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하 윤순(1680~1741)
명제: ‘흥진첩’(興盡帖)
옥동 이서(1662~1723)
명제: ‘위자원휴서’(爲子元休書)
창암 이삼만(李三晩, 1770~1845?)
내용:‘무이도가’(武夷棹歌) 주희(朱喜)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서시(序詩)에서 제7곡(第七曲)까지 여덟 폭에 쓴 것 중 마지막 폭이다.
창암의 행초 필적 가운데 변화로움이 잘 드러나는 수작이다.
탈초하면 七曲移船上碧灘, 隱屛仙掌更回看. 却憐昨夜峰頭雨, 添得飛泉度幾寒.
규격: 종이에 먹, 67.3×31cm
양사언 오언시 (楊士彦 五言詩)
朝鮮, 16世紀
103.5×57.2Cm
任昌淳 所藏
양사언(楊士彦,1517∼1584)은 조선 전기의 문인이요 서예가이다.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창해(滄海).해객(海客)이다.
형 사준(士俊) 아우 사기(士奇)와 함께 문명(文名)을 널리 떨쳐
중국의 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 삼부자와 비교 되기도 하였다.
글씨에 뛰어나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濩)와
더불어 조선 전기 4대가의 한 사람이다.
특히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에 장기가 있었으며,
큰 글씨를 잘 쓴 것으로 알려진다.
금강산을 자주 유람하였는데 금강산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 새겨진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은 그의 글씨를 가지고 새긴 것이다.
웅장하고 힘찬 필세는 금강산과 견줄만큼 뛰어난 신
품(神品)이라고 회자(膾炙)되고 있다.
시조에도 뛰어나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본 작품은 그의 장기인 초서가 유감없이 드러난 것으로
활달 분방한 필세가 잘 나타나 있고,
[봉래산인(蓬萊散人)].[양사언인(楊士彦印)]의 도장 2과(顆)가 찍혀 있다.
霜餘水反壑 서리 내린 뒤 물은 계곡으로 흘러 들어가고
風落木歸山 바람에 진 나무도 산으로 가누나
歲華晩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昆蟲皆閉關 벌레도 모두 숨어 움추리는도다.
<호암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