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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네티즌본부 원문보기 글쓴이: 최신형
겨울철 기동전, 현대 특수전의 핵심으로 발전하다 스키전스키전이란 스키전(Ski Warfare)은 스키 장비를 착용하고 눈과 얼음이 덮인 지역을 신속하게 이동하도록 훈련받은 부대를 전쟁에서 활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겨울철 눈이 많이 내려 이동하기 힘든 지역이나 고산지대, 극지방에서는 스키를 타고 적과 싸우는 스키전을 수행한다. 특히 역사적으로 노르웨이와 핀란드 같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이나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같은 알프스 지역에서 스키전이 활발했다. 관련 임무를 부여받아 작전을 수행하는 스키부대도 이들 지역의 국가들에서 명성이 높다.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하다 1958년 해체되었던 제10산악사단을 1985년에 재창설했다. 이 부대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지에 파견되어 대테러전을 수행하고 있다. 겨울철 고산지대에 눈에 쌓이는 이스라엘도 스키부대를 편성하고 있다. 국군도 특수전사령부 소속 요원들이 스키전을 훈련한다. 스키부대는 눈 덮인 벌판이나 숲속을 스키를 타고 은밀하면서도 신속하게 이동해 적을 기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에 따라 스키부대는 신속한 기습을 위한 경무장 경보병 부대로 주로 활용된다. 스키부대의 유래 역사적으로 스키부대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먼저 발달했다. 노르웨이에서는 1130~1240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여러 세력이 서로 싸운 ‘노르웨이 내전’ 당시 스키를 타고 싸운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자작나무’를 뜻하는 ‘비르키베이나르(Birkibeinar)’라는 세력은 2살짜리 왕위계승자 호콘 호콘손(Haakon Haakonsson)을 눈 덮인 숲과 산악지대를 헤치며 안전하게 옮겼다.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Oslo)의 홀멘콜렌(Holmenkollen) 스키 박물관에는 당시 비르키베이나르의 병사들이 호콘을 옮기는 모습을 담은 19세기 후반 역사화가 전시되어 있다. 노르웨이 화가 크누 베르그슬린(Knud Bergslien)이 그린 이 그림 속 병사들은 칼과 창을 든 채 스키를 타고 이동하고 있다. 상상화지만 중세 스키부대의 모습이 생생하다. 노르웨이에서는 일찍이 이를 재연하는 크로스컨트리 경기가 군인들 사이에서 열려 오늘날 대중 스포츠로 발전했다. 눈 덮인 지형을 스키와 폴을 이용해 이동하는 겨울 스포츠인 크로스컨트리 스키와 크로스컨트리 스키에 스키 점프를 결합한 노르딕 복합 종목은 1924년 제1회 동계 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에 포함되었다. 크로스컨트리 스키에 사격을 결합한 바이애슬론(biathlon)은 1960년 동계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오늘날 러시아를 이룬 기원 중 하나인 모스크바 대공국은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까지 서쪽에 위치한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영토를 놓고 경쟁하며 다섯 차례나 전쟁을 벌였다. 이를 다룬 러시아 화가 세르게이 이바노프(Sergey Ivanov)의 1908년작 <리투아니아인에 대항하는 원정을 벌이는 모스크바인들>이라는 그림에는 방한모와 방한화를 신은 보병들이 기병보다 앞장서서 스키를 타고 행렬을 이끄는 모습이 보인다. 신속함을 앞세운 스키부대가 전투를 이끌었음을 보여주는 상상화다. 스키부대의 존재를 보여주는 첫 문헌상 기록은 12세기 후반~13세기 초의 덴마크 역사가이자 왕실 보좌관 삭소 그라마티쿠스(Saxo Grammaticus)가 라틴어로 쓴 『덴마크의 역사(Gesta Danorum)』에서 발견된다. 이 책은 처음으로 쓰인 덴마크 역사서이며 덴마크 중세문학의 거의 유일한 작품이다. 이런 전통을 지닌 덴마크는 19세기에 군대에 정식으로 스키부대를 편성했다. 덴마크는 노르웨이-스웨덴과 함께 1387~1523년 국가연합체인 ‘칼마르 동맹(Kalmar Union)’으로 한 나라를 이뤘다. 1523년 스웨덴이 별도 왕조로 독립하면서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으로 남았다. 하지만 나중에 181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가 몰락할 무렵 스웨덴이 노르웨이 왕위를 차지하면서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체제는 무너지고 덴마크 왕국으로만 남게 되었다. 1905년에는 국민투표로 노르웨이가 스웨덴에서 평화롭게 분리되어 현재에 이른다. 덴마크의 스키부대 덴마크는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시절이던 1808년 3월부터 1809년 12월까지 스웨덴과 ‘덴마크-스웨덴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덴마크는 스키부대를 군의 정식 편제에 넣었다. 이 전쟁은 유럽을 지배하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 제국(프랑스에 굴복한 동맹국 포함)과 이에 맞선 영국(영국과 손잡은 연합군 포함)이 벌인 ‘나폴레옹 전쟁(1803년 3월~1815년 11월)’의 일부로 진행되었다. 덴마크-노르웨이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편, 스웨덴은 영국 편이었다. 전쟁의 배경은 다소 복잡하다. 스웨덴은 1805년 러시아, 영국과 더불어 나폴레옹에 맞서는 제3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지만 독일 북부에 있던 스웨덴령 포메라니아(Pomerania)만 프랑스에 빼앗겼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프로이센은 1806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가 그해 10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Battle of Jena–Auerstedt)에서 대패하고 수도 베를린(Berlin)까지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는 러시아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차르 알렉산드르 1세(Aleksandr I)의 러시아군 역시 1807년 2월 프리틀란트 전투(Battle of Friedland)에서 프랑스군에 패배했다. 이듬해 6월부터 프랑스 측과 협상한 러시아는 1807년 7월 7일, 프로이센은 7월 9일 각각 프랑스와 치욕적인 ‘틸지트 조약(Treaties of Tilsit)’을 맺었다. 이로써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었고, 유럽에서 영국과 포르투갈, 스웨덴만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연합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는 1808년 2월 스웨덴령 핀란드를 침공해 점령했다. 그러자 스웨덴은 3월에 덴마크-노르웨이 공격에 나섰다. ‘덴마크-스웨덴’ 전쟁 당시 스웨덴은 2만 3,000명, 덴마크-노르웨이는 3만 5,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덴마크-노르웨이는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별개의 주권국가인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동일한 군주가 통치하는 동군연합(同君聯合)이었기 때문에 군대는 국가별로 따로 구성되었다. 노르웨이군은 용기병, 화승총인 머스킷(musket)을 장비한 머스켓티어(musketeer), 저격 임무를 주로 하는 명사수, 척탄병, 요새 포병, 야전 포병, 엽총 사수 등 다양한 병과 중에 스키 병과가 별도로 편제되었다. 스키부대의 실질적인 활동 내역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사례다. 당시 노르웨이 스키부대는 각각 3개 중대로 이뤄진 2개 대대로 편성되었으며 전체 병력은 600명 정도였다. 프랑스는 장밥티스트 베르나도트(Jean-Baptiste Barnadotte) 원수가 이끄는 4만 5,000명의 원정군을 보내 덴마크-노르웨이를 지원했다. 이 전쟁은 덴마크-노르웨이와 스웨덴이 우열을 가리지 못한 가운데 1809년 3월 스웨덴에서 쿠데타가 발생해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Gustav IV Adolf)가 폐위되고 6월 연로한 왕족 카를 13세(Karl XIII)가 의회에서 국왕으로 선출돼 왕위에 올랐다. 의회는 카를 13세의 후임으로 나폴레옹 휘하의 육군 원수로 덴마크-노르웨이 편에서 싸우던 장밥티스트 베르나도트를 선출했다. 동맹 정책의 변화를 새 국왕 선출로 표현한 셈이다. 베르나도트 왕가는 현재 스웨덴식으로 발음하는 바르나도테 왕조로 지금까지 존재한다. 스키부대가 정식 병과로 편제되어 활동했던 ‘덴마크-스웨덴 전쟁’의 결과다. 알프스의 스키부대 알프스 지역에서도 스키부대가 활동했다. 알프스 국경을 지킬 산악부대는 지형상 등산과 더불어 스키 능력이 요구되었다. 산악부대 안에 스키중대를 별도로 설치하기도 했다. 1866년 독립을 이룬 이탈리아는 북부 국경지대인 알프스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산악부대를 창설했다. 1872년 주제페 페루체티(Giuseppe Perrucchetti) 대위가 제안하고 당시 전쟁장관이던 세자레 리코티-마그나니(Cesare Ricotti-Magnani) 장군이 이를 받아들여 알피니(Alpini)라는 이름의 산악부대를 창설했다. 부대원은 현지 지형을 잘 알고 산악 생활에 익숙한 현지 출신으로만 구성했다. 산악부대는 이탈리아군의 정예부대로서 1896년 1차 에티오피아-이탈리아 전쟁과 1900년 중국 의화단의 난 당시 원정군으로 참전했다. 이탈리아의 알피니 부대는 시험 운영을 거쳐 1902년 11월 특수 장비를 갖추고 특별 훈련 과정을 마친 스키중대(Compagnie Sciatori, 콤파니에 샤토리)를 설치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평화 시기에 26개 대대이던 알피니 부대는 62개 대대로 확장되었다. 이 부대들은 8개 연대로 편성되어 알프스 전선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싸웠다. 이 가운데 몬테 마르몰라다(Monte Marmolada) 대대는 스키대대로 편성되어 이탈리아 북동부에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국경지역인 마르몰라다(Marmolada) 산의 빙하 지대에서 전투를 벌였다. 600km에 이르렀던 양국 국경에서 1915년 5월부터 1918년 11월까지 전개되었던 ‘이탈리아 전선’ 전투는 높은 고도에 따른 혹독한 추위 때문에 ‘눈과 얼음의 전쟁(war in snow and ice)’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특히 1915년과 1916년 사이의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려 전선의 적설량은 12m에 이르렀다. 이탈리아군은 물론 상대방인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지원에 나선 독일군은 이런 지형에 산악도로와 산악철도를 건설하고 케이블카를 놓았다. 양측은 고지를 확보한 뒤 정상 부근에 터널을 뚫고 여기에 다량의 폭탄을 설치해 폭파시킴으로써 산을 무너뜨리고 산사태를 일으켜 상대방을 매몰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이 지역에서는 지금도 빙하가 녹으면 당시 묻혔던 군인들과 장비가 발견되곤 한다. 이를 위해 군인들은 두터운 눈이 덮이고 가파른 산길을 이동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등산과 스키는 산악부대원이 갖춰야 할 필수적인 기능으로 자리 잡았다. 스키부대와 특수 등반부대가 탄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탈리아 알파니 부대는 4만 명 가운데 1만 2,000명이 전사하는 혹독한 희생을 치르면서 명성을 얻었다. 프랑스군도 이탈리아의 영향으로 19세기 말 산악부대를 만들어 스키 이동을 군의 공식 전술에 포함시켰다. 1866년 이탈리아가 통일되어 강력한 단일국가가 되면서 남동부 지역의 지정학적인 정세가 변화하자 대비에 나섰다. 특히 이탈리아가 알프스 산맥 지역의 산악 지형에 밝은 현지 출신 군인으로 이뤄진 알피니 부대를 창설하자 1888년 12월 산악부대인 샤쇠르 알팽(Chasseurs Alpins: 산악 사냥꾼)을 창설해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 이탈리아군이 알프스를 가로지르는 국경을 넘어 공격해올 가능성에 대비한 조치다. 산악부대원들은 등산과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비롯한 산악 전투에 필요한 기술을 훈련했다. 이와 함께 프랑스는 1932년 알프스 지역인 샤모니(Chamonix)에 세계 최초의 산악전술 군사학교인 고산지대 군사학교(École militaire de haute montagne)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스키, 산악전투, 극지전투 전술을 연구·교육하고 있다. 이 산악부대는 제1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과의 국경지대(지금은 프랑스 동부)인 보주(Vosges) 산맥 지역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그러자 독일군도 산악부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14년 11월 뮌헨에서 제1·제2설상화대대(Bayerisches Schneeschuhbataillon)를 창설했다. 독일 산악부대의 시작이다. 이후 추가 창설과 편제 변경을 거쳐 1915년 5월 사단 규모의 산악군단(Alpenkorps)이 만들어졌다. 이 부대는 프랑스, 세르비아 등 유럽 여러 전선에서 인상적인 전투를 치렀는데, 두고두고 명성을 남긴 유명한 전투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1917년 10월 24일~11월 19일에 벌어졌던 카포레토 전투(The Battle of Caporetto)[또는 제12차 이손초 강 전투(Twelfth Battle of the Isonzo)]다. 당시 카포레토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였고, 지금은 슬로베니아 영토로 코바리드(Kobarid)로 불린다. 이탈리아군은 최대 87만 4,000명의 병력과 6,918문의 야포를,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모두 35만 명의 병력과 2,213문의 야포를 동원했다. 카포레토 전투는 독일군 산악부대인 알펜코르프스가 처음으로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한 전투이기도 하다. 당시 알펜코어에 배속되었던 뷔르템베르크 산악대대의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에르빈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은 150명의 부하들을 지휘해 약 9,000명의 포로를 잡고 81문의 야포를 노획해 독일제국 최고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를 수훈했다. 이 전투에서 같은 훈장을 받은 독일군 장교 페르디난트 쇠르너(Ferdinand Schörner)는 롬멜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독일군 원수가 되었다. 당시 독일군 산악부대는 강력한 화력과 빠른 기동성을 바탕으로 전선을 돌파하고 이탈리아군의 전열을 뒤흔들어 승리의 핵심을 맡았다. 특수부대를 신속하게 적진에 침투시켜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로 공격해 이탈리아군의 혼을 빼놓기도 하고, 독가스를 사용하기도 했다. 카포레토 전투 결과, 이탈리아군 제2군은 완전히 무너져 1만 명이 전사하고 3만 명이 부상했으며 무려 26만 5,000명이 포로로 잡혔고, 3,152문의 야포와 3,000정의 기관총, 그리고 1,712문의 박격포를 잃었다. 이탈리아군은 베네치아에서 30km 떨어진 피아베(Piave) 강 유역까지 밀려났다. 전투 패배로 이탈리아군은 루이지 카펠로(Luigi Capello) 제2군 사령관이 경질된 것은 물론, 이탈리아군 참모장 루이지 카도르나(Luigi Cadorna)도 물러나고 아르만도 디아츠(Armando Diaz)가 그 자리에 올랐다. 국방장관 격인 전쟁장관도 가에타노 자르디노(Gaetano Giardino) 장군에서 비토리오 루이지 알피에리(Vittorio Luigi Alfieri)로 바뀌었다. 이탈리아의 파올로 보셀리(Paolo Boselli) 총리도 사임해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오를란도(Vittorio Emanuele Orlando)로 바뀌었다. 군은 물론 정부의 전쟁 지휘부가 모두 교체된 셈이다. 이 전투를 배경으로 한 헤밍웨이의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는 당시 이탈리아군의 혼란상과 무너진 군기를 잘 보여준다. 20세기의 스키부대 스키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등장했다. 나치 독일이 핵무기 개발을 위해 필요한 노르웨이산 중수 획득을 막기 위해 영국이 노르웨이 레지스탕스와 함께 벌인 일련의 작전에서다. 1942년 10월, 영국에서 훈련받은 4명의 노르웨이 레지스탕스를 낙하산으로 본국에 투입하는 ‘그로스 작전(Operation Grouse)’이 진행되었다. 이들은 착륙 지점에서 중수 공장까지 장거리를 크로스컨트리 스키로 이동했다. 이들의 공장 파괴 작전이 실패하자, 요원들은 이끼와 지나가는 순록을 잡아먹으며 장기 잠입에 들어갔다. 이들에 이어 1943년 2월에 벌어진 거너사이드 작전(Operation Gunnerside)에서 6명의 노르웨이 요원이 영국 비행기로 현지에 투입되었다. 이들도 크로스컨트리 스키로 며칠간 겨울철 산악지대를 이동한 끝에 앞서 투입된 4명과 접선에 성공했다. 이들은 중수 공장을 습격해 중수를 못 쓰게 만들고 장비를 파괴했다. 임무를 마친 요원 중 5명은 400km를 크로스컨트리 스키로 이동해 스웨덴으로 탈출했으며, 나머지는 노르웨이에 은신했다. 스키부대의 투혼은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는 핵심으로 작용했다. 스키전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표적인 군대가 핀란드군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주곡 격인 ‘겨울전쟁(1939년 11월 30일~1940년 3월 13일)’에서 눈과 얼음으로 덮인 숲속을 빠른 속도로 종횡무진했던 핀란드 스키부대는 승리의 원동력이었다. 당시 소련은 핀란드 국경이 레닌그라드[Leningrad: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에서 불과 3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자국 안보를 위협한다며 국경선 재조정을 압박했다. 큰 나라임을 내세우면서 주권을 무시하고 무례한 요구를 한 셈이다. 핀란드가 이를 거절하자 ‘소비에트 제국’ 소련은 즉각 전쟁에 들어갔다. 당시 인구 1억 6,852만 명인 소련은 최대 99만 8,100명의 병력과 2,514~6,514대의 전차, 3,880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물량작전에 나섰다. 당시 인구 300만 명인 핀란드는 25만~34만 명의 병력과 32대의 전차, 114대의 항공기로 맞섰다. 소련 병력은 핀란드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달했다. 핀란드는 이 전쟁의 총사령관에 72세의 노장군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Carl Gustaf Emil Mannerheim)을 임명했다. 핀란드 출신이지만 인구의 6~10%를 차지하는 소수민족인 스웨덴어 사용자로, 제정 러시아군에서 중장을 지낸 인물이다. 핀란드가 독립하자 귀국했지만 핀란드어를 제대로 하지 못해 통역을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핀란드 내전 당시 백위대를 지휘해 러시아 볼셰비키의 지원을 받은 적위대를 물리치고 현대 핀란드 건국의 초석을 놓았다. 만네르하임은 새 조국에 충성하며 국민 기대에 부응했다. 그가 이끈 핀란드군은 번득이는 아이디어와 지혜로 소련군에 맞섰다. 그중 하나가 겨울용 백색 설상 위장군복의 대량 도입이다. 군인은 물론 차량과 야포도 그렇게 하얀 천으로 위장했다. 스키부대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기후조건상 핀란드인이라면 스키를 기본적으로 탈 수밖에 없었다. 핀란드군 스키부대는 겨울철 눈에 잘 띄지 않는 하얀색 설상 위장군복을 입고 소리 없이 눈과 얼음으로 덮인 벌판과 숲속을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 지형지물을 활용해 은폐·엄폐하고 있다가 적이 나타나면 기습했다. 핀란드군 스키부대는 소련군에게는 그야말로 ‘하얀 악마’였다. 핀란드군 스키부대는 자체 개발한 ‘1931년식 수오미(Suomi: 핀란드어로 핀란드 또는 핀란드어라는 뜻) 기관단총’으로 소련군을 강습했다. 1931년식 수오미 기관단총은 무거운 소총탄 대신 가벼운 9mm 권총탄으로 속사가 가능한 대신 화력이 약한 것이 단점이었다. 핀란드군은 이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었다. 핀란드군 스키부대원은 눈과 얼음이 덮인 벌판이나 숲속을 스키를 타고 소리 없이 이동한 뒤 적에게 몰래 접근해 기관단총으로 순식간에 연발사격을 가하고 사라지는 신보병전술을 개발했다. 개인화기에 탄약을 한꺼번에 최대한 많이 장탄하기 위해 71발이 들어가는 동그란 드럼형 탄창도 개발했다. 눈밭에 설상복 차림으로 스키를 타고 귀신처럼 불쑥 나타나 기관단총을 쏘아대는 핀란드군 스키부대 앞에 소련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위장복 대신 녹색 군복을 입어 눈밭에서 선명하게 눈에 띄는 데다가 눈밭에서 뒤뚱거리며 움직이는 소련군 보병은 핀란드군 스키부대의 ‘사격 표적지’가 되었다. 대전차무기가 부족했던 핀란드군은 겨울전쟁 중 에탄올과 가솔린 등이 섞인 750밀리리터짜리 화염병 45만 개를 정식 무기로 실전에 사용했다. 이른바 ‘몰로토프 칵테일(Molotov cocktail)’이다. 헬싱키 주류회사인 ‘알코(Alko)’가 술 대신 이를 대량 생산해 공급했다. 전쟁 당시 소련군은 제공권을 장악하고 핀란드 민간인 지역을 폭격해 숱한 사상자가 났다. 이에 대한 비난이 가중되자 소련 외상이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는 “핀란드 인민을 위해 빵 바구니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황당한 변명을 했다. 분통이 터진 핀란드 국민은 이를 되갚아주는 의미에서 화염병을 ‘몰로토프 칵테일’로 불렀다고 한다. 핀란드군 스키부대는 지형지물을 이용해 숨어 있다가 소련군 전차가 접근하면 뒤에서 몰래 다가가 전차보병을 기관단총으로 사살하고 몰로토프 칵테일을 화재에 취약한 전차 후면 엔진에 던져 불태웠다. 이는 지금도 게릴라전에서 활용되는 전술이다. 소련군은 제공권은 장악했을지 몰라도 눈 덮인 들판과 숲에서의 ‘작전 통제권’은 확보하지 못했다.그 뒤 독소전쟁에서 소련군과 독일군 모두 이 방식을 사용했다. 6·25전쟁 때 국군도 춘천 전투 등에서 화염병과 수류탄으로 적 전차와 자주포를 파괴함으로써 당시 서울을 점령했던 적군의 진격을 사흘간 미루게 한 공을 세웠다. 이로써 주일미군이 한반도에 투입될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나라를 구하려고 스키부대부터 화염병까지 온갖 갖은 아이디어와 기술을 총동원하며 단결했던 핀란드인의 의지와 지혜는 기적을 낳았다. 이 전쟁에서 소련군은 기록에 따라 12만 6,875~16만 7,976명이 숨지거나 행방불명되었고, 부상자는 18만 8,671명에 이르렀으며, 포로도 5,572명이나 되었다. 또한 1,200~3,543대의 전차, 216~515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핀란드군은 2만 5,904명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었고, 4만 3,557명이 부상당했으며, 800~1,100명이 포로로 잡혔고, 20~30대의 전차와 62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인구가 적은 핀란드는 소련군에 만만치 않은 타격을 입혔지만 전쟁을 지속할 힘도 갈수록 떨어졌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타격을 입은 소련은 전의를 상실하고 약간의 영토만 받는다는 다소 ‘후한’ 조건으로 전쟁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핀란드는 나중에 1941년 소련 침공에 나선 나치 독일과 손잡고 겨울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되찾으려고 계속전쟁(1941년 6월 25일~44년 9월 14일)에 나섰다. 하지만 소련이 역공에 나서자 다시 타협하고 이번에는 자국에 들어온 독일군을 쫓아내는 라플란드 전쟁(Lapland War: 1944년 9월 15일~1945년 4월 25일)에 나섰다. 주변 강대국 등살에 제2차 세계대전 중 여러 차례 말을 바꿔 탄 비극의 역사다. 그런데도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Iosif Stalin)은 종전 뒤 핀란드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겨울전쟁의 악몽이 한몫했던 것이다. 핀란드의 역사는 러시아 혁명 와중에 독립한 나라 중 가장 인상적이다. 핀란드, 폴란드, 발트 3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1922년 소련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폴란드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소련과 나치 독일에 분할 점령되었다. 발트 3국은 1940년에 소련에 무력 합병되었다. 그런데 핀란드만 예외였다. 핀란드는 소련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두 차례에 걸쳐 치열한 전면전을 치르고도 소련군을 막아냈다. 오히려 냉전시대 소련과 국경을 맞대면서도 마르크스-레닌주의 이입을 막고 서방식 시장경제·의회민주주의·자유인권을 지켰다. 스키부대로 상징되는 강소군대 핀란드군의 전설은 이렇게 역사가 되었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비롯한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에서 시작되어 기동전을 수행했던 스키부대는 현대에 이르러 겨울철 특수전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저자 소개 채수윤 영국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영국과 중국을 오가며 현대 중국학을 연구했다. 러시아와 발칸 지역을 비롯한 동유럽의 분쟁사와 대외 관계사, 서유럽 국가 지도자들의 위기관리 리더십, 중국 현대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해왔다. 중세와 근대, 현대의 분쟁사와 무기체계의 관계에 관심이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