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시
미천면 오방리 소재
하륜(河崙) 선생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한번은
꼭 찾아 뵙고 싶었고
평소 깊이
마음에 둔 분이시라
마음은
구름 위를 날고
발걸음은
의기양양 했다.
어제
겨울비가 내려
도로도 깨끗하고
산도 촉촉히 젖어
참나무 향이
온 산을 진동을 한다.
하씨 문중 제실(祭室) 뒤
돌담 오솔길 따라
약 300m 올라서니
하륜 선생의 묘소가
들어온다.
약 700여년의 세월이
말해 주듯이
묘를 둘러 싼
납작한 돌들 위에는
세월의 무게 만큼
진중하게 이끼들이 끼였다.
준비한 소주와 막걸리를
이내 내어 놓고
막상
큰 절을 올리고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한다.
하륜 선생이 누구이신가?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의
심복(心腹) 이자
책사(策士) 이다.
하륜(河崙, 1347~1416)!!
본관은 진주이며
고려말 문신이자 학자이고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시호는 문충(文忠) 이다.
1388년(우왕 14)에는
최영(崔瑩)의 요동 정벌을 반대하여
양주로 유배되었다가
위화도회군 이후 복관되었고
조선 개국 후 1393년(태조 2)
경기도 관찰사 시절
계룡산 천도를 반대하고
한양 천도를 적극 주장하였다.
1차, 2차 왕자의 난 당시
태종 이방원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여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지휘했으며,
정종에 이어
이방원이
태종(太宗)으로 즉위 하자
명나라의 사신으로
조선 왕조의 인준을 증거하는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와
조선 건국의 기반을 닦는데
큰 공을 세웠다.
또한,
태종은
하륜의 예언으로
죽음의 고비를
몇 차례 넘기기도 하며
특히,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6조직계제를 도입하는
정치제도 개편과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 하였다.
훗날,
태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벼슬에서 물러나려 하자
태종은 하사품을 내리는데
사사로이
쓸 수 있겠는가 하고
향사당(鄕射堂)을 지어
태종의 교서(敎書)를 모셔 두고
하사품은 시골 노인들을 위해
쓰게 하였으며
하륜이 사후에는
태종의 묘정(廟庭)에 봉안되었다.
이렇게 하륜은
항상 승자의 편에 있었고
살아남는 자가
진정한 승자임을 보여준
성공한 정치인으로
역사에 남았는 건
시문(詩文), 천체(天體)
의술(醫術), 지리(地理) 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주역(周易)에 능통한 이유이고
문집에는
호정집(浩亭集)이 있다.
관상에도
뛰어난 하륜은
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을
처음 보는 순간
장차 임금이 될 것으로
한 눈에 알아차려
정안군의 장인(丈人)
민제 대감에게 만남을 간청하고
민제 대감의 주선으로
이방원과 인연을 맺게 되는데
만약,
하륜이 아니였다면
정안군 이방원은
태종(太宗)이 되었을까?
과연!!
한나라의 장자방(張子房),
송나라의 치규(稚圭) 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하륜의 반대 편에 있었고
역사의 패배자였던
정도전을
더 많이 기억한다.
그가 남긴 유산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고
정도전은
그 삶을 다하지 못했지만,
그의 정신과 신념은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하륜은 성공한 정치인이고
2인자 였다는 점이다.
그의 삶 또한,
치열한 경쟁에 있는
현대인에게
적용해도 될 정도로
치밀하고
전략적 이었다.
정치적
타협을 포기하고
죽음으로 자신을 몰아넣은
정도전 보다는
지혜로운 삶을 산
인물이라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본다면,
하륜과
정도전의 비교되는 삶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
대조(對照)의 좋은 예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이런 저런
깊은 생각 속에서
묘소를 꼼꼼히 둘러 보고
뒤돌아 오는 길에는
하륜 대감의 손 길이
내 어깨에 다가와
묵직한
따스함을 느꼈으며
태종께
알현(謁見)하는
" 소생 하륜 입니다. "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乙未年
律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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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河崙) 선생의 묘소를 찾아서...
律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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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1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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