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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19. 주일설교요약
본문▶ 시편 136편 23절~26절
제목▶ 감사는 명령이다.
오늘은 특별히 교회가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의미 있는 주일입니다.
이미 여러분이 잘 아시겠지만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성경에서 출발을 하게 되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첫 열매를 거둘 때에 드려지는 감사가 있고,
마지막 추수가 끝날 때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감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유대인들에게 있어 좋은 점은,
그들은 몸과 마음에 감사가 습관화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추수감사절은,
1620년에 102명의 청교도인들이
메이플라워호라는 배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의 미국이라는 나라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해 겨울을 넘기면서 절반의 인구가 사망하게 됩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인디안의 도움을 받아서
옥수수와 밀 경작법등을 도움 받아 농작물을 재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자신들이 피 땀 흘려
재배한 농작물을 수확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추수감사절은 이렇게 시작 되었습니다.
오늘 시편 136편을 읽어 드렸는데
지금도 히브리 사람들은 시편 136편을
감사절이 되어지면 낭송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에 말씀 드릴 것은 세가지인데
감사절기마다 이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첫 번째는, 근본적인 감사입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나온 사람들이 드렸던 감사와
유대인이나 히브리 사람들이 드렸던
감사 중 가장 큰 감사가 무엇이었냐면
바로 근본적인 감사였습니다.
신앙을 회복 할 수 있도록
도우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한 것도 있지만
그리고 이렇게 곡식을 거둘 수 있게
지켜 주신 은혜에 감사한 마음도 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것에 대한
근본적인 감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라는 말이
히브리말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냐하면?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
또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
그런 의미의 단어로 쓰여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천한 가운데에”있는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에
근본적 감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근본적인 감사가 있어야
나머지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생명 주신 분이 부모잖아요?
거기서부터 부모에 대한 공경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근본적 감사는,
내 형편이 어떠하든지, 내 환경이 어떠하든지
이런 것과 상관없이
나를 자녀 삼아 주신 것에 대한
근본적인 감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가 그러잖아요?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어도
우리에 양떼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어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리로다”
우리의 감사는 근본적인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 마음에 진정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이라고 해서
거두어들인 열매를 두고 감사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근본적인 감사가
먼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에 근본적 감사가 없다고 하면
나머지 감사가 진정성이 떨어지게 됩니다.
근본적 감사가 있어야지만
성경에 나오는 “범사에 대한 감사의 고백”
그 감사의 고백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범사에 감사”라는 말을 우리가 자주 사용해서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평범하고 쉬워 보이지만
이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보통 영성을 가지고 있는게 아닙니다.
깊은 영성의 내공의 없는 사람이라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듭니다.
여러분 인생을 한번 돌아보세요.
인생에는 ‘희노애락’이 있자나요.
기쁜 일이 있으면 슬픈 일이 있고
뭔가 잘 되는 날이 있으면
뭔가 잘 풀리지 않는 날이 있고
내가 기분이 좋을 때 감사하는 것 쉽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기분이 좋지 않거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쳐왔을 때
감사하는 것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범사의 감사가
어디에서 시작 되어지는 것이냐?
바로 근본적인 감사에서 시작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추수 감사절의 의미 중에 하나는
일 년을 마무리 하면서 한 해를 돌아보는 의미도 있습니다.
일 년 동안 우리 인생 가운데 범사에 감사한 마음이 있었는지
범사에 감사함이 없다면 근본적인 감사가
내 삶에서 흔들리고 있는지를 체크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근본적 감사는 우리 인생을 살찌우게 만들고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메이플라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청교도인들이 처음 드렸던 추수 감사절의 감사함은
수확물을 거둘 수 있게 하심에 감사함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자녀 삼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여러분 ‘생각하다’라는 단어인 "Think"와
‘감사하다’의 단어인 “Thank”는
같은 어원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생각을 해보면 감사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수확물을 놓고 감사한 것은
그 열매가 그냥 거두어들인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두어들인 열매이기에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인생이 어려울 때마다
상황과 환경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나를 택하시고
나를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풀부불에 들어간 다니엘의 세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뱃느고의 이야기를 너무나 잘알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시면 좋겠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고백이 늘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바벨론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신 은혜에
근본적인 감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은 웅덩이와 수렁 속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받고 싶은 고백은
“우리를 건져 주세요” 이게 아닙니다.
설사 내가 이 웅덩이와 수렁 속에서
빠져 나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주님은 나를 다스리는 왕이시며,
또한 나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라는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광야에서 불평불만을 늘어 놓자나요
그런 이스라엘에게 무엇이라 말을 하십니까?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니라”
애굽에서 꺼내어 준 것만으로도
그들의 입술에 감사가 넘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게 해준 것만으로도
너희는 춤을 주며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먹을 것 없다고 불평하고
마실 물 없다고 불평하고
애굽에서 먹던 것 손에 쥐어주지 않는다고
불평, 불만 하니까 하나님이 슬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까와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니라”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깨우쳐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광야의 생활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인생의 광야훈련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집회에 가서 어느 목사님에게 큰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사례비를 80만원을 받는다고 해요.
여러분 4식구가 사례비 80만원으로 산다는 것이
솔직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런데 밥을 먹으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하시느냐?
물론 자신의 삶이 힘들고 어렵긴 하지만
자신의 마음은 늘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가 그렇게 기쁘세요?” 물어봤더니
“비천한 가운데 있는 자신을 목사로 삼아주시고
이렇게 주의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신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신앙 고백을 하시더라구요.
여러분 근본적인 감사가 없으면
이런 감사가 나오지 않을 뿐만 아이라
우리 입술에서 불평과 불만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번 추수 감사절을 맞이하여
‘내 삶에 근본적인 감사를 잊고 살지는 않았나?’
자신을 돌아보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두 번째로는, 드리는 감사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가끔 하자나요?
사람은요! 받고자 하는 것이 너무나 강하면
그 삶은 너무나 불행해 진다고요. 행복하지 않다고요.
여러분 드리는 사람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는
드려본 사람만 알아요.
강단에 이 꽃을 하기 위해
어떤 권사님에게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추수감사절이고 하니
한번은 새로운 분위기도 좋겠다 싶어서
감동 주시는대로 하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연찮게 교회를 들어오다가
꽃꽂이를 하고 돌아가시는 권사님을 만난거예요.
그래서 “힘드셨겠어요?”라고 물으니까
너무 좋대요! 너무 행복하대요!
왜 그럴까요?
자기 돈 써서? 자기 시간 써서?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어제 강단을 꾸미신 분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풍족한 분도 아니셨어요.
예를 들어, 앞에 있는 과일을 그분에게 이만큼 싸줬어요.
그러면 이거 받고 돌아가는게 기쁠까요?
이렇게 강단을 꾸미고 돌아가는 발걸음이 기쁠까요?
사람의 행복은요.
받는 행복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는 행복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진짜 행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 할 때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절을 통하여서 주님께 드리는
그런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받기만 하는 사람은요
‘밑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받고자만 하는 사람은 열 번 주다가 한번 안주자나요?
열 번 준거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그 한번 때문에 섭섭해 해요.
여러분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자나요
그중에 아홉은 돌아가고 한명이 돌아옵니다.
돌아간 사람은 전부다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돌아온 사람은 사람 취급도 안했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걸 생각해 보셔야 해요. 9가지! 1가지!
은혜를 받았던 사람! 은혜를 잘 못 받은 사람!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받는 것에 익숙했어요.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못 받았거든요.
그런데 한번 받으니까 너무나 감격이 큰거예요.
여러분 원래는 아홉 번 받은 사람이 더 감사해야 해요.
그런데 늘 받던 사람은 한 가지만 못 받으면,
아홉 번 받은 것은 아무런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한 번 못 받은 것 때문에 섭섭해 하고 서운해 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이 한번 받은 것 때문에
그냥 돌아갈 수 없는 것이죠.
예수님 발 앞에 와서
깊은 감사의 표시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생활도 똑같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드리고자 하고
성도를 위해서 드리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충만한 사람은요
훨씬 상처를 덜 받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통해 뭔가를 받고자 하고
목사님을 통해 뭔가를 받고자 하고
성도를 통해 뭔가를 받고자 하면
상처 받고 시험 들 확률이 엄청나게 높습니다.
하지만 주고자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거죠.
내가 더 주지 못한 것 때문에 안타까움이 있고
내가 더 주지 못한 것 때문에 내 부족함이 보이고
그래서 시험 들 확률이 적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이해서
어떤 영성을 회복해야 하냐면?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전환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 바라기 보다는
내가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가 주님께 무엇을 바라기 보다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나 발상의 전환이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이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은 그동안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가 드리는 훈련을 하는 것이거든요.
여러분 우리가 나이가 들어 성장하게 되면,
내가 부모에게 무엇을 받기 보다는
내가 부모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강해집니다.
그게 성장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성장한다면 내가 받은 사랑을
하나님께 내어 드릴 수 있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이번 추수절을 통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할 게 없는가?
그리고 교회를 위해 할 것이 없는가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나누는 감사입니다.
히브리 사람에게는 참 좋은게 있습니다.
그들은 수확을 하면 10분의 1은 하나님께 드려요.
그리고 그들은요. 10분의 1은 가난한 사람을 도와줍니다.
그리고 자기 땅에 추수할 것이 있는 사람은
나무의 열매를 절대 따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세요.
집에서 감이 썩어나가고, 포도가 썩어나가도
반드시 나무에 달려 있는 과일을 따갑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의 집에
과일이 하나라도 냉장고에 들어 있다면
나무에 달린 과일을 절대 따가지 않습니다.
포도 한 송이도 없는 사람
감이 집에 하나도 없는 사람이 따가도록
과일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수확물의 10분의 1을
일부러 수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아나 과부나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가져가서 생계를 유지하도록 말입니다.
청교도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거두어들인 첫 수확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인디언에게 자신의 수확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신대륙에 정착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추수감사절을 통해서
우리는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인근에 교회를 보더라도
추수 감사절에 들어오는 금액을 모두를
힘들고 어려운 이웃에게 사용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바로 근방에 있는 광염교회가 그런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는 아직 재정 자립도가 그 정도가 되지 않아서
추수감사절에 들어온 금액의 10분의 1이라도
힘들고 어려운 이웃에게 사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년 전에는 한 개당 3만원씩 하는
1인용 온수매트 100장을 구입해서 나누어 드렸고,
작년에는 300만원어치의 연탄을 사서
힘들고 어려운 분들에게 나눠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절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감사가 있어야 하는 절기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할까 합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의 신앙에는
근본적인 감사가 넘쳐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리는 감사가 넘쳐나야 하는 것이며
또한 나누는 감사가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를 내 안에 고이게 하지 말고
흘려보낼 줄 아는 그런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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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를 구원하시고 받은 은혜 감사하며 이제부터라도 주님께 드리고 받은 은혜와 사랑을 나누고 전하며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랑은 나누고 전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 가슴에 울림을 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