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의 작사자는 왜 미상인가? (2)
(전호애서 계속)4
정광현 교수의 <애국가의 유래> ----- 전 서울대법대 교수였던 정교수가 1955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 낸 진정서 중의 일부를 소개한다.
1955년에 국사편찬위원회(국편위)는 역사계의 권위자들에게 현행 애국가 작사자 자료를 제시하고 위원회를 소집했다. 정광현 교수는 자신이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자료를 조사한 결과,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자임이 분명한 것을 찾아내어, 그 자료와 진정서와 좌옹의 친필 애국가를 제시했으나 진위 여부를 따지다가 채택이 되지 않자, 이에 대한 진정서를 또 냈다. 국편위는 애국가 작사자 후보로 민영환, 안창호, 김인식, 최병헌, 윤치호 등을 세우고 위원회를 열었으나 윤치호 작 찬성이 11표, 부표가 2표였는데, 2명의 반대표 때문에 무산시켜 버렸다. 좌옹의 사위이기도 한 정교수는 1945년에 좌옹에게서 직접 받았던 애국가 친필을 국편위에 제출했다가 채택되지 않자, 미국에 있는 큰아들 정태웅 씨에게 보관하게 했다. 그 후 아들은 1977년에 좌옹의 모교인 에모리대학에 그 친필의 애국가 가사를 기증하였다. 단, 대한민국이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임을 공인할 때 대한민국에 돌려 준다는 조건을 달아 두었다.
정교수가 애국가 친필을 증거로 제시할 때, 1907년 그가 세운 한영서원에서 부르던 <찬미가>도 함께 제시했다면, 틀림없이 역편위에서 통과되었을 것이라고 역편위원인 김연갑 선생은 아쉬워 했다.
김선풍 교수의 <애국가 연구> ----- 중앙대 김선풍교수는 “국가 혹은 애국가는 민족의 심금에 공명을 얻고 정서적 공감대 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국가란 민족의 노래이므로 그 민족의 이상과 꿈을 노래 속에 그림처럼 펼처 보여야 할 것이며, 민족 정신이 담겨 있어서 힘과 용기를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애국가를 작사하고, 스코트랜드 민요곡 ‘올드랭싸인’에 붙여서 불렀다는 증언을 한 신영순(당시 한영서원 학생), 정광현, 백종섭, 주영환, 최규남, 백낙준, 김동성, 최남선 등의 예화를 들었다. 105인 사건 당시, 식민지 경찰이 좌옹이 설립한 한영서원에서 불순 책자를 몰수하였고, 이에 연루되어 체포된 신영순의 재판기록이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조서에 윤치호 자신이 작사한 애국가가 들어 있는 <찬미가>등을 몰수 당한 것이다. 따라서 민영환, 안창호, 김인식, 최병헌, 윤치호 등의 작사설 중에서, 1907년에 간행된 <찬미가>에 나온 윤치호의 작사 애국가가 가장 유력한 증거로서 확립된 것이다.
김갑연 선생의 <애국가 작사자 연구>
----- 김갑연 선생은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이다”라고 주장을 하였다. 1955년 문교부와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는 최종회의에서 11:2라는 표결로 윤치호가 작사자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만장일치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합작설로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여기서는 당시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정서가 반영된 것으로 본다. 이 결과 애국가 작사자는 미상이거나 윤치호 + 안창호 합작설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 이후 기독교 계통에서는 윤치호 작으로, 흥사단 계통에서는 안칭호 작으로 주장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 국가인 ‘애국가’는 1907년에 윤치호에 의하여 작사 되어 1908년에 재판된 <찬미가>에 수록되었다. 한영서원과 대성학교 학생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보급이 되어 3.1운동 현장에서 불려저서 ‘역사작인 노래’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현 애국가는 “1907년 윤치호 작사, 1935년 안익태 작곡” 이라고 표기 되어야 한다.
이 노래는 1940년에 애국가로 준용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애국가로 정식 공인을 받았다.
주요한의 <안도산전서(1963)>
----- 본래 애국가 가사의 첫 절이 “성자 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 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라고 되어 있었는데,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하루는 서울에서 내려 온 윤치호 교장을 보고 이 가사가 적당치 않으니 고처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 청하자 윤치호가 도산의 생각을 물었고, 도산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라는 구절을 보여 주자 윤치호가 기뻐하면서 찬성을 표시하자, 도산이 이를 교장인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하여 전국적으로 퍼저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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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에서 계속)5
1999년 연세대 매거진 <계간; 진리, 자유>제 36호 (겨울호) ----- 좌옹 윤치호 문화사업회 이사이며 윤씨 가문의 일원인 윤경남 씨는 “애국가 작사자의 진실”이란 제목으로 9쪽에 달하는 장문의 글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윤경남씨는 애국가 작사에 관한 역사적 고증을 많이 예시하였고, 윤치호 작사임을 입증하는 내용을 강조하였다.
2014년 1월 27일 ----- 더민주당 안민석 의원이 에모리대학을 방문하여 윤치호 친필본을 열람 하러 떠나면서 남긴 말이 있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위원장 최남선은 변절자다. 윤치호 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우겨 댔던 것을 잘 안다. 또한 위원 상당수가 친일파였다. 그 친일파들이 국사를 편찬하다니 얼마나 개탄스러운가. 그 분들이 친필본을 놓고 진위여부를 가릴 수 없다하여 작사미상이라는 꼬리를 달아 놓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국민 모두는 독립지사인 안창호 선생이 진짜 작사자라는 주장을 사실로 받아 드리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 분에게는 친일파 여부의 시비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애국가 작사자를 가리기 위해 사실 여부보다는 친일이냐 아니냐에 더 초점을 두고 떠들다가 결정을 내지 못하고 문을 닫은 것이 1955년의 회의였다. 참으로 감정 에 치우치고, 파벌적인 욕심으로 역사의 사실을 감싸려던 ,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14년 7월 12일 -----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란 방송에서 는 김연갑 선생과 혜문스님 (문화재 제자리찾기운동대표)간의 언쟁에서도 그랬다. 애국가 친필본의 주장이 핵심인데도 , 이야기는 본질을 비켜 놓고, 윤치호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한편, 안창호만이 애국지사라고 국민감정에 호소하는 이야기로 이끌어 갔다. 결국 이야기는 윤치호 매도로 끝이 난 것이다. 이렇게 편파의식으로 언론을 유도하는 가운데에서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겠는가?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와 친일행위는 아주 다른 시대에 발생한 행위이다. 이를 동일시한다면 역사의 진실한 규명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
2014년 7월 15일 ----- 1955년 당시 경향신문 및 동아일보에 게재되였던 기사를, ‘문화재 제자리 찾기 대표’인 헤문스님이 다시 확인 기사를 발표하였다. 주요한 씨는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주장을 하던, 흥사단 활동의 중요 인물이었는데, 이를 번복하고 안창호의 작사설은 다만 신화적일 뿐이라고 안창호의 작사설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주요한박사는 애국가는 윤치호의 작품이라고, 자기의 뜻을 번복인정한 것이다.
2015년 8월 15일 ----- 연세대학교 사학과 출신인 신동립씨가 “애국가 작사자의 비밀”이라는 270쪽의 두툼한 책을 발행하였다. 역사적인 고증을 총동원한 책이다. 여기에 담겨진 쓴 몇 마디.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남기고 윤치호는 애국가를 남긴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 했다.” 이는 언론인 김을한이 1955년 애국가 작사자 조사 미상 결정을 비난이나 하듯 연합신문 1959년 11월 27일자 ‘애국가만으로 도 할 일을 다하였다’에서 강조한 말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를 미상으로 처리한 배경에는 (이승만)대통령이 윤치호 작사로 밝혀지면 친일을 험 삼아 애국가를 고치자고 할 터이니 그대로 미상으로 하라고 했다는 미당 서정주의 주장과도 일치하는 내용이다. 당시 문교부 장관의 발언을 뒤로하고, 국사편찬위원회를 거수기로 만든 절대 권력의 존재이다. 짐작 되듯이 이승만 대통령의 영향력이 있었을 것이란 추정이다. 실로 이승만 박사는 안창호와도 라이벌이었고, 반일 운동에 앞장을 섰던 분이니 그러한 입김이 있었을 법도 하다.
2016년 3월 12일 ----- 윤치호 문화사업회 이사인 윤경남 여사의 부군이신 민석홍 장노께서는 캐나다의 한국일보에 2회에 걸처 < 검증된 자료로 사실 밝혀야> 란 제목으로 “애국가 작사자 규명토론회”에 강력한 제언내용을 실었다. 그는 정부와 국사편찬위원회에 부탁하는 말로
“애국지사를 찬양하고 친일협력자를 비판하는 사업이 아니고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사업이므로, 여론몰이에 휘둘리지 말고 검증된 자료에 근거해서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임을 공인해야 한다” 라는 말로 글을 맺었다.
(5) 맺는 말
이제 필자의 의견을 말하여야겠다. 진실로 우리 역사속에서 수난시대의 역사를 판단할려면, 감정에 치우처서 아니 되고, 자기쪽을 내 세우려는편파적 자세여서도 아니 된다. 시대성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고찰하여야 하며, 확실한 증거주의에 입각해서만 판단하여야 한다.
토론토에 흥사단 지부를 유치한 필자이기에 , 도산 선생님의 귀하신 업적에 한 치라도 누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아니 된다. 애국가 작사 문제를 놓고, 마치 편가르기 같은 인상을 남기며,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존함이 왈가 왈부 되는 것은 그 분을 섬기는 후예들에게 거룩한 일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이 된다. 도산께서 비록 윤치호 선생님에게 애국가 작사에 도움을 주셨다 하드라도 도산 선생님은 자기의 이름을 빼라고 하셨을 분이다. 좌옹 윤치호 선생님과 도산 안창호 선생님 간의 선후배적 인간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돈독하시었다. ‘안창호’라는 이름 남기려고 후예들이 입씨름 하는 모습을 구천에서라도 들으신다면 심기가 심히 불편하실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더 이상 지체 말고 애국가 작사자로 윤치호 선생님을 결정해 줄 것을 촉구해 마지 않는다.
1955년 이래로 61년간이나 이 문제를 해결치 못하고 ‘미상’이라고 방치해 두었다는 것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며,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창조해 나가는후손들에게도 떳떳치 못한 일이다.
2016
3 24 강신봉
<현 (캐나다)역사교육원장, 토론토흥사단 창립 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