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밝은 소는 허수아비를 사람으로 착각하지 않는다. / 성파 스님
산승은 통도사 서운암에 살고 있습니다.
내방객들이 절에 오면 제가 오래 살았다고 법문을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분들에게 ‘나에게 들으려하지 말고 직접 보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제가 가장 하기 싫은 것이 법문이고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일입니다.
그래서 법문은 될 수 있는 대로 안하고 대신 일을 하려고 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니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나이에 비해 건강하다며 비결을 묻는다면
저는 비결이 따로 있을 수 없다고 말할 겁니다.
왜 건강에 매달려야 합니까? 저는 일하기 바쁜 사람입니다.
그리하면 건강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비법이 없습니다. 부지런히 일만 하면 됩니다.
그런 심정으로 오늘날까지 살아왔는데,
조계사에서 초하루 법회가 있다고 해서
못하는 말이나마 해보려고 부득이하게 왔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창피 좀 당하려고 했는데,
와서 보니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법당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습에서
머리 깎은 우리보다 더 지극한 신심을 느낍니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 사람이 동행하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보다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보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나쁜 것도 배우게 됩니다. ‘저래서는 안 되겠다.
나는 저렇게 하지 않아야지’ 하면서 배우는 것이지요.
피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나쁜 것은 되도록 멀리하려 하는데,
마음 한 번 돌이키면 그것 역시 내 스승이 됩니다.
살아가다보면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많이 목격하게 됩니다.
그것을 내 상황에 비춰서 같은 잘못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습니다.
배움이라는 것은 바로 그렇습니다.
제 나이가 80살이 다 되어갑니다만,
오늘 이 자리에 와서도 크게 배우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진리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다고 이르셨습니다.
겁이 나서 할 말을 잊어버렸을 때 ‘식겁하다’고 표현합니다.
1겁은 사방 80리에 이르는 상자에
겨자씨를 한 알씩 넣어 채운 뒤 다시 한 알씩 비우는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인간은 숫자를 하나부터 세어나가지만 끝이 없습니다.
숫자로는 그 무한함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주공간의 넓이 역시 단위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가장 크고 가장 많은 것이
바로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게 바로 하나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화엄경’에 보면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라는 가르침이 있듯이
하나에서 천만억이 나가고 다시 돌아오면 그것이 바로 하나입니다.
높이 올라가다보면 공기가 없는 무중력 공간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공부를 열심히 하면 일체시비가 없는 경지에 이릅니다.
청탁이 없고 고저가 없고 장단이 없는 공간입니다.
그 상태에 까지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수행을 통해 도달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시시비비를 가리면서 고통스러워 합니다.
이럴 경우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아무 시비가 없습니다.
죽었는데 어떻게 시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항상 나보다 어려운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면 그저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편안한 삶입니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입니다.
처음 발심만 단단히 지키면 그것이 바로 정각입니다.
어느 사찰에 돌 석상이 있었습니다.
그 석상의 입은 세 번 끌어맨 형상입니다.
등에는 ‘이 사람은 옛날에 말을 조심하는 사람이었다.’라고 새겼습니다.
입을 한번 끌어매도 말을 못하는데 세 번이니 어떻겠습니까?
선방에 가면 처음 절에 들어온 사람들,
사미들이 앉는 자리에 ‘삼함(三緘)’이라고 써놓습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말을 주의해야 합니다.
평생 살아도 말은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좋은 말을 하면 선근의 씨앗이 돼 좋은 결과가 생기고
안 좋은 말을 하면 악연이 돼 안 좋은 결과가 생깁니다.
예전에 도를 깨친 스님이 지은 시 한편이 있습니다.
고초폐의화작인(枯草弊衣化作人)
야금산수총의진(野禽山獸總疑眞)
황년험세무우객(荒年險世無憂客)
전국징병누적민(戰國徵兵漏籍民)
태세장시종사무(態勢長時終似舞)
형용심야갱생신(形容深夜更生新)
가우유력겸명안(家牛有力兼明眼)
직입전중끽우신(直入田中喫偶身)
마른풀 헤진 옷으로 인형을 만들어 놓으니
들새 산 짐승들이 긴가 민가 의심하네.
흉년들고 험한 때도 근심걱정 없고
전쟁 통에 병사모아도 족보 없는 사람이라네.
뚫어져라 쳐다봐도 미동도 하지 않지만
한 밤중이면 행색에 생기가 돋아나네.
그러나 내 집에 눈 밝고 힘 센 소가 있는데
성큼성큼 논밭으로 들어가 허수아비를 먹어버렸도다.
이 시에서 풀을 뜯어먹는 소는 자성, 곧 스스로의 심성입니다.
심성이 밝으면 허수아비를 사람처럼 꾸며도 속지 않습니다.
들새와 산짐승들은 사람인줄 알고 오다가도 멈춥니다.
우리들은 깨닫지 못했을 때 진짜 사람인지, 가짜 사람인지 분별하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했을 때 정법인지, 망상인지, 본심인지, 자성인지 분별하지 못합니다.
소가 눈이 밝다는 것은 안목이 밝다는 것입니다. 이치를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물을 바로 보고 명석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지혜의 광명이 샘솟아 환하게 보입니다.
본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볼 수도 있고
허수아비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보는 눈, 지혜의 눈을 열어야 합니다. 눈
은 어떻게 여느냐, 진리를 깨달으면 열립니다.
예전에 스승이 상좌를 불러 등을 밀게 했는데,
상좌가 스승의 등을 탁탁 두드리며
“법당은 좋은데 부처님은 영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허우대는 멀쩡하지만 지혜가 밝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목욕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벌이 한 마리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벌은 밖으로 나가고자 했지만 창호지에 뚫린 구멍을 찾지 못해
문에 자꾸 부딪치고 있었습니다. 상좌가 말했습니다.
공문불긍출(空門不肯出)
투창야대치(透窓也大痴)
백년찬고지(百年讚古紙)
하일출두기(何日出頭期)
“열려있는 문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자꾸만 창문에 부딪치니 어리석도다.
백 년을 그렇게 묵은 종이 뚫어본들
대가리 빠져 나가는 날 언제 올까”
여기서 ‘공문’이라는 것은 부처자리, 극락입니다.
새가 새장에 들어가 있을 때야 비로소 숲 속이 극락임을 알 수 있듯이
여러분들도 여기 조계사에 와서 법문 듣고 기도하고 마음 닦고 있으니
바로 극락임을 알아야 합니다.
극락 가운데 극락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번뇌망상에 사로잡히지 말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능히 자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충분히 길러야 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
나는 극락세계에 살고 있다’고 마음먹는다면 몸에 병이 나지 않습니다.
오늘 누군가는 병원에 갔겠지만 여러분들은 이렇게 조계사에 와 있습니다.
누군가는 일과를 정해놓고 병원을 찾지만
여러분들은 일과를 정해놓고 극락세계에 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 잘 깨달으면 그대로가 바로 도입니다.
행복은 먼 데서 빌려올 것 없이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내가 마음을 깨우쳐 내 법에 내가 있으면 설령 부도가 나더라도,
그로 인한 행복은 차압당하지 않습니다.
내 법은 어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남편도 뺏을 수 없습니다.
그 보배를 스스로 알아차리면
천하의 갑부가 되고 천하의 행복을 얻습니다.
여기 참석한 분들은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파 스님 / 통도사 방장 (현 종정 예하)
출처 : 지리산 천년 3암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