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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 출생지 | 거주지 | 체포 장소, 시기 | 순교일 (양력) | 나이 | 순교한 곳 |
1. 박 바르바라 | 충청도 면천 | 고초골 | 고초골에서 (1866년 11월) 서울 포교에게 | 1867년 1월10일 | 17세 | 서울에서 교수 |
2. 신 안드레아 | 충청도 덕산 | 온양 성골 → 고초골 | 고초골에서 (1866년 11월) 서울 포교에게 | 1867년 1월20일 | 65세 | 서울에서 교수 |
3. 유군심 치릴로 | 고초골 | 고초골 → 1867년 3월 홍주 대전골 | 홍주 대전골에서 1867년 5월, 해미 포교에게 | 1867년 5월 | 39세 | 해미에서 순교 |
4. 유군심의 아내 | - | 고초골 → 홍주 대전골 | 홍주 대전골에서 1867년 5월, 해미 포교에게 | 1867년 5월 | - | 해미에서 순교 |
5. 유군심의 제수 | - | 고초골 → 홍주 대전골 | 홍주 대전골에서 1867년 5월, 해미 포교에게 | 1867년 5월 | 32세 | 해미에서 순교 |
* 註 : 괄호안의 내용은 추정자료임
1. 박 바르바라(여, 17세, 충청 면천 출생, 용인 고초골 거주. 1867.1.10. 서울서 교수)
<병인치명사적>(23권-002. No.90)
"신자 여러분, 아무쪼록 이번에 여러 교우들과 함께 주님을 위하여 죽어 천국에 갑시다."
바르바라는 본디 충청도 면천(沔川, 현재 충남 당진시 면천면 일대) 사람이라. 부모가 문교(聞敎)하여 수계하다가 경기 용인 고초골(현재 경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학일리)로 이사하여 여러 해를 지내더니, 자녀 6남매가 있어 (박) 바르바라는 셋째라. 집이 가난하여 그 부모 여러 자녀를 기르기 어려우므로, 의식(衣食:먹고 입고 생활함)이 심히(매우) 박(薄)하여 많이 기한(飢寒, 굶주림과 추위)으로 지내되, (박) 바르바라는 본성이 순량(順良)하므로 여러 형제와 서로 다툼이 별로 없어 (굶)주림도 잘 참더니, 나이 십 오세에 출가(出嫁)하매, 시집이 또 가난하나 의식(衣食, 먹고 입는 재물)이 없음을 한탄함이 없고, 장부(가) 여러 번 박대(薄待, 모질게 대함)하나 양선함으로 참아 밧고 순명함으로 지내더니, 병인년 군난에 동네(의) 남녀 많은 교우 잡히매, 한가지로 잡혀 서울로 갈 제, 포교들이 “너는 오지 말고 네 뜻대로 가라” 하되, 듣지 아니하고 한가지로 잡혀가며 동교(同敎, 같은 천주교 교우)여인을 권하되, “우리가 이번에 아니 죽고 살아나가면 무엇에 쓰겠느냐?” 아무쪼록 이번에 여러 교우들과 한가지로(함께) 주를 위하여 죽자“ 하며, 좋은 낯으로 즐겨 따라와 서울로 가니, 옥에 먼저 잡혀있던 교우와 함께 병인년(1866) 12월 초5일(양력 1867년 1월 10일)에 교(絞首)하여 죽으니 나이 17세요. 증인은 평택 신흥리(新興里) 사는 원 루카이니 나이는 40세라.
박 발바라 <치명일기>(서울) 105.
면천(沔川) 사람이라. 시골에서 잡혀 병인 12월 초5일(양력 1867년 1월 10일)에 서울 와서 교(絞首)하여 죽으니 나이 17세러라.
<박 바르바라의 신앙행적 및 가족구성 관계를 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박 바르바라는 본래 고향인 충청도 면천에서 1851년경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는 데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서 천주교 신앙을 이어받았다.
* 그의 부모는 박 바르바라가 아직 어렸던 시절에 충청도 면천에서 경기도 양성 고초 골로 이사를 해왔는데, 고초골로 이사 온 후 비록 가난한 생활을 하였으나 여섯 형 제들은 다툼 없이 우애 있게 서로 잘 지내었다.
* 1865년경에, 신앙생활에 열심이던 고초골의 15세 처녀 박 바르바라를 같은 동네 살던 남성에게 혼인시키기로 결정하자, 바르바라의 집안에서는 마을의 어른인 신 안 드레아 노인 등에게 혼인성사를 주선해주도록 청했을 것이다.
* 박 바르바라는 결혼한 이후에도 고초골에 살았는데 남편에게서 심한 박대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구박하는 남편의 행패를 잘 참고 견디면서 지냈다.
* 박 바르바라의 시가와 친정집안의 고초골 거주 세대수를 대략 추산한다면, 적어도
4~5가구로 식구는 10여명에 달했을 것이다. 50대였을 박 바르바라 친정 부모와 출 가하지 않은 동생들로 구성된 1가구, 박 바르바라의 오빠·시누이 가족과 혹은 결혼 한 언니·형부 가족들이 1~2가구, 박 바르바라 시댁의 가족들도 1~2가구가 고초골 에 이웃해서 함께 살았을 것이다.
* 병인년 박해가 전국으로 확산되던 1866년 11월 초순경에,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 에게 고초골에 살던 박 바르바라는 마을의 여러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었는데, 이때 여러 사유로 풀려났던 마을 교우들이 있었다는 정황이 있다. 11월 초순경인 이때 이웃 마을인 병목골과 미리내 교우촌에도 같은 서울 포교들 습격을 받았다.
* 병인년(1866) 박해 때에 포졸들이 신자들을 잡아내기 위해 고초골 교우촌을 언제 몇 번이나 습격했었는지? 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신 안드레아 노인 가족이 인근 산중으로 피신했던 때가 고초골 마을이 1차습격을 받은 때인데, 이때 이미 교 우촌의 몇몇 교우 집들은 불 태워졌다. 박 바르바라가 동네 신자들과 함께 체포당한 시기가 2차 습격 때인 병인년(1866) 양력 11월 초순경일 것이다. 교우촌에서 포교 에게 붙잡힌 후 2, 3일간은 고초골에 머물며 재물을 흥정하고 약탈당했을 것이며, 고초골을 출발한 죄인들 행렬이 한양까지 160리 길을 5, 6일간에 올라갔을 것이다. 또한, 서울 관아 감옥에 수감되어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기까지 짧게는 한 달 내외, 길게는 두 달 가까이 수감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박 바르바라의 순교일이 1867년 1 월 10일(양력)이고, 신 안드레아의 순교일이 1867년 1월 20일(양력) 이었으니, 이 를 역산해보면, 고초골 교우촌이 서울에서 내려온 포교들에게 두 번째 습격을 당했 던 시기는 대략 1866년 11월 초순쯤이 되고, 1차로 처음 습격을 당했던 시기는 그 로부터 5개월 전인 5월말, 또는 6월초순경 쯤 이었을 것이다.
* 11월 초순 두 번째 습격 때에, 동네의 많은 남녀 교우들이 함께 잡혀 동구 밖에서 서울로 향해 갔는데, 포졸들이 박 바르바라에게 “너는 오지 말고 네 뜻대로 돌아가 라” 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고 함께 붙잡혀가면서, 잠시 마음 흔들리고 있던 옆 동료 여인에게, “우리가 이번 안 죽고 살아나가면 무엇에 쓰겠습니까? 아무쪼록 이번에 여러 교우들과 함께 주님을 위해 치명 합시다“ 라면서, 평온한 모습으로 즐겁게 서 울 감옥으로 향했다고 한다. 이때 5개월간을 고초골 미리내 인근 산중에서 도피생 활을 하다가 붙잡힌 신 안드레아 가족과 동료들도, 박 바르바라 일행의 고초골 죄인 호송행렬에 함께 했을 것이다. 1866년 11월 초순경이었다. 박 바르바라가 17세의 나이로 순교했으니 박 바르바라 생몰연대는 1851년 출생 1867년 순교로 추정된다.
* 고초골 출신 순교자 유군심 치릴로가 해미에서 온 포졸에게 체포당해서 옷을 벗기고 몸이 묶여 공중에 매달려 채질 당하다가 외교인 양반의 도움으로 위험을 벗어나 고 초골 집에 돌아왔다고 <박순집 증언록>에 수록돼 있는데, 당시에 해미 포졸들이 고 초골로 출동해서 유군심을 체포한 것인지? 해미 인근지방을 다니러 간 유군심을 체 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위의 경포에 의한 1, 2차 고초골 박해와는 관련이 없는 것 같다.
2. 신 안드레아(남. 65세. 충청 덕산출생, 용인 고초골거주. 1867.1.20. 서울서 교수)
<병인치명사적>(23권-001~002. No.90)
“이는 항상 원하던 일이니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 더 살다가 죽는 것 보다 좋습니다.”
안드레아는 본디 덕산(德山) 개안 사람이라. 그 부모 문교(聞敎)하야 수계할 마음으로 입산하여 온양(溫陽) 성골로 가서 농사로 생애(生涯, 생계를 유지함)하되, 신병(身病, 몸에 지닌 병)으로 일하기 어려워 집이 가난하니, 위주구령(爲主救靈)하기로 감수(甘受,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임)하며 처자(妻子)와 상해(詳解, 자세히 말해줌) 하는 말이, “위주(爲主)하여 가난 받는 것이 주의 자식 되는 보람이니 산중(山中)에 와서 빈천고난(貧賤苦難, 지극히 가난하고 고생스러움)은 우리가 취하여 받을 본분이라” 하며 수십 년을 지내더니, 후에 용인 고치골로 이사하여 여러 해 신병으로 공극(困極, 지극히 곤란함)히 지내더니, 마침내 병인년 군난을 당하여 세간(집안 살림에 쓰는 온갖 물건, 재물)을 다 포교에게 빼앗기고 집을 다 소화(燒火, 불태워 버림)하니, 외인(外人, 비신자) 친구는 붓치지 아니코(붙잡지를 않았으나) 포리(暴吏, 포악한 관리)들은 잡으려고 하매 갈 곳이 없기에, 깊은 산에 가서 소솔(所率, 거느린 식구들)을 다리고 다섯 달을 생불여사(生不如死, 살아있으나 죽느니만 못함)로 지내다가 심하게 잡으려 하매, 날마다 쫒기여 산에서도 정처 없이 지내다가, 경포(京捕)에게 십 여인이 잡히어 서울로 가서, 다른 이는 월옥(越獄, 탈옥)하며 “함께 나가자”고 하되, 다시 생각하며 “(이는 내가) 항상 원하던 일이니 위주 하여 죽으면 더 살다가 죽는 것 보다 좋다”하고 나갈 뜻이 없이 옥에 있으매, 남은 교우와 한가지로(함께) 병인년 12월 망간(望間, 보름 날)에 교하여 죽이니 나이 65세요. 증인은 평택 신흥리(新興里) 사는 원 루카이니 나이는 40세라.
- 임성빈, 요한 크리소스토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