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굉장히 좋아했던 찬송이 있다. 찬송가 348장 ‘마귀들과 싸울지라’. 어린 내게는 너무 길었던 예배시간, 알아들을 수 없는 어른 예배가 지루하다가도 이 찬송을 부를 때면 흥도 나고 힘도 났다.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이 4분의 4박자의 경쾌한 리듬에 맞춰 일제히 박수를 치며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어느 순간 굉장한 몰입감과 일체감을 느껴서 4절이 다 끝나가는 것이 아쉽게 느껴진 순간이 있었을 정도였다.
남성적이고 호전적인 찬송가 가사들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담대하게 싸울지라 저기 악한 적병과
심판 날과 멸망의 날 네가 섰는 눈앞에 곧 다가오리라
가사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핵심은 파악할 수 있었다. 마귀와 싸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싸움은 담대함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래서일까? 부를수록 어쩐지 결연해져야 할 것 같았다. 이런 흥겨움이 불편함이 되기까지 꽤나 긴 시간이 흘렀다.
이 찬송이 불편해지기 시작한 시점은 고등학생 때로 기억한다. 첫 번째 불편함은 ‘호명’(呼名)에서 시작되었다. 왜 죄악 벗은 ‘형제’만 부르지? ‘자매’는 왜 안 부르지? 자매를 호명하지도 않는 이 찬송을 나는 왜 부르고 있어야 하는 거지? 두 번째 불편함은 ‘명령’에서 발생했다. 싸우라는 명령, 다른 선택의 여지라고는 없다는 투가 싫었다. 세 번째 불편함은 ‘불안감’이었다. 심판 날과 멸망의 날이 곧 온다는 것, 그 두려움 속에서 싸움으로 내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불편했다.
입시 부담 속에서 사춘기를 보내고 있던 당시 나의 현실에서 이 찬송의 가사들은 부당한 강요로 느껴졌고, 그렇게 찬송가 348장과의 틀어진 관계는 다른 찬송가들에 대한 불편함으로 이어졌다.
나는 예수 따라가는 십자가 군사라 주 이름 증언하기를 왜 주저하리요
다른 군사 피흘리며 나가서 싸울 때 나 혼자 편히 앉아서 바라만 보리오
큰 싸움은 시작되어 용사를 부른다 일어나 전쟁마당에 다 어서 나가자
… (찬 349)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앞서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
우리 대장 예수 기를 들고서 접전하는 곳에 가신 것 보라
… (찬 351)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기 들고 앞서 나가 담대히 싸우라
주께서 승전하고 영광을 얻도록 그 군대 거느리사 이기게 하시네
… (찬 352)
주의 진리위해 십자가 군기 하늘 높이 들고서
주의 군사되어 용맹스럽게 찬송하며 나가세
… (찬 358)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군병’인가?
이 찬송들은 찬송을 부르는 주체들을 ‘십자가 군병’ 또는 ‘십자가 군사’로 호명한다. 그러고는 ‘주 위해 일어나’ ‘십자가 군기’를 따르거나 들고 ‘용맹스럽게’ ‘목숨까지도 바치고’ ‘우리 대장 예수께서 접전하는’ ‘싸움터로’ 나갈 것을 독려한다. 박수를 치며 이 찬양을 부르는 이는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는 것과 십자가 군병이 되겠다는 것은 과연 애시당초 양립가능한 목표인가?
십자군 전쟁이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목표 아래 ‘성지’를 회복하고자 했던 전쟁이라는 설명과는 별개로, 십자군 전쟁을 둘러싼 복잡한 맥락과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당시 신흥 상인들은 전쟁을 둘러싼 교육과 수송 및 약탈된 이슬람 지역의 물품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자 했다. 점차적으로 안정되어 가던 당시에 기사 직급들은 싸울 거리를 찾고, 일부 귀족 세력들은 지배할 땅을 찾고 있었다. 이러한 다층적인 욕망들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십자군 전쟁의 목표를 중심으로 결속되었고, 그리스 정교회의 재통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자기 권력 아래 놓고자 했던 교황의 욕망은 이 모든 전쟁을 ‘성스러운 전쟁’으로 정당화하기에 이른다. ‘성스러운 전쟁’이라는 십자군 전쟁의 또 다른 얼굴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모두 모여 본격적인 원정에 돌입한 후 아나톨리아반도부터 이들이 지나가는 길목은 당대 동로마제국인들이나 무슬림들이 보기에도 충격적인 대규모 파괴와 살상, 야만과 잔혹으로 점철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들을 충격이 빠트린 사건은 바로 1099년 예루살렘 함락과 더불어 벌어진 대학살 사건이었다. 2주 동안의 공성전에서 승리한 십자군은 7월 15일 드디어 ‘신의 도시’인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었고 이내 도시를 ‘정화’한다는 명목으로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여 일반 양민들을 대학살하기 시작하였다.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십자군은 신의 뜻이라는 열에 들뜬 광기로 차마 말로 하기 힘든 잔혹하고도 엽기적 행각들을 발작적으로 벌여 나갔다.
- 홍용진, ‘침략과 이주: 제1차 십자군과 예루살렘 왕국’〈e-Journal Homo Migrans〉 Vol.10 (Jun. 2014): 55-68쪽
1095~1208년 사이, 십자군이 소집되었다. 십자군은 무슬림 투르크에게서 예루살렘을 수복하는 ‘정당한 전쟁’을 치름으로써 죄를 사하고 천국행 티켓을 얻으려 했다. 십자군은 행군하는 도중에 만난 유대 마을들을 파괴했다. 니카이아, 안티오케이아,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여 약탈한 뒤, 무슬림과 유대 인구를 모조리 학살했다. 럼멜은 사망자 수를 100만 명으로 추정한다. 당시 세계 인구는 약 4억 명으로 20세기의 중반의 6분의1쯤이었으니, 십자군 학살의 사망자 수를 오늘 날의 인구에 대한 비율로 계산하면 약 600만 명이다. 나치의 유대인 집단 살해에 맞먹는 셈이다.
-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사이언스북스, 2014), 260-261쪽
십자군 전쟁은 예루살렘을 탈환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전쟁이었는가? 정말 그러한가? 무릎까지 차오르는 피를 휘저으며 도착한 예루살렘은 그래서 무엇이었는가? 라틴 교회의 승인을 받아 ‘정당하다’ 이름 붙여진 이 전쟁은 2003년 조지 W. 부시가 기도하며 벌였던 이라크 전쟁과 어떻게 다른가? 지금의 한국교회가 영적 싸움에 대한 비유라는 명분으로 ‘십자가 군병’이라는 호명을 그저 ‘상징’쯤으로 여기는 것은 정말 괜찮은가?
찬송가 353장의 가사 “십자가 군병 되어서”는 기독교가 지향하거나 암묵적으로 묵인해온 그 욕망을 굉장히 잘 포착하고 있다. 신앙생활을 십자가 군병이 되는 과정과 등치하고 그 과정을 통해 무서움 없이 예수를 따르는 것을 이상향으로 설정한다. 하지만 무서움을 무릅쓰고 십자가 군병이 되는 이 목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예수(마 12:20)라는 존재와 격렬하게 충돌한다. 이 충돌에 대한 설명들 역시 존재한다. 어디까지나 영적인 전쟁이며 그에 대한 비유일 뿐이라고. 그러나 문화적인 폭력은 그 사회의 구조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그렇게 정당화된 구조적 폭력은 직접적 폭력을 용인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사례들은 전체주의 역사 속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십자가 군병’이 혐오 폭력을 휘두르는 한국 사회
교회는 찬송가를 통해 십자가 전쟁의 향수를 복기하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무슬림에 대한 혐오, 난민에 대한 혐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에 앞장서고 있는 주류 기독교인들은 ‘십자가 군병’을 자처하고 있다. 그들이 온갖 십자가 표시가 들어간 깃발이란 깃발은 다 들고 나서는 서울의 풍경 속에서 군사주의가 기독교의 핵심적인 멘탈리티를 장악하고 있지 않은가? 언제라도 싸울 태세를 갖추고 눈앞에 오는 적병을 다 쳐부숴 이기려는 강력한 결기, 성도들을 준전시 태세에 몰아넣는 한국교회와 그 교인이라는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과 양립할 수 있는가?
몇 해 전이었다. 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를 앞두고 준비 회의가 있었는데 주일학교 담당자가 모 선교회에서 발행한 여름성경학교 교재를 소개했다. 큰 주제는 “믿음으로 승리해요”였는데 “하나님의 군사예요”로 시작하는 목차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2017년 한 교회의 여름성경학교 표어는 ‘전신갑주로 무장하여 세상을 정복하라’였고, 2016년 모 교회의 유치부 여름성경학교 주제는 ‘주님의 군사’였다. 꽤 많이 불린 어린이 찬송가 중에는 <어린이 군대>라는 곡도 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나가자 주님의 군대, 외치자 용감한 군대, 우리는 어린이 군대 주님의 용사.”
어떤 언어와 어떤 비유가 일상으로 스며들고 있는가. 분단의 역사 속에서 북한을 적이라 규정하고 신고의 대상으로 교육받아왔던 이들에게 ‘북풍’은 언제나 효과적인 대민 통제 수단 아니었던가? 국민은 언제나 동원 가능한 전쟁 수행자들 아니었던가? 군사주의는 일상에 스며들어 휴전선 너머의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를 정당화했고, ‘현역’ 또는 ‘군필’이라는 ‘정상 남성’을 중심으로 사회 서사를 구성함으로써 젠더에 기반한 불평등을 정당화해왔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국교회 안에서 군사주의는 어떻게 스며들어 무엇을 작동시켜 왔는가? 부채와 한복, 만국기 아래 모인 극우 기독교인들을 마주할 때면, 나는 교회가 군사주의 이데올로기를 활용하여 성도를 군사화하고, 그들의 신앙생활을 전시 태세화하며, 유일신 믿음 아래서 전체주의를 정당화해왔음을 확인한다. 돌고 돌아 혐오의 최전방에 서는 것이 그 신앙의 결과라면, 예수를 믿는 것이 다 무슨 의미인가?
이 책은 우리의 세계를 영영 변화시켜 놓은 12년간의 파괴적인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젊은이들이 맡았던 역할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증오와 살인, 타인에 대한 우월감을 가르쳤다는 사실로부터 새로운 이해를 끌어내려는 시도다. 결국 히틀러청소년단은 나치로 태어난 게 아니었다. 그들은 나치가 되어 갔다.
- 수전 캠벨 바톨레티, 《히틀러의 아이들》(지식의풍경), 196쪽
그리하여 묻는다. 한국교회는 무엇이 되어왔으며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그리스도를 닮겠다는 이들이 십자가 군병이 되겠다고 외치는 상황, 이 그로테스크한 풍경 속에서 우리는 대체 어떤 존재가 되어 왔으며 또 되려는 것인가?
문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