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선배가 다니는 회사는 몇 해에 한 번씩 해외 지사로 파견을 보내면서 직급에 따라 현지에서의 숙소를 정해주고, 그곳에서 쓸 짐을 회사측의 화물편으로 부쳐준다. 대리는 2 톤, 부장은 3톤...뭐, 대충 그런 식이다.
굉장하다고 생각한다. 이 회사의 사람들은 파견을 나갈 때마다 자기 인생의 무게를 확인하는 것이다.
선배는 원래 부모님 집에 살고 있었지만, 선배의 형이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집으로 들어오게 되자 따로 나와 살게 되었다. 선배의 짐은 꽤 단촐한 편이었다.
책꽂이 몇 개, 책상 두 개, PC와 TV, 비디오, 오디오,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냉장고와 식기, 세탁기, 건조대, 이불과 쇼파, 커튼과 장식장...그리고...따로 열거할 필요 없을 것 같은 생활을 위한 소품들...일상적으로 쓰는 물건들을 가지고 있었고, 일상적이지 않은 물건들은 드물었다. 낙서한 영수증까지 보관하는 나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어른들의 집기란 건 알아보기 쉬운 모양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떠나기 며칠 전, 선배가 전화를 걸었다. 술이나 한 잔 하자며 당장 나오란다. 학원 수업을 하는 동안이었지만, 다 뒤로 미루고 나갔다.
술자리에 앉은 선배 옆에는 커다란 박스가 놓여있었다. 뭐냐고 묻자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며 나에게 맡고 싶은 짐이란다.
상자는 컴퓨터로 "취급주의-깨지는 물건"이라고 프린트 된 A4 용지가 붙어 있었고, 꽤 단단히 포장이 되어 있었다.
"...위, 위험한 물건 아냐? 느낌이 안 좋은데...왠지...!"
"그럴리가 있냐? 확인해 봐...!"
2중, 3중으로 붙여진 접착 테이프를 뜯어내자, 왠 종이 뭉치들 수십 개가 들어있었다. 주먹 반 개만한 크기의 누런 종이 뭉치들이었다.
"...사제 폭탄 아냐? 형 고등학교 때 그런 거 만든다고 연구했었잖아?"
다른 사람들 같으면 이런 물건 맡아주는 것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겠지만, 언젠가 한 번 생물학과 친구 녀석의 짐을 맡아주었다가 큰 낭패를 본 적이 있었기에 무척 망설여졌다. 자기 학과 연구소를 옮기는 동안만 맡아달라기에 집에 두었는데, 나중에야 그 물건이 뭔질 알게 됐다. 그 빌어먹을 녀석은 자기네 연구소에서 샘플로 쓰는 곰팡이를 통째로 내게 맡겼다. 몰랐을 땐 마음 편했는데, 나중에 뭔지 알게 되자 등골이 서늘했다. 나는 각종 곰팡이가 든 샬레 수십 개를 방안에 두고, 거기서 밥도 먹고, 라면도 먹고, 책도 읽고, 잠도 자고, 이빨도 닦고 했던 것이다. 하기야...서늘한 곳에 두라고 했을 때 확인을 해 봤어야 했다...제길...
"...형이 뜯어보면 안 될까?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한 건드리기 싫은 걸?"
"자식이, 중국놈 빤스를 반찬으로 싸 가지고 다니나...안 본 사이 소심해져 가지고선..."
"이왕이면 '안 본 사이 섬세하고 조심스러워 졌다.'고 정정해줘...인생이란게 뭔지 배웠걸랑...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개를 들어 포장지를 까기 시작했다. 종이를 벗기자 나온 물건은 해골마크가 새겨진, 심지가 붙은 검은 구체...일리가 없고, 굉장히 잘 만들어진 도자기 인형이었다.
"다른 건 그냥 집에 둬도 괜찮겠다 싶은데, 이거랑 몇 가지는 안심을 못하겠어. 아버지 집에 형네 식구들이 들어와 살고 있잖냐? 근데 조카 녀석이 보통 건강해야 말이지. 입에 넣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조카가 큰일이야...? 아니면 인형이 큰일이야...?"
"...두, 둘 다...아무튼...니가 딱이다. 집에 애기 없지? 당분간 결혼할 생각도 없고?"
"...결혼은 잘 모르겠지만 애기 문제는 확답을 지을 수가 없는 걸? 최근 생각으론 어디서 하나 줏어올까 하는데...공짜로 낳아볼 생각도 있고...딴데 가서 알아보면 안 될까? 정자 수가 모자라서 불임인 친구 녀석이 하나 있거든..."
"까불지 말고...당장 못 맡겠냐?!"
"우씨...! 이거 밑에 쪽엔 사제 폭탄 깔아 둔 것 아냐? 형 옛날에 무협지 보고 벽력탄 만든다고 난리친 적 있잖아? 대학교도 화학과로 간 주제에...어디 믿을 수가 있어야지?"
"뱀파이어랑 인터뷰하겠다고 설치던 너보단 나아...대학을 가고 싶은데로 가냐? 적성에 맞게 대충 고르는 거지. 그렇게 따지면 넌 신방과로 갔어야 되는 거 아니냐?"
"사회생활과 신비주의의 간극을 너무 늦게 깨달았거든...이과 주제에 문과의 델리게이트한 정신 세계를 침범하지 말아줬음 좋겠어...!"
"잔소리 말고 맡아! 잘 정리하고...일주일에 한 번씩 젖은 걸레로 닦고, 마른 걸레로 마무리하고...아, 그리고 서늘한 곳에 두라구! 알겠냐?!"
"...이, 이런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어! 이거 곰팡이지, 그치? 곰팡이가 아니면, 조금만 온도 올라가도 폭발하는 폭탄인 게 틀림없어! 안 속아! 도로 가져 가~! 제기랄~!"
심술 때문에 버티긴 했지만 맡아줘야 겠다는 생각은 했다.
파견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선배는 그 도자기 인형을 하나 하나 포장하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수십 개를 종이에 싸서 박스에 넣은 다음, 봉글봉글한 비닐을 구해 사이에 끼우고, 테이프를 바르고, "취급주의..."하는 글자를 컴퓨터로 프린트해 붙였다.
혼자 쭈그리고 앉아, 그런 짓을 하는 선배를 상상하면 조금 가슴이 쓰렸다. 파견 기간 5년은 꽤 긴 시간이고 선배에겐 미련을 정리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되바라지게 말도 잘 하고, 자기 할 일을 챙기는 것도 소홀하지 않았지만...나는 알고 있다. 선배는 언제나 어디서나 그렇게 냉정하고 똑똑하게, 자신의 일을 잘라내는...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이 사람도 결코 헛수고를 두려워하지 않는 충분한 바보인 것이다.
"언제 출발해?"
"내일 모레 5시..."
"...흠...얼굴 볼 시간은 되겠군...집으로 갈게..."
나는 박스를 들고 돌아왔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박스는 어머니 손에 온통 풀어 헤쳐져 있었고, 수십 개 되는 도자기 인형들은 우리 집 장식장을 온통 메우고 있었다. 우악~! 이건 맡은 물건이란 말입니다~!
"여기에 놓고 잘 보관하는게 훨씬 더 좋아. 박스에 쌓아두면 더 깨지기 쉬운 거 모르니?"
아아...왠지 이해하기 힘든 논리지만, 그걸 다시 포장하기엔 내 정성이 너무 부족했다. 묵념...!
선배가 모은 인형들은...그렇게 놓고 보니 꽤 그럴 듯 했다. 흔한 천사 인형에서, 꽤 드문 디자인의 리얼 스타일 마릴린 몬로 시리즈까지...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수집품이었다. 보고 있자니, 선배가 애써 마련한 정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을 두고 기억이 쌓이듯 차곡차곡 도자기 인형은 모여진 것이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특별히 필요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하고 싶었기에...선배는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 잘 깨지고, 거창하게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그냥 하고 싶어서...결코 논리적이지 못한...자신에게 충실한...그런 바보짓. 하지만 그 인형들은 말 그대로 선배만의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선배가 떠나기로 한 날, 조금 서둘러 선배의 집으로 갔다. 짐은 거의 다 옮겨 놓았는지, 좁은 오피스텔이 꽤 넓어 보였다. 거실의 커다란 박스 위에 선배는 온 집안 문을 다 열어 놓은 채 앉아 있었다. 인사를 주고 받았지만, 텅빈 방에 울리는 메아리가 귀에 거슬렸다. 헤어진다는 건 아쉬운 만큼 부끄럽고 거추장스런 행위다.
"...정리한다고 했는데...이것들은 남아버린 것 같아."
"뭔데, 그게...?"
"아아...다 읽은 전공서적하고...레고 블럭 몇 개...이런 게 어디 남아 있었던 건지 모르겠어...레고 테크닉 시리즈인데 가질래? 너 아니면 집에 가져다 놓을려고 하는데..."
"...우리 집으로 가져가면 어머니가 욕해...그리고 난 레고보다는 조이드 파 였다구...다른 건 없어?"
"...음...이 녀석..."
왠 도마뱀이 든 수족관이 눈에 들어왔다.
"맡아주기로 한 회사 친구가 지방으로 급하게 다녀올 일이 생기는 바람에 붕 떠 버렸어. 회사에 들러 맡겨야 할까?"
"...애물단지들을 끼고 사셨군, 그래? 이리 줘. 언제 어디로 갔다 주면 되는데...?"
"아아...고맙다...핸드폰 번호가..."
번호를 적어주며...조금 풀 죽은 투로 선배가 말을 이었다.
"...2.5톤이랜다...내가 가지고 갈 수 있는 물건들은...조금...그래...나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승진도 빠른 편이고...아무튼 꽤 노력했거든...그런데...500킬로 그램이 모자라서 포기해야 하는 물건들이 너무 많아...목적지까지 가는데...내 다리 힘이 조금 부족한 거야...조금...그게 조금 억울하다..."
"...아아..."
그러고보니...나는 선배의 나이를 잊었다...아직 26살...세상 모든 것에 초연하기엔 이른 나이다. 이 사람도 무섭고 겁이 나고...왜인지, 누구를 향해서인지는 모르지만...어쨌든...억울한 것이다...무언가, 자신을 이루고 있던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약간은 분한 것이다.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나야 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24살이었다.
이렇게 말해주었다면 어땠을까? 선배는 잘 해 왔다고...누구보다 노력했고, 그건 내가 보증해 줄 수 있다고...다리 힘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목적지의 통과점을 지나는데, 아주 약간의 시간이 모자랐을 뿐이라고...나였다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여러가지 선택을 그 누구보다 멋지게 해 냈고...그것 때문에 지금 당장은 서글플지 모르겠지만...아마 그 역시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선배의 방식으로, 선배가 원하는데로 다시 이루어 낼 수 있을 거라고...그렇게 말해주었다면 참 좋았을 것을...반드시 해야 할 말들은...왜 그 당시에 떠오르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이것 저것...되지도 않는 농담을 나누다 보니...일어 설 시간이 되었다. 선배는 가방을 챙겨들고, 박스를 들어 차로 옮긴 다음...시동을 걸고...내 앞에 섰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난다...바람이 새는 것처럼...헤실 헤실 서로 얼굴을 보며 웃기만 한다.
"...간다, 임마..."
"...아아...연락해...!"
"...그...인형 중에 '브레멘 음악대'는 좀 신경을 써 줘. 이젠 못 구하는 물건이야..."
"하하...중국놈 빤스가 비행기 기내식이야...? 걱정말아..."
"아아...그래...음...좋은 사람 생기면 나한테 먼저 알리고..."
"...형부터 먼저..."
악수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굳게 쥐게 됐다...
결국 선배는...그렇게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자신의 새로운 집으로 향해 갔다. PC와 TV...비디오와 오디오...세탁기와 냉장고...책상과 쇼파...그렇게...오직 생활을 위해 필요한 물건들만이. 선배의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다.
선배가 떠나고 남은 자리에 내 몫으로 돌아 온 것은...살아가는데 있어 필수적이지 않은 것들...도자기 인형과 도마뱀이었다...아무리 생각해도 쓸모 없는...긴 시간 계속되어 온 바보짓의 결과물들...
...하지만 그야 말로...온전히 선배 그 자체인...살아가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그런 바보 같은 것들...
수족관의 도마뱀은 피곤했는지, 아니면 우울했는지, 조그맣고 까만 눈을 이리저리 굴리기만 하며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다. 쉬게 해 주고 싶었다...이제 선배가 없으니...이 녀석도 새롭게 무언가에 적응해야 하겠지...그 전까지...어디에서든 한 번 늘어지게 재워주고 싶었다...
나는...같은 상황에서 선배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생활과 감정을 어떻게 자로 나누듯 분리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이 자신에게 필요하고, 어떤 것은 잠시 놓아야 하며, 어떤 것을 잊어버리지 않을까...그런 것을 어떻게 택하고 알아낼 수 있을까...?
논리와 감상...필수적인 생활과 자신을 이루는 것들...일상과 초월...그 사이에서의 선택...아무래도 힘든 일이다, 나에겐...
그 뒤부터...나는 인생의 무게를 줄이기로 했다. 꼭 필요한 물건과 그렇지 않은 물건을 가릴 능력은 내게 없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외의 면에 관해선...무게를 줄여 놓아야 할 것이다.
더 큰 TV를 포기할 것이다. 한 14인치로 만족할까? 비디오는 2헤드라도 상관없고, 오디오는 미니 콤포면 되겠지...그도 아니라면 CD 플레이어 하나면 될지도 모른다. 신기종의 PC로 업그레이드를 하는 것보다는 PC방 카드를 신청하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손빨래에 익숙해지고, 압력솥으로 먹을 만큼만 밥을 한다면 굳이 괜찮은 밥통도 필요없겠다...자동차는 발이라기 보다는 이동을 위한 선택이므로, 자동차 유지비에 돈을 들이 붓느니 버스 카드를 하나 더 사는 게 좋겠지...자전거는 어떨까? 아주 멀리 떠날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비행기를 타고...그 외의 장소를 갈 때는 좀 더 여유를 둔다면...? 그렇게 하면...아마 모든 것이 조금은 가벼워질지도 모르겠다...그렇게...내 인생의 무게를 2톤 안팍으로 묶어두는 것이다...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가고 싶은 곳으로 갈 때...너무 허전하고 너무 많은 것을 버리고 가지 않아도 되도록...
알고 있다. 이런 선택은 물론 나의 값어치를 높여주지 않는다.
그저...내 인생을 값으로 따질 수 없게 만들어 줄 뿐이다...
아무튼...살아가는데 있어 여러가지에 관한 선택은 비극적인 필수다.
나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을 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한다면...적어도 도마뱀은 고요히 잠들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