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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간 운영한 끝에 그의 유업은 세 자녀들이 계승해 오늘도 착실히 이어가고 있다. 골동품 복원기술을 인정받은 그는 1960년대 초 퍼스트 레이디 재클린 케네디의 골동품을 수리하느라 2년간 백악관 생활도 했다. 뉴욕한인사회와 관련해서는 제7대 뉴욕한인회장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미동부 지역회 창설 공로로 초대회장을 지냈다.
초기 군악대가 없던 해군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육군군악대를 차출해 쓰곤 했었는데 이때 육군군악대장 김판기는 해군참모총장이던 손원일과 자주 공식 석상에서 만나 특유의 사교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나팔 불던 군인의 프랑스 국립음악원 입학은 그렇게 해서 이뤄졌다. 부인 이계은도 합류하고 지휘공부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는 프랑스가 고학으로 버티기 힘든 나라라는 걸 깨달았다. 집에서 부쳐오는 경비도 한계가 있었고 파리에 정착할 기회를 찾지 못한 김판기 부부는 미국이 그런 면에서는 훨씬 유리하다는 소문을 듣고 미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때마침 워싱턴 주미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던 군대 동기 이후락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미국의 소리 방송국(VOA)에 근무하는 교포직원 명의의 초청장과 재정보증서가 큰 힘을 발휘했다. 입국 직후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음악학원에 입학한 김판기는 지휘코스 2년을 마치고 아무 연고도 없는 뉴욕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호리구찌라는 일본계 직업소개소를 통해 얻은 일자리 골동품 복원이 제2의 천직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처음 얻은 일자리는 맨하탄 59가 3애비뉴의 ‘찰스 그레이시 앤드 캄파니’였는데 이 회사는 선대로 부터 동양골동품을 취급하던 굴지의 회사로 주로 자개, 병풍, 그림 등을 취급했다. 영주권도 없고 경험도 없는 김판기는 입사 초기 엘리베이터 운전과 잡일 등을 하다가 결국은 기회가 되어 골동품을 복원하는 예민한 기술을 그곳서 배우게 되었다.
한국서 그의 부친이 골동품을 많이 갖고 있었으므로 그 분야에 상식이 있던 터여서 전문기술을 습득하는데 도움이 됐고 수리를 배우면서 부터는 대우도 개선돼 주급 70달러선이 되었다. 그레이시 회사의 작업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였으므로 이후의 시간은 활용할 여지가 있었다. 마침 프랭크 칼로라는 프랑스인 경영의 골동품 회사에 자리가 나와 이때부터 투잡을 뛸 수 있었다. 두 회사가 세 블럭 떨어진 거리에 있었으므로 프랭크 칼로에서는 오후 4시부터 밤 9시까지 계속해서 일할 수 있었다. 수리기술도 많이 늘고 불어도 조금 할 줄 아는 김판기는 프랭크의 눈에 들어 일급사원 대우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랭크로 부터 귀에 번쩍 뜨이는 제의가 들어왔다. 골동품을 무척 좋아하는 페스트 레이디 재클린 케네디로 부터 백악관 소장 중국병풍의 수리 의뢰가 들어왔는데 자신이 영업을 집어치우고 직접 갈수는 없는 노릇이고 대신 김판기를 보내겠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이루어진 백악관 행은 2년간이나 유지됐다. 백악관 별관 숙소에서 직원들과 침식을 함께 하면서 첫번째 임무로 맡은 12폭 중국병풍 수리가 끝나갈 무렵 병풍 뒤에 새까맣게 초서로 쓰여진 한문글자의 뜻을 큐레이터가 물었을 때 한국에서 한문께나 배웠다고 자부하던 김판기도 병풍에 새겨진 장문의 내용을 도저히 해독하기가 어려웠다.
주말 뉴욕으로 올라온 김판기는 그 길로 강용흘을 찾아갔다. 중국고전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있던 강용흘은 그때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동양관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를 통해 소개받은 컬럼비아대 중국계 노교수에게 종이에 베껴온 한자 전문을 보였다. 강희연대 때 어느 훌륭한 성장의 공적을 국민들이 높이 기려 12폭짜리 병풍을 진갑선물로 바친 내용이었는데 이 병풍이 청나라 시절 미국대통령에게 선물로 보내져 왔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런 연유로 백악관 큐레이터로 부터 신임을 얻은 김판기에게 수리를 요하는 갖가지 골동품들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병풍 복원에 재미를 붙인 재클린이 백악관 창고에 쌓여있는 골동품들의 일제 정리작업에 나섰던 것. 루즈벨트, 트루먼, 아이젠하워 시절 퍼스트 레이디들이 방치해 두었던 값나가는 보물들이 주인을 제대로 만나 햇볕을 보게 된 셈이었다.
뉴욕으로 돌아온 그가 한인사회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것은 1967년부터였다. 당시 한인회장이던 이범선의 권유로 한인사회에 발을 디뎠고 이듬해 제7대 한인회장에 출마해 원로 김형린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 시절 함께 한인회를 이끌었던 인사들은 부회장 김일학을 비롯해 김정희, 최수용, 이응호, 유민철, 홍순식, 김태선 등이었다. 그의 임기 중 브루클린 부두에 미국적 상선 알젠틴호가 6개월간 발이 묶여있었는데 미국인 선주가 파산선고를 한 다음 행방불명이 된 사건이었다.
이 배에 타고 있던 한국인 선원 30여명이 끼니도 잇지 못한 채 오도가도 못하는 딱한 사정이 한인사회에 알려지자 김회장은 이들의 구호에 나섰다. 오철호 목사, 남병학 변호사 등과 함께 법정투쟁을 벌인 결과 선원들을 무사히 비행기 편으로 귀국시킨 일도 있었다. 그는 재임시 음악인다운 사업도 벌였다. 68년 6월8일 맨하탄 46가 소재 뉴욕센터에서 한국유학생 장학금 모금 자선 음악회를 주최했다. 이때 백건우, 김성길, 박신숙, 김의영, 김형미, 유건열, 김복희 등이 출연했고 당시 줄리어드 음악학교 재학생 50여명으로 구성된 심포니 오케스트라도 선보였다. 그는 임기말인 1969년 12월 정기총회에서 처음으로 뉴욕한인회 회칙을 개정한 회장이 되었다. 그때까지 실시되어 온 실행위원회에 의한 회장 간접선거를 폐지하고 직접선거로 바꾸는 한편 실행위원회 대신 이사회를 신설했다.
이듬해인 1969년에는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미동부지역회가 뉴욕에서 창설되어 김판기가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다. 창설식에는 전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과 김용식 주 유엔대사 등도 참석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그의 개인적인 숙원은 1982년 한미수교 1백주년 기념음악회 때 이루어졌다. 링컨센터 에이버리
피셔홀에서 아메리칸 심포니를 직접 지휘하는 숙원을 잠시나마 풀었던 것. 자녀들에게 갤러리를 유업으로 남긴 그는 1989년 타계, 웨체스터 켄시코 묘지에 안장됐다.
금년 4월 타계한 부인 이계은도 그의 옆으로 갔고 장녀 형미는 현재 맨하탄에서 남성의류회사 부사장겸 디자이너로 활약하고 있다. 아래로 조세핀, 준, 로널드 등 3남매가 부친의 유업인 에이시안 아트 갤러리를 뉴로셀에서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조종무<국사편찬위원회 해외위원>
첫댓글 직접보지않고는 믿지못한다는 말이 있다 반신반의 햇지만 이제는 확실해졋다
살기위해서 북미 조선인 .과 한반도인 재일교포와 조선족 도 마찬가지 한반도는 살아남기위해서 힘겨운 몸부림을 계속할뿐이었다
대한민국의 해결책은 있는가 한민족이 살아갈 방법말이다 빠져나갈 방법은 아직까지는 없어보인다 가진게 많은 이들은 진실을 찻는것보다는 묻는게 기득권을 유지하는게 나아보인다구 판단을 했다 정말 희안한점은 통제당하는 이들의 후손들의 이야기다 진실을 위해서 찾기 위해서 보다는 기득권에 편입하기 위해서 더욱더 열심히 노력하는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