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11.4일 박 동원 논설위원의 논평에서 발췌한 짧막한 내용입니다.이태원 참사의 비극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정치적 흑심을 잘 깨우쳐주는 글이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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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죽음을 정치화하는 유일한 종이며, 죽음을 삶과 권력에 이용하는 유일한 종이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철학적 명제는 실제적 현실이기도 하다.
산처럼 거대한 진시황의 무덤은 사후에도 놓지 않으려는 본인의 권력욕이고, 조선 사대부의 장엄한 무덤은 조상의 음덕으로 권세를 누리려던 후손들의 욕망이다. 화장하여 작은 비석 하나 놓아달라던 노무현의 유언은 짓뭉개져 거대한 진영의 권력 상징이 되었고, 고향 시골 마을 성당 묘지 한 평짜리 드골의 작은 무덤은 후세에 귀감이 되었다.
전쟁에서 죽어간 원혼을 달래는 아테네의 전몰자 추도식은 국가를 단결시키는 국가적 제례였고, 게티스버그 전사자 추도식은 미합중국을 각인시키는 공화국의 이념이 되었다. 이처럼 죽음은 문화와 정치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권력을 위한 상업적 소비재가 되기도 한다. 산자가 죽은 자를 규정하고, 죽은 자는 산자를 지배하기도 한다.
정치를 거부한 이태원의 안타까운 젊은 죽음은 이제 진영 권력의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다. 김주열의 죽음은 4.19를, 이한열의 죽음은 6.10을, 세월호의 죽음은 탄핵과 정권교체를 불러왔다. 조상의 무덤이 자손의 권세를 좌우하는 유교 조선의 후손들은 죽음의 위력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봉하 참배가 진영 혈족을 확인하는 통과의례로 이용되는 이유다.
분열의 나라에서 죽음조차 진영화되고 정치적 상업화로 소비된다. 천안함 46명의 젊은 죽음엔 짧은 추모글 하나 달지 않던 옛 운동권 친우들이 세월호의 죽음에 그토록 슬퍼하는 것을 보면서 죽음도 정치사회적이란 걸 깨달았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란 건 정치적 동물이란 의미다. 죽음을 대하는 심금도 정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민주당 정치인들의 잇단 술판과 ‘개딸’들이 이재명의 기사회생에 즐거워하는 건 '죽음의 상업화' '죽음의 정치화'의 한 단면이다.
한쪽에서는 죽음의 정치적 소비에, 상대 쪽에서는 죽음의 정치적 불매운동으로 맞대응한다. 그리하여 죽음의 원인 규명은 공중으로 흩어져 버리고 정치적 소비 욕망만이 팽배한다. 슬픔과 애도는 그저 죽음의 상업화를 위한 광고 문구가 되었다.
출처 : 최보식 의 언론(https://www.bosik.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