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5가해23-1-1.zip
冶父:正人이 說邪法하니 邪法이 悉歸正하고 邪人이 說正法하나 正法이 悉歸邪하니 (歸邪는 一作皆邪라) 江北成枳江南橘이나 春來에 都放一般花로다
說誼:一味無爲法이 能正亦能邪하니 一種이 分南北하나 南北이 一般花로다
야부:바른 사람은 삿된 법을 설해도 삿된 법이 모두 바른 법으로 돌아오고 삿된 이가 바른 법을 설해도 바른 법도 모두 삿됨으로 돌아오니 江北에서는 탱자요 江南에서는 귤이나 봄이 오면 모두 한가지로 꽃 피도다
설의:한 맛의 무위법이 능히 바르기도 하고 또한 능히 삿되기도 하니 한 종자가 남북으로 갈려도 꽃은 남북이 한가지로다
청봉착어:정각을 이루니 일체가 둘 아니어서
바르고 삿됨도 둘 아니라
꽃을 꽃이라 함에 옳지도 그르지도 않아
근기 따라 설함에 걸림이 없어라
宗鏡:得亦非說亦非이니 能仁機輪이 電?이라 取不可捨不可이니 空生舌本이 瀾?이로다 且道하라 無爲法이 爲甚?有差別인가 萬古碧潭空界月을 再三撈?始應知인가
說誼:得而無得이고 說而無說이니 神妙其機가 電光이라 難能入手이니 取之不可取며 捨之不可捨니 快然其舌은 勇浪이 能爲高下로다 此則且置하고 只如無爲法이 爲甚?有差別인가 君今欲識無爲理이면 不離千差萬別中이니라 雖然如是이나 但知空月이 落潭心하면 爭似癡猿枉勞形이리오
종경:얻는다는 것도 또한 틀리고 설한다는 것도 또한 틀리니 能仁(부처님)의 기틀의 쓰임(機輪:솜씨)이 번개와 같아 취하려해도 取하지 못하고 버리려해도 버리지 못하니 수보리의 혀뿌리가 물결침(무유작용)이로다.
자, 일러라! 무위법이 어찌하여 차별이 있는가? 만고의 푸른 못에 잠긴 허공의 달을 재삼 건져 보아야 비로소 능히 알겠는가?
설의:얻어도 얻음이 없고 설해도 설함이 없으니 신묘한 기틀의 솜씨가 번개라 손에 넣기 어려우니 取할래야 취하지 못하고 버릴래야 버리지 못하니 상쾌한 그 혀는 용맹스러운 물결이 능히 오르고 내리도다. 이것은 곧 그만두고 다만 저 무위법이 어찌하여 차별이 있는가?
그대가 이제 無爲의 도리를 알고자 하면 천차만별 가운데를 여의지 않아야 하느니라. 비록 이와 같으나 다만 허공의 달이 못 가운데 떨어짐을 알면, 어찌 어리석은 원숭이가 부질없이 수고로운 짓을 행하리오.
청봉착어:함이 없는 무위법은
본래 차별상이 없으니
구름 없는 허공의 달이
만강에 떠 있음을 알라
宗鏡:雲捲秋空月印潭이여 寒光無際與誰談하리 豁開透地通天眼하면 大道分明 不用參이리라
說誼:若使空月不印潭이면 豈謂寒光廣無邊인가 照天照地含萬象하니 無窮此味與誰談할까 但於頂門能具眼하면 更向何處覓玄宗이리오
종경:구름 걷힌 가을 하늘아래 못에 비친 달이여
밝은 빛의 끝없음을 누구와 더불어 말하리
천지를 꿰뚫는 안목을 활짝 열면
大道가 분명하여 의심하지 않으리라.
설의:만약 허공의 달이 못에 비치지 않는다면 어찌 밝은 달빛이 넓고 끝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하늘을 비추고 땅도 비춰서 온갖 모습을 머금었으니 무궁한 이 맛을 누구와 더불어 얘기할까? 다만 정수리에 능히 눈(慧眼:일척안)을 갖추면 다시 어느 곳을 향해 현묘한 종지를 찾으리오?
청봉착어:천 강에 뜬 달은 곧 하나의 달이요
하나의 달이 강마다 떠 있으니
일체의 달이 둘 아니라서
하나의 달이 일체를 거두도다.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한 맛으로 돌아가니
이 오묘한 도리를
누가 알아 더불어 논하리요
依法出生分 第八 (법성에 의하여 나옴)
圭峰:二는 校量顯益이라 於中에 有四하니 一은 擧劣福以問이라
규봉:(2)는 헤아려 이익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가운데 네 가지가 있으니 ①은 작은 복(劣福)을 들어서 물은 것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인가 若人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로 以用布施하면 是人이 所得福德을 寧爲多不하느냐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보시를 한다면 이 사람이 얻은 복덕을 얼마나 많다 하겠느냐?”
圭峰:俱舍偈에 云하되 四大洲日月과 蘇迷盧欲天과 梵世各一千을 名一小千界하고 此小千千倍를 說名一中千하며 此千倍大千이니 皆同一成壞라하다 七寶者는 金銀琉璃珊瑚碼瑙赤眞珠??니라 二는 釋福多以酬라
규봉:俱舍論 게송에 이르되 “四大洲의 해와 달과 소미로(수미산)의 6욕천과 초선천(색계 4선천 중 첫 선천)의 각각 一千을 一小千세계라 하고 이 小千의 천 배를 중천세계라 하며 이것의 천 배가 大千세계이니 이 모두 하나같이 생겨났다가 무너지는 것이라”고 했다. 칠보란 금, 은, 유리, 산호, 마노, 적진주, 파려이다. ②는 복이 많음을 해석하여 답한 것이다.
須菩提言하되 甚多이니다 世尊이시여 何以故 是福德은 卽非福德性이니 是故로 如來說福德多이나이다
수보리가 말씀드리기를 “매우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의 성품이 아니니 이러하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이옵니다.”
淸峯:유위의 복덕이지 성품으로 말씀하는 무위의 복덕이 아니기 때문에 “말하자면 복덕이 많다고 하신 것이다”하는 것으로 복덕이라는 것이 실체의 성품이 없어 공적한 무위의 복덕은 많다는 것을 헤아림으로 미칠 수 없기 때문에 유위의 복을 여래께서 양으로써 많다는 표현을 방편으로 쓴 것이다.
복덕이라 하는 것은 이름(相)만 있음이요, 유위의 것도 본성인 근본 성품으로 살피면 복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본질적으로 공하니 큼이 한계가 있음이요, 공덕은 무량무변하므로 있다 없다를 초월한 것이니 한량없는 공덕과 복은 다른 것이다. 공덕조차도 공덕이라 할 때는 실상으로 보면 차별상이 되므로 방편으로 쓸 뿐인 것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복을 구함은 공덕이 될 수 없다.
공덕은 성품을 보는 것이 공(定)이요 평등함을 아는 것이 덕(慧)이다. 공덕은 자성 가운데 이름하는 것이요, 보시와 공양(有爲)으로 구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공덕과 복이 다른 것이니, 유위의 복은 다함이 있으나(有漏) 무위의 공덕은 항상하며(無漏) 무량한 것이다. 초조 달마가 양무제의 불사 보시를 일컬어 ‘공덕이 하나도 없다’ 했음도 이 까닭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圭峰:無着이 云하되 是福者는 標牒이요 卽非者는 約勝義空이요 是故者는 約世俗有라하다
규봉:무착이 이르되 “是福者(德?)란 것은 거듭 나타낸 것(標牒:앞서 칠보 보시 복덕을 다시 수보리가 말한 것)이요, 卽非라는 것은 진제의 뜻인 空(勝義空)을 묶은 것이고, 是故란 세속에 있음(차별상)을 묶은 것이라” 했다.
六祖:三千大千世界의 七寶로 持用布施하면 得福이 雖多하나 於性上에 一無利益이니라 依摩訶般若波羅蜜多修行하며 令自性으로 不墮諸有하면 是名福德性이니라 心有能所하면 卽非福德性이며 能所心이 滅하여야 是名福德性이니라 心依佛敎하고 行同佛行하면 是名福德性이며 不依佛敎하여 不能踐履佛行하면 卽非福德性이니라
육조:삼천 대천세계의 칠보를 가지고 보시에 쓰면 복 얻음이 비록 많으나 성품에는 하나도 이익 됨이 없는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수행하며, 자성으로 하여금 모든 있음에 떨어지지 않으면 이를 福德性이라 이름한다. 마음에 능과 소가 있으면 곧 복덕성이 아니며, 차별(能所)심이 없어져야 복덕성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마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지하고 行이 부처님의 行과 같으면 이를 복덕성이라 이름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지 않고 능히 부처님의 행을 실천하고 이행하지 않으면 곧 복덕성이 아닌 것이다.
圭峰:判經福超過라
규봉:③은 經에 福이 넘침을 가린 것이다
若復有人이 於此經中에서 受持乃至四句偈等하여 爲他人說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니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에서 이에 네 글귀등 이라도 받아 지니는데 이르러 남을 위해 설해준다면 그 복은 그보다 뛰어나리니
淸峯:아무리 크게 복밭을 지었을지라도 유루의 업을 지은 것이므로, 다함이 있어(有漏) 윤회를 면할 수 없으나 이 진리를 설한 무루의 공덕은 열반의 이익이 있어 무한대인 것이다. 얻어 지닌다 하는 것은 깨달아(般若波羅蜜) 아는 것이요, 타인을 위해 설해준다는 것은 설해도 설함이 없는 것인 무루의 공덕인 것이므로, 스스로 알고 스스로 행함이 한량이 없고 사량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乃至라는 것은 이 긴 설법 가운데에서 이 사구게에 이르러서(노래로 된 네 글귀)만이라도 라는 뜻이며 等이라고 한 것은 총괄적으로 싸서 한 말씀인 것이다.
說誼:福德性者는 離能所絶是非하며 泯存亡無得失하여 眞淨無漏者가 是라 如是福德은 等空難量하며 絶對無倫하여 不應以多少待對之言稱之이니 今則反是로 只可說名爲多하나 不應以無量無邊稱之이니라 若能持經悟理하여 行無往行하면 則所作이 出於無心하여 行行이 一一淸淨하니라 所感福德이 宜其眞淨無漏하여 而終無有極也니라 故로 前에 讚云하되 若菩薩이 不住相布施하면 其福德은 不可思量이니라
설의:福德性이란 상대적인 주객(能所)을 여의고 是非가 끊어지며 삶과 죽음도 없고 얻고 잃음도 없어 참으로 깨끗하여 샘이 없는 것이 이것이니라.
이 같은 복덕은 허공과 같아서 헤아리기 어려우며 상대(待對)가 끊어져 가릴 것이 없어 마땅히 많고 적고 상대적인 말로서 일컫지 못하니, 지금 이와 반대로 다만 많다고 설할지언정 마땅히 한량없고 끝이 없으므로 일컫지 못하는 것이니라. 만약 능히 경을 받아 지녀서 도리를 깨달아 집착 없는 행을 행하면 곧 그 지음이 무심에서 나와 행하는 것마다 낱낱이 청정하니라.
얻은 느낌(感)의 복덕이 마땅히 참으로 깨끗하고 샘이 없어서 마침내 다함이 없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앞에서 찬탄하여 이르되 만약 보살이 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헤아릴 수가 없다 하시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