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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는, 제주도 고산리에서 발견된 “고토기”입니다. 양평에 있는 그릇도매 상가를 가보면, 그릇의 종류들이 꽤 많습니다. 간략하게 종류들을 분류하면, 알미늄 그릇, 스테인리스 그릇, 플라스틱 그릇, 양은 그릇, 유리 그릇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릇의 종류가 많은 것은, 그 사용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를 테면,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는, “주발, 대접, 쟁반, 병, 찬합” 등이 있고, 음식을 만들 때 쓰는 그릇으로는, “솥, 냄비, 프라이팬, 시루” 등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바구니, 광주리, 함지” 등 그 쓰임새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한때, 대하드라마로 방영되었던 박경리씨의 “토지”에는, 고유의 그릇들이 소개됩니다. “사기로 만든 사발그릇”도 나오고, “놋으로 만든 주발”도 나옵니다. 그리고, 이보다 작은 “종발”도 나오고, 그 외로, “반병두리”와 “놋쇠로 만든 여자 밥그릇인 바리”도 나옵니다. 이것만 봐도, 우리의 조상들은, 그릇 하나도 세세하게, 그 용도와 사용하는 자에 따라, 명칭과 용도를 구분하여 사용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당시대에 사용되던 그릇을, 네 가지로 구분해서 소개합니다. 어떤 그릇입니까? “금 그릇, 은 그릇, 질 그릇, 나무 그릇”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릇 중에는, 귀하게 사용되는 것도 있고, 천하게 사용되는 것도 있습니다. 이 중, 어떤 그릇이 귀하게 쓰이고, 어떤 그릇이 천하게 쓰이겠습니까? 선뜻, 생각하면, 금 그릇이 귀하게 쓰이고, 질그릇이나 나무 그릇이 천하게 쓰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대답은 다릅니다. 그 이하를 보시면, “깨끗한 그릇이 귀하게 쓰인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딤후 1장에서, “오네시보로”를 축복합니다. 그 이름은, 당시 노예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입니다. 이렇게, 초라한 자에게 바울은, 두 번이나 축복기도를 합니다. 처음에는 그의 집을 축복하였고, 두 번째는 그 자신을 축복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그가 사도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일에, “자주, 부지런히, 많이” 행하였고, 또, 바울을 위함으로 선교에, 힘껏 봉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몬 1장에서는, “오네시모”가 나옵니다. 둘다 이름이 비슷하지만,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다가 도망친 종입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바울을 만난 뒤로 기독교인이 됨으로, “감옥에서 낳은 아들”이 되었고, 과거 빌레몬에는 무익한 자였으나, 현재는, 바울의 선교에 유익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골 4장을 보시면,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라고 합니다. 그 외, 대상 4장의 “야베스”는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 생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형편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가 귀한 자가 되길 원합니다. 여러분 중에, 천한 자가 되길 원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이 아니어도, 과거에 귀한 자리에 있었으면, 그것이라도 내세우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다윗이 어린 시절, 목동으로 있을 때는, 아버지에게조차 잊혀진 자였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을 방문했을 때,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라고 묻자, 그제야, 생각 난 듯, “아직 막내가 있지만, 양을 지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던 다윗이, 집 안에서는 물론이고, 이스라엘에서, 존귀한 자가 되었고, 훗날, 메시야로 오시는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이것이, 그 답입니다.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겁니다. 우리가 깨끗해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깨끗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깨끗해 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귀한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직분을 받을 때, “직분을 받았다”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길 원하신다”라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여러분의 생각과 가깝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면, “오네시보로, 오네시모, 야베스, 다윗”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올 한 해,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 얼마만큼 쓰임 받는 교회가 되었습니까?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려면,
본문 20절을 보시면,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쓰임을 받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주인과 그릇에 비유합니다. 이는, 토기장이와 진흙 비유를 연상케 합니다. 이러한 비유는, 창조과정에 근거를 두며, 또, 사 64: 8에 근거를 둡니다. 여기를 보시면,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라며, 이사야 선지자가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롬 9: 20 – 21을 보시면,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라며,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여러분, 어떤 집이든, 싱크대가 있는 주방을 보면, 여러 그릇들이 진열되어있습니다. 거기에, 진열된 그릇들은, 쓰임새에 따라, 모양이나 재료들이 제각기 다릅니다. 그래서, 귀한 손님이 왔을 때만, 내 놓는 것도 있고, 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렇게, 가정에서 사용하는 그릇도 저마다, 그 쓰임새가 다른 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성도들의 쓰임이 같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에는 여러 직분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직분의 쓰임에 대해, 본문에서는 그릇으로 비유했지만, 다른 곳에서는, 우리 몸의 각 지체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이와 다릅니다. 성경의 기록과 전혀 다른 생각을 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생각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생각에 맞추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탈북자의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탈북을 해서, 중국의 어느 집을 가보니, 개가 도자기로 만든 그릇으로, 하얀 쌀밥을 먹더랍니다. 이를 보면서, 북한에서는, 개밥그릇도 저렇게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번 주간에는, 교회에서 김장을 할 텐데, 예로부터, 김장한 김치는 질그릇에 담았습니다. 금그릇이 좋다고 금그릇에 담지 않았습니다. 제 맛을 내기 위해, 질그릇에 담았습니다. 왕의 수라상에서, 음식에 독이 있는 지를 살필 때, 금수저로 확인하지 않고, 은수저로 확인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에게 맞는 직분을 주십니다. 롬 12: 6 - 8을 보시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또, 엡 4: 11 - 12을 보시면,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분에 대해 욕심을 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욕구에 맞지 않으면, 교회를 험담하거나 담임 목사님을 비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직분을 주실 때는, 반드시, 그 직분에 대한 행위를, 요구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행위가 뭡니까? “충성”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왕위를 허락한 뒤에,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다윗에게 왕위를 주신 뒤에,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지 못한 사울은, 왕위에서 폐위되었으나, 다윗은 그의 후손까지 왕위를 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사울 왕이 되길 원합니까? 다윗 왕이 되길 원합니까? 그러나, 사울 왕이 되는 직분자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충성”입니다. 우리가 어떤 직분을 받았든, 그 직분에 대해, 최선을 다함으로,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마 25: 22 – 23을 보시면,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올 한 해를 보내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직분에 대해, 얼마만큼 최선을 다했습니까?
본문 21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합니다. 성도가 귀히 쓰임받는 조건은, 능력이 아니라, 깨끗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쓰겠습니까? 천하게 쓰겠습니까? 이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윤리입니까? 우리의 능력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경험입니까? 답을 엉뚱한 곳에서 찾지 마세요. 본문에서 찾으세요.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결정을, 우리의 뜻, 우리의 결정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중심이, 아직까지, 하나님께 있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끗케 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비우는 겁니다. 조성모씨의 “가시나무 새”의 가사를 보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귀하게 쓰일려면,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우리의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야 합니다. 10년, 20년, 평생을 교회 다녔으면서도, 나사렛 예수와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없다면, 그의 신앙이 올바른 겁니까? 사람도 자꾸 만나면, 미운 정, 고운 정, 모두 쌓입니다. 그런데, 평생을 믿었다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할 말이 없다면, 예수를 믿은 것이 맞습니까?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두어야 합니다. 본문을 다시 보시면, 바울은, “이런 것”에서 깨끗게 하라고 합니다. “이런 것”이 뭡니까? 위의 16절을 보시면,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고 합니다. 이는, 15절에서 말하는, “오직 진리의 말씀 안에 거하라”는 겁니다. 또, 19절을 보시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라고 합니다. 시 119: 9을 보시면,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청년”을, “성도”로 바꾸어서 읽겠습니다. “성도가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또,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읽어보세요. 어떻게 해야 깨끗한 겁니까? 우리는 주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문자적으로, 비유적으로, 신비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단과 거짓 교훈에 유혹당하지 않고, 주의 말씀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빌 4: 8 – 9을 보시면,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합니다. 또, 약 4: 8을 보시면,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합니다. 다윗은,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실수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 전체를 볼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복 받길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형통의 길로 인도하시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다윗이 평생을 걸었던, 그 외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그 분의 뜻을 위해 쓸 사람을 찾고 계신다면, “주님, 저를 써 주십시오”, “주님, 저희 가족을 써 주십시오”, “주님, 저희 신목 교회를 써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까? 사 6: 8을 보시면,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며, 이사야는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지, 잘 아십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 묻지 않고, 우리를 부르고, 우리를 그의 종으로 사용하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가 사해졌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며, 나사렛 예수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나사렛 예수가 나를 위해 부활하셨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지난 과오를,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도, 은혜를 입으면, 그에 대해, 감사함을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지옥의 안방에 있어야 할 영혼이지만, 천국의 잔치에 참여하는 영혼이 되었습니다. 이 보다 더 감사한 일이, 우리의 생애에서 더 있겠습니까? 우리의 생활 속에 감사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우리 자신을 담그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고는, 우리를 깨끗하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 앞에서 깨끗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더욱 귀하게 쓰임 받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2절을 보시면,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고 합니다. 신앙으로 하나가 되어, 함께 할 때, 하나님께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은, “함께 하며, 협력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마치, 중풍병자를 위해, 친구들이 그를 메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으로 그를 내린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개인주의가 강조되면서, 신앙생활도 개인주의가 되어갑니다.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사라지고, 모여서 찬송하는 것이 사라졌습니다. 오직, 개인입니다.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의 신앙은, 함께 모여 기도하고, 함께 모여 찬송하고, 함께 모여 전도하고, 함께 모여 봉사하며, 주를 위해 충성해야 합니다. 행 4: 32을 보시면,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마음과 뜻을 함께 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여기서의 “한 마음”이란,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하나되어, 뜻과 사상이 일치했다”는 겁니다. 즉, 신앙으로 하나의 동질성을 회복했다는 겁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유대교는, 400년의 세월 속에서, 구약에서부터 이어지는, 12지파의식이 희미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족보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희미해지는 가운데, 새로운 형태가 생겨났습니다. 그것이, 사두개파, 바리새파, 엣세네파, 열심당입니다. 이러한 계파가 생겨나면서, 그들은 서로가 자신들의 교리를 주장했고, 자신들의 계파가 우월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사도들을 중심으로 하나가 된 기독교는, 제자들과 사도들이 하나가 되었고,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자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곧,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행 2: 46 – 47을 보시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합니다. 이들은,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던 겁니다. 그들의 구심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본문을 다시 보시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라고 합니다. 혼자, 깨끗함과 거룩을 추구하지 말고, 주를 위해 충성하는 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라는 겁니다. 성도들의 무리를 가리켜, “신앙 공동체” 또는, “믿음 공동체”라고 합니다. “친목회”나 다른 목적을 중심으로 모인 단체를 가리켜, “신앙 공동체”, “믿음 공동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신앙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함께, 신앙의 성숙과 성장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는, 1: 1단독으로 서게 됩니다.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 자녀가 아무리 잘 믿어도, 그의 믿음으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내가 아무리 잘 믿어도, 내 믿음으로 내 가족이 서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심판대에서의 심사는,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또, 무엇을 중심으로 살았는지 심사도 하지만, 또 하나,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자세도 심사합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함께 한다는 것은, 교우들과도 함께 하는 것이고,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다른 단체나 교회를, 주의 이름으로 돕는 것도 함께 하는 겁니다. 빌 4: 3을 보시면,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고 합니다. 또, 요삼 1: 8을 보시면,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림으로, 이 시대에,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는 하나님 나라의 일군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