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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스님, 한국불교의 하와이 포교를 시작한 스님
글/차윤진(하와이 대원사, 정법사 신도)
대원스님은 하와이 대원사(현 무량사)라는 한국불교의 가장 큰 규모의 불사를 한 스님이다. 대웅전을 전통사찰 형식으로 1982년 10월에 낙성식을 가졌는데 이것은 본토 달마사보다도 5년 정도 빠르다. 이런 연유로 대원사는 한때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미주의 한국사찰이었고 한국의 스님들이 가장 많이 방문한 사찰이었다. 대원스님은 대원사 불사를 하면서 한국 재벌 기업인들의 협력을 얻었고 한국사회의 주요 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였다. 대원사는 하와이 한인사회에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이는 L.A., 뉴욕, 시카고 등 미주한인사회 어느 사찰에서도 가져본 적이 없는 힘이었다. 또 일찍이 미국에서 한국불교가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대규모의 문화원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것은 L.A.관음사 도안스님과도 같다. 대원스님은 불교계 인사로는 가장 먼저 1985년 평양을 방문하였고 한국스님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국제학술대행사를 여러 차례에 걸쳐 하와이, 일본, 몽고, 한국 등 여러나라를 순회하면서 주최하였다.
이 행사에는 국제적으로 비중있는 학자와 관료, 전문가들이 참석하였다. 미주한국불교 한 페이지를 장식한 대원스님을 차윤진 거사의 글로 소개한다.
불가에서는 천 여개 이상의 화두가 있다지만 '달마가 서쪽에서 온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화두로 참구하다가 도를 깨우친 선객이 얼마나 계신지?
모든 사물이 다 인연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는 하겠지만 기 대원스님께서 하와이 대학교의 페이지 교수의 초청을 받고 1975년 불상과 목탁 하나를 들고 하와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 과연 그분이 하와이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하와이에 살고 있는 한국사람들 특히 불교신자들에게 커다란 획을 긋게 되는 불사가 여하이 이루어지게 될지는 더더욱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4.19 혁명에 이어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던 1960년 초기의 한국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혼란을 거듭해 왔으며 당시 20대의 꿈과 열망이 충만했던 청년 기춘서(대원스님의 속명)씨는 일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일대사의 인연으로 1962년 당시 해인사 용탑선원의 조실 스님으로 계시던 윤고암 대종사를 은사스님으로 모시고 수계 득도를 한다. 속세와 인연을 끊고 피나는 수행정진을 하면서 1965년 범어사에서 실시하는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마친 후 1979년 대한불교 조계종 3교구 본사 신흥사의 살림을 꾸려 가는 재무국장의 소임을 맡게 된다.
이때 또다시 스님의 앞길에 다시 한번 전환점이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1972년 7월 여름방학 전 조계종단의 종립학교인 동국대학교 총장 김동익박사로부터 여름방학동안 특별기획의 책을 저술하려고 적당한 거처를 찾으려는 하와이 대학교의 정치학교수인 그렌 페이지박사를 소개받게 되고, 페이지 박사가 물 좋고 산세가 훌륭한 신흥사에서 집필하는 동안 대원스님의 각별한 도움을 받으면서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페이지 박사는 백천만 겁이 지나도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의 가르침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이 종국에는 대원스님을 하와이로 초청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당시 하와이에는 일본불교계와 중국불교계를 비롯하여 동남아시아 등지의 여러 나라 불교가 전래되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으나 한국불교는 아직 뿌리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대원스님은 한국불교의 하와이 포교에 대한 소명의식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더더욱 한국전란 때 미 포병장교로 출전하였던 경험이 있고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결정과정을 책으로 써냈을 뿐만 아니라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창립당시 관여했던 관계로 한국의 정치학교수 및 고급장교들과 깊은 인연이 있었던 페이지박사는 대원스님의 하와이 진출을 은근히 권고하였다. 아울러 하와이 초청은 물론 당시 하와이 대학교에서 활동중인 한국인 교수와 하와이 관계 요로의 인사들을 소개하여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원래 명지대학교 3학년 재학시 출가했던 대원스님은 당시 사원에서 사용하던 축원카드를 보고 카드 행정에 관심을 갖고 종단 행정에 기여해 보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던 차라 하와이를 가게 된다면 물론 해외포교에도 주력을 하겠지만 하와이 대학교에서 행정학공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순수한 생각으로 페이지 박사의 제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름동안 집필을 마치고 페이지 교수가 하와이로 떠난 후 약속대로 보내 준 초청장을 받고 대한민국 여권과 미국비자를 받을 때까지 수속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웠지만 큰 뜻을 품고 시작한 일인지라 스님자신은 물론 주위의 여러 사람의 보살핌과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국제포교인 만큼 조계종 국제포교사 자격증도 받고,(1975년) 소임을 맡고 있던 서울 백련사 주지 자리도 인계시키고, 당시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정이시던 윤고암큰스님을 곁에서 모셨던 종정 사서(비서)직도 사임하는 등 한국에서의 모든 활동은 중단하였다. 드디어 1975년 6월 15일 자은스님, 나귀만 처사 등 몇 분의 환송을 받으며 벅찬 희망과 아울러 처음 떠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한 마음도 함께 지닌 채 김포공항을 출발하였다.
통상 하와이에 처음 도착하면 더운 훈기와 긴장감, 그리고 기내에서의 피로함까지 한데 어울려 공항 밖을 나오면 어리둥절해지지만 대원스님은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기다린 페이지 박사의 반갑다는 인사와 목에 걸어 주는 레이의 향긋함 때문에 모든 불안감과 피로가 싹 씻기는 것만 같았다고 훗날 주위사람들에게 얘기하곤 하셨다.
하와이 첫날을 페이지 박사와 마음씨 착한 그의 부인의 따뜻한 환대로 보낸 스님은 이미 페이지 박사가 일정을 잡아논대로 하와이 대학교에서 불교철학을 전공하는 심재룡씨(훗날 대원사 신도회 초대 총무부장으로 활동), 주호놀루루 대한민국 총영사 이윤희씨, 하와이 대학교 부설 한국학 센터의 서대숙소장 등 한국인사 뿐만 아니라 하와이 주지사, 호놀루루시장 및 일본 정토종 총본부 주지스님 등 여러 관계인사들을 소개하여 줌으로 빠른 시일 안에 하와이에 관한 많은 사항들을 배울 수 있었다.
1975년 7월 20일 하와이 총영사관 뒤뜰에서 창립법회
특히 6월 25일 하와이 펀치볼 국립묘지에서 호놀루루 총영사관 주최로 거행한 6.25 기념행사에서 여러 교포를 상면할 기회를 가졌는데 그때에 필자 차윤진(동양식품 운영)를 만난 것은 훗날 대원스님이 불사를 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며 그것이 인연이 되어 기독교 신자였던 필자가 부처님법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전생의 빚을 조금이나마 탕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후에도 대원스님은 보다 많은 한인을 만나기 위하여 한인이 경영하는 식당, 유흥업소등을 찾아다니면서 부처님과 인연이 있는 한인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스님의 독특한 복장으로 인해서 길거리에서도 불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스님의 불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던 이교유보살과 어머님, 세상을 등진 성풍(건축업)씨, 이주현보살 등 신행이 변함없는 불자들과의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페이지 교수 부부, 심재룡씨, 차형권씨, 김주성(은행원)씨와 쉘리 나카다(가정주부)보살 등의 적극적인 참여로 7월 20일 대한민국 영사관에서 창립법회를 실시하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한국인 스님에 의해서 부처님의 법음이 동서의 문화가 만나는 하와이에 퍼지게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7월 20일 오전 11시 교포 9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스님의 목탁소리에 맞추어서 거룩한 부처님, 가르침, 스님들께 귀의할 것을 맹세하는 삼귀의가 영사관 뒤편 파라하이웨이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삼귀의에 이어 이윤희 총영사의 뜻깊은 축사는 참석자 모두에게 미국에 사는 한국인의 자존심을 느끼게 했으며, 페이지 교수의 대원스님 초청에 관한 얘기는 불법의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느끼게 해주었다. 아울러 미국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대원스님의 불법에 대한 귀한 말씀과 한국불교에 깃든 한민족의 얼과 고유한 문화를 동서문화가 융합되어 있는 하와이에 이식시킴은 세계문화창달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길임을 강조함으로 참석자 전원에게 감명을 주었으며 이제 하와이에서 정신적으로 갈 길을 못 찾아 방황하는 한국인 교포들에게 부처님의 감로법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모두가 정성껏 힘을 모으자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참석자중 일부는 불교신도는 아니었으나 오랜만에 이국 땅에서 고향의 정취를 맛볼 수 있는 종교적 분위기에 모두가 기쁜 마음을 나눌 수 있었으며 특히 당일이 김주성씨 친구 고승식씨의 딸 첫 돌이 되어서 그들이 정성껏 준비한 한국식 음식으로 점심 공양을 잘 마칠 수 있었다.
식사 후 법회 중 제출된 안건에 따라 앞으로 하와이에서 스님을 도와서 한국불교를 포교할 준비위원의 모임을 갖게 되었다. 뜻을 같이하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우선 가칭 불교신도회를 구성하게 되었는데 초대회장에는 어머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대대로 불교집안의 박인규(식당운영)거사를 부회장에는 켈리 리여사를 총무에는 심재룡(현 서울대 교수), 재무에는 차형권, 교화에는 김차선 보살, 섭외에는 쉘리 나카다여사, 조직에는 김주성씨를 우선 선출하고 회장단이 수시로 모여서 앞으로 풀어야 할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토록 하였으니 한국불교의 씨앗이 이제 태평양 한가운데 지상낙원이라고 불리우는 하와이에 떨어진 셈이 되었다.
7월 27일 첫임원회의를 박인규회장댁에서 갖고 스님의 숙소문제, 영주권문제, 불교포교문제 등을 토론하고 우선 숙소문제는 법당이 준비될 때까지 신도 집에서 순회하면서 거처토록 하여 첫 번째는 박회장댁에서 3일간, 다음에는 이태분(유흥업 운영) 보살댁 등으로 결정하였다. 8월 3일 하와이 카이에 소재하고 있는 박회장 리빙룸에서 두 번째 법회를 실시한 임원들은 법당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하고 앞으로 사원의 이름을 하와이 대원사로 명명키로 하였다. 마침 신도의 소개로 구 축구장 건너편 킹스트릿에 소재하고 있는 유흥업소의 2층 빈사무실을 염가로 임대하여 성풍거사 등 건축업을 하는 신도들의 협조를 얻어 신속하게 법당을 꾸미게 되었다. 마침내 새로 꾸민 법당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우란분재 조상천도 법회를 하게 되니 뜻있는 신도들의 감개무량함은 이루 표현 할 수 없었다. 이 법당은 비록 길가의 초라한 건물 2층에 위치한 비좁은 법당이었지만 훗날 화재로 인해 파로로 계곡에 세울 대법당으로 옮길 때까지는 하와이에서 한국불교를 뿌리내리는 뜻깊은 산실이 되었다.
특히 하와이가 미국 본토와 한국중간지점이라는 지리적인 요건 때문에 당시 미국을 다녀가셨던 대덕스님과 보살님들이 수없이 찾아오셔서 감로의 법문과 격려의 말씀을 아끼지 않았다. 훗날 대원사의 초대 조실스님으로 많은 법문과 자비의 손길을 베풀어 주셨든 윤고암 큰스님께서 호놀루루 국제 회의장에서 시행하신 국제 보살계는 신도는 물론 지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감명을 준 행사였다.
하와이 초창기 시절 대원스님께서는 주상하의원과 주지사 등이 참석한 주의회 개원식에 특별 초빙되어 목탁소리에 맞추어 반야심경을 독경해 주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훗날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날이면 매년 와이키키 중심거리를 제등행열하는 허가를 시의회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통과시켜 주었다. 그리하여 거의 10년간을 관광객이 가장 많은 와이키키거리를 부처님을 높이 모시고 한복 등을 곱게 차려입은 한국의 숙녀와 거사들이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석가모니불을 외치며 행진할 때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걸을 수 없는 뜻깊은 행사였다.
대원사 초창기시절 열심히 불사에 치중하시던 박인규회장이 지병이 악화되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자 당시 하와이에서 부군과 사업을 하시던 조미령(전 영화배우)보살이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대원스님께서는 포교에 주력하는 한편 교포유지 및 신도임원들과 거듭하는 회의 끝에 대원사 건립위원회(초대회장: 차형권)을 설립하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였다. 불사를 원만히 성취하기 위해서는 물론 하와이 신도들의 피나는 노력과 모금이 필요하였지만 하와이의 불자들의 재정적인 힘만으로는 쉽지가 않기 때문에 뜻있는 한국의 불자님들의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1977년 주지스님을 단장, 조미령회장을 부단장으로 모시고 신도 17명이 모국방문단을 조직, 한국방문을 하게 된다. 당시 조계종 전국신도회 회장이었던 이후락거사의 열성적이고 따뜻한 환영, 종정스님, 정일권 국회의장, 정각회 회장 등의 호의와 하와이 법당건립을 위해서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며 특히 전국신도회가 주관한 조계사 환영법회에서는 이후락회장의 격려사와 아울러 방문단 모두에게 주는 특별선물도 조미령 회장에게 전달되었다. 이 모든 행사가 대원스님께서 하와이에 오심으로 인해서 이루어진 역사적인 불사임을 생각할 때 수계자 전원이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음이랴.
물론 하와이에 대원사가 창설됨으로 대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뜻깊은 행사가 하와이에 많이 벌어졌지만 그 중에도 꼭 명기해야 할 사항 중에 하나가 있다면 해군사관생도들의 하와이 방문을 들 수가 있다. 한국 해사생들은 졸업에 즈음해서 세계순항을 하는데 2년에 한번은 그 코스가 하와이를 거쳐가게 된다. 진주만에 한국배가 입항하는 순간도 감명 깊은 일이기도 하지만 하와이에 정박하는 동안 대원사에서는 꼭 불자 해사생 및 수병들을 바다가 보이는 넓은 공원(카피오라니 공원)에 초대하여 특별 야외법회를 실시하고 그후 여러 보살님들이 준비한 음식을 같이 나누면서 환담을 나누는 것이다. 특히 어느 해에는 졸업하는 사관생도 반수이상이 불자생도여서 물론 음식은 더 많이 장만해야 했지만 그들이 하얀 제복을 입고 모두 합장자세로 반야심경을 큰소리로 독송할 때는 공원전체가 환한 빛을 나타냈으며, 그만큼 한국에서 불교가 젊은 층에 많이 퍼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좋은 척도가 되기도 하여 여간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닌가 여겨진다.
1982년 대웅전, 선원 낙성식과 평화탑 제막식
1979년 대원스님께서는 현재법당이 들어선 사원부지를 $315,000에 매입하여 이전한 후 대웅전을 건립할 때까지 수 차례 한국을 다니면서 모금활동을 실시하였다. 롯데호텔에서 여러 차례 불자 연예인의 도움을 받아 모금파티를 거행하였고 하와이에서도 이민생활에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스님의 정력적이고 열성적인 불사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 드리기 위해서 김치 판매하기(1976년부터 7년간), 길가에서 깡통 줍기, 장담가 팔기 등 자원봉사 활동을 하였으며 하와이에서도 불자연예인 초대 모금 디너 파티를 위한 티켓 팔기에 열성을 기울여서 스님이 하시는 불사를 도와 드렸다. 이와 같이 한국의 모든 불보살님들의 뜨거운 성원과 하와이 불자들의 끊임없는 헌신적인 보시정신이 일치가 되어 1980년에 시작하여 1982년 10월 24일 한국식으로 이루어진 대망의 대웅전, 선원, 종각 및 세계평화 기원 불사리탑이 착공되었고 특히 사리탑은 세계평화를 위해 봉헌하였다. 당일 행사장에는 한국에서 노구를 불구하고 참석하신 윤고암큰스님을 비롯해서 여러 대덕스님, 국회의원과 불자님들이 다수 참석하였고 현지에서는 당시 아리요시 주지사를 비롯해서 마스나가 연방 상원의원 및 교민 단체장들이 참여하여 앞으로의 대원상의 발전을 축하해 주었다.
스님께서는 이와 같은 어려운 불사를 하는 과정에서도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대원사 장학회를 설립(1980년)하여 하와이 박사과정에 있거나 버클리대학교에서 불교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재정후원하였다. 이들은 현재 미국과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김욱중, 남성일 서강대교수, 조성택 고려대교수 조은수 미시간주립대교수 등이 이들이다. 또 어린 불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하여 대원사 한글학교를 설립(1984년)하여 2세들이 한글과 한국의 전통 문화를 배우고 부처님의 법도를 어려서부터 익히고 생활화 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를 하신 것이다.
대원사 법당불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대원스님께서는 불교문화원건립에 관한 계획을 세우고 신도회 임원회의(신도회장 정계성)를 하여 대원사내에 불교문화원 건립위원회(위원장 차형권)을 구성한다.
아울러 한국에서도 대원사불교문화원 건립추진위원회를 설립하고 위원장에는 스님과 평소 인연이 깊었던 윤길중 국회의원을 모시고 부위원장에는 당시 교통부장관이었던 차규헌씨, 간사장에는 국무총리 비서실장인 윤석순씨 그리고 위원에는 하와이 불교문화원을 건립하는데 적극관심이 많고 도움을 아끼지 않겠다고 원을 세웠던 한국 불교계의 각 지도자들을 총망라하였으니 당시 스님의 활동영역이 얼마나 넓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불교문화원의 설립취지를 보면:
1. 한국불교 및 불교문화를 동서문화의 접점인 미국 하와이를 통해 국제적으로 소개함으로서 그 가치와 정신을 세계적으로 인식시키고 불교의 근본정신인 자비사상을 바탕으로 한 자유와 평화의 사상을 전파함.
2. 한국민족의 문화와 정신을 소개, 교육, 정승케하여 민족정신을 고양하고 한민족으로서의 긍지를 제고시킴과 아울러
3. 현지의 한국 및 한국불교 연구를 활성화시키고자 하는데 있음.
이와 같은 취지를 구현하기 위해 문화원내에 세계종교 문제 연구소, 평화문제 연구소를 설치하고 한국불교 및 불교문화를 소개하기 위해서 박물관, 도서관 및 전시관을 설치하고 이미 설립되어 있는 한글학교를 더욱 보완 확장하여 한글교육의 체계화는 물론 한국 민속, 서예, 도예, 다도 등을 보급하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하여 1984년부터 준비를 하여 1986년에 공사를 시작하고 1988년에 완전히 끝낼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1988년 10월 준공예정으로 9월에 외부 단청공사를 끝내고 내부공사를 하면서 이웃 주민들과 시비가 벌여져서 대원스님은 그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 대원스님과 하와이 한인불교계로서는 애석한 순간이었다.
또한 스님께서는 "세계 평화를 위한 불교의 지도적 역할"이란 주제로 1983년부터 격년으로 1995년까지 일곱 차례의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물론 이 학술회의는 대원스님의 기획에 의해 시작되고 운영되어 왔다. 이 세미나의 주된 관심사인 평화는 세계 각국의 불교 사상가, 평화지도자 및 평화 학자들이 함께 호소해 온 '평화로운 세계 건설'에 대한 공동 관심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불교도가 이 회합의 계기를 마련하였지만 이 회의 참가자를 불교도로만 제한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이 학술회의를 주관해 온 대원 스님은 각개인의 종교의 믿음을 초월하여 학술회의 근본취지에 동감하는 모든 학자들에게 참가의 문호를 개방하여 왔다. 그러므로 그간의 학술회의 참가자는 기도교인은 물론 간디주의자, 힌두교도, 자이나교도, 이슬람교도, 맑시즘, 비종교적 휴매니스트 등 세계 모든 지역의 학자들도 망라되어 있다. 참고로 회의 연도와 주제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불교와 평화 국제 학술회의 연혁 (1983-1995)
제 1차 회의(1983): 제 1차 학술회의는 "평화를 위한 불교의 지도적 역할"이란 주제로 1983년 10월 22일부터 28일까지 7일간 하와이 호놀룰루 시에서 개최되었다. 하와이 대원사가 주관한 이 학술회의에 하와이 대학 정치학과가 후원 단체로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 '위말 디싸나야케'는 불교에 관한, '차이와트 사타-아난드'는 지도력에 관한, 그리고 '요한 갈등'은 평화에 관한 주제 토론 논문을 발표하였다. 토론 및 논문 발표에 참가한 학자들의 소속 국가는 중국, 한국, 소련, 태국 및 미국이다. 학술회의 기록은 '페이지'(Glen D.Page)가 편집한 Buddhism and Leadership for Peace(Honolulu: Dae Won Sa Buddhist Temple of Hawaii, 1984)에 수록되어 있다.
제 2차 회의(1985): 제 2차 학술회의는 "각국의 다양한 내적 관련 조건을 통해서 존 불교"란 주제 아래 1985년 12월 2일부터 7일까지 일본의 동경 시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하와이 대원사와 소카대학 평화연구소가 공동으로 주관하였다. 논문 발표 학자는 '게동 바고즈오카'(발리), '자오 바오수'(중국), '라다크리쉬난'(인도), '나까오 쯔요시', '다까무라 따다시즈'(일존), '오키르발'(몽고), '베이코프', '힐리노프'(소련), '차이와트 사타 아난다'(태국), '료 이마무라'(미국)로서, 1차 회의 때 참가국외에 3개국가(발리, 인도, 몽고)가 추가 확대되었다. 이 학술회의 기록은 소카대학 평화연국소가 발간한 Buddhism and Leadership for Peace(Tokyo: Soka University, Peace Research Institute, 1986)에 수록되어 있다.
제 3차 회의(1987년): 제 3차 학술회의는 '차이와트 사타 아난드씨가 제의한 "불교와 관련하여 본 평화 조성"이라는 주제로 1987년 5월 23일부터 28일까지 6일간에 걸쳐 하와이 호놀룰루 시에서 개최되었다. 이 학술회의는 하와이 대원사와 하와이 대학 평화연구소가 공동으로 주관하였다. 중국, 인도, 일본, 한국, 몽고, 소련, 태국, 그리고 미국 등지에서 여러 학자들이 주제발표자 혹은 토론참가자로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토론을 위한 기조 논문은 스리랑카의 '아리야라트네', 태국의 '차이와트 사타-아난드', 베트남의 '치트 나타한' 3인이 발표하였다. 이 회의에서 발표되었던 주요 논문과 이 주제와 관련이 있는 기타 논문을 모아 '불교와 비폭력'(Buddhism and Nonviolence)이란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제 4차 회의(1989): 제 4차 학술회의는 '불교와 비폭력적인 범세계적 문제 해결'이란 주제로 1989년 8월 16일부터 24일까지 몽고의 올란바토르에서 개최되었다. 이 학술회의는 하와이 대원사와 아시아 불교도 평화 협의회(ABCP) 그리고 하와이 대학 평화연구소의 범세계적 비폭력 기획 센터가 공동으로 주관하였다. 이 회의에서 '슐락 시바라크사'는 불교에 관한, '무샤코지킨히데'는 범세계적 문제 해결을 위한 지도력에 관한, 그리고 '요한 갈퉁'은 평화로운 세계에 관한 주제 논문을 발표하였다. 토론은 군비축소, 경제정의, 인권, 환경보존, 국가간의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 노력과 같은 내적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불교 이론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에 그 초점이 모아졌다. 참가 국가는 중국, 인도, 일본, 몽고, 한국, 북한, 소련, 스리랑카, 태국, 베트남, 미국으로서 11개 국가로 확대되었다. 이 회의에 발표되었던 주요 논문들은 아시아 불교도 평화협의회에서 발행하는 잡지 Buddhism and Leadership for Peace Vol.11, No.4(1989)에 수록되었으며, Buddhism and Nonviolent Global Problem Solving(Honolulu: Center for Global Nonviolence Planning Project Spark M. Matsunaga Institute for Peace, 1991)이란 단행본으로 정리되어 출판되었다.
제 5차 회의(1991): 제 5차 학술회의는 '사회적 실천을 통한 불교 사상의 실현'이란 주제로 1991년 11월 18일부터 21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기간의 4차 대회를 통해 쌓여진 대원사의 국제학술회의 개최 역량을 서울에서 펼쳐 보이는 계기가 된 이 대회에는 13개 국가 60여명의 학자가 참가하였다. 하와이 대원사가 주최하고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이 후원한 이 대회는 한국 불교의 국제화 그리고 이를 위한 한국 불교 내적 토대 견실화의 필요성과 그 가능성을 보여 준 학횔 평가되고 있다. 이 회의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그 다양성으로 인해 아직 단행본으로 출판되지는 않았으나 연구 자료집 형태로 전문학자들에게 배포되고 있다.
제 6차 회의(1993): 제 6차 학술회의는 '불교의 세계관과 평화의 개념'이란 주제로 1993년 11월 25일부터 27일까지 호놀룰루에서 개최되었다. 하와이 대원사와 하와이 대학 불교학 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이 대회는 기간의 학술대회의 성과를 이론적으로 재정립하는 불교학자 중심의 순수불교학술회의로 치루어 졌다. 이 회의에서 발표되었던 논문들은 그 학술적 가치가 크게 평가되어 현재 하와이 대학 출판부에서 1995년도에 단행본으로 출판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대회의 성과를 모범으로 하여 불교뿐만 아니라 여타 종교 혹은 평화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학술회의의 이론적 성과를 함께 나누고 현실화시켜 학술회의 초기 목표를 구체화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제 7차 회의(1995): 제 6차 학술회의는 '불교와 평화: 그 이론과 실천'이란 주제로 호놀룰루에서 1995년 6월 3일부터 8일까지 개최될 예정이다. 1995년 학술회의는 은 대원사 창건 2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순수 국제 불교 학술회의로는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의 대회를 계획하고 있다. 대원사와 하와이 대학 철학과가 공동으로 주최할 이 학술회의에 아시아와 미주는 물론 유럽 쪽에서도 여러 저명한 불교학자들이 참가 신청을 하였으며, 이미 40여명의 학자가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 참가한 학자중 한 사람은 세계적인 평화학자 갈퉁교수다. 그는 1930년 노르웨이에서 출생한 정치학자 이자 사회학자이다. 그는 간디의 평화주의에 감명을 받고 동양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다가 불교와 만나게 되었다. 그는 평화연구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데 대원신문에서 이 갈퉁을 소개한 적도 있다. 이 갈퉁이 국내 불교학계에 소개된 것은 대원신문과 회의에 참석하여 대원스님과 관계를 맺은지 10년도 더 지난 후였다.
대원스님은 이 대회가 지속되지 못해 너무 아쉽다고 한다. "회가 지날수록 명망있는 학자들이 참석하고 싶어 했습니다. 자기 초청해 달라고 많은 사람들이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지식인 중심으로 학자, 불교평화를 위해 활동하는 사람, 덕망있는 학자, 스님들 엘리트 불교인들을 중심으로 국제불교평화조직을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행사를 한번 하는데 평균 6만 달러 마지막 대회때는 10만달러가 들어갔습니다 ."라고 이 대회가 중단된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스님과 신자들 영주권 신청해주어 미국에서 살수 있도록 도와 줌
스님은 대원사를 통해 수 없이 많은 스님들에게 영주권을 신청해 주어 그들이 미국에서 스님으로 살아가는 길을 열어 주었으며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는 서울대학교 심재룡 교수, 경희대학교 허우성 교수들을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을 후원하고 1985년 3월 1일에 창간된 대원신문 등에서 그들의 활동의 장을 만들어 주었다.
그밖에도 하와이에서 창립된 국제불교 협의회에도 참관 고문역할을 하면서 하와이내 국제불교인간의 상호 친목과 정보교환에 힘쓰는 한편 북한에서 고통받고 있는 불자들에게 부처님의 법음을 펴야겠다는 남다른 깊은 생각으로 여러 차례 평양을 방문하면서 불교인들의 방북의 물고를 텄으며 한민족 불교교류추진 미주 불교 협의회(한불협) 상임 위원장 겸 부회장(1991년)을 지내기도 했고 1991년 10월 28일에는 박태호 북한불교도 연맹 위원장 일행을 하와이에 초빙 환영법회를 실시한 바도 있다. 금강산 관광을 가는 현시점에서는 그러한 행사가 대단한 것이 못되겠지만 당시로서는 참으로 획기적인 행사가 아닐 수 없었다.
1998년 하와이에 정법사 창건
대원스님께서는 비구니 스님이신 지법스님께서 대원사 불사에 많은 공헌을 했고 비구니 스님들만의 독자적인 발전을 위한다는 뜻을 세워 1996년 호놀루루 시내와 거리가 떨어진 아이에아 지역에 관음사를 창건한 후 지법스님에게 전권을 이양하셨다. 과연 관음사는 비구니 스님의 하와이 중심 사찰이 되어 그후 인연이 있는 비구니 스님들이 기도 처로 휴식처로 활용을 하여 원대한 원력과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대원사를 건립하였고 문화원 건축에 전력을 다했건만 호사다마란 말이 있듯이 문화원 건립도중 인근주민들과의 불화가 악재가 되어 스님께서는 문화원 준공을 모두 마치지 못하고 종국에는 대원사 초창기 시절 인연이 깊었든 연재 주지인 권도현스님에게 불사의 뒷마무리를 부탁하고 대원사를 떠난다. 허지만 옛 부터 스님을 따르던 신도들의 청을 뿌리칠 수 없어 1998년 하와이 정법사를 창건하여 얼마 안 되는 신도들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신행하면서 오직 불법의 포교만이 주어진 사명으로 생각하면서 매주 일요일마다 작지만 훈기가 도는 법당에서 법회를 하는 한편 라디오 서울의 "2분 설법"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교포들에게 부처님의 법문을 3년 동안 계속하여 청취자들의 불자화를 꿈꾸며 세계평화가 이지구상에서 어서 속히 이루어 질 수 있는 방도를 찾기 위해서 지금도 끊임없는 기도를 해 오고 있다.
200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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