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입구는 하루에 한번 기차가 지납니다. 철로는 닳아질대로 닳아져서 아스팔트와 거의 평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반짝이는 하얀 선이 그곳이 기차가 지나는 곳임을 알게 할 뿐 별 흔적은 없습니다 . 그래도 기차는 때가 되면 느릿느릿 갑니다. 기차는 방금 지났던 기억의 힘으로 평지처럼 밋밋한 선을 지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철로를 지나면 참 오래된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은 한 오십년은 넘었을 건물들이 쓰러질 듯 서 있는 곳입니다. 어느 집은 1층과 2층 그 사이가 타원으로 주저앉은 곳도 있고, 언덕을 타고 흘러내린 절벽 한 귀퉁이에는 여인숙 간판이 간신히 기대어 서 있기도 합니다.
그 동네 사람들은 집 앞에 벽돌색 고무 함지박을 내놓고 상추를 키우고 파를 키웁니다. 아침이면 발 내린 샷슈문 앞에 할머니들이 나앉아 마늘을 까고, 리어카가 느리게 지나며 말린 갈치를 팔기도 하는 곳입니다.
그곳을 오간 지가 벌써 몇 년이 넘어갔는데도 그 마을에 들어서던 첫 느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엊저녁 건져 올린 물것들이 바다 바람 속에 말라가는 그 큼큼하고도 은근한 냄새가 건드려 주던 느낌.
그것은 잊혀졌던 아니면 묵혀 오던 옛것들을 불러오는 냄새이기도 했고, 그냥 그냥 살면서 썩어가던 것들이 풍기는 냄새이기도 했고, 하얗게 선만 남은 철로 위를 안개처럼 싸안고 도는 풍경이 주는 냄새이기도 했습니다
아직 그 냄새가 건드려 주는 것들을 채 들쳐 내지도 못하고 , 한사코 살아남아 있는 반짝이는 쇠의 근성을 다 알아채지 못했는데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쁩니다. 늘 망설이고 주저하고 염려하고 의심하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점점 낡아가고 허물어져 가는 시간 앞에 새로운 문을 내어주신 무등일보와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말없이 응원하고 있는 나의 오랜 님께도 고마움 전합니다.
이제 작은 함지를 골목에 내놓고 푸른 것들을 키우고 싶습니다. 세상에 널려 있는 아픈 은유를 말하고 싶습니다.
<신춘문예>시 심사평
허형만 시인, 목포대 교수
"기본적인 시적 역량 독창성 돋보여"
올해 응모작이 1천편에 달했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몽유도원도' 외 4편, '젊은 도서관' 외 3편, '팥죽을 끓이며' 외 2편, '불이 짓는 집' 외 3편, '아우슈비츠' 외 3편, '썩는다는 것에 대하여' 외 3편 등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신춘문예'의 성격상 한결같이 신인의 시는 참신해야 하고 진정성이 있어야 하며 튼튼한 시적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새로운 상상력과 언어 사용, 시적인 표현과 리듬은 시가 갖추어야 할 기본이다.
아울러 시적인 기량과 작품으로서의 완성도, 그리고 기성 작품과는 다른 자기만의 체험을 통한 독창적인 내용과 시형식의 새로움이 요구된다.
공정한 심사를 위해 표지를 뜯어내고, 혹 작품마다 이름이 있는 경우 그 이름까지 도려낸 신문사 측의 배려로 누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 채 앞에서 밝힌 심사 기준에 의해 심사를 하면서 소재와 표현기법이 표절을 의심할 정도로 기성 작품의 냄새가 짙거나 어떠한 형태로든 일단 발표되었다고 판단된 작품은 일단 제외시켰다.
또 최종 확인 과정에서 기성 문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응모자의 작품도 제외시켰다.
올해도 신춘문예의 경향에 맞추기 위한 장시와 산문화, 기존 신춘문예 당선작의 아류는 물론 참신한 발상에 비해 언어의 밀도가 떨어지거나 추상성으로 인해 주제의식이 선명하지 못한 작품이 많았다.
특히 진부한 소재와 개인별 응모작의 수준이 고르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심사위원들은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을 놓고 진지하게 토론을 하면서 위에서 지적된 문제점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아우슈비츠'와 '팥죽을 끓이며'를 다시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응모작의 수준이 고를 뿐 아니라 전체적인 구성이 단단하고 화자의 의식이 과도하게 노출되지 않으면서도 시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능력과 신선함이 인정된 '팥죽을 끓이며'를 당선작으로 뽑는데 합의했다.
한편 기성 작품의 흉내나 냄새의 혐의가 전혀 없는 신선한 이미지로 조류독감에 의해 살처분돼야 하는 닭의 현실을 아우슈비츠로 상징화 한 작품 '아우슈비츠'에 대하여도 장시간 논의가 있었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