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묘지공원(忘憂墓地公園)을 다녀와서!
2018년2월11일 인터넷 카페 "5060아름다운사람들" 걷기동호회에서 47~54년
생들의 연합띠방 모임을 겸하여 걷기장소로 정한 망우묘지공원을 가기위해
오전 08:20분 집에서 출발 양주역의 전철을 통해 상봉역에 도착하니 10:30분
12명의 회원들이 모여 버스를 타고가다 구리시 묘지공원 입구에 내려서
버팀목님 안내로 망우묘지공원길을 걸으며 만고풍상(萬古風霜)
비바람의 세월이 앗아간 인명의 육신은 사라지듯 간 곳이 없고 유택
(幽宅)인 볼품없는봉분(封墳)과 작은 비석(碑石)에 가신님들이 남기고
간 정신사적(精神史的) 사상을 몇 줄 세겨놓은 유산(遺産)뿐이었습니다.
일반인들의 묘역과 일제36년동안 조국광복을 위헤 필사적(必死的)으로
저항(抵抗)했던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의 묘역(墓域)을 지나 공원입구로
원점회귀(原點回歸)하여 인근 교문리동 쇠고기를 무한리필 한다는 어느
식당에 가서 점심을 겸한 뒷풀이를 마치고 노래방에 가서 여흥을
즐기다가 집에돌아오니 밤 20:15분이었습니다...
망우산묘지공원(忘憂山墓地公園)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망우산에 있는 공원묘지
개설
망우 묘지 공원은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과 서울특별시 중랑구에 걸쳐 있는
망우산에 조성된 공원묘지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3년부터 조성되기 시작
하였으며, 망우리 공동묘지라고 불렸다.
설립 목적
망우 묘지 공원이 처음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33년부터이다. 당시 묘지
조성의 목적은 늘어나는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의 택지 보급을 위해 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의 공동 묘지를 없애고 새로운 대체 묘지를 조성
하는 것에 있었다. 1973년까지 사망자 유해를 안장할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명칭 유래
망우(忘憂)라는 지명은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있다. 태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 사직을 마련한 후, 선왕들의 능지를 정하기 위해 대신들과 함께
현재의 동구릉을 답사하였다. 하지만 선왕의 능지보다는 대왕의 신후지지
(身後支地)로 적합하다는 무학 대사의 권고로 태조 자신의 능지로 정하고,
기쁜 마음으로 환궁하던 중 지금의 망우 고개 위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이 보았던 능지를 바라보니 과연 명당이라 "아아, 이것으로
오랫동안 근심을 잊을 수 있게 되었노라."라고 하여 ‘망우’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변천
망우 묘지 공원은 일제가 1933년 경성 부립 묘지로 조성한 이후 1966년 당시
4만 7,754기의 분묘가 들어찰 정도로 확대되었다. 1973년에 더이상의 분묘
사용을 금지함으로써 공동묘지로서 수명을 마쳤다. 1997년부터 시작된 공원화
사업을 통해 주민 친화적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계속된 묘지 이장으로 인해
2015년 현재 7,988기의 묘소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묘역 역사 탐방'은 장년 위주로 진행하던 장사 문화 체험을 청소년층과 일반
인을 대상으로 확대해 청소년에게는 최근 급증하고 있는 자살 예방 등 생명
존중과 올바른 인생관을, 일반인에게는 자신의 삶을 재정립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마련됐다. 또한 이는 과거 혐오 시설로 여겨지던 장사(葬事) 시설을 일상
생활에 꼭 필요한 도심 속 친근한 근린 시설로 바라볼 수 있는 인식 전환을 목적
으로 하고 있기도 하다. 망우 묘지 공원 중간 중간에는 자연이 만들어 준 포토
존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저명인사 묘역 도착 시 묘역 투어 스탬프 날인,
죽기 전에 꼭하고 싶은 일 다섯 가지가 담긴 1년 후 나에게 쓰는 엽서, 세상에서
가장 느린 우체통, 위시 보드 작성 코스를 다 돌았을 경우 역사 탐방 인증서가
수여되는 이벤트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또, 시립 자연 장지인 수목장과 잔디장의
모형을 돌아보며 미래 지향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장묘 문화를 직접·간접 체험
하고 수목장, 잔디장에 대한 궁금증도 해소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고 있다.
한편 망우리 공원 투어에서는 망우 묘지 공원에 대한 설명과 신청 단체가
선택한 코스를 향토 문화 해설사와 함께 걸으며 저명인사의 약력, 그림, 시,
노래를 통해 주요 활동 및 시대적 삶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현황
망우 묘지 공원은 1997년부터 시작된 공원화 사업을
통해 주민 친화적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망우 묘지 공원은 대한 제국과 일제 강점기 한국의 시인·승려·작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萬海) 한용운, 아동 문화 운동가이자 어린이 교육인·사회 운동가인 소파(小波)
방정환, 3·1 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위창(葦滄) 오세창, 화가 이중섭
등 독립운동가·정치가·학자·시인·소설가 등 유명 인사 23인이 묻혀 묻혀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또한 근대 장사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경기 관광 포털(http://ggtour.or.kr)
망우리 공원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http://cafe.naver.com/mangwoopark)
망우리 시립 공원묘지(http://cafe.daum.net/2424sss)
중랑구청(http://www.jungnang.go.kr)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망우리(忘憂里)고개의 유래(由來)
중랑구 망우동 서울특별시와 구리시와의 경계가 되는 곳에 있는 고개로서,
태조 이성계가 검암산 밑 동구릉의 건원릉 터를 유택으로 정한 후 망우산
고개 위에서 쉬면서 신하들에게 “아아 이제야 근심을 잊게 되었구나(어사
(於斯) 오우망의(吾憂忘矣)).”라고 하였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일설은
태조가 남재(南在)를 대동하고 명당을 찾던 중 동구릉 부근에서 삼혈(三穴)
을 얻었는데 이곳은 이미 남재가 묘 터를 잡아놓은 곳이었다.
태조가 남재에게 다른 곳과 바꿀 것을 제의하였으나 남재는 왕릉예정지에
제가 묻히는 것은 불경이며 후손에게도 중죄가 돌아가게 될 것이므로 불가
하다고 대답하자 태조는 불망기를 써 줄 터이니 증빙을 삼으라 하고 불망기
를 써 준 뒤 근심을 덜게 되었다는 뜻으로 망우리라고 했다 한다.
태조의 능터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로는 무학대사가 양주 회암사로 가기 전에
검암산 아래에 절터를 정하려고 했으나 그날 밤 꿈에 신령이 나타나서 이곳은
아홉 왕릉을 모실 자리라는 계시를 받고 그 자리에 태조를 모시기로 하고 절터
를 단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재 망우리고개는 옛 고개 보다 남쪽에 새로 낸
고갯길이며, 옛 고개의 위치는 중앙선의 망우역과
도농역 사이의 기차 터널 윗길이다.
(서울지명사전, 2009. 2. 13.,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도산 안창호선생의 유허비와 같은 묘비
▼항일애국지사들의 영정과 같은 사진속의 면면들
성주풀이 유지나 노래 1. 낙양성 심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번가면 저기 저 모양이 될터이니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2. 저 건너 잔솔밭에 솔솔기는 저 포수야 저 산비둘기 잡지말라 저 비둘기는 나와 같이 님을 잃고 밤새도록 찾아 헤매노라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
2018-02-12 작성자 상산봉
첫댓글 망우리 공동묘역엔 저명인사, 애국지사, 민족 혼이 숨쉬는곳으로
마음의 다짐 새롭게하는 장 같기도하여 감사하며 고무적인 곳입니다.
다양한 자료 올리심에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시며 기쁨의 나날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