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자동차 업계의 '빅 3(Big 3)'로 불리는 GM·포드·크라이슬러의 미래에 관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 빅3 업체의 시장점유율이 안방인 북미시장에서조차 지속적으로 감소해온데다 글로벌 경제위기까지 겹치면서 빅3 파산설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현재 미국 빅3의 상황은 정상적인 기업으로서는 생존이 불가능한 수준이라는 것이 투자분석가들의 판단이다.
미국 신용평가 기관들은 빅3의 회사채 등급을 투자위험 등급으로 내린 지 오래다. 최근 유럽 4위 은행인 유니크레딧은 5년 안에 GM이 파산할 확률은 84%, 포드는 75%라고 분석했다. 이미 생존능력을 상실한 크라이슬러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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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픽=박상훈 기자 ps@chosun.com
최근 미국 자동차 시장의 급격한 냉각은 빅3에 특히 치명적이다. 지난달 미국 시장에서 GM은 전년 대비 45%나 판매가 줄었다. 포드는 32%, 크라이슬러는 35% 줄었다. 문제는 시장 규모 자체가 줄어들면서 도요타 등 일본업체 판매까지 함께 줄어들어 출혈 판매가 극에 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자동차 시장의 판매량이 12개월 연속 감소하는 가운데, 지난달
일본 도요타(-23%)와 혼다(-25%), 닛산(-33%)도 각각 큰 폭으로 판매가 줄어들었다. 서로 값을 계속 깎아주고 무이자 할부 경쟁을 하게 되면 아무도 차를 팔아서 이익을 남길 수 없게 된다. 현금을 쌓아놓고 있는 도요타는 버틸 수 있다고 하지만, 누적손실이 큰 빅3는 재정적 부담 때문에 살아날 방법이 없다.
■미국 자동차산업, 빅3에서 빅2로 재편되나빅3의 미래에 대한 유력한 시나리오는 대략 3가지로 나눠진다. 그 첫 번째가 빅3 중 2곳이 합쳐져 '빅2' 체제로 가는 것이다.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에서 적자투성이 기업으로 전락한 GM이 인수·합병에 가장 적극적이다. GM은 먼저 포드와 합병을 시도했으나 불발에 그쳤다. 차선책으로 크라이슬러 인수에 나선 GM은 지난달 미국 정부에 100억 달러의 인수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GM의 생각은 크라이슬러가 보유한 현금과 정부 지원금을 통해 당면한 재정난을 일단 모면한 뒤 기회를 엿보겠다는 것이다.
GM의 최근 재무상황은 자체적으로 해결 가능한 수준을 넘어섰다. 지난 2분기 GM의 손실 규모는 154억7000만 달러(약 20조3600억원)에 달했다. 한 달에 6조원 이상씩 손실을 보고 있는 형국이다. 2004년 이후 누적 손실 규모는 700억 달러(92조1000억원)에 이른다. 월스트리트저널은 GM이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내년 여름쯤 유동성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이 상황을 막으려면 판매를 획기적으로 늘리든지, 아니면 미국 내 공장의 절반쯤 문을 닫고 인원도 반쯤 줄여야 한다. 그러나 글로벌 경기 침체 속에 판매의 획기적 증대는 거의 불가능하고, 인력 구조조정도 미국 최고의 강성노조인 전미자동차노조(UAW)가 버티고 있는 탓에 쉽지 않다. GM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크라이슬러 인수·합병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망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빅3 가운데 한 곳 정도가 망해서 시장에서 퇴출되는 것이다. 빅3 가운데 덩치가 제일 작은 크라이슬러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때문에 크라이슬러의 최대 주주인 서버러스캐피털이 회사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조건이 여의치 않을 경우 청산(淸算)에 나설 수도 있다. 적자 회사를 계속 끌고 가기보다는 빨리 공장 문을 닫고 자산을 처분하는 것이 그나마 손실을 줄이는 길이기 때문이다. 포드에 대규모 투자를 했던 미국의 억만장자 기업 사냥꾼 커크 커코리언(Kerkorian)이 최근 포드 주가 폭락 이후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주식을 처분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빅3 중 크라이슬러의 퇴출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관측되는 것은 최근 경제위기 속에서 그나마 잘 팔리는 소형차 기반 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이 회사의 톰 라소다(LaSorda) 부회장은 "크라이슬러는 소형차를 안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못 만드는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소형차를 싸고 품질 좋게 만드는 것은 대형차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며 "현대차가 싸고 품질이 뛰어난 소형차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솔직히 두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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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자동차산업의 심장부인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외곽에 있는 포드자동차의 픽업트럭 생산공장. / 블룸버그
크라이슬러는 1990년대 초반 '네온'이라는 소형 세단을 시판, '일본차 킬러'로 키우려고 했으나 품질이 악평을 받은 뒤 사실상 소형차 사업을 접었다. 이후 중대형 SUV(스포츠유틸리티 차량)와 픽업트럭 사업을 확대해왔다. 최근 소형차 인기가 높아지자 크라이슬러는 현대차, 중국 체리자동차, 일본 닛산 등에서 소형차를 들여와 자사 상표를 붙여 팔기로 했다.
소형차에 관한 한 GM과 포드의 상황은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다. GM은 GM대우라는 한국의 소형차 생산·개발기지를 갖고 있다. GM대우가 만들어 미국시장에서 시보레 브랜드로 파는 소형차 '젠트라X'는 GM에 가뭄 속의 단비 같은 존재다. 포드의 경우도 유럽법인에서 '포커스'나 '카(Ka)' 같은 상품성 뛰어난 소형차를 보유하고 있어 조만간 미국시장에 투입이 가능하다.
■글로벌을 포기하고 내수 업체로 연명한다세 번째 시나리오는 빅3가 모두 살아남긴 하지만, 글로벌 사업이 크게 축소되면서 미국 내수 중심의 자동차회사로 연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빅3는 어려울 때 손실을 보더라도 경기가 좋아지면 차를 많이 팔아 금방 손실을 만회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빅3의 전성기 때 GM 혼자서만 미국 내수시장 점유율 70%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20% 전후로 추락했다. 포드는 15%, 크라이슬러는 10% 수준. 빅3의 제품이 아니라도 살만한 차가 널려 있는 미국 시장 상황에서 지금의 빅3의 규모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한마디로 난센스다.
따라서 몸집을 최대한 줄여 연명해 나가든지,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다. GM이나 포드가 지금보다 더 상황이 어려워질 경우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돈 되는 것은 전부 팔아 치우게 될 것이다. 이미 포드는 과거 거액을 주고 매입했던 애스턴마틴과 재규어·랜드로버를 매각했고, 볼보마저 매각을 검토 중이다. GM도 사브의 매각을 고려하고 있다. 앞으로 포드는 유럽포드, GM은 독일의 자회사인 오펠이나 호주 홀덴은 물론이고, 현재 캐시카우로 각광받고 있는 GM대우까지 매각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근본적인 문제는 미국 자동차의 경쟁력 상실빅3가 왜 이 지경이 됐을까? 빅3의 최대 문제는 바로 자동차라는 '제품'에서 찾아야 한다. 빅3에는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한 장기적이고 실질적인 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빅3는 그 동안 단기 수익에만 골몰하면서, 노사 문제처럼 껄끄러운 사안은 해결을 미뤄왔다. 미국 자동차전문지 모터트렌드 앵거스 매킨지(MacKenzie) 편집장은 "빅3는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실수를 저질러 왔고, 그 실수는 교만과 자기만족과 근시안적 행태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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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5년 출시된 GM의 전기자동차 'EV-1'이 좋은 사례다. 당시 GM은 이 차량 개발기술을 기반으로 도요타를 앞설만한 하이브리드카를 먼저 내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GM 경영진은 고객들이 이런 차에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 1999년 사업을 완전히 접고 말았다. 사업 지속을 주장했던 당시 GM의 CEO 로버트 스템플은 회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연구에 따르면 1940~1950년대에 알프레드 슬로언 CEO를 비롯한 당시 GM 최고경영진은 지금의 도요타 경영진처럼 현장 경험과 현장과의 소통을 중시하며 본능적으로 '좋은 자동차'를 만들어내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지금의 GM은 그렇지 않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포드 역시 마찬가지. 포드는 1990년대 이스케이프, 익스플로러 같은 SUV를 잇달아 히트시키며 제2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때 포드는 넘쳐나는 현금을 품질·개발에 쏟기보다 볼보나 재규어, 랜드로버 같은 유럽회사를 사들이는데 전부 써버렸다. 일본 차와 경쟁이 어려운 패밀리 세단 시장을 아예 버리고 대당 수익이 큰 SUV시장에만 주력하다 이제 와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빅3의 다른 문제는 자만이다. 1970~1980년대 일본 도요타나 혼다의 소형차들이 미국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을 때도 빅3는 소형차 시장을 너무 쉽게 내주고 말았다. 어차피 수익성도 별로 없으니 일본에 내줘도 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고, 왜 일본 차가 인기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일본 차들은 소형차 시장의 강세를 바탕으로 캠리나 어코드 같은 중형차와 렉서스나 인피니티 같은 고급 대형차를 선보이며 미국 시장을 무서운 기세로 장악하기 시작했고 미국차 회사들의 판매 영역은 점점 더 좁아져 갔다.
GM은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가 나오자 즉시 "오바마 대통령 당선을 환영하며, GM에 대한 즉각적인 도움을 원한다"는 성명을 냈다. 그러나 GM이 정치권에 기대서 지원금을 얻어낸다 해도 한번 돌아선 소비자의 마음까지 얻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소비자의 욕구를 외면해온 빅3를 국민 세금으로 지원하는 데 대한 시각도 곱지 않다. 오바마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취임식 이전에 빅3의 CEO를 만나 지원방안을 논의하겠다고 공언해 왔지만, 바닥으로 추락한 빅3의 경쟁력은 단기간에 끌어올리기 힘들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