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언어학과 과대표 박종철(1964~1987)이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에서 수사요원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의 물고문을 받다 1987년 1월 14일 사망했다. 박종철은 당시 지명 수배자인 박종운의 소재파악을 위해 참고인 자격으로 영장 없이 불법 연행돼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던 중이었다. 박종운(1961년생, 사회학과 81학번)은 학내 서클 ‘대학문화연구회’선배로, 1984년 결성된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건으로 1985년부터 수배 중이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살해되기 며칠 전 선후배들과 즐겁게 담화를 나누고 있는 고 박종철(우)
지금 우리가 ‘박종철’을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은, 당시 중앙일보 검찰 출입기자 신성호의 공이 컸다. 신성호는 흔히 그랬듯이 검찰 간부들의 방을 한 바퀴 돌다가 우연히 "경찰 참 큰일 났어!"라고 말하는 한 간부의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것이 결코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신성호는 "그러게 말입니다. 어쩌다 그런 일이…"하고 사건의 내용을 아는 척하며 접근했다. 그렇게 해서 '남영동' '서울대생' 등 단서가 될 만한 꼬투리를 얻어냈다.
이어서 그는 그 단서들을 바탕으로 검찰 관계자 10여 명을 만나 퍼즐 조각을 맞춰 나갔다. 그 결과 경찰에서 조사 받던 대학생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문제는 그 대학생의 인적 사항이었다. 신성호는 서울대 취재를 담당하던 동료기자 김두우로 하여금 학적부를 뒤지게 하는 등의 복잡한 절차를 거쳐 마침내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이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그리고 취재 후 당일 석간에 ‘경찰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 기사를 단독 보도했다.
당시 중앙일보 보도 자료
이 보도가 나가자 경찰로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해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6일 오전에 있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발표는 이렇게 되어 있다.
“1월14일 오전 8시 10분경,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하숙방에서 연행하여 오전 9시 16분경 조반으로 밥과 콩나물국을 주니까 조금 먹다가 어젯밤 술을 많이 먹어서 밥맛이 없다고 냉수나 달라고 하여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10시 51분경부터 신문을 시작, 박종운 군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음.”
이 때 경찰이 배포한 보도 자료의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은 한 때 세간의 비웃음과 더불어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유행어가 되었다. 어쨌든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박 군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쇼크사가 고문사로 확인된 것은 우선 당시 공안부 최환 부장검사가 청와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부검을 진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한 것이 진상을 밝히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부검의였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장 황적준도 경찰의 협박, 회유를 뿌리치고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라는 의견을 밝혔다.
또 한편 사망 검진의였던 중앙대병원 내과 전문의 오연상의 덕도 있다. 1월 14일 오전 11시 40분경 간호사와 함께 대공분실로 불려간 그는 5층 9호 조사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고, 7-8명 되는 수사관은 초조한 기색으로 서성대는가 하면 어떤 이는 누워 있는 한 청년에게 열심히 인공호흡을 하고 있었으며 그 청년은 이미 숨져 있었고, 복부 팽만이 심했고, 폐에서는 수포음이 들렸다고, 본 대로 언론에 알렸다.
언론에서는 16일자 신문에 오른쪽 폐에 탁구공 크기만한 출혈이 있었다는 부검입회 가족의 증언이 실렸고, 17일 사체를 첫 검안한 의사 오씨의 “조사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는 등 고문 시사 증언이 신문이 보도되면서 사건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치안본부 특수대는 17일 수사에 착수 19일 고문사를 공식 인정하면서 조한경, 강진규 2명을 고문 치사 혐의로 구속했다.
박종철을 사망에 이르게 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우)
시신은 16일 오전 화장돼 임진강의 한 샛강에 뿌려졌다. 흩날리는 유분에 대고, 허공에 대고, 아버지 박정기가 했다는 말 “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도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영정은 어머니가 다니던 부산의 사리암에 모셔졌다.
정부는 17일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열었고, 19일 강민창은 조한경 등 2명의 수사관이 지나친 직무의욕 때문에 저지른 일로 모든 책임을 떠 안겼다. 그날 그도 해임됐다.
2월 7일은 ‘고 박종철 범국민추도회’로 전국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부산에서도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이하 부민협) 임원인 노무현 변호사, 김광일 변호사, 김재규 사무국장, 고호석 사무차장 등 300여 명이 가슴에 검은색 리본을 달고 집결해 있었다. 그리고 오후 2시 전국에 있는 사찰과 성당 등 종교기관에서 타종이 시작되고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기 시작하면서 추도식이 시작되었다.
그 동안 기껏 박수나 치던 시민들이 투쟁 대열에 합세하기 시작했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시위에는 총 수많은 군중이 모여 구호를 외치며 분노를 힘으로 결집시켜 나갔다. 이날 부산은 마치 9년 전 10월에 있었던 부마항쟁의 열기 속으로 들어간 듯했고, 민주화를 열망하던 사람들은 독재정권을 끝장낼 수 있겠다는 희망에 감격했다.
박종철 영정 든 후배, 1987년 1월 20일 서울대에서 열린 박종철군 영결식.
1987년 1월23일, 서울 동부지구 8개 대학 학생 700여명이 고려대에서 박종철군 추모제를 마치고 교문을 나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7년 1월 24일, 정구영 당시 서울지검장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수사해온 검사들을 배석시킨 가운데 "박군의 사인은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라는 검찰수사 결과를 기자들에게 발표하고 있다.
1987년 2월 7일 명동성당에서 열릴 '2.7 범국민 추도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되자 시민, 학생들이 명동근처 도심에서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1987년 4월 24일, 서울대에서 열린 고 박종철군 100일 추모제에 참석한 박군의 어머니 장차순 여사와 누이 박은숙.
그날 박종철의 어머니와 누나는 명동성당 추도식에 가려고 부산역에 도착했으나 저지를 당하고 만다. 경찰차는 취재차량을 따돌리며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모녀를 박종철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리암에 내려놨다. 그곳은 이미 추모객들로 가득했다. 백우스님은 지치고 긴장해 위태롭게 걸어오는 두 모녀를 따뜻하게 맞았다.
오후 2시 정각이 되자 두 사람은 백우스님이 이끄는 대로 타종을 시작했다.
“이제 종을 치세요. 타종은 스물한 번입니다!”
전국의 사찰과 성당에서 동시에 박종철의 나이만큼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머니와 누나는 종을 치며 울부짖었다.
“종철아, 이 소리를 듣고 깨어나거라!”
박종철의 어머니 정차순 여사와 누이 박은숙은 부산 괴정동 사리암에서 “종철아, 이 소리를 듣고 깨어나거라”고 울부짖으며 타종하고 있다.
1988년 1월 12일, 박종철의 1주기를 앞두고 그의 유해를 뿌린 임진강 가를 다시 찾은 아버지 박정기 씨.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박종철을 살려내라’라던 이 날의 외침으로 181명의 연행자를 만들어냈다. 추도식 내내 최루탄을 뒤집어쓰며 함께 했던 노무현 변호사는 네 번이나 구속영장이 신청됐으나 모두 기각되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발표를 계기로 이 사건이 축소 조작되었으며 고문가담 경관이 모두 5명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짐으로써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와 민주화 열기가 다시 폭발했다. 국민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은 격렬하게 전개되어 곧바로 6월 항쟁으로 이어짐으로써 이 사건은 5공 몰락의 기폭제가 됐다.
이후 박군의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 2억4000만여 원의 배상금을 지급받게 됐다. 그러자 국가는 다시 고문사건에 연루됐던 일선 고문경관들을 상대로 구상금 청구소송을 냈다. 대법원은 지난 2000년 12월 26일 “배상액의 70%를 일선 고문 경관들이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2001년 3월 14년 만에 ‘박종철’군은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최종 확정돼 명예 회복됐다.
1988년 1월 14일,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은폐 조작사건의 수사를 받기 위해 검찰에 소환되고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고문 당사자로 지목된 경찰관 2명이 구속된 1987년 1월 경찰이 이들의 얼굴을 숨기려고 똑 같은 복장을 한 경찰관 20명을 서대문구치소로 함께 이동시키는 촌극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