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 12. 23. 02:25
진천문화원 <문화와 역사>
■병자호란과 이경선(李慶善)
[생졸년] 1600년(선조 33)~1636년(인조 14) / 향년 36歲 戰死
[문과] 인조(仁祖) 11년(163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7위(10/33)
[진사] 인조(仁祖) 2년(1624) 갑자(甲子)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36위(6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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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선(李慶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 아명은 경민(慶敏), 초명은 경징(慶徵), 자는 군선(君善), 호(號)는 남포(藍浦), 충익공 벽오 이시발(忠翼公 碧梧 李時發)의 아들로 선조 33년(1600) 오늘날 경북 구미시 고아읍 예강리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인조 2년(162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진사(進士)가 되고,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正九品)로 출사(出仕)하여 사과(司果,正六品武官職)로 재임시 인조 11년(1633) 계유 식년시(癸酉式年試) 을과로 문과급제(文科及弟)하여, 교서관교리(敎書館校理,從五品), 예조좌랑(禮曹佐郞,正六品),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正六品)을 역임한 후, 인조 13년(1635) 11월 24일 남포 현감(藍浦縣監,從六品) 겸 홍주 진관 병마절제도위(洪州鎭管兵馬節制都尉)에 제수되어 재임중 인조 14년(1636) 12월 14일 병자호란이 일어나 적병이 서울에 침입하였다.
당시 인조 대왕(仁祖大王)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파천(播遷)하였는데, 이 때 이경선(李慶善)은 관찰사 정세규(鄭世規)가 이끄는 충청도 근왕병(勤王兵) 참모관으로 출전 2,432명의 병졸을 인솔하고, 밤길을 걸으면서 수원산성까지 갔다.
그 곳에서 3일 동안 머물면서 남한산성의 소식을 듣고 있다가 다시 수원 만의산(万義山) 아래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에 다음날 남한산성으로 가려고 할 때 만여 명이 넘는 호적의 대부대가 진을 치고 있기에 앞으로 더 나가지 못했었다. 하는 수 없이 여기서 진을 치게 되었으니 이 곳이 광주(廣州) 험천(險川 또는 檢川) 손허산(遜墟山,297m)이다.
이 전쟁에 참가한 중심인물은 충청감사 정세규(忠淸監司 鄭世規), 남포현감 이경선(藍浦縣監 李慶善), 금정찰방 이상재(金井察訪 李尙載), 전 참판 최진립(前參判 崔震立), 연산현감 김홍익(金弘翼), 전 부사 황백(前 府使 黃柏), 전 부사 이건(前 府使 李鍵), 심약 이시량(審藥 李時亮) 등 여러 사람들이었다.
다음날 새벽에 적병들이 안개 속을 헤치며 진재산(陣在山- 228.6m)에서 습격하여 왔다.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자기 당하는 일이었지마는 모두들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던 중에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는 절벽에서 떨어졌다.
다행하게도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연대장 5명은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다.
오직 남은 사람은 이경선 김홍익(金弘翼) 두 사람 뿐이었다.
이경선은 군량미를 쌓아 놓은 노적 위에 올라가서 충청감사를 대신하여 군사를 지휘하였다.
군사 중에서 후퇴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다.
그러기에 군사들은 흩어지지 않고 적병들과 용감하게 싸웠다. 이것은 이경선의 힘이 컸었다.
그 때 감사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군중 속의 일부에서는 술렁대기 시작하였다.
그런 모습을 보자 이경선(李慶善)은 즉시 눈치를 차리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우리는 적과 싸워야 한다. 만일 여기서 감사가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질서가 어지러워지면 우리는 적과 싸우지도 못하고 모두들 앉아서 죽고 만다. 어찌 이런 위급한 때에 개죽음만 당하고 말겠는가. 우리는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목숨도 가볍게 여기고,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끝까지 싸우면 안 될 일이 있겠는가?』
라고 외쳤을 때 군중들은 동요하지 않고 침착한 모습을 했었다.
즉시 말을 타고 칼을 들고 적진에 들어가서 적과 싸웠다.
삽시간에 적군의 목이 10개나 떨어진 모습을 보고 있던 군사들은 더욱 용기를 얻어 적군과 힘차게 싸웠다.
이경선은 적진에 들어가서 적병의 목을 베기 시작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면서 날쌔고, 용감무쌍하게 싸워댔다.
그러던 중에 말이 적의 화살에 맞아 쓸어졌다.
이경선은 재빨리 말에서 뛰어 내리여 적병들과 싸웠다.
이 때 적의 기습 공격에 칼이 부러졌고, 다른 군사가 버린 칼을 재빠르게 쥐고 또 싸웠다. 왼손에는 인부(印符)를 굳게 쥐고 적병의 왼팔을 쳤으며, 오른손에 쥐고 있는 칼로는 적병들의 심장을 찔러댔다.
또 다시 쏜살같이 적장에게 달려가 적장의 코를 물어 뜯어댔다.
그 때 적병은 이경선(李慶善)의 목을 쳤다.
김홍익(金弘翼)과 같이 용감하게 싸우다가 끝내 두 분이 전사를 하시고 말았으니 그 때가 12월 27일 이었다.
병자호란은 끝이 났다. 형((兄) 경충(慶忠)은 다음 해 정월 19일에 이 경선의 시체를 찾으려고 검천으로 갔다.
그 곳에는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노적 위에 가보니 생시에 언제나 차고 다니던 가죽주머니가 있어 이것을 보고 곧장 시체를 찾아냈다.
그러나, 전신이 칼에 찔려 성한 곳이 조금도 없었다.
우리들은 이것으로 보아 호병들이 얼마나 잔인무도 하였는가를 낱낱이 알 수가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나만갑일기(羅萬甲日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경충(李慶忠)은 아우 이경선의 시체를 거둔 뒤에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말(鎭川郡 德山面 山尺里 山直村)에 장사를 지내고 넋을 위로해 주었다.
조국이 이처럼 커다란 전쟁으로 위태롭고 어지러울 때 나라를 위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목숨을 바치신 거룩한 넋이여!
후세 사람들의 모범이 되고 거울이 될 것으로 믿는다.
※ 자료 : 상산지. 진천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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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당시의 남한산성 부근을 간략하게 묘사한 남한산성도(南漢山城圖).
산성의 4대문과 옹성, 서장대(西將臺)가 표시돼 있다. 남문에서 삼전야(三田野)를 거쳐 송파진 (松波津)에 이르는 길 중간에 있는 비석은 청태종 송덕비다.
-자료 규장각 소장 동국여도(東國輿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