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아의 게르만족들(서게르만족)
보헤미아는 오늘날에는 체코인 혹은 집시들의 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그러나 아직 체코인들과 집시인들이 나타나지 않았던 로마 시대 때는 무수히 많은 게르만족들의 땅이었습니다. 보헤미아라는 지명은 켈트족의 한 일파인 보이족Boii과 게르만어 *haimas"고향; 영토"가 합쳐진 게르만어에서 유래했으며, 그 의미는 '보이족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고고학적으로도 게르만 이전에 켈트족이 중유럽을 본거지를 삼았던 때를 감안하면 역사적으로 정확한 뜻을 지닌 지명입니다.
켈트족의 한 일파인 보이족이 게르만족과의 경쟁에서 밀렸는지, 아님 다른 땅을 찾아 이주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보이족의 영토였다는 걸 암시시켜주며 실제 고고학적으로도 수많은 보이족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는 수많은 보헤미아 게르만족들 중, 네 부족을 소개할 겁니다.
▲ 125년 경의 보헤미아의 게르만족들. 마르코만니족, 콰디족, 부리족.
마르코만니Marcomanni
부족 명칭의 이름은 전방, 변방을 뜻하는 게르만어 *mark(a)-와 사람을 뜻하는 *manns의 합성어인 게르만어 *Mark(a)manniz, *Mark(a)mannaniz의 라틴식 표기입니다. 요근래에는 영화 글래디에이터 도입부에 등장하며, 로마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마지막 5현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와의 전쟁으로 유명합니다. 그들의 왕들 중 하나인 마로보두스Maroboduus의 이름은 게르만식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만, 켈트식으로도 설명이 가능해서 지배층은 켈트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거나 켈트식 체제를 지녔을 거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초창기 역사
역사적으로는 마르코만니족에 대한 첫번째 기록은, 수에비족Suebi의 아리오비스투스Ariovistus가 율리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Iulius Gaius Caesar와 대립할 때였습니다. 당시 아리오비스투스는 수에비족들을 이끌고 현재 남독일에서 넘어와 라인강을 건넜습니다. 그런 시절에 마르코만니족의 이름이 로마인들에게 알려졌다는데,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마르코만니족은 라인강과 마인강 인근에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그러나 플로루스Florus에 따르면 그 당시에는 그곳에 시캄브리족Sicambri이 있었다고 기록했으므로 어쩌면 당시에는 마르코만니족이 라인강 인근에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마르코만니족은 기원전 6년, 로마의 공습에 밀려나 보헤미아 동부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그 때 마르코만니족의 왕 마로보두스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와 평화 조약을 맺고, 주변 게르만족들을 복속시켜 강력한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마로보두스는 이후 로마와 싸우려는 케루스키족Cherusci의 아르미니우스Arminius와 사이가 틀어졌습니다. 아르미니우스는 마르코만니족의 지배를 받고 있던 게르만족들과 동맹을 맺어 마로보두스를 고립시켰습니다.
결국 알력 다툼에서 패배한 마르코만니족과 마르보두스는 보헤미아에 있을 수 밖에 없었고, 아우구스투스는 그것을 빌미로 게르마니아로 침략함과 동시에 마르코만니족을 이용해 케루스키족의 후방을 고립시키려고 했지만 마르코만니족은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습니다. 테우토발트 전투 이후, 카투알다Catualda라는 귀족이 마르코만니족이 케루스키족과 전쟁을 벌이던 틈을 타서 마로보두스를 유폐시킴에 따라 그 계획을 성사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드루수스Drusus에 따르면, 카투알다는 고트족에 볼모로 잡힌 마르코만니족의 젊은 귀족이었다고 합니다. 카투알다는 헤르문두리족Hermunduri의 비빌리우스Vibilis에게 패배당해서 갈리아로 쫓겨났습니다. 이후 마르코만니족은 콰디족Quadi의 반니우스Vannius 왕에게 통치당합니다.
▲ 마로보두스
-마르코만니 전쟁과 그 이후
콰디족에 통치당하던 마르코만니족은 언제부터인가 그 관계를 청산하였습니다. 그리고 2세기경에 콰디족, 반달족Vandali, 그리고 非게르만족인 사르마티아인Sarmatian과 함께 연합전선을 맺어 로마에 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자들 의견으로는, 아마 마르코만니족의 주도 하에 고트족 같이 거대한 부족연맹으로 성장할 계획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했으나 정확히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166년, 마르코만니족은 발로마르Ballomar의 주도 하에 약 3년 동안 로마와 전쟁을 벌였고 전쟁 도중 수많은 게르만족들이 마르코만니 연맹에 참가했습니다. 한편, 로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주도 하에, 국경을 위협하는 게르만족들을 내쫓고 영토를 확장할 목적으로 북상을 시작합니다. 실질적인 분쟁의 시작은 랑고바르트족Langobardi과 우비족Ubii으로 추정되는 오비족Obii이 모에시아를 향해 다뉴브강을 건넌 것에서 시작된 걸로 보입니다.
전쟁 초반에는 로마 전방에서 마르코만니족이 우세했으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성공적으로 마르코만니족의 공격을 막아냈고, 사마르트족에 크나큰 피해를 입혀 '사르마티쿠스Sarmaticus'라는 칭호를 얻어냈습니다.
▲ 마르코만니 전쟁에서의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
178년 무렵에 마르코만니족은 전에 로마군에게 진압당한 콰디족의 반란에 호응하여 다시 로마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시 한 번 그들을 격퇴하다만, 콰디족을 쫓느라 너무 깊숙히 게르마니아로 들어갔고, 전투에서는 승리했다만 빈도보나(오늘날 빈Wien)에서 황제가 사망했습니다. 황제의 아들인 콤모두스Commodus는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흥미가 없었기에 재빠르게 게르만족과 협약을 맺고 180년 가을 초에 철군을 명하고 로마로 돌아와 10월 22일에 승전을 자축합니다.
마르코만니족은 이후 4세기 중순, 프리티길Fritigil 여왕이 기독교화를 선포하고 난 뒤에 더 이상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409년, 피렌네 산맥을 건너간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 부리족Buri 일파가 갈리시아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수에비 왕국의 일원이 됐다고 합니다.
마르코만니 전쟁에서 로마는 승리했다고 하다만, 이 전쟁으로 게르마니아에 대한 로마 북방 방어선이 약해지고 그 단점이 노출됐습니다. 또한 로마군단의 절반(33개 군단 중 16개 군단)이 쪼개져서 다뉴브강과 라인강에 주둔하게 됐고, 약해진 로마의 감시망을 이용해 많은 게르만족들이 로마 국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게르만족은 대담하게 로마 깊숙히까지 들어가기도 했는데, 로마는 가면 갈수록 내전으로 인해 힘을 잃기 시작했고 결국 게르만족들의 로마 이주를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프랑크 왕국의 룬문자 형식 중에 마르코만니 룬이 있다만, 마르코만니족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바이노카이마이Baenochaemae
또는 Bainochaimai, 바노카이마이Banochaemae, Banochaimai, 보노카이마이Bonochaemae라고도 불립니다. 바이노카이마이족의 뜻은 '보이족의 땅(보헤미아)'이라는 뜻으로, 오늘날 보헤미아 지역에서 활동했습니다. 바이노카이마이족은 광대한 영토를 지니고 있었는데, 한 때 모라비아, 헝가리, 남오스트리아와 심지어 북이탈리아에 걸쳐 살기도 했습니다. 로마 제정 시절 기록에는 그들이 마르코만니족과 함께 수에비족의 한 일파라고 생각했습니다.
프톨레미우스Ptolemius는 엘베강 인근, 멜리보쿠스 산 동부에 있다고 기록했는데, 그 멜리보쿠스 산이 오늘날 멜리보쿠스 산이 아니라, 하르츠 산이거나 튀링거발트로 보는 의견이 있습니다. 또한 아스키부르기움 산맥(아마도 현 주데텐) 인근에 루기족과 부리족이 있었다는데, 이를 보아 그들의 위치가 어쩌면 보헤미아 북부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바이노카이마이족을 바이미족(Baemi, 바이모이Baimoi)으로도 언급했는데, 그리스어 번역의 차이로 보이나, 실존했던 바이미족은 바이노카이마이족 남부에 있었고, 남헝가리와 북다뉴브강 인근에 있었다고 하며, 인근에는 콰디족과 루나 숲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콰디족Quadi
콰디족은 게르만족 일파들 중에서도 작은 파벌로 인식되는데, 아마도 다른 게르만족들과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도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콰디족은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질 못했으나 로마의 기록에서는 비교적 자주 나오는 편입니다.
▲ 콰디족 전사 피겨
-초창기 기록
기원전 1세기 로마 기록에 의하면 콰디족은 마르코만니족과 나란히 이주했다고 전해집니다. 아마도 마르코만니족과 함께 마인강이 본거지로 추정이 되는 콰디족은 마르코만니족과 함께 현 보헤미아 혹은 모라비아 지방으로 이주를 개시했으며 마르코만니족과 오래전부터 연합을 맺어온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들은 기원후 6년, 훗날 황제가 되는 티베리우스Tiberius와 싸우기도 했습니다.
스트라본Strabon은 그의 저서에서 콰디족을 수에비족의 한 일파인 콜도우오이(Koldouoi; 라틴어 Coldui)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들은 보헤미아에 있었고, 마로보두스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마 콜두이라는 낱말은 콰디족을 가리키는 또다른 말인 Coadui로 수정해야 맞다고 생각됩니다.
타키투스Tacitus는 콰디족을 마르코만니족과 마찬가지로 호전적이었으며, 투드루스Tudrus 혹은 투드릭Tudric의 지배 하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350년도에 마르코만니족의 서족, 부리족의 북쪽에 있었으며 사르마트인과 반달족의 한 일파인 하스딩기족Hasdingi과 함께 동부에 도착했다가 이후 로마제국이 있는 남쪽으로 나아갔다고 합니다.
-마르코만니 전쟁과 그 이후
콰디족은 2세기 후반, 마르코만니 전쟁에 참가했습니다. 콰디족은 로마의 영토에 진입하는데 크나큰 어려움을 겪었으나 결국에는 로마국경을 뚫기는 했습니다.
몇 년 뒤, 마르코만니족과 함께 여러 게르만족과 연합을 맺어 대대적으로 다뉴브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171년, 마르코만니족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격파당하고 휴전 조약을 맺게 됨에 따라 콰디족 역시 전쟁을 중단했다만 172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마르코만니족을 공격하기 위해 콰디족의 영토를 걸치게 됐습니다. 그러나 콰디족의 격렬한 저항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군단은 거의 패배했으나 갑작스러운 푹우로 인하여 도리어 콰디족이 패배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로마는 174년에 콰디족을 거의 몰아냈다고 전해지며, 다시 황제는 175년에 다뉴브강 유역을 콰디족과 그 동맹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군을 일으켜 세웠지만, 곧 국내의 반란으로 인해 진격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178년, 반란을 진압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또 다시 다뉴브강을 건너 게르만족을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콰디족은 다뉴브강 인근과 보헤미아를 통치하고 있었는데, 포에토비오 판노니아의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Marcus Valerius Maximianus의 활약으로, 콰디족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4세기, 발렌티니아누스Valentinianus 시절, 콰디족의 왕 가비니우스Gabinius가 다뉴브강에 세운 로마 성채에 불만을 가지고 침공을 개시했습니다. 가비니우스가 회담을 청하자, 갈리아 제독의 아들 마르켈리우스Marcellius가 가비니우스를 회담 장소에서 암살했습니다. 이런 황제의 행동에 게르만족들은 분노하자 발렌티니아누스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직접 콰디족 사신을 만난 자리에서 뇌졸증으로 즉사했습니다.
400년 이후 역사에 등장하지 않으며, 유물로는 그 당시부터 수에비족-콰디족 스타일의 화장 방식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콰디족의 한 일파는 마르코만니족과 부리족과 함께 갈리시아로 넘어갔고, 그곳에서 수에비 왕국의 한 일원이 됐다고 전해집니다.
▲ 마르코만니 전쟁 승전 기념비 중 일부
부리족Buri
부족명의 의미는 아마도 '주거지'를 뜻하는 *būraz¹ 또는 '거주민'을 뜻하는 *būraz², '아들'을 뜻하는 *buriz¹ 혹은 '언덕'을 뜻하는 *buriz², '산들바람'을 뜻하는 *buriz³에서 파생됐다고 봅니다. 또한 '기회'를 뜻하는 *burjaz에서 파생됐다고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추정되어집니다. 일반적으로 타키투스의 견해처럼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살았다고 보지만, 프톨레미우스는 루기족과 하나로 묶어 Lougoi Bouroi라고 불렀으며, 남프랑스와 주데텐의 엘베강, 비스툴라강 상부에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프톨레미우스는 그들이 실링기Silingi 반달족의 한 일파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타키투스든 프톨레미우스든 모라비아로 진출을 했었고, 이후 비출라강 상부로 올라갔다고 보며, 그곳에 있던 루기족Lugii과 동맹을 맺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마르코만니족, 콰디족과 함께 마르코만니 전쟁에 참가했으나 로마와의 협약을 통해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원래 동맹군들이었던 마르코만니 연합과 갈등을 빚게 됐으며 그들의 보복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후, 그의 아들 콤모두스가 집권하자 그들은 평화를 누리게 됐으나 마르코만니족의 보복을 피할 수 없었던 걸로 보입니다. 게르만족이 로마와의 평화를 맺었다는 것은, 부리족 같이 로마편으로 돌아선 부족들 뿐만 아니라 적대 부족들 역시 로마와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부리족은 로마에 도움을 청했지만 마르코만니족과의 전쟁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로마는 그들을 돕지 않았고, 부리족은 마르코만니족에게 철저히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이후 더 이상 부리족은 언급되지 않는데, 아마 마르코만니족에게 병합당한 걸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