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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3강
IV. 새 사람
새 사람, 새 창조, 중생은 구속자적이고 종말론적인 표현으로서 원래는 초 개인적 의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비로소 나 자신에게 구체적으로 적용된다. 즉, 나는 새 사람이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우리는 본 단락을 통해 복음을 믿어 새롭게 된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곳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자기의 상태와 일치해야 한다. 즉, 본 단락을 통해 자기를 점검해야 한다.
성령님의 새롭게 하시는 사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론을 살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론에서 인간이 어떻게 새롭게 변화되었는지를 기술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은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성령님 안에 있는 자는 이로써 새 사람을 입었으며, 이것은 혹은 “신령한 자”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고전 2:14-15).
우리가 앞에서 바울 선포의 기본 구조를 살펴보았을 때, 우리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이 초 개인적 의미가 있으며, 이것이 개인적 회심의 두 가지 면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았다. 이곳에서도 집단적(korporative) 관점이 우선한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Gemeinde)를 새롭고 “완전한 사람”으로(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한 사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갈 3:28[1]). 이 매우 두드러지고 중요한 개념은 –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둘째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첫 사람과 대비되고 있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 바울에게 있어서 새 생명의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통찰하는 데 기준이 되는 지배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이 새 사람은 또한 당연히 개인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다른 구속사적이고 종말론적인 표현인 “새 창조”, “거듭남” 등과 같은 표현도 역사 안에서 사는 이 구체적인 인간에게 사용된다. 그러므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은 단지 단 한 번의 믿음의 결단과 세례를 통한 성사적인 연합일뿐만 아니라, 이것은 신자의 구체적인 실존 가운데서 계속 반복되면서 일어나야 하는 “새롭게 됨”으로서, 그때마다 새롭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어야”하는 것이다(참조: 골 3:10; 롬 13:14). 새로운 생명(삶)은 단지 그리스도와 함께 단번에 일으키심을 받아서 새로운 지배 아래 놓여지게 된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워지는 데에도 있다(고후 4:16).
우리는 바울이 새롭게 됨을 새로운 인간성(neue Menschlichkeit)으로도 묘사함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im Ganzen) 묘사할 때도 있고,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측면을(in einzelnen Aspekten) 묘사할 때도 있다.
1. 새로운 인간성을 전체적으로 묘사한다
이 새롭게 됨을 전체적으로 묘사하는 곳에서는, 변화가 인간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새창조로만 설명될 수 있는, 급진적인 변화를 나타낸다(고후 4:6). 그러므로 새 사람을 말할 때에는 항상 창조의 범주 안에서 말한다. 이것의 의미는 단지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질서에 속하게 되었고,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창조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새창조 역사가 신자들의 실존 속으로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거나 새롭게 되었다고 말하는 구절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이곳에서 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하나님과 부합하는 방식으로) 지음받았다고 말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새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8).
여기에는,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창 1:27이 배경이 되고 있음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개념에도 유의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고(고후 4:4), 그분은 이 형상을 자기에게 속하는 자에게 부여하신다(고전 15:49). 바울은 다른 곳에서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엡 2:10),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자기가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갈 4:19). 여기에서도 또 다시 집단인격적인 관점이 전면에 등장한다. 바울은 갈 3:27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은, 신자가 세례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어서, 즉 새 사람을 입음으로써 가능해진다고 한다. 이렇게 신자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의 새로운 실존에 참여하게 되고, 그 후로 그에게는 계속 새롭게 되는 것이 가능해진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고 있으며, 그분 안에서 새롭게 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고서 그 형상에 따라 변화 받는 것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기 안에서 새 사람이 된 모든 자들 안에서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원래의 형상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아니다. 하늘에 속한 자이자 살리는 영인 그리스도는 땅에 속한 자이자 생령인 아담과는 전적으로 다른 질서이자 실존 방식을 대표한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지음 받는다거나 변화된다는 것은(첫 사람처럼: 고전 11:7), 하나님의 영광에 새롭게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으로부터 영광으로 이르는”(고후 3:18) 것, 즉 그렇게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는 달리 표현된다. 즉 이러한 주의 영광의 반영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o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지음받는 것(엡 4:24)
o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는 것”(골 3:10)
o 지각(누스)이 새로워짐으로써 변화를 받는 것(롬 12:2)
o 신자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롬 6:4)
이렇게 새롭게 되는 것은 속사람에서 일어나며(고후 4:16), 우리가 행위를 새롭게 함으로써 계속 진행되는 것이다(롬 6:4). 이것이 미래에 관련해서는, 신자들의 실존 전체가 영화롭게 되어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 같이 변화되는 것(빌 3:21; 고전 15:43 이하)을 의미한다.
딛 3:5에서 말하는 중생(팔린게네시아)도 이와 같은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 중생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이곳에서도 그리스도의 몸에 합해지는 것으로서의 세례와 그리스도로 옷 입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눈에 띈다.
이 중생이라는 개념이 바울이 말하는 새 생명의 의미와 다르다는 이유로 디도서가 가짜 바울서신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디벨리우스, 콘첼만, 쉬바이쳐), 단순히 용어 때문에 그런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이 개념 자체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리스 문화에서 나왔지만, 이것은 요세푸스와 필로와 같은 작가들도 사용했다. 이 말은 그리스 문헌에서도 국가의 재생, 개인적인, 우주적인 갱신이라는 넓은 의미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또한 밀의 종교의 전문 용어라는 주장도 증명할 수 없다.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이 개념이 미래적-종말론적 의미로 사용된다(마 19:28). 6절은 디도서 3장의 컨텍스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Epipanie)과 성령님이 부어졌다는 것의 의미를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종말론적 의미이다.
바울이 이 용어를 다른 곳에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의 의미가 아니라 단지 부활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했다는 말도(쉬바이쳐) 맞지 않는다. 갈 4:21-31에서 바울이 이삭의 기적적인 탄생에 이어서 “육체가 아니라 영을 따라 난 자”인 믿는 사람을 자녀라고 이야기하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그들의 어머니라고 할 때에는(26), 완전히 중생의 의미로만 사용되었다. “중생의 씻음”이라는 표현은 세례를 통해 믿는 자에게 주어진, 성령님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생명의 실제와, 그의 인격 전체로서의 새로운 피조물로서의(zwar in seiner Totalität als neue Schöpfung) 실제를(Realität)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2. 새로운 인간성을 구체적이고 개별적으로 묘사한다
바울은 새로운 생명에 대해 이렇게 포괄적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구체적이고 개별적으로 묘사할 때도 있다. 우리가 바울의 죄론을 설명할 때 분석했던(19장) 개념들이 모두 이곳에서도 사용된다. 즉, 앞에서와같이 속사람과 겉사람이 다시 구별되는데, 속사람은 내적이고 영적 성격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하는데, 이는 매일 새롭게 되고(고후 4:16), 그리스도와 교제 속에서 산다. 그러나 외부를 향한 육신적인 실존 방식 가운데 있는 인간인 겉사람은 시험과 위험 가운데 노출되어 있다.
바울이 이러한 구별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끊임없이 교통해야 한다는 것인데, 엡 3:16의 표현을 빌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고후 4장에서는 눈부신 믿음의 언어를 통해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 새로운 인간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새로워진다
또한, 이러한 속사람의 새로워짐에 있어서 마음과 지각(누스)의 중요성이 전면에 부각된다. 여기에서 마음과 지각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은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는 인간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성령님께서 인간에게 역사할 수 있는 근거(Ansatzpunkt)가 되며, 그러므로 인간은 마음에서 중요한 결단을 할 수 있다. 바울은 여러 가지 다양한 그림을 통해 인간 마음에 일어나는 영적 변화를 묘사하는데, 즉, 성령님께서 마음을 한 번, 그리고 그후에 계속해서 복음의 능력 아래로 데리고 오실 때 일어나는 영적 변화이다. 그러나 마음 안에서뿐만 아니라 인간 전체에서 성령님을 통해 새롭게 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특히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구절은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다양하고 풍부하게 드러내주는 내용들을 제공해준다:
o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으로서) 자기 백성의 마음속에 거하신다(엡 3:17).
o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영(성령님)을 신자들의 온전한 구속의 보증이자 인침으로서(고후 1:22) 그들의 마음에 보내신다(갈 4:6).
o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사랑을 그들 마음에 부어주고(롬 5:5),
o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그들 마음에 쓰며(고후 3:3),
o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그들의 마음에 빛을 비쳐 주고(고후 4:6),
o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통해 그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준다(엡 1:18).
o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평강은 그들 마음에서 거듭 중재자가 되어서 최종적인 결정을 내려 주고(골 3:15, 참조: 살전 3:13),
o 그들 마음을 지켜 주어서 방황하거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며(빌 4:7),
o 그들 마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랑과 인내를 나타내 보일 수 있게 역사하신다(살후 3:5).
이 모든 것은 성령의 감추어진 역사의 결과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하면, 마음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중요한 결정들이 일어나는 지점이지만, 성령에 의한 새롭게 함은 속사람의 마음에만 국한되지 않고, 거기에서 시작되어서 한 사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다음 구절은 성령과 신자의 속사람이 얼마나 친밀하고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매우 잘 보여준다:
o 성령은 율법 아래에서 신자들이 받는 종의 영과는 달리 양자의 영이기 때문에, 신자가 자녀의 자격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게 해 주는 영이시다(롬 8:15; 참조: 1:7).
o 성령은 종종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친히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주신다(롬 8:26-27).
o 성령은 그들과 연합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림으로써, 그들의 기도는 그의 기도가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살펴서 성령의 생각을 알아내어서 성령이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는 것을 들으신다(롬 8:27).
2) 새로운 인간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지각이 새로워진다
지각[2]이 새롭게 되는 것은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지각이 새롭게 되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계시에 따른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롬 12:2) 깨닫게 되어 새로운 윤리적 의식이 생긴다. 그의 사고와 행동은 그리스도에 의해 인도되고 지도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의 여부에 의해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이 구별된다. 이렇게 새롭게 된 지각은 인간의 모든 삶의 표현과 그의 삶의 양식에서 그를 규정한다(bestimmen). 그러므로 중생된 사람이 그리스도의 품성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육적인 사람에게는 그러한 품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의 영과 혼이 새 생명이 거하는 곳이며, 또한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이라는 것도(Sitz und Offenbarungsweise) 이곳에서 언급되어야 한다(참조: 롬 1:9; 롬 8:16; 갈 6:18; 빌 4:23; 살전 5:23; 엡 6:6; 빌 1:27 등). 이곳에서 영(프뉴마)과 영혼(프시케)이 단순히 인칭대명사로 표현되지 않은 경우에는, 영과 영혼이 인간의 보이지 않는 내적 실존과 연관되어 있고, 새로운 삶은 인간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풍부하게 증거해준다.
마음과 속 사람이 이렇게 성령의 빛을 받아 새로워진 것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본성과 능력을 지니게 되어 신자의 삶과 행실 속에서도 나타난다. 즉, 이것은 그의 새로운 삶에 그대로 반영된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우리가 앞에서 본 대로 “몸”과 “지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3. 바울에게서 몸의 다양한 의미
1) 죄악된 인간의 구체적인 실존 방식
그러므로 몸은 종종 죄와 동일시 되었었는데, “죄의 몸”(롬 6:6), “육의 몸”(골 2:11), “사망의 몸”(롬 7:24: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이 그 예다. 따라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새 생명의 삶은 “죄의 몸을 제거하는” 것, ”육의 몸을 벗는” 것, “땅에 속한 지체들을 죽이는” 것, “이 사망의 몸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롬 6:6; 골 2:11; 3:5; 롬 7:24). 이 표현들은 “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죄악된 실존 방식을 나타낸다. (우리는 이러한 실존 방식을 탈피하기 위해 복음을 믿어야 한다. 성령님에 의해 새롭고 정결하고 거룩하게 되어야 하고, 이러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옛 사람의 영향권을 벗어나기 위해 믿음으로 살아야 하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옛 사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은혜를 꼭 붙들어야만 옛 사람의 막강한 능력을 벗어난다. 이것이 죄악된 인간의 실존 방식을 탈피하는 길이다).
2) 가치중립적: 우리 몸이 늘 새롭게 됨으로써 우리 몸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
몸은(때때로 “육”이라는 말도 사용하는데), 일반적으로 외적으로 모습을 보이는 인간을 나타낼 때는 사용하는 가치 중립적인 말이다. 그러므로 새롭게 하는 것이 이 몸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님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5,19).
몸은 “오직 주를 위해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해” 계신다는 말씀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몸에서도 영광스럽게 되어야 한다(고전 6:20). 살아서나 죽음을 통해서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빌 1;20). 또한 신자는 그의 몸을, 살아있고 거룩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재물로 드려야 하는데(롬 12:2), 이것은 그들이 자기 지체를 의의 병기로 바치고(롬 6:13), 죄가 더는 자기 몸에서 다스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롬 6:12).
이곳에서는 인간의 육신적인 면을 강조한다든지, 육적인 죄에 대항하여 투쟁해야 한다는 의미가 주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기 선한 의도를 실행으로 옮겨서 하나님이나 인간의 눈에 선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3) 몸은 인간의 현재의 실존이 지닌 연약함과 덧없음을 가리킨다
이때는 이런 경우를 나타내고자 사용하는 “육”이라는 의미와 같다.
o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o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o 4: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따라서 새 생명이 육체에 나타나는 것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새 생명이 현재의 삶 속에서의 육체의 연약함과 유한성을 폐기하거나 원칙적으로 무효화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도리어 육체의 이러한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서 새 생명이 나타나게 하라는 의미이고(참조: 고후 4:7 이하), 새 생명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알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갈 2:20). 이것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새로워진다는 것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1) 새로운 인간성(das neue Menschsein)은 지금 현세에서도 실현된다. 종말론적인 구원과 관련된 은사는 육을 입고 있는 신자에게도 임한다. 신자는 지금 이 세상에서 성령님을 통해 완전한 구원의 인장과 보증물(Unterpfand)을 받았다(고후 1:20-22; 엡 1:13-14).
(2) 이렇게 새 생명이 육신 안에서 나타났다는 것은, 이러한 나타남이 임시적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세대에서의 새 생명에 대해서는 감추임과 나타남이라는 말이 동시에 사용된다(골 3:3; 참조: 롬 8:19; 빌 3:21). 새 생명이 현재에는 감추어져 있으면서도 잠정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파루시아 때에 완전히 드러난다.
4. 그리스도인 삶의 매우 독특한 긴장과 양극의 대립(Polarität)의 원인
신자에게 구원의 은사가 이미 나타나서 이들이 이것들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고통스럽게 죄와 싸워야 하는, 매우 긴장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이유에서이다. 이들은 구원의 은사를 이미 받았지만, 갖은 유혹에 열린 약한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이라는 말이 나온다.
바울은 이것을 한편으로는 매우 감격적인 믿음의 언어로 말하다가도, 어떤 때는 깊고 고통스러운 탄식으로 표현기도 한다(참조: 롬 5:3 이하; 8:22 이하; 고후 4:7 이하; 5:2 이하). 그러므로 그는 이 현세의 삶을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능력을 아는 것으로, 그의 고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모양이 되는 것으로 보며, 그러면서도 죽은자들로부터의 부활을 소망하면서 기다리는 것으로 본다(빌 3:10-11). 왜냐하면 부활에 이르러야 비로소 신자에게 주어진 생명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골 3:4).
[1]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 nous, Verstand, 오성, 깨달음
*강의자 : 송다니엘 교수
*본 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3강은 2024년 8월 25일(주일)과 9월 1일(주일)에 실시된 부천개혁교회의 사경회와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집중강의를 겸하여 강의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