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글에서 이어집니다
흑여의주를 보고 홀려있는 이 나라의 풍수를 일부분 바로잡기 위해
흑여의주를 보고 홀리는 눈앞에 천불 천탑을 도선국사가 세웠다
홀리지 말고 바라보지 말라는것
아마도 이 나라풍수의 어그러짐을 보고
자생풍수라고 해서 부단히도 이 나라 풍수를 개선시킬려고 비보책도 마련하여 실행에 옮겼다
간간히 전해지는 도선국사의 풍수 술수가 그것중에 하나이다
``동문선``에 실린 박전지(朴全之)의 ``영봉산 용암사 중창기``에는
지리산 성모천왕이 도선에게 비밀스럽게 말하기를 ¨만일 3암사를 창립하면
삼한이 합하여 한나라가 되고 전쟁이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는 기록이 있다.
성모천왕은 바로 지리산 성모마고 할매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 석상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도선이 말한 3암사는 바로 선암·운암·용암이다.
그런데 이 3대 비보사찰은 폐사되고 말았다.
그것도 선암사만 조선 중기에 중수를 거듭해서 오늘날 존재하나 운암과 용암은 이미 잃어버린 옛터로 변해버렸다.
풍수란 좋은 땅을 골라 음덕(蔭德) 좀 보자는 술법 정도로 이해하기 쉽다.
이는 중국에서 전래된 풍수 개념 때문이다.
그러나 도선 풍수, 즉 한국적 자생 풍수는 땅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람과 자연의 상생 조화이다.
도선 풍수는 ‘비보’(裨補)가 핵심이다.
비보란 모자라는 것을 도와서 채운다는 의미.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적극적 개입을 의미한다.
즉 좋은 땅을 찾는 풍수가 아니라 ‘아픈 땅을 고쳐 좋은 땅으로 만드는’ 개념이다.
기타 석상등을 세워서 나쁜 기운이나 쇠락하는 기운을 바로잡거나 물리친 기록등이 있다
이 나라 내부적인 요건은 풍수적으로 이미 대충 말씀을 드렸다
엉망이다 항상 패망쪽으로 기울어진다
이 나라를 비유를 들자면 작은 물고기이다
흑여의주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흑여의주를 바라보는것만 보아도 이 나라 풍수가 얼마나 뒤틀렸는지를 가늠이 가능하다
반대로 그 나라라 그래도 제법 온전한 吉한 풍수면 밝은 여의주를 바라볼것이다
모든것이 뒤틀린 결정체여서 드디어 흑여의주를 바라보는 결과를 낳은것이다
적당히 뒤틀렸으면 흑 여의주를 바라보지는 않았을것
퍼펙트하게 풍수적 불길함이 모여있으니 드디어는 흑여의주를 보게 되는것
작은 새끼고래 라고 비유하자면
저 멀리 태평양쪽으로 어미 고래가 존재한다
새끼가 아프고 위험에 처하면 본능적으로 새끼를 살릴려는 모성애가 존재하는데
그 어미고래 덩치가 매우 장대하다
천조국 미국도 일부분 고래의 모습이 보인다고 이를테면 고래의 모습이 보인다고
가정을 하자
마찬가지로 어미고래는 근접하고 아비 고래는 멀리 있다
따라서 이 나라는 위태해지고 패망직전이 다가오면 거대한 어미고래격의
풍수적 기운이 작동을 한다
물론 어미고래의 엄청난 풍수적 요건이
작동을 하는 시기와 그렇지 않은 시기가 있을것이다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어미고래의 풍수적 기운이 작동하면
이 나라는 패망직전에 다시 회생을 하는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망국으로 가게 된다
외부적 거대하게 감싸는 풍수적 요인들이 있어 내부적으로
충신들이 그 영향을 받아 일어서고 끝내는 패망을 막아내는것이다
내부는 엉망이니 드디어는
즉 풍수적 결함이 80% 정도여도 흑 여의주를 바라보지는 않을것이다
90%를 넘어가니 드디어는 흑여의주가 출현 바라보고 홀리는것
그래도 이 나라가 명맥을 유지하는건 외부에서 웅장한 풍수적 도움이
다가오기때문에 극복이 가능한 경우가 많게 된다
거대하고 웅장한 어미고래의 풍수적 기운이 다가오면
내부가 엉망이어도 뜻이 있는 인사들을 위기국면에 일으켜 세우게 된다
임진왜란때의 의병들처럼
마찬가지로 거대하고 방대한 보호의 기운이 불어오면
그래도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이 나라의 위험을 결국은 극복하게 만든다
새끼고래로 비유하자면 고래의 위장 즉 수많은 양분들이 모여드는곳은
기생충으로 바글 바글하다
어미고래의 도움은 국난을 극복하는 거기까지만 가능한듯 보여진다
그렇게 국난이 극복되면 충신 애국자들은 모습을 감춰버린다
다시 기생충들이 들고 일어나 나라를 엎는 작업이 또 시작되는것이다
그 부분이 차단되어야 하지 않을까
제 아무리 풍수적 결함으로 기생충이 바글 바글 일어나도
그 기생충들이 모두 제거가 되어버린 다음에야
원인의 요인들이 없는데 풍수적 결함이 작동을 하고 싶어도 응하는자가 없다면
못하는것이다
.....................................................................................................................
[특별기고] 진주 이반성면 용암사 터와 문화재 관리
진종삼 (해인사신도회장·전 경남도의회의장)
출처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http://www.gnnews.co.kr)
진주시 이반성면에 위치한 용암사는 고려제찰사 박전지(朴全之·1250~1325)가 찬한 ‘
영봉산 용암사 중창기’에 따르면 도선국사는 만일 삼암사(三巖寺)를 창건하면 삼한이 합쳐져 일국이 되고
자연히 전쟁이 종식되리라 해 신라 현강왕 때 도선국사가 직접 비보사찰 삼암사를 창건했다.
지금의 순천 조계산 선암사(仙巖寺), 광양 백계산 운암사(雲巖寺). 진양 영봉산 용암사(龍巖寺)가 그것이다.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둔 비보사찰이란 지세, 산수, 강 등을 종합해서
풍수지리적인 학설에서 볼 때 쇠처(衰處)나 역처(逆處)는 불행을 가져다 줌으로
비보사찰을 세워 재앙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로 세운 절이라 한다.
즉 자연재해나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해 약간의 승려가 상주하는 곳이라 하고 있다.
창건된지 1000여년이 지난 오늘날 선암사·운암사는
아직도 절이 번창하고 있지만, 절집이 100여 칸이나 됐고 대장경 인영본 600여 상자를 봉안했으며,
충숙왕이 천태종 무외국통(無畏國統)의 하산소(下山所)로 지정해 한때 웅장하고 화려했던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사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발굴하지도 않은 채 일부 문화재만 암자 터에 흩어져 있고,
형상변경 허가 대상구역으로 지정돼 있는 사역(寺域)은 마을과 밭으로 변해 있다.
이는 마치 솥의 발이 하나 부러진 듯 도선국사의 삼암사 비보설이 크게 훼손됐다고 볼 수 있으며
혹시 용암사의 폐사로 인해 남북이 분단되고 한반도에 계속해 전운이 감돌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절터는 임진왜란 시 북관대첩으로 유명한 정문부(鄭文孚·1565~1624)장군의 후손
해주 정씨(海州鄭氏) 들의 세거지(世居地)가 되면서 해주정씨문중 사유지가 돼 있다.
이 절터에서 400m 떨어진 암자 터에는
△보물 제372호 용암사지 승탑(부도) △경상남도 지방유형문화재 제4호 용암사지 석불좌상
△비지정문화재 용암사지 석비 귀부 및 이수, 석등부재, 용암사지 5층 망배탑 유구 등이 남아있어
번창했던 용암사의 옛일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해주정씨의 문중 재실인 장덕재가 함께 건립돼 있어 문화재 관리차원의 부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지적이 이어지고 있어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들 문화재를 관리·보호하려면 1931㎡(584평)의 암자 터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예산을 확보, 매수 조치하고 용암사를 복원해 스님들이
거주케 하는 것이 최상의 문화재 보호대책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아울러 풍수설의 원조인 도선 국사의 비보설에 입각해 ‘한반도의 통일과 전쟁 없는 세상’을 기원하는
독경소리가 저 북한에 이르기까지 울려퍼지게 해 독재자의
마음이 바뀌도록 하는 것 또한 후회 없는 조치라 믿고 불교계 일각에서는
용암사 복원운동을 전개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또한 이 절터의 도면을 열람했더니 신기하게도 한반도의 지도와 같은 모양이 나타났다.
1100여년 전에 한반도와 같은 형태의 절터를 찾아 용암사를 창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도선국사의 비보설에 신뢰가 더 가기도 해 용암사를 복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더 솟구친다.
전 국민이 힘을 합해 ‘통일과 전쟁 없는 세상’을 염원하는 함성이
이곳 용암사를 시발점으로 해 전국으로 울려퍼지게 하는 것 또한 통일에 대한 열망을
승화시키는 방편이라 생각한다. 뜻 있는 많은 분들의 관심 있기를 바란다.
첫댓글 광양 운암사
전남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295-1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길46번길 34-43
진양 영봉산 용암사(龍巖寺)
조계산 선암사
승주읍 죽학리 802
임제선풍의 대쪽 같은 승풍을 고고하게 지켜온 청정도량, 선암사는 전라남도 순천시에 있는 고찰로 신라시대에 창건되었습니다. 542년(진흥왕 3) 아도가 비로암으로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875년(헌강왕 5)도선국사가 창건하고 신선이 내린 바위라 하여 선암사라고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