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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6 - 칭기즈칸 서요를 정벌한후 다시 호라즘을 공격해 멸망시키다!
테무진은 몽골을 통일하고는 1206년에 쿠릴타이를 개최해 칭기즈칸에 오른후 다음해인 1207년에
서하를 정벌했으며..... 1211년에는 5만 대군으로 금나라를 공격해 들어갔고, 이후 1218년에
2만으로 서요를 정벌한후 1219년에 20만으로 이란 지방인 호라즘을 공격해 1225년에 멸망시킵니다.
칭기즈칸은 서요를 멸망시키는 와중에 1227년에 죽게 되지만..... 아들인 오고타이칸은 유지를
받들어 1234년에는 기어이 금나라를 멸망시켜 중국 북부를 차지했고, 1235년 우크라이나를
지나 폴란드와 헝가리를 침공했으며.... 1252년에는 일 칸국이 세워지고 바그다드를 공격합니다.
먼저 서요 원정에 대해 살펴보면.... 칭기즈 칸은 서요로 도망간 나이만의 왕자(나이만의 타양 칸의 아들)
쿠츨루크를 사로잡기 위해 제베를 사령관으로 삼아 서요로 군대를 급파했는데, 서요는 요나라의
황족 야율대석이 금나라를 피해 서쪽으로 가서 중앙 아시아 민족들을 누르고 강대국으로 군림했습니다.
당시 서요 황제는 야율직로고 였는데 말제는 비참하게 죽어 시호도 못받은 망국의 군주의 호칭이니
동시대의 비슷한 처지의 인물로는 서하의 말제 이현과 금나라의 말제 완안승린이
있는데, 서요의 말제는 나이만 왕자 쿠츨루크를 크게 신뢰해서 자신의 부마로 삼는등 환대했습니다.
그러나 쿠츨루크는 야율직로고가 호라즘을 응징하기 위해 군을 일으켜 원정을 간 사이 모반을 일으켰으니,
호라즘은 서요에 압박을 받는 속국의 처지였는데, 무함마드에 의해 서요로 부터 자립하고 전성기를
열려는 상태였으니 그후 칭기즈칸의 대대적 침공을 받아 전성기를 제대로 맞지도 못한채 멸망하고 맙니다.
쿠츨루크는 이때 서요 본국을 장악한후 야율직로고를 폐위시키니, 명목상으로는 상황 대접을 받으며
2년을 더 살았다는데.... 쿠츨루크는 서요의 제위에 오른 뒤 선정을 베풀기는 커녕 오히려
이슬람교를 탄압하는 등의 폭정을 일삼았기 때문에 서요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이만의 왕자 쿠츨루크는 본디 기독교인이었고 서요의 부마가 된 후에는 불교도로 개종했는데, 서요의
피지배층이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는 이민족이었기 때문에 불만은 더 심했으니.... 서요는 소수의
거란족이 다수의 이민족을 지배하는 전형적인 불안정한 정복왕조로 나라가 혼란에 휩싸이자 붕괴합니다.
칭기즈 칸은 서요로 들어갈 방법을 고심하는 중이라 침략의 좋은 구실이 되었으니, 제베의 몽골군이 서요를
침공하자 쿠츨루크의 학정에 지친 서요 백성들은 침략자인 칭기즈 칸을 반갑게 맞았고.... 어떠한
종교를 신봉해도 된다는 종교 자유를 인정한 칭기즈 칸의 칙령이 있었기에 "해방군" 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결국 쿠츨루크는 전투에서 대패하고 도망치다가 붙잡혀 죽음을 당했으니 쿠츨루크는 칭기즈 칸
에게 대패하고 살해됐기 때문에 서요의 '결제' 라고 불리며 거란족의 마지막 제국
서요는 끝내 멸망하고 말았는데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멸망한 첫 번째 국가라는 기록을 남깁니다.
다음은 이란 지방인 호라즘을 원정하는데.... 칭기즈 칸은 아바스 칼리파조를 누르고 중동의 강자로 군림
하던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제국과 교역하기 시작했는데, 호라즘은 셀주크 투르크와 싸우는
중에 몽골의 침공을 받았으니..... 불과 10년도 되지 않는 짧은 전성기가 몽골군에 의해 끝나게된 것 입니다.
처음 호라즘 제국에서 상인이 왔을때 보물을 못본 촌놈들이라고 우습게 보며 바가지를 씌우자 몽골인들은
금나라에서 약탈해온 금은보화를 보여주며 "이것을 봐라!" 하며 물건을 빼앗고 체포하자 상인들이
더이상 바가지를 씌우지 않게 되니..... 몽골인들은 뺏은 상품을 값을 후히 쳐주며 화해를 청했다고 합니다.
1218년 칭기즈 칸이 호라즘에 보낸 사절단이 오트라르성의 성주 이날축에게 상품을 빼앗기고 살해당하자
칭기즈 칸이 사과를 요구하는 전령을 보냈으나 사절단을 해친 이날축은 호라즘 샤 무함마드 2세의 동생
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전령들은 수염이 깎인채로 돌아오는 수모를 겪으니 거세와 같은 굴욕이었습니다.
이에 격노한 칭기즈 칸은 친히 2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호라즘 원정을 떠났는데, 당시 쇠퇴한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조를 무너뜨리고 짧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호라즘 제국은 주민은 타지크인이나
페르시아인이고 지배 계급은 투르크인으로 40만명에 달하는 대군을 거느린 만만치 않은 상대 였습니다.
잭 웨더포드가 지은 “징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라는 책에 보면 본대는 빠른 길을 이용해 국경도시들을
공격하는 한편 일부 군대를 상상도 하지 못할 원거리를 우회하는데... 사막, 산과 초원을 가로질러 부산~
서울 거리 (400km) 의 9배에 달하는 무려 3,500km 거리를 행군해 호라즘의 반대 반향에 불쑥 나타납니다!
원거리 전쟁에서 큰 문제는 수양제 113만대군의 고구려 침공에서 보듯 “보급” 인데, 몽골군은 소를 삶은뒤
햇볕에 말린후 몽둥이러 때려 가루로 만든 다음에 가죽부대에 담고... 4~5마리 말을 끌고 가며 갈아타니
신속하게 전진하며 솥에 가루를 넣고 물을 부은후 불을 때서 소고기국을 마시면 한끼 식사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붉은 사막 키질쿰을 건너기 위해 가장 추운 달이 오기를 기다렸으니 이때는 사람이나 말
모두 물 소비가 적었으며... 이 계절에 맺히는 아침 이슬 때문에 잘 자라는 풀이 있으니 말의
먹이가 됐을뿐 아니라 사냥감 짐승들도 끌어들였으며, 무거운 공성 무기 대신에 기동성 좋은
공병대를 구성하여 현장에서 손에 넣을수 있는 재료를 사용해서 사다리등 공성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사막을 건넌후 마을을 발견하자 마치 상인처럼 느리게 움직였으니 경보를 발령하기도 전에 태연하게
성문에 이르렀으며, 바로 부하라를 공격하지 않은건 다른 국경도시들이 몽골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는지라 어차피 구원올 원군은 없다고 본 것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엉뚱한
방향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적군에 놀란 부하라 주민들의 공포와 희망을 이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곧 적에게 공포심과 겁을 주어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항복을 얻어내려는 심리전술이니 작은 읍
몇 개를 공격해 주민들이 부하라로 달아나게끔 했고 피난민들이 성내에 들어차자 부하라
주민들은 공포심을 느꼈으니, 후방 깊숙한 도시임에도 적에게 기습당했다는 사실에
도시는 공황상태로 빠졌으며..... 성벽 밖 온 들판에 기병이 일으키는 먼지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근처 항복한 마을에는 자비를 베풀었으니 주베이니의 말에 의하면 항복하면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없이살수
있다는 것이며... 저항하면 가차없이 죽이고 불태운다는 것이니, 2만명 수비군은 요새를 운영할 5백명만
남겨두고 몽골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성을 나가 도주하니 그들은 몽골군 기병대에 가차없이 죽임을 당합니다.
부하라의 주민들은 항복하고 성문을 열었는데 요새에 틀어박힌 5백명 병사들은 견고한 요새를 믿고 버티니
주민들에게 말에게 먹일 꼴을 가져오게해 항복의 징표로 삼은후.... 모스크로 들어가 부유한자
280명을 불러 술탄을 포함한 그들의 죄를 꾸짖은후 병사를 딸려서 숨겨놓은 그들의 보물을 거두어 들입니다.
그런후 몽골군은 공성 부대들이 수백년간 사용해온 돌과 불을 던지는 투석기, 평형추 투석기에
대석궁을 새로 만들고..... 또 불이 붙은 액체가 든 단지, 폭발장치, 인화물질 에데가
바퀴에 올려놓고 쏘는 엄청난 크기의 쇠노에 접이식 사다리가 달린 이동식 탑도
밀고 요새로 갔으니 탑 위에 올라가면 성벽의 수비군을 향해 같은 높이에서 활을 쏠수 있었습니다.
몽골군은 공중전만 한게 아니라 굴을 파는 기술자들이 땅을 파서 성벽을 무느뜨리려고 했는데
하늘, 땅, 지하에서 과학기술 능력을 과시하는 외에 들판에서 잡은 포로(수비군의 동료)
들에게 요새를 향해 달려나가라고 명령해 수비군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가했으며
포로들의 몸이 해자를 메우면서 평평해지자 다른 포로들이 공성용 무기를 밀고 나아갔습니다.
몽골군은 화염과 폭발을 일으키는 무기 분야에서 훗날 박격포와 대포의 초기형태라고 할만한
무기들을 실험했으며 주베이니에 따르면 몽골군의 무기가 빨갛게 달아오른 용광로
처럼 생겼다고 말했는데.... “단단한 막대를 오목한 곳 안으로 밀어넣어 연료를 공급하자
용광로 배 부분에서 공중으로 불꽃이 튀었고 수비군들은 전멸의 바다에 빠져 익사하고 말았다”
잭 웨더포드가 지은 “징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라는 책에는 몽골군이 점령한 천개 넘는 도시 가운데
징기스칸이 직접 입성한 도시는 단 하나, 호라즘의 도시로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속하는 “부하라” 뿐
이라는데, 징기스칸은 성이 함락될 무렵이면 부하들에게 맡기고 멀리 떨어진 야영지로 물러나곤 했답니다.
부하라는 수도도, 부유한 상업도시도 아니지만 무슬림세게에서 “고귀한 부하라” 로 일컬어지는 정서적으로
아주 높은 위치를 차지했으니 신앙의 중심은 “모든 이슬람의 훈장이요 기쁨” 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
도시라 칭기스칸은 도시를 정복하고 입성하는 자신의 행동이 선전전에서 큰 가치가 있다고 여긴 것 입니다.
호라즘 샤 무함마드 2세는 아들 루큰 앗 딘에게 수비를 맡기고, 호라산, 사마르칸트, 잔드를 거쳐 투르키스탄
국경지대까지 향한뒤 킬리강과 카임치강 사이에서 몽골 군대와 대치했는데 당시 무함마드 2세가 대치
하던 몽골 군대는 수베테이 바하두르와 토가차르의 군대였는데 원래 부대는 쿠두를 치기 위한 군대였습니다.
무함마드 2세의 공격에 몽골군은 물러나면서, 칭기즈칸의 명령이 없어 호라즘과 싸울 의향이 없다고 밝혔지만
무함마드 2세는 공격했는데, 호라즘 군대는 역으로 포위되어 샤 무함마드 2세까지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무함마드 2세는 아들 잘랄 웃 딘 밍부르누의 활약으로 간신히 탈출해 사마르칸트로 귀환합니다.
호라즘 제국이 몽골 제국에 크게 뒤쳐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대부분의 영토는 60~70년에 이르는 혼란기
를 거친 끝에 군사적으로 막 제압된 상황이었으므로 아직 국가의 통치력이 확고히 자리잡지 못한
상황이었으니 호라즘에 이를 갈던 여러 부족들은 칭기즈 칸을 환영하고 협력해 지리등 정보까지 제공합니다.
칭기즈 칸은 이렇게 협력한 부족들에게는 무역이라든지 여러 권리를 보장하여 보답했으니 이렇게
하여 한층 유리해진 칭기즈 칸이 엄청난 속도로 군대를 몰아쳐 새 수도인
사마르칸트 등 트란스옥시아나의 핵심 도시들을 격파하자 호라즘 세력은 바로 지리멸렬해 버립니다.
몽골군의 위력을 본 무함마드 2세는 전면전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도주했으며, 몽골군에 저항한
도시들은 외부지원 없이 저항하다거 점령된뒤 학살당했으며 이란 서부 지역을 돌면서 병력을 모아
보려던 무함마드 2세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카스피해의 한 섬에서 병에 걸려 사망했고
무함마드 2세를 쫓던 몽골 추격대는 도중에 러시아인들의 땅까지 도달하니 러시아인에게는 악연 입니다.
전쟁의 원인을 만든 오트라르 영주 이날축은 오트라르성이 함락된후 몽골군에 붙잡혀서 두 눈에
금을 녹인 물을 들이붓는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당했다고 전해지니 그의 탐욕을 조롱한
것인데..... 2005년에 지상파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 <칭기즈 칸> 에서는 '녹인 금'
설을 채택했으며 2006년에 드라마 <칭기즈 칸> 에서는 끓는 수은을 부은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왕자 잘랄 웃 딘 밍부르누는 옛 수도 구르간즈와 호라즘을 포기하고 가즈니로 갔으니 아프간 에서 병력을
충원한 잘랄 웃 딘은 카불 근교 파르완에서 몽골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으나, 칭기즈 칸이 직접
군대를 몰아 추격해 오자 인도 방면으로 도주했는데 인더스 강변에서 따라잡힌 잘랄 웃 딘의
군대는 몽골군에게 궤멸당했으나 본인은 간신히 탈출해 인도 맘루크(노예) 왕조의 수도인 델리로 갑니다.
잘랄 웃 딘은 맘루크 술탄 샴스 알 딘 일투트미쉬에게 몽골과 싸우자고 제안했으나 일투트미쉬는 거부했고,
잘랄 웃 딘이 토착 세력과 손을 잡고 라호르를 점령하자 일투트미쉬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몰아내자
구자라트, 신드 등을 약탈하다가 인도에서 쫓겨난 잘랄 웃 딘은 1224년 이란으로 갔고, 몽골군이 일시
철수한 틈을 타 분열되어 있던 이란 일대의 군소 영주들을 복속시켰지만 몽골군에게 또 다시 패배합니다.
그러자 잘랄 웃 딘은 반대쪽인 서북쪽의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하여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으니 세력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조지아(그루지아) 왕국을 공격해 수도 트빌리시를 약탈한 뒤 서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이곳에서 서방의 무슬림 국가인 룸 셀주크 왕조 및 아이유브 왕조와 대립하게 됩니다.
결국 1230년에 잘랄 웃 딘의 군대는 룸 셀주크 술탄 카이쿠바드 1세가 이끄는 아이유브-셀주크 연합군
에게 패배했고, 몽골군이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하여 거점까지 잃게 되었으니 살아남아
도주하던 잘랄 웃 딘이 쿠르드족 노 상강도(혹은 암살자) 에게 살해당하면서 호라즘 왕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고, 몽골은 끝내 인도를 정복하지 못하고, 서아시아로 전력을 집중합니다.
1219년 개전 당시 호라즘의 총 병력은 수십만에 달했으니 주력은 타지크족 보병과 투르크족 기병
이었으며 특히 캉글리족과 킵차크족으로 이루어진 기병대는 호라즘 최강의 군대였는데....
또 맘루크와 굴람 연대도 보유하고 있는등 외형적으로는 결코 몽골군에 뒤지지 않는 군세였습니다.
더불어 몽골과 호라즘 사이에는 키질쿰 사막이 놓여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군단이 움직이기에는 위험
요인이 많았으니... 술탄 무함마드 2세는 중국으로 부터 받은 서신을 통해 몽골인들이 야전에는
강하지만 공성에 서툴다는 정보도 가지고 있었는데, 술탄은 당연하게도 성채에서 수비에 치중
하는 전략을 들고 나왔으니, 실제로 금나라는 이런 방식으로 개봉에서 몽골군을 패퇴시킨 바 있습니다.
문제는 몽골군이 과거의 몽골군이 아니었다는 것이니.... 이 전쟁에서 부터 몽골인들의 악명높은 공성
전술이 빛을 발하게 되는데, 동시다발적인 공격으로 적의 거점을 고립시키고 공포전술을 사용하여
내부로부터 무너뜨렸으니..... 피정복민을 동원했고 투석기와 공성추, 누대 등 대규모 공성병기를
도입했으며 하나의 거점이 무너지면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고 소문을 타고 부풀려져 공황을 일으킵니다.
금나라와 달리 호라즘은 정복활동을 막 끝낸후 체제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로, 중국의 정교한 관료제와 지방
통치체제가 구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분산된 각각의 군대 및 요새들의 공조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호라즘이 승리할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수세에 몰리게 되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합니다.
키질쿰 사막을 건넌 몽골군은 1219년 오트라르에 도달하니, 칭기스 칸은 "지휘관은 사로잡으라" 는 명령을
내리자 이날축은 저항했으나 5개월 만에 성이 함락되자 내부의 성채로 옮겨 저항했지만 결국 성채도
뚫렸고 사로잡힌 이날축은 끔찍하게 살해되고 오트라르는 철저히 파괴되며 시민들은 모두 노예로 팔립니다.
사마르칸트에는 10만 수비 병력이 있었으니 칭기스 칸은 공격하기전에 거점들을 함락시켰으니 1220년
3월 부하라가 함락되자 사마르칸트는 고립되었고 부하라의 포로들은 공성전의 최전열에 내몰려
화살받이가 되었는데..... 수비군이 반격에 나섰지만 위장퇴각 전술에 걸려 한 번의 전투에서
5만 명의 병력이 궤멸되었고, 무함마드는 기병을 보내 사마르칸트를 구원하려 했으나 모두 패합니다.
도시는 포위된지 닷새만에 함락되었는데, 수비군은 몽골군에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성문이
열린후 모두 살해당했으니.... 칭기스 칸으로 부터 "두 발로 걷는 것은 모두 죽여라"
라는 명이 있었고 충실히 지켜졌다고 하며, 술탄 알라 웃 딘 무함마드는 달아났으나
제베와 수부타이의 추격을 받아 1220년 12월 카스피해 연안에서 병사하니 잘랄 웃 딘이 뒤를 잇습니다.
다음은 아랄해 남쪽에 수도 우르겐치였으니, 우르겐치의 성벽은 견고했고 주민들이 완강히 저항했기 때문에
시가전에 익숙하지 않은 몽골군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는데... 이 도시는 함락된 후 장남 주치가 소유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주치가 도시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고도 합니다.
공성의 진척이 늦어지자 격노한 칭기스 칸은 주치와 차가타이를 모두 해임하고 오고타이를
지휘관으로 임명했으니.... 1221년 4월 우르겐치가 함락되자 주민들은 저항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했고 살육을 피한 주민들도 몽골군이 제방을 터뜨리는 바람에 모두 익사합니다.
왕자 잘랄 웃 딘은 1221년 몽골군이 철수한 우르겐치로 돌아와 술탄으로 즉위하고 몽골
과의 항쟁을 계속했으니..... 잘랄 웃 딘은 이때 카불 근교에서 벌어진 몽골군
과의 야전에서 승리했는데, 이는 호라즘이 몽골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승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마지막 승전이기도 했으니.... 사마르칸트에 있던 칭기스 칸이 본대를 이끌고 내려와
잘랄 웃 딘의 군대를 궤멸시켰고 근거지인 가즈니를 완전히 파괴했는데, 잘랄 웃 딘은
포로로 잡힐 위기에 빠졌으나 기적적으로 탈출해 인도로 달아났지만 결국은 살해당하고 끝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