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윤성(安允成)
[생졸년] 1673년(현종 14)~1735년(영조 11) / 향년 62세
[본관] 죽산(竹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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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통덕랑 안공 묘갈명(通德郞安公墓碣銘)
공의 휘는 윤성(允成)이고 자는 군집(君集)으로, 죽산(竹山) 사람이다. 부친 휘 상석(相奭)은 진사이고, 조부 휘 현(絢)은 통덕랑이고, 증조 휘 정섭(廷燮)은 사복시 첨정을 지냈다. 이전에 통덕공이 재주를 품고서 때를 만나지 못해 교하(交河) 월롱산(月籠山) 남쪽에서 늙어갔는데 중간에 상고(喪故)를 겪어 가업이 쇠락해졌다.
공은 고아로서 스스로 수립하여 옛 전지(田地)와 원포(園圃), 산림(山林)과 소택(沼澤)을 모두 회복하였다. 얼마 뒤에 탄식하기를,
“내가 자식이 되어 생전에 봉양하지 못하고, 또 입신양명하여 부모를 드러내지도 못했다. 지금 오로지 제사를 모시고 무덤을 살피는 일만 있을 뿐이니, 여기에 힘을 다하지 않으면 어디에 내 마음을 쏟겠는가.”
하였다.
사계절의 시향(時享)을 예법대로 지냈는데, 제수(祭需)는 반드시 미리 준비하여 군색하지 않았으며 꼼꼼히 갖추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세속에서는 구기(拘忌)로 제사 지내지 않는 집이 많은데, 공은 개연히 말하기를,
“사람이 일생 동안 선조의 제사를 모실 날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고는 혹 전염병이 발생하면 깨끗한 장소로 옮겨 제사 지냈다.
선조의 무덤에 비석 세우는 일을 한 곳도 빠트리지 않고 거행하였지만 그 제도를 준수하여 견고하고 치밀하게 하기를 힘썼다. 또 후사가 없는 방존(旁尊)과 누이들에게까지 이를 미루어 그 정성과 마음을 다하였으니 이처럼 한 것이 40년이었다.
한 석공(石工)이 공의 정성에 감복하여 시종 함께 일하였고, 또 자신의 무리에게 경계하기를,
“이 사람은 효자이니, 절대 수공비(手工費)의 다소를 따지지 말라.”
하였다.
공은 젊었을 때 과거공부에 힘쓰다가 그만두었는데, 항상 말하기를,
“선비가 때를 만나지 못하면 농사에 힘쓸 뿐이다.”
하였다.
집안을 다스림이 검소하고 근면하여 식구 수만큼 농사를 짓고 수입에 따라 지출하였으며, 용도가 넉넉해지자 의(義)로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였다. 고을에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하는 데 공이 실로 그 논의를 주관하였으며 간간이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설행하여 그 예용(禮容)이 볼만하였다.
늙어서는 교유를 사절하고 문을 닫고 들어앉아 자신의 뜻을 지켜 성부(城府)에 발을 들이지 않았고 터럭만큼도 남에게 구하지 않았다.
시세를 따르고 이익에 붙어 구차하게 달려가는 자가 있으면 마치 자신의 몸이 더렵혀질 듯이 멀리하였다.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과는 누대에 걸쳐 한 마을에 살던 교분이 있는데, 그의 지위가 높고 성대했을 때에는 그 집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충민공이 화를 당하자 문객들이 모두 두려워 감히 조문하지 못했는데 공이 가장 먼저 가서 조문하니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공은 사람됨이 방정하고 엄숙하며 독실하고 확고하였다. 평소에 엄연히 범할 수 없는 기색이 있어 자제들이 감히 그 앞에서 함부로 웃지 못했다. 집안이 엄숙하여 소리가 없는 것처럼 조용하였으며 언론이 바르고 준엄하여 선악의 구분에 더욱 엄격하였다. 남과 교유할 때 겉치레로 꾸미지 않았으며 옳지 못한 점을 보면 면전에서 지적하고 용서하지 않았다.
크고 작은 일에 반드시 그 요령을 잡아 말소리와 얼굴빛을 번거로이 할 필요 없이 한마디 말로 즉시 처리하였으며, 비록 어찌해볼 수 없는 패국의 어지러운 일도 공의 손길이 닿으면 어려움이 없는 듯하였으니, 그 재능과 기국이 이러하였다.
아! 오늘날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봉양에는 후하고 근본을 보답하는 데는 소홀하니, 공이 종신토록 행한 것은 부귀한 자들도 참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재능 있는 선비들은 남에게 자랑하여 팔지 않는 자가 적고, 물러나 은거하는 자들은 번번이 쓸모가 부족한데, 공은 이런 재주를 지니고도 남에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으며 산골짜기에서 늙고 죽어 끝내 그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이는 그 속에 필시 남보다 매우 훌륭한 점이 있었을 것인데, 세상에 쓰여지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증조 첨정공이 항상 말하기를,
“‘분수를 지키고 조용하게 생활하고 교제를 삼간다.〔守分居靜愼交〕’는 여섯 글자가 바로 우리 집안의 가법(家法)이다.”
하고, 또한 일찍이《소학》을 준칙으로 삼았는데, 공이 일생동안 수용하여 잃지 않았고 또 이것으로 자식들을 경계하였다고 한다.
공은 을묘년(乙卯年,1735, 영조 11) 윤4월 10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3세였다. 그 이듬해에 양주(楊州) 송랑리(松浪里) 선영 진좌(辰坐)의 언덕에 안장하고, 유인(孺人) 이씨(李氏)를 합장하였다.
이씨는 통덕랑 정설(廷卨)의 딸로, 영릉(英陵 세종)의 별자(別子) 밀성군(密城君) 침(琛)의 후손이다. 공보다 16년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온화하고 유순하여 부녀자의 행실을 갖추었다. 4남 5녀를 두었다. 아들은 종주(宗胄), 종무(宗茂), 종구(宗耈), 종수(宗秀)이고, 사위는 이덕용(李德用), 이경창(李慶昌), 이항(李沆), 민범수(閔範洙)이다. 딸 하나는 시집가기 전에 죽었다. 종무가 와서 명(銘)을 청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정성으로 선조에게 보답하고 / 報先以誠
정도로 집안을 다스렸네 / 理家以正
성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 聖不云乎
이 또한 정사라 하였네 / 是亦爲政
재능 있고 지조 있는 사람을 / 有能有守
누가 그 능력을 펼치게 할까 / 孰使羞行
내가 시대를 위해 개탄하니 / 我爲時嗟
명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 莫曰有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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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통덕랑 안공 묘갈 :
이 글은 안윤성(安允成, 1673~1735)의 묘갈이다. 안윤성의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군집(君集)이다.
[주02] 성인이 …… 하였네 :
《논어》〈위정(爲政)〉에 “《서경》에서 효에 대하여 말하기를, ‘효도하며 형제간에 우애하여 정사(政事)에 베푼다.’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정사를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벼슬자리에서 정사하는 것만이 정사이겠는가.[書云孝乎, 惟孝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爲
政, 奚其爲爲政?]” 하였다.
[주03] 재능 …… 할까 :
《서경》〈홍범(洪範)〉에 “재능이 있고 시행할 수 있는 사람을 그 행함에 나아가게 하면 나라가 창성해질 것이다.[人之有能有
爲, 使羞其行, 而邦其昌.]” 하였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