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곧 실천 하는 것 / 박성배
“깨달음이란 곧 實踐하는 것” (1)
-전남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와 있던 박성배 박사(53. 뉴욕주립대 종교학과)가 1년간의 강의를 마치고 지난 12일 미국으로 떠났다. 박성배 교수는 69년 한국을 떠나기 전 동국대학교에서 인도철학을 가르쳤으며 한 때 해인사로 出家하여 화제를 모았던 불교학자. 16년만에 돌아온 박성배 교수의 눈에 비친 한국 불교는 어떤 모습일까. 또 한국 불교를 위해 그가 제시하는 “衆生佛敎”의 구체적 논리는 무엇인지 離韓을 며칠 앞두고 인터뷰를 통해 알아봤다.
-다시 떠나신다니 섭섭합니다. 오늘 선생님을 찾아 뵌 것은 故國에 돌아와 1년간 살펴 본 한국 불교의 현상과 발전적 전망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어서입니다.
[좀 거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히 말해 현재상태라면 장래는 비관적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일부 희망적인 부분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근본적인 방향전환이 없는한 한국불교는 形骸化하거나 枯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한국 불교의 현실을 비관적으로 진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한국 불교는 民衆과 遊離되어 있습니다.
중생의 고통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의 요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 지를 모른 채 관념화된 깨달음만을 되뇌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현상을 불교가 고답적이고 철학적인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하는데 나의 견해는 다릅니다.
불교는 모든 중생이 부처이다,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불교의 깨달음은 부처님이나 일부 고승들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가능하다는 보편성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깨달음을 산중으로 끌고 들어가 특수화시킴으로써 민중이 불교의 진실에 접근할 수 없도록 높은 담을 쳐 놓고 있습니다. 불타의 깨달음이 보편화되지 않는 오늘의 불교를 놓고 어떻게 미래를 낙관할 수 있겠습니까?]
-보다 原論的인 질문입니다만 그렇다면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어떤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불교의 바른 깨달음은 일체중생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상태입니다.
부연하면 불교의 깨달음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존재(存在)의 실상(實相)은 모두가 서로 의존하고 보완하는 연기적(緣起的) 관계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일체 중생은 현상적으로는 이체(異體)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체(同體)입니다.
동체(同體)에 대한 자각은 필연적으로 이웃과 고통을 나누는 大悲의 행동을 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오른손이 다치면 왼손이 치료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동체(同體)이기 때문이듯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불교의 깨달음이 이와 같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은 관념적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깨달음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고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듯이 “自性을 깨친다”고 할 때 그 自性이란 무엇입니까?
[自性을 실체(實體)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법성(法性)”과 통하는 말이어야 합니다. 법성은 곧 연기성(緣起性)이고 연기성은 곧 동체성(同體性)입니다.]
-질문이 중복되는 것 같습니다만 불교의 깨달음이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중생의 고통입니다.
일체중생이 나와 한 몸인데 그 일체중생이 고통에 있다면 나는 당연히 대비(大悲)의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위(當爲)라기 보다 본능(本能)입니다.
이웃은 사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깨달음이 대비(大悲)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바로 그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실천적 행동을 留保하는 것이라는 것이 종래의 생각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화엄경에 보면 “以普賢行 悟菩提”, 즉 이웃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보리(菩提)를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을 饒益케 하는 행위 자체가 보리를 구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동체적(同體的) 인식을 가졌다해도 남을 이롭게 하는 일에는 주저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행동없는 관념화된 깨달음이 갖는 허구성 때문입니다.
중생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업(業)”을 짓지 않으면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해도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합니다.
한국 불교 고승(高僧)들이 그 좋은 예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수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수행은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실천입니다.
염불이나 참선은 비연기적(非緣起的)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동체대비를 실천하려는 종교적 상징이고 다짐이어야 합니다.
흔히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먼저 깨닫고 나중에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 시간적 선후(先後), 가치관적 상하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요약해서 말하면 이기성을 극복하고 이웃을 동체로 느끼는 경험이 깨달음이고 이런 깨달음은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불교는 깨달음의 참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獨坐하고 염불이나 참선만 하면 견성오도(見性悟道)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다보니 깨달음이란 일부의 전유물로 특수화되어 진정한 깨달음의 지평은 확대가 아니라 축소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불교는 그런 뜻에서 역사적 전개가 잘못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깨달음이란 곧 實踐하는 것” (2)
-그렇다면 한국 불교의 바른 역사전개를 위해 어떤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나는 1년간 고국에 머물면서 "중생불교(衆生佛敎)"의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중생불교는 과거 한국 불교의 전통인 "고승불교(高僧佛敎)"에 대한 반성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고승불교와 중생불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고승불교는 과거에 있던 고승들의 관념적 깨달음의 불교, 중생의 구체적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 행동이 없는 불교를 말합니다.
그러나 중생불교는 이웃을 동체(同體)로 알고 대비(大悲)를 실천하는 앞으로 "있을, 있어야 할" 불교입니다.
고승불교가 청산돼야 할 이유는 간단합니다.
중생이 고승을 존경하는 것은 중생이 못하는 "중생을 위한 일"을 고승이 온몸으로 하기를 바라는 뜻에서인데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존경에 대한 배신입니다.
이와는 달리 중생불교는 중생을 그대로 부처로 알고 모시는 불교이기 때문에 반드시 있어야 할 불교입니다.
중생이 그대로 부처란 말이 戱論이어서는 안됩니다.
고승불교는 말로만 중생이 부처라고 했지 실제로는 "중생" 이고 "남" 이었습니다]
-고승에 의한, 고승을 위한 고승불교를 중생에 의한, 중생을 위한 중생불교로 전환하기 위해 선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입니까?
[관념적 깨달음을 실천적 깨달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존재의 실상(實相)은 연기(緣起)이고 연기(緣起)는 동체이며 동체는 대비이고 대비는 바로 실천이고 행동입니다.
대비를 실천하자면 동체인 이웃의 고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산중에 독좌(獨坐)해서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현대 사회의 조직화 메카니즘은 중생을 구조적으로 억압하고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는 인간을 평등치 못하게 하고 공산주의는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조직이나 제도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그것에 대해 분명히 아니라고 말하고 고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잘못된 현실을 보고도 자비라는 이름으로 방관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죄악에 대한 봉사가 됩니다.
불교인들은 흔히 적극적인 행동을 중도(中道)정신에 어긋난다하여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중도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옳고 바른 것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中" 은 좌우의 가운데가 아닌 "正"입니다.
종단이 망하고 불교가 망해도 중생이 망하면 안된다.
이것이 불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중생불교의 이념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회적 구조악과 싸워 중생을 고통으로 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은 요즘 얘기되고 있는 민중불교(民衆彿敎)와 비슷한 논리인데 중생불교는 그것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한국에서의 민중이란 개념은 억압받고 빼앗기고 소외된 계층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중운동은 민중이 뭉쳐서 억압하고 빼앗는 계층과 투쟁하여 승리하자는 것입니다.
왜 투쟁해야 하느냐에 대한 이들의 대답은 "민중의 권익은 기득권자의 선심으로 확보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들의 이기적 탐욕으로 억압구조가 강화되기 때문" 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법은 갈등과 투쟁 뿐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로 사용되는 민중불교는 어느 일방을 증오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불교는 빼앗고 억압하는 사람조차 구제해야 할 중생이요 동체라고 인식합니다.
그들은 증오와 적개심의 대상이 아니라 자비로 구제해야 할 대상입니다.
여기서 자비란 반드시 관용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매를 들어야 하고 심하게 썩은 부분은 잘라내는 것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폭력도 자비란 말씀입니까?
[물리력도 경우에 따라서는 자비의 反面佛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물리력은 증오심이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자비로운 매질"이랄까]
-증오나 적개심 없는 "자비로운 매질"이 인간에게 가능합니까?
[연기(緣起)를 깨닫고 동체(同體)로 느끼느냐 아니냐가 자비를 물리력으로 만들고 물리력을 자비로 만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장난이 아닌 행동으로 표현할 문제입니다.
우리가 유의할 것은 연기와 동체의 자각은 처음부터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는 만큼 실천하고 실천한 만큼 알아지면서 완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구경각에 이르는 보살의 53위는 깨달음과 실천의 깊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 사회가 보살의 개인적 대비행만으로 정토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까?
[우리에게는 공업(共業)과 불공업(不共業)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노력으로 해결할 것과 집단적 노력으로 해결할 것이 다릅니다.
개인의 탐욕과 이기심도 극복되야 하지만 잘못된 조직과 제도도 고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사회와 개인에 대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가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대학생들은 이를 사회과학적 인식이라고 하는데 불교 식으로 말하면 4제 8정도(4諦 8正道)의 논리입니다.
4제 8정도의 안목으로 분석하고 실천해야 불교가 역사와 사회 안에서 제 할 일을 다하게 됩니다.]
- 대원불교대학에서 펀 글.
첫댓글 글을 실컷 정리해서 올려놓고 박성배 교수...라고 조회를 해보니 예전에 파랑새님께서 한 번 올리신 글이네요...이상하게 어쩐지 낯익은 내용이더라니...ㅠ.ㅠ 박성배 교수님 글이 하도 많이 올라와서 그렇겠거니 했더니 실제로 올라왔던 글이네요. 내릴까 하다가 내용이 좋아서 복습하는 셈 치고 놔두렵니다. 며칠뒤 내리겠습니다. _()()()_
그런데 이 글을 쓰신 것이 86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만 20년이 더 지났는데 한국 불교는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그리고 요즘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박성배 교수님의 글에는 제 생각에 중요한 두가지가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생명과 보현행원...언급이 없으시네요. ^^; _()()()_
뭘 내리
내리지 말고 보면 되지요... 까막 중생이 한번 본다고 다 아는것도 아닌데 ^^** 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왜 제가슴이 다 뿌듯할까요 _()()()_
파랑새님, 언제나 감사할 뿐입니다. ^^ _()()()_
파랑새님의 답글에 동조합니다 감사합니다 법혜님 마하반야바라밀
좋은 글은 몇 번이고 가져와도 되지요 파랑새님 말씀대로 한번 본다고 다 압니까 그런데 같은 글도 뒷북()은 문제()가 좀 되겠지요... 카페에 자주 오시지 않는 관계로, 무슨 글이 올라왔는지도 모르고 며칠 전에 올려진 글을 새 글인 줄 올리고 하는 게 문제()겠지요... 특히 뜨거운 토론이 이미 있었던 글이 다시 올라오면 김()이 좀 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하고 읽을 글들이 많은데...
^^ 덕분에 고맙게 열공하고 갑니다. 항상 고맙습니다...........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_()()_ 마하반야바라밀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고맙습니다. 이 글을 보셨으면 하는 분이 인연이 닿아 보셨으면 합니다._()_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고맙습니다...보현행원 !!.._()()()_
감사합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보현행원에 대해 조금 이해를 할수있는 요즘 다시 글을 보니 마음에 닿아오는게 다릅니다..보현행은 깨달음의 실천입니다..마하반야바라밀.._()()()_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