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언제 갔나 싶게 눈이 오고, 비도 내리고, 바람 불고..
한 주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지나간다.
11월이면 시댁에서 김장 한 번, 친정에서 김장 또 한 번, 연례 행사처럼 치르는 일들도 이제 모두 끝났다.
시댁에서야 밥 당번인지라 무채 썰고 파 다듬거나 마늘 까는 일들은 다른 식구들이 미리 해 놓는다.
그래서 오히려 크게 힘들다는 생각은 안 든다. 먹을 것만 넉넉하게 준비해서 김장할 때 온 식구들이 함께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챙겨주기만 하면 내 임무는 어느 정도 끝난다.
수육도 준비하고 밑반찬에 국 끓이고 밥하는 것.
모처럼 김장한다고 식구들이 모이면 열댓 명 가까이 되니 그것도 만만치 않다.
간식도 챙기고 하다보면 어느새 배추에 양념버무리는 일은 잠깐 밖에 하지 못한다.
잠시 밥 당번도 짬이 나면 김치속 넣는 일에 동참하는 건데, 이때는 집중적으로 옷에 고춧가루가 잔뜩 묻는다.
고무 장갑도 끼고 앞치마를 해도 왜 그럴까?
쭈그리고 앉아 하는 일에는 허리도 아프고 이래저래 고역이긴 다들 마찬가지일텐데,
잠깐 하는 사이에도 제일 많이 한 사람처럼 옷에 얼룩을 잔뜩 묻힌다.
김장 고수들은 어찌 옷에 별로 묻히지도 않고 그리들 잘 하시는겐지..
혼자서만 김장을 한 것 같은 옷 꼬락서니를 보곤 웃음이 나온다.
'그래, 네가 제일 수고 많다!' 하며 속으로 힘 내라, 힘! 하며 응원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힘들다고 뻗기 일보직전이니 어떻게든 힘을 받아야 한다.
서로들 우스갯소리도 하며 힘을 북돋워주고 함께 하는 것이다.
밥 당번을 하건 배추에 양념을 열심히 버무리건 김장할 때는 모두들 신경을 쓰고 하니,
한 번 하고 나면 다들 온 몸이 뻐근하고 찌뿌두둥 하고 그럴게다.
여자들에게만 있는 연례행사는 아닌 것이,
남자들도 연신 완성된 김치를 나르거나 통에 담거나 배추 절인 것을 나르거나
등등 같이 해야 하니 다들 힘이 들기는 마찬가지이리라.
그래서 찜질방에 가기도 하고 , 병원 가서 물리치료 받기도 하고 그러는가 보다.
나도 지난 번 시댁에서 김장하고 왔을 때, 잠시 감기 기운이 있더니 평소보다 일찌감치 자고 조금 늦게 일어나니
이삼일 뒤엔 말끔해졌다.
그렇게 마무리하는가 싶었지만, 친정의 김장이 남아 있었기에 힘을 또 비축해 두어야 한다.
지난 토요일,
아이들 미사와 복사단 회합까지 마치고 친정으로 가니 벌써 배추는 다 절구어 놓았다.
채 썰려고 꺼내 놓은 무는 한 가득이다.
내 다리 만큼이나 굵고 큰 무들이 잔뜩 있으니 남 같지 않고 친근감마저 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친근하게 다가오던 무들은 꿈에라도 나타날 것 같은 공포감을 준다.
왜 이리 금방 줄지는 않는 것인지.
조금 일했다고 배는 고파오는데 무채 다 썰기 전까지 저녁 먹는 것은 어림없고... 어쩌나.
무가 크니 팔은 아파오고, 쭈그리고 앉아 하니 허리도 아프고 야단이다.
그렇게 온 몸이 아우성일 때 드디어 마무리.
배추 몇 포기 하세요? 하고 묻는 것은 의미 없는 물음이다.
친정은 식당을 하니 한 번 김장을 하려면 그 양이 장난 아니기 때문이다.
시댁에서 한 것 쯤은 새발의 피다.
다들 배고픈 것도 참고 무채 썰고, 무,양파,배도 갈고 갖가지 양념 버무릴 것을 다 준비해 놓은 다음에서야 늦은 저녁을
먹으러 잠시 나갔다. 식당이지만 김장 준비를 하는 통에 밥차리고 할 여력이 없는 거였다. 그래서 간단히 국밥을 먹기
위해 나갔고, 다들 맛있게 먹고 나니,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렸다. 바람도 불고.....
잠깐 사이에 날씨의 반전이 있었다.
본격적인 김장은 천막 쳐 놓은 곳에서 하니, 큰 걱정은 아니나 조금 염려스러운 날씨이긴 했다.
갑자기 또 추워지면 벌벌 떨면서 김장을 해야 하고 , 새벽부터 배추를 헹구어야 하는데 그것도 일이기 때문이다.
토요일은 날씨에 대한 염려로 하루일과를 마무리하고 드디어 다음날,
여섯 시부터 배추 헹구는 일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삼십 분 조금 늦게 도착.
전날 비로 안개는 잔뜩 껴 있는데, 전등불 환하게 켜 놓은 모습이 마치 신선 놀음이라도 하는 곳 인양 느껴졌다.
'그래, 어디 신선 놀음을 해 볼까나' 하고 들어가니 배추 헹굴게 참 많기도 하다. 허걱!
네 명이서 순서 대로 서서 헹구는데 한 두통이 아닌지라 시간은 꽤나 걸렸다.
전날처럼 밥 먹는 것은 헹구는 일이 끝나야 먹을 판이었다.
일찌감치 배추를 헹구다보니 장운동도 활발해지고 눈치없이 배꼽시계는 울려 대는 것이 민망하기까지 하다.
이걸 어째~~
헹구는 것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지원군들이 속속 도착하고 김장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거의 아홉 시는 다 되어서야 아침밥을 먹으니 그야말로 최고.
역시 일한 다음에 먹는 밥이 맛있다.
밥 먹고 난 후, 본격적으로 김장 돌입. 다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배추에 양념을 버무리기 시작했다.
작년엔 뽕짝 음악에 맞추어 김장을 했는데, 올해는 군 제대한 조카의 선곡에 맡기고 김장을 했다.
가끔 느린 곡조의 음악도 나와서
"야, 이러다간 김장 오늘 다가도 못해~~!!" 하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들은 조카는 얼른 신나는 곡으로 바꾼다.
그렇게 한참을 하다보니, 막걸리와 수육이 나온다.
따끈따끈하고 부드러운 수육 한 점을 절인 배추에 양념과 싸서 먹으니 그야말로 꿀맛!
아침부터 일한 노고가 겹쳐 막걸리도 한 잔 저절로 걸친다. "아, 좋다!" 하고.
저녁 미사때 늦둥이 아들 복사 서는 것만 생각하고, 점심 때 성당에 가려는 것을 잠시 깜빡 하는 순간이었다.
한 잔 달게 들이켜고 나니 생각나는 걸 어째~~^^
잠시 성당에 들르느라 살짝 빠져 나오고, 김장은 나중에 들으니 한 시 반쯤 끝났단다.
여느때 같으면 방앗간 고모님의 진두 지휘아래 왁지지껄 진행됐을 김장은, 다른 일정과 겹치는 관계로
함께 하시지 못했다. 하지만 인절미에 흰떡까지 해다주고 가셨기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함께 나누며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김장하는 날은 또다른 잔칫날이 된 듯 싶었다.
김장을 하기 전, 무도 크고 튼실한 것이 좋아 보였다. 얘기를 들으니 평소 오빠, 형님하고 지내는 분이
식당 일에 바빠서 무를 심지 못하고 있음을 아시고는 당신의 밭에 여유된다고 심어서 기른 후 잔뜩 뽑아 오셨단다.
요즈음 어디 그런 분이 계실까.
서로들 마음으로 함께 하니 그런 분도 만나는 게지 싶다.
훈훈한 인정나눔의 얘기도 전해 들으면서 올 한 해의 김장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십이 월이 되기 전, 어느 정도 월동 준비가 된 것이다.
팔이 시큰하고 다리도 뻐근하고 하지만, 한 해의 넘어야 할 산을 넘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생긴다.
날씨도 더 추워지기 전에 옹송그린 마음도 풀고 따뜻한 겨울나기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