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드는 것만이 살길이다
증 언 자:김영호(남)
생년월일:1960. 9. 1(당시 나이 20세)
직 업 :농기구 기술자(현재 농공장 경영)
조사일시 : 1989. 1
개요
5월 19일 친구가 계엄군의 돌에 맞아 수술을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5월 20일부터 시위차량에 탑승하여 시위를 하고 다녔다. 21일 지원동 버스종점에서 카빈 1정과 실탄 8발을 배급받고 화순 예비군 중대본부에 있는 무기를 가지러 가던 중 너릿재 부근에서 잠복해 있던 계엄군의 총에 맞아 다리를 다쳤다. 화순 최의원으로 가서 대충 수술을 하고 다시 시위차에 탑승하여 중대본부 무기고에 가서 총과 무기고에 가서 총과 실탄을 화순지역 청년들에게 배급한 뒤 광주로 와 집에서 치료를 하고 있다.
어린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나는 1960년 9칠 전남 화순에서 2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이곳저곳에서 사업(땅콩 도매업)을 하셨으므로 국민학교를 네 군데나 전학을 다녔다. 5살 때 가족이 대구로 이사를 갔는데 그곳에서 아버지 사업이 번창해 서울로 이사했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될 즈음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두 집 살림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매우 싫어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기복이 심했다. 서울에서 용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상도중학교를 다닐 무렵 아버지가 부도를 내고는 행방불명되어 버렸다. 집안의 기둥을 잃은 우리 집은 어머니가 행상을 하면서 겨우 입에 풀칠은 하였으나 납부금조차 내기가 힘들었다. 그때 담임선생님이 "너는 머리가 좋아 공부도 잘하니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다녀라"며 납부금까지 주시며 위로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살기보다는 고학을 하는게 낫겠다고 생각해 학교를 중퇴했다. 그때 어머니가 팍팍한 서울 바닥에서 살기 싫어하셔서 전가족이 광주로 내려왔다. 광주로 내려와서 혼자 공부를 하려니 쉽지가 않았다. 장남이라 동생 뒷바라지도 해야 하고 집안살림도 꾸려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는 것보다 돈을 버는게 급선부인 것 같아 15세 때부터 농가구 기술을 배웠다. 어느정도숙달이 됐을 때는 30만원이 넘는 월급을 받았다.
친구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1980년 당시도 농가구 종업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방관자의 입장에서 시위에 동참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5월 19일 저녁 친구가 비아 가는 쪽에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눈이 찢어졌다는 애기를 들었다. 그러고는 후배들이 찾아와 왜 참여하지 않느냐고 부추겼다. 나는 가만허 앉아 있을 수 없어 20일부터 시내에 나갔다. 시내 전체는 최루탄에 뒤덮여 있었고 갖가지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젊고 혈기황성했던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본격적으로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시위차에 탑승하여 '계엄해제', '전두환 물러가라',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를 외쳤다.그때는 광주 시민들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었다. 시민들이 빵,음료수,김밥 등을 주어 먹는 것에는 불편함이 전혀 없었으며 하다 못해 치약,수건까지 건네주었다. 21일도 시위대와 함께 열심히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했다.
그런데 오후 2시정 도청 앞 시위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두 사람의 부상자가 생겼다. 한 사람은 옆구리에 총을 맞았다. 서너 사람과 함께 그곳에 있던 지프차에 태웠다. 적십자기를 손에 들고 차 뒤쪽에는 태극기를 꽂고 전남대병원으로 가 응급실에 입원을 시켰다. 그곳에는 서너 명의 부상자가 먼저 와 있었다. 피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집회를 하고 있는 광주공원으로 갔다. 그곳에 가서 나는 메가폰을 잡고 시민들에게 "우리의 아들딸이 죽어갑니다. 우리 모두 헌혈을 합시다"며 호소를 했다.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부모형제 아니 광주 시민 전체가 잔학한 공수부대에 의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화순으로 무기탈것하러 가던 중 계엄군의 사격을 받고
그때 8톤 트럭에 탄 시민군이 LMG와 카빈으로 무장을 하고 시민들을 향해서 왔다. 그들은 지원동 버스종점으로 가면 총기를 배급받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우리도 당하고 일을 수만은 없다. 무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나가는 봉고처럼 생긴 차를 잡아타고 지원동으로 갔다. 그곳에는 2정과 16발의 실탄이 있었다. 총을 다룰 줄 알았던 나는 카빈 1정과 실탄 8발을 건네 받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그 총은 화순 예비군 중대본부에서 가져왔다고 했다.
중대본부에서 총을 가져와 지원동 버스종점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나눠주고 그것은 여분의 무기라고 했다. 그곳에 있던 8명의 사람들과 함께 차를 타고 시내 쪽으로 가려는데 누군가 화순 여비군 중대본부에 총이 있다는 애기를 했다. 우리는 화순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나는 총을 들고 있었으므로 입구 쪽에 타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장전을 해뒸다.
화순 너릿재를 지날쯤 우리가 타고 있던 차에 잠복해있던 계엄군의 총격이 가해졌다. 갑자기 날아온 총알에 의해 유리창이 깨지자 운전사는 방향을 바꾸려고 핸들을 돌렸다. 그 통에 차가 논바닥으로 굴러 떨어져버렸다. 총알이 위로 핑핑 날아와 나의 오른쪽 다리 복숭아뼈를 스치고 지나갔으나 아픈 감각도 없었다.우린 움직이지도 못하고 쥐죽은 듯 누워 있었다. 잠시 후 총성이 멈췄다. 그때 시간이 3시 30분이 채 못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는 일어나서 걸으려는데 다리가 몹시 아팠다.
그때 무장한 지프차와 8톤 트럭이 지나가길래 무조건손을 들어 잡아탔다. 그 시위대들은 나를 화순 최의원까지 데려다주었다. 최의원에서 "뼈는 부러지지 않았으나 핏줄이 끊어져 봉합수술을 해야겠다"고 해 대충 수술을 했다. 그곳에는 부상당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실려왔다. 병원에 누워 있는데 "계엄군이 화순에 낙하산 투입을 끝냈다. 화순지역을 차단해 청년들과 부상자들을 무조건 잡아간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시위 도중 공수부대에게 잡힌 사람들이 어떻게 작살나는지를 보았기 때문에 매우 불안했다. 내가 하도 불안해 하니까 최의원이 방으로 옮겨주어 3시간 정도 누워 있었다. 계속 누워 있으니까 더욱 불안해졌다. 여기 있다가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원장에게 광주로 가겠다고 했다. "죽어도 광주에서 죽어야겠소" "잘못하면 발목이 잘리오" 원장은 한사코 말렸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화순 예비군 중대본부 무기고를 탈취하고
거리에 나가보니 시위차량으로 보이는 소방차에 20∼30명의 시민들이 타고 있었다. 그중에 열서너살쫌되어 보이는 중학생의 카빈총을 들고 있었다. 총을 보니 안전장치가 풀어져 있고 실탄이 장전되어 있었다. 자칫하면 오발사고가 생길 것 같아 나는 그 중학생에게 "너는 집으로 가라" 하고는 총을 건네 받았다. 소방차에 매달려 화순 시외버스공용터미널까지 오는데 발목이 너무 아파 도중에 내렸다. 길가에서 5분 정도 쉬다가 광주로 가는 8톤 트럭을 잡아탔다. 시위대들중 절반은 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 차를 타고 광주로 오는 도중 어떤 사람이 "화순 예비군 중대본부에 무기가 남아 있다. 모두 그곳으로 가자"고 해 화순예비군 중대본부 무기고로 갔다. 무기고는 잠겨져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차를 그대로 밀어붙여 문을 부수자고 했다.
그러나 내가 "무기고 안에 폭발물이라도 들어 있어 터지련 어떻게 합니까 좋게 열읍시다"라고 하자 다른 사람들이 망치로 열쇠를 부슀다. 그사이 다른 시위차량들도 많이 몰려왔고 화순지역 주민들도 많이 모였다.문을 열어보니 총,실탄,공포탄이 많이 있었다. 시위대가 모두 무장을 하고도 남았을 정도로 많이 있었다.그런데 화순지역의 청년들과 주민들이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도 좋지만 당신들이 우리 신변에 위협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무기는 화순지역의 것이니까 지역방어를 하게 끔 우리에게도 총을 주시오"라고 해 시위대들은 명단을 일일이 적고 화순 주민들에게 무기를 배급해줬다.
그러는 사이 다친 다리에서 피가 흘러 서 있기조차 불편했다. 나는 통증이 너무 심해 시위대에게 "무장한 사람들은 광주로 갑시다. 나는 다리가 아프니 집에 가서 치료를 해야겠소"라고 사정해 시위차량 4, 5대와 함께 광주로 향했다.계엄군의 총에 다친 경험이 있던 나는 광주로 넘어오면서 "계엄군이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르니 모두 총기를 숨기고 구호도 외치지 말고 조용히 넘어갑시다"라고 했다.다행히 사고는 생기지 않았다.
귀가하여 치료
일단 총을 든 채로 지원동에서 내렸다. 다리가 아파 어쩔 줄 모르며 주저앉아 있는데 사오사오십 된 건장한 어른이 나를 집에까지 업어다쥤다.방림동에 있는 집으로 오는 사이 지원동 다리에서 20대 청년이 총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전남대 학생이라며 총을 달라고 했다. 나는 학생증을 확인하고서 가지고 있던 카빈1정, 실탄 50발, 탄창 3개를 넘겨주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치료를 했다. 다리의 통증은 매우 심했으나 병원으로 갈 수가 없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를 위협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상처에 마이신 가루를 뿌리고 소독을 했다.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은 다 먹었으나 쉽게 낫지가 않아 석 달 동안을 꼬박 누워 있었다.
한때 가택수색을 한다는 소문이 나돌아 다락방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 치료가 끝날 때쯤 되니까 동에서 부상자신고를 받았다. 처음에는 서류를 제출했으나 리스트를 작성한다는 얘기를 듣고 취소시켰다. 괜히 보상금 타려다가 보복을 당할 것 같아 두려움 때문이었다.1988년 6월에서야 주위 분들의 등쌀에 못 이겨 추가 부상자신고를 했다. 그때의 후유증으로 혈액순환이 잘 안되는지 많이 걷거나 조금이라도 달리면 다리에 통증이 오고 퉁퉁 붓는다. 지금은 자개농을 완성하는 마지막 작업인 칠을 하는 조그마한 영세업체인 농공장을 경영하고 있다. 남의 집살이하는 것이 지겨워 주위 분들의 도움을 얻어 8∼10명의 기술자를 데리고 있다.
그러나 막상 사람들을 부리며 일을 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인력이 없는 데다 자금난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요즘은 일이 너무 바라 부상자회 활동을 못 하고 있다.대신 회비는 꼬박꼬박 납부한다. 5 · 18을 경험한 뒤 많은 생각을 했다. 특히나 아무리 무력을 써서 다수의 국민을 억누르려고 해도 그들의 뜻대로 국민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수의 억압받는 국민이뭉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조사 · 정리 신봉화)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의미있는 휴일 보네셨냐요?
행복한 저녁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