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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대한민국 임시정부③④ / 이덕일의 事思史
이장희 추천 0 조회 26 14.05.23 22: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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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단 출범 계기로 황족·귀족도 독립운동 가세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친일파 중에는 일본이 대한제국보다 더 나은 정치를 펼칠 것으로 예상했던 인물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는 무단통치로 일관했고, 그에 반발해 3·1운동이 일어나고 임정까지 수립되자 큰 충격에 빠졌다. 그래서 이들 가운데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가진 장례식. 남작 김가진이 상해로 망명한 후 1922년 사망하자 임시정부장으로 치렀다. 김가진은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하고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대한민국 임시정부
③ 대동단

일제 강점 후 매국적(賣國賊) 중에서도 후회하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일본이 신정(新政)은커녕 식민지로 통치하자 속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일진회 출신 전협(全協)이었다.

 

전협은 일진회 이용구·송병준 등의 총애를 받아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고종 42년(1905) 부평군수로 나가고, 일진회의 ‘합방청원서’에도 세 번째로 서명했던 매국적이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삼킨 후 일진회까지도 해산시켰고, 끈 떨어진 신세가 된 전협은 만주 유하현(柳河縣)으로 이주했다. 전협은 ‘경찰 신문 조서(1919년 11월)’에서 “당시 그 지방(유하현)에는 배일(排日) 조선인 두목 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이동녕(李東寧)·이윤일(李允一) 등의 일파가 극히 왕성했는데, 나는 일진회원이었다는 이유로 큰 박해를 받아 견딜 수가 없어 명치(明治) 46년(1913) 여름 경성으로 돌아왔다”고 진술

했다.

일진회 출신이 만주에서 목숨을 건사한 것만도 다행이었다. 전협은 또 부평군수 시절 관내에 있던 윤치호의 토지를 전국환(全國煥)이란 가명으로 사취한 적이 있었는데, 뒤늦게 이 사실이 드러나 2년4개월을 복역하기도 했다. 석방 후 만주·상해·국내를 오가며 할 일을 모색하다가 3·1운동이 발생하자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수행할 조직체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1919년 4월께 최익환(崔益煥), 승려 정남용(鄭南用), 보부상 우두머리 양정(楊楨) 등과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약칭 대동단)을 결성했다. 3·1 운동으로 일경(日警)의 감시가 강화된 상황에서 대동단은 뱃놀이를 가장해 한강에서 전국대회를 개최할 정도로 일제의 허를 찌르는 전략이 있었다. 다른 독립운동 단체들과 구분되는 특징은 황족·귀족들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전협이 대동단의 활동자금을 확보한 것도 남작 정주영(鄭周永)의 장남 정두화(鄭斗和)를 통해서였다. 정주영은 충청도·경기도 관찰사와 귀족원경(貴族院卿)을 역임한 귀족이고 그 아들 정두화도 충청도 호서은행(湖西銀行) 취체역에 종오위(從五位)의 위기(位記)를 가진 상류층이었다. 일제 ‘신문조서’는 정두화에 대해 “성질이 완고하여 시세를 깨닫지 못하고 국권 회복을 꿈꾸다가 불량배의 꾐에 빠져 독립자금을 공급했다는 의문이 수차 일었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항일 의지가 있었다.

 

‘신문조서’에는 정두화가 처음에는 ‘아직 부친의 감독 밑에 있기 때문에 출자는 할 수 없다’면서 거절했지만 나중에는 모두 1만100여원의 거금을 전협 등에게 제공했다고 기록돼 있다.

 

대동(大同)은 원래 예기(禮記) ‘예운(禮運)’ 편에 나오는 공자가 말한 이상사회를 뜻하지만 전협은 온 민족의 대동단결이란 뜻으로도 사용했다.

일제 당국의 ‘공판시말서’에 따르면 대동단의 3대 강령은 “①조선의 독립을 공고히 할 것 ②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확보할 것 ③사회주의를 철저하게 실행할 것”이었다. 대동단은 총독정치 철폐, 일본 군대 철거 등을 결의하면서 “완전한 독립정부를 성립시킬 때까지 가정부(假政府·임정)를 원조할 것”도 규정했다.

 

‘신문조서’는 전협이 ‘상공단(商工團), 청년단(靑年團), 유림단(儒林團), 진신단(縉紳團)을 결속해 하나의 단체로 만들어 운동하는 것이 좋은 계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공단은 전 보부상 두목인 피고 양정에게, 청년단은 피고 나창헌(羅昌憲)에게, 유림단은 이래수(李來修)에게, 진신단은 김가진(金嘉鎭) 및 이달하(李達河)에게 서로 연락하면서 일치된 운동을 할 것을 약속했다’고 전하고 있다.

대동단의 활동은 대담했다. ‘증인 조종윤(趙鍾胤) 신문조서’에 따르면 대동단은 원은동(援恩洞) 159번지 조은성(趙銀成) 소유의 점포를 월세 10원에 빌리고, 황금정 이건호(李建浩)의 집과 주교정(舟橋町) 최익환의 셋집에도 인쇄기와 활자를 비롯한 인쇄시설을 갖춰놓고, 겉으로는 인쇄업자로 가장했다. 그러곤 비밀리에 ‘대동신보(大同新報)’ 1만 매를 인쇄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배포했다. ‘대동신보’ 외에 파리 강화회의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 보내는 ‘진정서’ ‘일본 국민에게 고함’같은 경고문도 작성했다.

 

훗날 사회주의자가 되는 최익한은 ‘관망하면서 정담만 하는 자들에게 경고함(警告于觀望淸談之諸氏)’이란 경고문도 작성했는데, 그 말미에 “최근 10년간 학정의 자취는 우리 민족을 박멸하지 않고는 그치지 않을 것”이라면서 “차라리 일본의 칼[蠻劒]에 옥쇄(玉碎)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겠다”고 말하고 있다. 역시 사회주의자가 되는 권태석(權泰錫)은 ‘등교 학생 제군에게’라는 글에서 동맹 휴학을 계속하라고 권고했다. 이 유인물들은 훗날 아나키스트가 되는 이을규(李乙奎)가 중심이 되어 각지에 배포했다.

이런 활동들도 충격이었지만 더 큰 충격은 대동단의 총재가 김가진이고, 그가 상해로 망명한다는 사실이었다. ‘공판시말서’에 따르면 전협은 원래 김가진과 알고 있었는데, “(전협이) 방문해 대동단에서 발행한 문서를 보이자 적극 찬성하면서 참가하겠다”고 동의했다고 전한다.

 

김가진은 고종 32년(1895) 농상공부 대신을 역임하고, 고종 37년(1900)에는 중추원 의장을 역임했으며, 망국 후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은 거물이었다. 대동단에는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金毅漢)도 가입했는데, 일제의 ‘공판시말서’는 앞의 ‘등교 학생 제군’ ‘일본 국민에게 고함’ ‘관망하면서 정담만 하는 자들에게 경고함’이란 글도 모두 김가진의 동의를 얻은 후 최익환이 인쇄했다고 전한다. ‘대동신보’도 김가진·전협·정남용이 집필했으며, ‘대동단 규칙’도 김가진이 지었고 체부동(體府洞) 김가진의 집에서 인쇄했다고 써서 김가진이 명목상 총재에 머물지 않았음을 적시하고 있다.

1919년 5월 23일 최익환과 권태석이 다른 사건으로 체포되면서 대동단에 위기가 닥치자 김가진은 대동단 본부를 상해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 무렵 임정 내무총장 안창호는 연통제 특파원 이종욱(李鍾郁)을 밀파해 저명인사들을 망명시키려 했다. 김가진의 망명은 이런 움직임과 맞아떨어지면서 폭발력을 갖게 되었다.

전협은 ‘신문조서’에서 “상해 가정부(假政府)에서 이종욱이 입경해 나를 양정의 집으로 찾아왔다”고 말해 대동단이 임정과 연락망을 갖고 있음을 시사했다. ‘신문조서’에 따르면 ‘전협은 이종욱이 상해 임정에서 가지고 온 30여 명의 망명 대상 명단을 보았다’면서 “지금 기억나는 인명은 이강 공(李堈 公·의친왕), 박영효(朴泳孝), 김가진, 김윤식(金允植), 이용식(李容植), 이능화(李能和), 이용태(李容泰), 정운복(鄭雲復), 윤치호(尹致昊), 이상재(李商在) 등이었다”고 말했다.

 

대동단의 정남용은 ‘신문조서’에서 “이종욱이 내게 ‘가정부의 각원(閣員·국무위원)으로부터 왕족·귀족 중 상해로 올 만한 사람이 있으면 될 수 있는 대로 안내해 데리고 오라는 부탁이 있어서 왔다’고 말했다”면서 저명인사 망명계획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조선 독립을 상하 구별 없이 모두 희망하고 있으나 왕족·귀족 및 유산계급(有産階級) 사람은 운동을 피하며 매우 냉정하게 처신하고 있는데 그들을 그대로 놓아두면 조선의 독립을 위해 결과가 좋지 않다. 그런 계급의 사람을 상해로 데리고 간다면 조선인은 상하 구별 없이 조선의 독립을 바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왕족·귀족을 상해로 데려가려는 것이다(‘정남용 신문조서 3회’).”

 

전협은 ‘신문조서’에서 상해에서 온 이종욱이 자신에게 “김 남작을 동행하기 위해 왔다고 하기에 이종욱에게 체부동 김 남작의 집을 가르쳐주었다”고 진술해 자신이 임정 특파원 이종욱과 김가진을 연결시켰음을 시인했다.

그런데 정남용은 ‘신문조서’에서 “김가진에게 상해로 갈 것을 권유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발의에 의해 대동단 본부를 상해에 두기 위해 가게 되었다”면서 임정의 권유 이전에 김가진이 상해 망명을 결심했다고 전한다. 임정특파원 이종욱이 망명시키려던 주요 인물 중에는 고종의 친아들인 의친왕 이강도 있었다.

 

그러나 두 거물을 한꺼번에 망명시키기가 쉽지 않자 이종욱이 먼저 김가진을 망명시키고 난 후 전협이 의친왕을 망명시키기로 역할을 분담했다.

전협은 경신학교(儆新學校) 북쪽 모퉁이 이종욱의 기와집 숙소에서 상해로 망명하는 김가진이 아들을 통해 의친왕 이강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았다고 진술했다. 이강에게 전한 편지는 “소인은 지금 상해로 갈 계획인데 전하께서도 따라서 왕림하시기 바랍니다(‘小人今往上海計殿下從此枉駕’)”라는 내용이었고, 편지 끝에 김가진의 도장까지 찍혀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김가진은 서울을 떠났다. 그동안 노블레스 오블리주는커녕 나라 팔아먹는데 앞장섰다고 비난받던 황족·귀족들의 망명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대동단의 주모자 전협은 일진회 간부였다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을규는 대동단의 각종 유인물 배포를 도맡고, 의친왕 망명작전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상해 임정 향하던 의친왕, 안동현서 잡혀 망명 실패

 

이덕일의 근대를 말하다-대한민국 임시정부④의친왕 망명사건

 

 

일제가 대한제국을 점령하고 식민지로 경영할 수 있었던 1차적 요인은 막강한 국방력이었다. 하지만 대한제국 황실과 집권당인 노론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의 협력도 절대적인 요인이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은 이 두 축을 심하게 요동시켰고, 수많은 인사를 망명하게 만들었다.

 

 

압록강 철교(오른쪽?현재 명칭은 압록강 단교). 의친왕 일행은 이 철교를 타고 안동현까지 탈출했다가 일경에 체포돼 망명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왼쪽은 중,조 우의교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은 고종 24년(1887) 5월 주차일본 참찬관(駐箚日本參贊官)과 일본 주재 판사대신(辦事大臣)으로 4년 동안 일본에서 근무한 일본통이었다. 고종 31년(1894) 공조판서, 고종 37년(1900) 중추원 의장이 되었다가 망국 후에는 일제로부터 남작(男爵) 작위까지 받았다.

이런 김가진이 상해 임정 합류를 결심하면서 금으로 만든 의치(義齒)를 빼서 얼굴을 바꾸고 시골사람 복장으로 위장한 후 1919년 10월 10일 임정 특파원 이종욱(李鍾郁)의 안내로 장남 김의한(金毅漢)과 함께 일산역에서 신의주를 거쳐 만주의 안동(安東:현 단동)현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임정 내무총장 이동녕이 임시대통령 이승만에게 보낸 ‘내무부 정문(呈文) 제16호:1920년 12월 20일)’는 ‘(대한민국) 원년(元年:1919) 10월 29일 특파원 이종욱이 유력가(有力家) 김가진을 동반해서 상해에 환착(還着)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김가진은 탈출 과정을 “물샐틈없는 감시망을 귀신처럼 탈출했도다/그 누가 삼등 객실의 승객을 알아보랴/찢긴 갓 누더기의 옛 대신인줄(天羅地網脫如神/誰知三等車中客/破笠衣舊大臣)”이라는 시로 남겼다.

의친왕 이강. 항일 의지가 굳셌던 거의 유일한 황족이었다.

김가진의 임정 합류에 일제는 경악했다. 며느리 정정화 여사는 자서전 '장강일기(長江日記)'에서 일제는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선전하다가 큰 타격을 입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더 큰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1919년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李堈)의 망명사건이었다.

고종 14년(1877) 귀인 장씨에게 태어난 의친왕은 해외통이었다. 고종 31년(1894) 일본으로 갔다가 고종 33년까지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이탈리아·미국 등지를 방문했다.

 

고종 37년(1900)에는 미국 유학길에 나서서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Wesleyan University)과 버지니아주 로노크대학(Roanoke College)에서 공부했다.

의친왕의 신학문은 망국과 더불어 아무 소용없는 것이 되었다. 미국 유학 때 의친왕(義親王)으로 책봉되었지만 1910년 망국과 더불어 공(公)으로 강등된 후 사실상 낭인(浪人)생활을 해야 했다. 비록 술로 지새우며 잘못된 세상을 한탄했지만 독립운동에 나설 수 있는 유일한 황족(皇族)으로 주목받았다. 그의 거처인 의화궁(義和宮)에는 항상 일경(日警)이 경호라는 명목으로 지키고 있을 정도로 감시가 삼엄했다.

대동단장 전협(全協)은 의친왕과 가까운 정운복(鄭雲復)에게 자신을 경상도 통영의 갑부 한(韓) 참판(參判)이라고 속인 후 의친왕이 통영에 가지고 있는 어업허가권인 어기권(漁基權)을 사겠다고 접근했다.

 

의친왕이 계약기간이 남았다면서 거절하는 등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의친왕은 11월 9일 전협이 임시로 빌린 공평동(公平洞) 집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의친왕은 도중에 일경을 만난 것이 마음에 걸려 발길을 돌렸다가 여러 번 재촉 받은 후 밤 11시쯤 공평동에 도착했다. 전협이 대뜸 “어기권은 거짓말”이라면서 “독립운동에 인물이 필요한 시기이니 떨치고 일어서기 바란다”고 말했다.


 

 


일제의 관련자 ‘신문조서’에 따르면 의친왕은 “의외의 사태에 놀라지 않고 동행하겠다”고 승낙했다. 그래서 전협은 미리 준비한 인력거에 의친왕을 태우고 자하문을 빠져나와 세검정을 거쳐 새벽에 고양군 은평면(恩平面) 구기리(舊基里)에 전협이 준비해 둔 집으로 들어갔다. 의친왕을 안내했던 정남용(鄭南用)은 일제 ‘신문조서(3회)’를 통해 구기리에서 의친왕이 했던 말을 전하고 있다.

“우리 집안은 조선 500년 동안 주인 집안인데… 2000만 사람들이 조선독립을 위해 소요하고 있는데 주인이 모르는 체할 수는 없다…. 또 이태왕(李太王:고종)의 붕어(崩御)는 그들(일본)이 독살한 것으로서 원수를 갚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주인집의 일원으로서 보통 사람의 열 배, 스무 배 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길 안내를 할 사람도 있으니 진실로 고마운 일이다.”

이에 정남용은 “전하 같은 분이 해외로 나가서 강화회의나 국제연맹회(國際聯盟會)에 출석해 조선인이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상황을 말하고 일본의 무단정치를 뒤집어야 하겠습니다”고 답했다.

이때 의친왕이 후궁인 수인당(修仁堂) 김흥인(金興仁)과 간호사 최효신(崔孝信)을 대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여인에게 “중대한 비밀서류와 태왕(太王) 전하께서 외국인에게 120만원의 돈을 맡긴 증서가 있다”는 이유였다. 고종의 비자금에 대한 아들의 증언이므로 이재호(李在浩)는 두 여인과 서류가 든 가방을 가지고 구기리로 왔다.

그러나 두 여인에 대한 여행증명서는 사전에 준비하지 못했으므로 다음에 망명시키기로 하고 의친왕과 대동단원들만 10일 오전 11시 수색역에서 평양행 기차를 탔다. 일행은 평양까지 갔다가 다시 기차표를 사서 안동현으로 향했다. 의친왕은 이을규(李乙奎)의 낡은 외투를 입고 3등칸에 탔는데, 검문 때는 이을규가 백부(伯父)라고 대신 대답했다.

의친왕이 열차를 타기 위해 구기리에서 수색으로 향하던 10일 아침 일경 간부 지바(千葉了)는 귀족 저택을 경호·감시하는 경위 순사들을 집무실로 불러 시국의 중대함을 설명한 후 “귀족들의 경호에 만의 하나라도 부주의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엄중히 훈시했다. (조선통치비화(朝鮮統治秘話)) 훈시 도중 제3부 경위반 주임이 귓속말로 “어젯밤 이강 공(公)이 공저(公邸)를 탈출한 혐의가 있다”고 보고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이왕직(李王職)의 구로자키(黑崎定三) 사무관은 오후 3시쯤 “이강 공은 저택에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지바는 “이강 공이 상해로 탈출했다면 그 결과가 조선 통치에 미칠 영향이 너무나도 막중하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사태를 파악하고 5시쯤에 아카이케(赤池濃) 경무국장에게 ‘중대사태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일제는 조선과 상해는 물론 일본·만주·시베리아까지 긴급 수배령을 내렸다. 의친왕 일행을 태운 열차는 11일 아침 압록강 철교를 건너기 시작했는데 열차 안에 일경 수십 명이 올라타 검문하기 시작했다. 의친왕 일행은 미리 준비한 여행증명서를 보이고 통과했으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열차는 11일 오전 11시쯤 안동현역에 도착했다. 안동현에는 아일랜드인 쇼가 운영하는 이륭양행(怡隆洋行)이 있었는데, 임시정부 교통국 산하였다. 이륭양행까지만 가면 이륭양행 소속의 기선을 타고 상해로 갈 수 있었다. 상해에 도착하면 상해와 서울에서 동시에 의친왕 명의의 ‘유고문(諭告文)’이 뿌려질 것이었다.

“통곡하면서 우리 2000만 민중에게 고하노라. 이번의 만주행은… 하늘과 땅끝까지 이르는 깊은 원수를 갚으려 함이다”로 시작하는 유고문은 고종 독살을 폭로하면서 “민중은 한 뜻으로 나와 함께 궐기하자”고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의친왕의 망명과 함께 유고문이 뿌려지면 국내외에 엄청난 충격파가 일 것이었다. 그가 임정에 가담했다면 이후 대한제국 황실의 운명도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의친왕과 정남용은 안동현역에 이미 쫙 깔린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의친왕과 정남용은 인력거에 강제로 실려 신의주 철도호텔로 압송되고 이을규는 역에서 탈출했으나 이내 체포되었다. 의친왕 망명 작전은 이렇게 수포로 돌아갔다.

일제는 의친왕을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거주하던 남산의 녹천정(綠泉亭)에 유폐시켰다. 의친왕 망명작전이 실패하면서 대동단 조직도 뿌리가 뽑혔다.

일제는 대동단원 검거작전에 돌입해 단장 전협과 최익한·권태석·정남용·이을규 등 모두 37명을 ‘정치범죄 처벌령 위반 및 출판법 위반·보안법 위반 및 사기 피고 사건’으로 기소했다.

조선총독부 판사 이토 준키치(伊東淳吉)를 비롯해서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된 법정은 전협에게 징역 8년형을 선고하는 등 가담자 모두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전협은 1927년 11월 9일 가출옥했다가 이틀 후인 11일 사망했다. ‘동아일보’는 “기미(己未:1919) 당시 ○○○ 전하를 모시고…상해(上海)로 가서 ○○운동을 하고자 했던 대동단 사건의 수범 전협씨”라고 보도했다. 일제가 이강 공과 독립이란 용어를 삭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종의 채권 서류는 어떻게 되었을까. 의친왕은 지바의 취조 때 “태왕께서 이용익(李容翊)에게 기탁하여 각 은행에 예금하신 돈이 독일인이 상해에서 경영하는 덕화은행(德華銀行)에 있을 것이니 그 유무(有無)를 찾아 받으라는 뜻의 증서”라고 분명히 밝혔다.

이 서류를 갖고 있던 이을규는 ‘공판시말서’에서 “피고는 가방을 든 채로 도망했으며, 그 가방은 이륭양행에 숨겨두었다는데 어떠한가?”라고 묻자 “그러함에 틀림없다”고 답했다.

그 후 재판 과정에서 일제는 이 서류의 소재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다. 독립운동 자금줄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했던 일제가 120만원의 거액에 대해서 침묵했다는 것은 서류 일체를 압수했다는 뜻이다. 지금이라도 이 돈의 행방 추적에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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