식1,2 거듭남의 본질 |
4 | 박영호 | 청교도 실천신학 | 30 | 루이스 베일리 | 경건의 연습 |
5 | 제임스 패커 | 청교도 사상 | 31 | 매튜 미드 | 유사 그리스도인 |
6 | 조엘 비키 | 청교도를만나다 개혁주의청교도영성 칼빈주의 | 32 | 존 오웬 | 내안의 죄죽이기 그리스도의 영광 영의생각,육신의생각 성령론 |
7 | 리랜드 라이큰 | 청교도-이세상의성자들 | 33 | 존 번연 | 천로역정 죄인괴수에게넘치는은혜 |
8 | 돈 키슬러 | 청교도를읽어야하는10이유 | 34 | 새뮤얼러더퍼드 | 서한집 |
9 | 로이드 존스 | 교리강좌1,2,3 부흥 로마서강해1~14권 에베소서강해1~8권 산상설교(상하) 십자가와구속 | 35 | 토마스 왓슨 | 하나님을경외함 팔복해설 십계명해설 주기도문해설 신학의 체계 |
10 | 이안 머리 | 로이드 존스 평전 1,2.3 | 36 | 리차드 십스 | 상한갈대와꺼져가는심지 영광스러운 부르심 |
11 | 조나단에드워즈 | 신앙감정론/전집1 부흥론/전집7 구속사/전집4 고전13장,사랑 | 37 | 토마스 굿윈 | 믿음의 본질1,2 그리스도인의 성장 |
38 | 리차드 백스터 | 회심 참된 목자 성도의영원한안식 | |||
12 | 양낙홍 | 조나단에드워즈생애와사상 | 39 | 토마스 브룩스 | 확신지상에서누리는천국 |
13 | 존 라일 | 거룩 18세기영국의영적거성들 곧은길,옛길, 한길,선한길 | 40 | 존 플라벨 | 하나님의섭리 은혜의방식 |
제임스 뷰케넌 | 회심과 부흥 | ||||
윌리엄 에임스 | 신학의 정수 | ||||
14 | 스펄전 | 회심을위한불같은외침 부흥 열망 목회자들을위하여 목회자후보생들에게 | 41 | 토마스 빈센트 | 성경소요리문답해설 |
조셉 얼라인 | 돌이켜회개하라 | ||||
존 폭스 | 기독교 순교사화 | ||||
15 | 어거스틴 | 하나님의 도성 고백록 | 42 | 토마스 보스톤 | 내몫에태인십자가 |
16 | 마틴 루터 | 로마서주석 종교개혁3대논문 | 43 | 존 프레스톤 | 황금홀 기도의영성 |
17 | 칼빈 | 기독교강요 요한복음주석1,2 | 44 | 메튜 헨리 | 주석 1~21권 |
18 | 조지 휫트필드 | 일기 | 45 | 메이첸 | 기독교와자유주의 |
19 | 엔드루 보나 | 로버트 멕체인 회고록 | 46 | 프란시스 쉐퍼 | 이성에서의도피 기독교와현대사상 |
20 | 존 에인절 제임스 | 간절목회 | 47 | 마이클 호튼 | 세상의 포로된교회 그리스도없는 기독교 |
21 | 켈리 카픽 | 청교도고전으로의 초대 | 48 | 행크헤네그라프 | 바벨탑에갇힌복음 빈야드와신사도의가짜부흥운동 |
22 | 브루스 비클 | 복음과 청교도설교 | 49 | 레이 윤겐 | 신비주의와손잡은기독교 |
23 | 피터 루이스 | 청교도 목회와 설교 | 50 | 옥성호 | 심리학에물든기독교 마케팅에물든기독교 |
24 | 피터 툰 | 청교도와칼빈주의 | 51 | 박순용 | 오직 하나님께 영광 |
25 | 이안 머리 | 부흥과 부흥주의 | 52 | 이태복 | 영성 이렇게형성하라 |
26 | 존 파이퍼 | 하나님의 열심 | 53 | 로버트 쇼 |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해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