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전북 옥구군 나포면 주곡리 대동 마을 부녀 회장 채 경례입니다.
저희 마을은 군산에서 동북쪽으로 16km 떨어진 마을로 총 호수 48호에 총 경지 면적은 42ha로 호당 평균이 약 1ha이며 8할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농외소득이 높은 비교적 잘 사는 마을입니다.
<기억조차 하기 싫은 지난날>
그러나 우리 마을은 1970년만 해도 옥구군에서 가장 낙후된 곳으로 손꼽히는 마을로서 논은 대부분 천수답으로 매년 한 해로 흉년을 면치 못하여 군산 옥구 지방에서 공무원 학생들이 총동원되어 호미로 구덩이를 파서 모를 심어주는 등 근근이 연명해가는 가난의 대표적인 마을이었고 궁핍한 생활이 계속되어 봄이면 객지로 품팔이를 떠나는 사람이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만 갔습니다.
더구나 자녀들의 교육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고등학교 졸업자가 단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예부터 주민들은 매일 술타령으로 세월만 보낸다 하여 마을의 명칭을 술주자(酒), 골곡자(谷), 즉 술의 골짜기란 주곡리라 이름 지어지고 주곡리에 가야 공술이라도 한 잔 얻어 마신다고 주변의 불량배들이 모여 들었다 합니다.
당시 이 조그마한 마을에 술집이 다섯 군데나 되었고 그곳에서는 싸움질과 도박이 성행하여 하룻밤 사이에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문전옥답을 날려버리고 처자식을 이끌고 타향살이 떠나는 예가 빈번했습니다.
<새로운 인생의 시작>
저는 나이 스무 살에 이곳 가난한 농가인 황 씨 집 아들에게 시집을 왔습니다. 시집을 와 보니 논 1,200평을 경작하고 있었으나 벼 50가마니의 빚에 쪼들려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여건 속에서 우리 가정을 일으켜 보겠다는 생각으로 직업 전선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상경하여 구슬백 공장에서 일감을 맡아 가지고 일하기 시작하여 동대문구 답십리 일대에서는 구슬백 아줌마라고 하면 꼬마들까지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자나 깨나 고향 생각을 잊을 수가 없어 5년 만에 그리던 고향으로 다시 내려왔습니다.
<새마을운동의 불길을 타고>
그때는 전국적으로 새마을운동의 열기가 메아리치던 때라서 지금쯤은 우리 마을도 새마을운동이 한창이겠구나 싶어 가슴이 부풀었습니다만 막상 5년 만에 돌아와 본 우리 마을은 술과 도박으로 나날을 보내는 옛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1972년 1월 중순경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뜻있는 부녀자 몇 분이 모인 자리에서 이 이상 우리 마을을 남자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남자들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우리 부녀자들의 손으로 다시 찾아는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저는 결심한 바 있어 자진해서 부녀 회장직을 맡았습니다.
먼저 부녀회 조직을 보강하기 위해 저와 뜻을 같이 하는 몇 분을 찾아다니면서 상의하여 마을 부녀회 총회를 개최하고 첫 번 사업을 마을에서 도박 몰아내기 사업으로 결의하였습니다.
<순사 부장 별명을 얻어>
도박이 성행하는 마을이 절대로 새마을이 될 수 없고 이 도박은 우리 부녀자들이 단합해야만 몰아낼 수 있다고 강조하며 저는 부녀 회원들을 이끌고 도박하는 집을 찾아 갔습니다.
희미한 등잔불 밑에 담배 연기만 자욱한 골방에서 도박에 정신을 잃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박을 중산 하라고 만류를 해 보았지만 도박꾼들로부터 입에 담지 못할 욕설만 듣고 별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몰려가 도박을 훼방하자 며칠 뒤에는 저희 집에 몰려와 순사 며느리 몰아내라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가정불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마을에서는 순사 부장이란 별명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러한 방법으로 도박을 몰아내기는 부녀 회원들 가정에 불화만 일으킬 뿐 용이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농한기에 노는 일손을 생산화 시킴으로서 도박을 점차 없앨 수 있다는 생각으로 착안한 것이 돗자리 생산이었습니다.
<부자 마을로의 전환점>
저희 고장은 옛 이조시대부터 임피세석이라 하여 전통적으로 유명한 돗자리 생산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옛날 전통적인 부업이 사라져 겨우 두 가구가 명백을 이어가는 정도였습니다.
저는 다시 이 돗자리 생산 사업을 일으켜 보기로 굳게 결심하고, 재배 방법 및 가공 방법 등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전문가를 찾아다니면서, 주민들에게도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첫 해인 73년도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20명으로부터 3천매를 생산 판매하여 360만 원의 소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원료 부족으로 타지에서 구입해 오던 완초를 마을에서 자급할 수 있도록 경작 면적을 확충해 나가는 한편, 이모작 재배 기술이 보급되어 완초를 심으면 벼농사보다 8배 이상의 소득을 올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희 마을은 연간 돗자리 8천매를 생산해서, 호당 70만 원의 돗자리 소득을 올릴 뿐 아니라 돗자리 부업에 열을 올리다 보니 자연히 도박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계획한 주점 없애기 운동은 생각보다 쉽게 남자 분들의 호응을 얻게 되었고 주점에서 스스로 문을 닫는 속 시원한 결과를 체험했습니다.
이렇게 부녀 회원들이 끈질긴 도박 추방 운동과 완초 재배는 날이 갈수록 성공을 거두었고 술 마시고 방황하던 풍토가 점차 없어지자 마을은 부채가 줄어들기 시작하여 저축도 하는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 지방 처녀들은 장롱 없이는 시집가도 이 마을의 돗자리 없으면 시집 못 가는 줄 알고 혼수용으로 기호도가 높아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자금 확보 위해 새마을 금고 육성>
이렇게 돗자리 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보니 여기에 수반되는 사업 확대를 위한 자본 확보가 문제되었고 궁리한 끝에 새마을 금고 육성을 착안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을은 새마을 금고가 어려운 특수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지난 70년 부녀회에서 회원 20명으로부터 500원씩 출자 받아 제가 회장을 겸하여 구판 사업을 활발히 운영하여 75년에는 110만 원의 자산이 확보되었으나 비협조적인 사람들로부터 회장이 자산을 유용하고 있다는 모략이 시작되었고, 또 출자도 하지 않은 사람이 융자를 신청해 와서 이를 거절하면 부락민을 선동하는 바람에 저는 궁지에 몰리고 말았습니다.
심지어는 저희 집에까지 찾아와서 돈을 나누어 쓰자고 소등을 벌였습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습니다.
저의 일에 대하여 이해해 주시던 남편마저도 회장직을 그만 두라고 꾸중이 심했고 시부모님들의 엄한 꾸중을 거역하기 힘들어 인내심이 부족한 저는 일단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나누어 쓰는 사실상의 해산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포기하면 마을은 말도 안 될 것 같고 저는 영영 도둑으로 몰리는 것만 같아 분함을 억제하면서 며칠을 두고 반성했습니다.
교육 부족으로 일일이 상세하게 보고를 하지 못하고 주먹구구식으로 한 것이 불씨가 되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끈질긴 집념으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
마을금고가 해체된 지 6개월이 되던 76년 여름, 다시 뜻이 맞는 부녀 회원들을 중심으로 도박을 말리던 끈질긴 힘과 큰소리치던 부녀 활동이 남자 분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말자고 결의하고 좀도리 저축부터 시작했습니다.
각 가정 부엌에는 똑같은 좀도리 통을 비치하고 아침, 저녁 한 수저씩 모으기를 실천하였습니다.
한편, 폐품 모으기 운동으로 마련한 12만 원으로 회원 21명이 그 해 8월 다시 마을금고를 조직했습니다.
우리는 2명씩 순번제로 매일매일 회원 집을 찾아 푼돈과 폐품을 모았으며 생활필수품 구판 사업도 하여 시장에 안 가기 운동을 벌리고 생일, 회갑, 결혼식 때 절약한 돈으로 기념 출자를 했으며 따라서 사치 안 해 돈 안 쓰고 그 동안에 돗자리 짜서 번 돈을 저축하고 스스로 마을금고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62명 회원에 590만 원으로 비록 자산은 적지만 알차게 마을 은행의 역할을 훌륭히 해 나가고 있습니다.
<순사 부장에서 구두쇠 부장으로 별명 바뀌어>
이와 같이 안 쓰기 작전에 주동이 되고 보니 이제 가정 살림, 마을 살림이 다 같이 늘어가고 저에게는 순사 부장에게 구두쇠 부장이라는 애칭으로 별명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75년부터 새마을 사업은 마을 회관 1동 건립하고 지붕 개량 45호를 완전 개량한 것을 비롯해 공동 축사를 건립하여 한우 36두를 사육하고 있으며 간이 급수 시설과 영양 급식 센터를 설치했고 매년 농번기에는 탁아소 운영으로 일손 돕기와 어린이들의 건강도 돌보고 있습니다.
<외화 획득의 일익 담당>
또한 부녀자들이 부업으로 시작된 돗자리는 이제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져 국내는 물론 외국 수출용으로도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버리던 돗자리 생산의 부산물인 완초 껍질을 활용하기 위하여 멀리 경북 김천 지방까지 가서 완포 벽지에 대한 기술을 배우고 익혀, 그렇게도 원했던 완포 벽지 공장 1동을 건립할 수 있었고, 최신식 기계 11대를 구입함으로서 지난해의 경우, 완포 벽지 1만 5천 필을 생산 수출함으로서, 연간 2,800만 원의 소득을 올렸고, 그렇게도 못 살던 우리 마을이 비록 미미하였지만 우리나라 백억 불 수출의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이 사실은 이 마을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며, 그날의 뿌듯한 감정은 그 동안의 모든 쓰라렸던 어려움을 한꺼번에 잊게 했습니다.
또 우리 마을 뒤에는 경관이 아주 좋은 저수지가 있습니다. 3년 전부터 잉어, 치어 7만 마리를 사서 키우고 있으며 휴일이면 대도시에서 많은 낚시꾼들이 찾아와 하루를 즐기고 갑니다.
지금은 유료 낚시터로 적은 소득을 올리고 있지만 2년 후에는 연간 2백만 원 이상의 공동 소득이 들어올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자 마을 기반 다져>
이렇게 하여 호당 평균 소득이 3백만 원이 훨씬 넘는 고 소득 마을로 끌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부채로 허덕이던 악몽 같은 지난날은 사라지고, 자라는 후세 교육에 전심전력하여서 대학생이 10명이나 되고, 고등학교까지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희 마을은 연중무휴의 희망찬 새마을로서 고향을 지키며 남녀노소가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하는 마을이 되었고 밤이면 TV 앞에 모여 앉아 악몽 같았던 지난날들을 꿈처럼 이야기하며 웃음이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우리의 숙명적인 가난을 몰아내는 가장 빠른 길이었음을 교훈으로 남겼고 끈질긴 노력은 엄청난 위력을 낳는다는 산 경험을 얻었습니다.
<이상 농촌을 향한 발돋움>
이제까지 다져진 새마을 정신을 바탕으로 우리 마을이 선진된 이상 농촌이 될 때까지 줄기차게 전진할 각오이며 연차 계획으로 이미 마을 노인들의 휴식처인 경로당은 착공하여 추진 중에 있으며 벽지 공장 1동을 확장하여 농한기 주민들의 유휴 노동력을 완전히 흡수시키고 특별 지원금 300만 원과 마을 기금을 합하여 비육우 사업을 확대해 갈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