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이 읽은 책]죽음 넘어서는 책들 ② <섭섭하게, 그러나…>
정토마을 10년 호스피스 능행 스님 ‘현장 중계’
“생각으로만 느끼고 너무 오만하게 여겨” 한탄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번개가 치더니 벼락이 떨어지데요. 내가 벼락을 맞을 줄이야. 내게 잘못이 있다면 정신없이, 열심히 돈 번 것밖에 없는데.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만 했을 뿐인데…. 스님. 글쎄 돈을 쓸 데가 없네요. 이런 개 같은 일이 다 있네요. 세상에. 이런 일이…그것도 나에게….”
어느 날 갑자기 죽음에 직면한 사람의 반응이다. 비구니 능행 스님은 10년 넘게 이런 안타까운 죽음들을 지켜왔다. 충북 청원군 미원면 대신리 구녀산 호스피스 정토마을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봐온 그다. 죽음만큼 절절한 수행의 현장이 있을까. 그가 그 처절한 현장의 얘기들로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도솔 펴냄)란 책을 냈다.
결혼을 몇달 앞두고 앞으로 두 달밖에 살 수 없다는 급성 위암 판정을 받은 26살 처녀가 있었다. 처녀의 어머니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되는 세상인 줄 알았다”고 “제발 살려 달라”며 매달렸지만 너무도 사랑스럽게 미소 짓던 아름다운 처녀는 아미타불을 부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날 울다 지친 어머니의 꿈에 나타나 “엄마! 나 부처님이 안고 갔다”고 환하게 웃으며 안녕을 고했다.
빨리 가고 많이 누리던 사람일수록 더욱 비참한 최후
군인의 아내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모두 박사로 키운 긍지로 살던 예순한살의 여인은 자궁경부암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열성으로 가득한 어머니 아래서 이기적인 삶만을 체득한 자식들 중 어느 누구도 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없어 그는 외로움에 치를 떨다 숨을 거뒀다.
오직 남보다 빨리 가려고만 하다가 세상에서 많이 누리고 살던 사람일수록 더욱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안타깝다 못해 처참하다.
능행 스님이 돌본 한 스님은 암에 걸리자 가족들과 가까운 도반들에게도 자신의 삶을 여여하게 정리해 보이는 여유를 보였다. 그러나 임종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리자 “뭐라고! 말도 안 돼! 내 정신은 이리도 말짱한데”라며 두려움에 떨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죽음을 수도 없이 지켜보며 능행 스님은 죽음은 오직 한 번뿐인 생방송인데도 우리는 죽음을 생각으로만 느끼고, 너무 오만하게 여기고 있다고 한탄한다.
수많은 죽음을 보며 그래서 능행 스님은 “아! 잘 살아야 잘 죽는구나!”고 깨달았단다. 잘 웃고 크게 웃고 사는 사람이 죽을 때도 웃으며 가곤했다. 그래서 그는 묻는다.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라고.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아래는 능행 스님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돌보고 있는 정토마을 현장 취재기(2006년 11월)입니다.
할머니 환자를 보살피는 능행 스님. 할머니는 스님을 보자 금세 “우리 스님, 우리 스님” 하며 눈물을 흘렸다. |
죽음으로 가는 ‘간이역’…청원군 미원면 호스피스촌 ‘정토마을’
지난 18일 충북 청원군 미원면 대신리. 구녀산의 좁은 산길을 따라 300미터 가량을 오른다. 물기가 잦아든 낙엽의 빛깔들이 제각각이다. 죽어가는 모든 것들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름다운 것들과 채 작별도 하기 전에 금세 터널을 빠져나온 듯 푸른 하늘이 툭 터진다. 그 아래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호스피스촌 정토마을이 있다. 사나흘이 멀다 하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곳이다. 그래서 단말마의 비명으로 고통스러울법한 곳이다. 그런데도 어찌 이토록 아늑하고도 예쁠까.
그러나 이곳에선 최근 일주 새만 해도 다섯 명이 죽어나갔다. 잠시 뒤 정토마을 원장인 능행 스님(46)의 모습이 보인다. 양말도 신지 않았고, 얼굴엔 피로가 가득하다. 입가에 부르튼 상처가 자다가도 일어나 맨발로 달려가 죽어가는 이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면서 날을 하얗게 밝히는 그의 여정을 대신 말해주고 있다.
죽음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의 취침과 기상 시간을 맞춰주는 법이 없다. 죽어가는 사람과 작별하면서 그 고통과 몸부림하다보면 양말을 갖춰 신기는 커녕 밥 한술 먹을 새도 없는 때가 많다.
스님은 또 청주시내 장례식장을 향해 황급히 차에 몸을 실었다. 전날 이곳에서 숨을 거둔 한 젊은 망자의 입관식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다. 30대 후반의 고인이 정토마을에 온 것은 4개월 전이었다. 췌장암 말기였다. 그는 지금껏 장가도 가지 않고 건축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고 했다. 돈만 벌면 여자도 생기고, 집도 생기고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행복할 것으로 생각했단다. 써보고 싶은 돈도 못써보고 돈을 모아 이제 어느 정도 살게 됐는데 말기 암이라니 웬 날벼락이냐고 했다. 돈만 벌기 위해 몸부림쳤기에 형제들과 관계도 소원했다. 6남매의 막내인 그는 늘 형과 누나들을 기다렸지만, 가족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가족들도 그처럼 모두 돈을 버느라고 바빴다. 그는 기다림에 울고 외로움에 떨다가 임종을 맞았다.
“징해. 징해. 이 세상이”
달리던 차에서 창밖을 보던 스님이 신음처럼 말을 뱉었다. 죽음 자체에 대한 한탄보다 오직 돈만 보고 달리다 정작 정말 소중한 사랑을 놓쳐버린 이들의 삶과 가족이 죽어가는데도 돈 버느라 바빠 올 수 없다는 사람들, 귀찮은 일은 죽어도 싫다는 현대인들의 개인주의와 메마른 마음에 대한 절규였다.
“세상 사람들이 다 돈에만 미쳐가고 있어요. 그 돈이 결국 우리를 미치게 하는 줄도 모르고.”
사흘 전에도 개인택시를 하며 돈만 벌며 장가도 가지 못했던 총각이 세상을 떴다. 요새 그런 젊은이들을 잇달아 보내면서 스님의 한숨도 더욱 커졌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입관실에 들어가자 하얀 천에 덮인 주검이 누워있다. 스님의 염불에 맞춰 염습사들이 주검의 몸을 닦고 손발을 한지로 싸기 시작한다. 이제 막 이곳에 도착한 50대로 보이는 한 여인이 울다가 염습사를 향해 “우리 막내 마지막 가는 길인데 좋은 천으로 싸주지 왜 종이로 싸느냐”며 화를 낸다. 한지로 싼 뒤 옷을 입히게 되어있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스님이 여인에게 “(고인과)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큰누님”이란다. 스님은 “○○씨가 얼마나 큰누님을 기다렸는데…”라며 뭔가를 말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고 만다. “살아서 한 번이나 와보지 웬 뒤늦은 소란이냐”는 말을 하고 싶었을까. 그의 염불과 목탁소리만이 마른 장작처럼 말라버린 주검 주위로 더욱 구슬프게 울려퍼졌다.
청원/글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능행 스님이 정토마을 짓게 된 사연
“임종 고통 등지려다 사흘 울고 돌아왔죠”
능행 스님은 출가한 지 5년쯤 지난 30대 중반에 한 불자의 남편 병문안을 갔다. 그 전엔 병원 문턱도 밟아본 적이 없던 그는 “이곳에 웬 스님이 이렇게 많으냐”고 놀라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님이 아니라 지독한 항암제를 맞아서 머리가 빠진 말기 암 환자들이었다. 지옥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바로 그곳이었다.
정토마을 능행 스님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입술 밑의 상처와 서글픈 표정이 고통스런 임종을 지켜온 그의 삶을 말해준다 |
‘부처님 고행상’을 보는 듯 말라붙은 말기 암 환자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뒤돌아서는 그를 누군가가 불렀다. 자기 어머니가 불자인데 기도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번엔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저도요, 저도요”하면서 달려들었다. 병원에 신부님, 수녀님, 목사님은 늘 찾아오는데 스님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신자들 덕분에 절집을 짓고 밥을 먹고 살아가면서 정작 신자들이 병들고 죽어갈 때는 그들 곁에서 돌보고 지켜봐주는 스님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게 기가 막히고 죄송했다.
얼마 뒤 가톨릭 한 수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임종을 앞둔 한 남자 환자가 아무래도 스님인 것 같은데 일체 대꾸조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환자는 20년 넘게 선방에서 수행만 해온 스님이었다. 그는 “내가 지금까지 중생들이 주는 은혜로 살아가면서도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느냐”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다시 태어나면 절대 그렇게는 살지 않을 텐데 이제 늦었다”는 것이었다.
머리와 수염과 손발톱까지 깎고 목욕을 시킨 뒤 무릎에 뉘여 자장가를 불러주던 능행 스님에게 그 비구 스님은 ”불자가 1천만이나 되는 불교인들에겐 병원 하나가 없다“면서 “스님들이 편히 죽어갈 수 있는 병원 하나 지어 달라”고 애원했다. 능행 스님은 “어떻게 저 같은 중이 병원을 짓겠느냐”며 고개를 흔들었다. 비구 스님은 임종 징후를 보인지 이틀이 지난 뒤에도 숨을 놓지 않은 채 “그 약속을 듣지 않고선 갈 수 없다”고 버텼다. 견디다 못한 능행 스님은 “그럼 스님께서 죽어서라도 저와 함께 그 일을 해주실 수 있느냐”고 묻자 비구 스님은 “그러마”면서 능행 스님의 손을 꼭 쥔 채 눈을 감았다.
그렇게 비구 스님을 보낸 지 2년 만에 스님은 돈을 탁발해 땅을 사 이 마을로 들어왔다. 그러나 “말기 암 환자들이 웬 말이냐”는 마을 사람들의 거부와 시위와 민원으로 3년 내내 시달려야했다. 더구나 돈이 없어도 편히 죽을 수 있는 곳을 만들겠다는 서원으로 이 마을을 만들었지만, 임종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도, 이들을 돌볼 돈을 탁발하는 것도 너무 힘에 부치기만 했다.
5년 전엔 서랍 속에 이별의 편지를 써놓고 아무도 몰래 이곳을 떠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을을 벗어난 순간부터 3일 내내 울다가 그래도 눈물이 그치지 않자 마을로 돌아왔다. 그 때 한 할머니 환자가 “어디로 탁발 갔는데 이렇게 늦게 오노? 스님 보고 싶어서 눈 빠지는 줄 알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그는 통곡하며, 수행자는 고통 받는 중생 옆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스님은 비구 스님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난 9월부터 경북 울주군 상북면에 관자재요양병원을 짓느라 매일 발이 부르트도록 탁발을 다니고 있다.
그런데 입관식을 마치고 돌아온 날 깊은 밤 스님의 방에서 눈물 젖은 스님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를 도와온 한 비구니 스님이 이번 동안거(겨울 90일간 참선기간)때 선방에 들어가겠다고 하자, “스님들이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느겠냐”면서 “곁에 있어달라”고 울며 호소하고 있었다.
한 정토마을 식구는 “일반 자원봉사자들도 이곳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 힘을 필요로 한 곳이라며 더욱 더 도울 마음을 내는데, 스님들은 대부분 임종하는 모습을 한두 번만 보면 놀래서 도망가 버리곤 해 원장 스님의 상처가 너무 큰 것 같다”고 말했다. 전화가 끊긴지 몇 시간이 지나도록 그날 밤 능행 스님의 방에선 흐느낌이 그치지 않았다.
청원/글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정토마을은?
정토마을은 말기 암 환자와 죽음을 앞둔 이들이 거쳐 가는 간이역이다. 능행 스님과 의사 한명, 간호사 4명,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교대로 ‘마지막 삶’을 돌본다.
삶의 마지막 현장에서 거짓은 허용될 수 없다. 지식인도 부자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능행 스님이 펴낸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도솔 펴냄)에는 누구도 피할 수 없이 맞아야할 단 한번의 생방송 현장이 너무도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10년을 한결 같이 이 마을을 지켜온 마니주 간호사는 “지식인과 부자와 수행자 등 뭔가 가진 것 많고, 명예가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곤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능행 스님은 삶엔 공짜가 없다고 말한다. 삶에서 많이 가지고, 많이 나누고 많이 버리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마지막 순간 고통으로 그 대가를 다 치르고 간다는 것이다. 능행 스님은 “잘 죽는 길은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jungtoh.com. (043)298-2258
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능행스님 존경합니다. 스님 덕분에 불교 복지.호스피스활동이 뿌리 내립니다.스님 건강하세요()()()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스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_()()()_눈물이 나네요............
아...가슴이 찡합니다...스님 존경합니다...감사합니다..나무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