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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안내문]
인천문인산악회
[제190회] (2009년 3월) 산행 안내문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09년 3월 산행은 지하철 1호선과 3호선을 이용해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부암동, 종로구 옥인동, 청운동 일원에 있는 인왕산과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성곽 길을 종주해 볼까 합니다.
인왕산은 1968년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다 1993년부터 부분적으로 개방되고 있으며 북악산은 청와대를 비롯하여 서울시의 진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유서 깊은 명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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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부암동, 종로구 옥인동, 청운동 일원
* 일시 및 만나는 장소 : 2009년 3월 1일(첫째주 일요일) 08시 부평역 1호선 <5-3>번 플랫폼.
* 산행코스 : 부평역 <5-3>번 플랫폼(08 : 00) → 1호선 전철 승차(08:10) → 종로3가역 도착(09:10) → 지하철 3호선 환승(09:20) → 경복궁역 하차(9:30) → 사직공원에서 산행시작(9:50) → 단군성전 → 인왕산 우측 성벽길 종주(11:30) → 범바위(10:30) → 인왕산 정상(11:00) → 기차바위 갈림길(11:30) → 창의문(자하문) → 탐방안내소(신분증검사)(12:00) → 북악산(백악산)(13:00) → 청운대(13:20) → 숙정문(13:40) → 말바위 쉼터(13:50) → 성북동 돼지갈비집(전화 : 02-764-2420)에서 뒷풀이(14:30) → 혜화동로터리(16:30) → 혜화역에서 4호선지하철 승차(17:00) → 서울역 하차(17:30) → 1호선전철 환승(17:40) → 부평역 도착(19:00) → 해산(19:30)
* 준비물 : 참가비 20,000원, 신분증(자하문 통과 때 필수지참), 식수 및 간식용 식품, 아이젠, 장갑, 우의, 윈드자켓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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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인왕산 ]
위 치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부암동, 종로구 옥인동, 청운동 일원
높 이 : 인왕산(338m) - 북악산(백악산 / 342m)
▣ 개요
인왕산은 서울의 진산(鎭山) 가운데 하나로서 경복궁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 : 동쪽 낙산, 서쪽 인왕산, 남쪽 남산, 북쪽 북악산) 가운데 서쪽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인왕산의 이름은 광해군일기 8년(1613년) 3월 24일조에 "인왕은 부처님 중에서도 아름다운 부처님이다. 이 산에 옛날 인왕사(仁王寺)가 있었기에 인왕산이라 불리었다"라고 하였듯 그 산에 인왕사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인왕산은 백악의 서쪽에 있어 조선초 태조·세종년간에는 서봉(西峰)·서산(西山)이라 부르던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仁王山'과 '仁王寺'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어, 성종 12년(1481년)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기 이전에 인왕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한다.
인왕은 불법의 수호신으로 사문(寺門) 또는 수미단 전면의 좌우에 안치하는 한 쌍의 금강역사로서, 둘 다 용맹하고 험악한 얼굴을 가지며 일명 이왕(二王) 또는 금강신(金剛神)이라 한다. 이렇듯 인왕산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산으로 세종의 내불당(內佛堂)이 이곳에 있었고, 인왕사 서쪽에는 금강굴이 있었으며, 또 세조 때에는 복세암(福世庵)을 짓기도 하였다.
인왕산은 일명 '필운산(弼雲山)'이라고도 한다. 필운은 서산(西山)을 뜻하는 이름. 조선 중종 32년(1537) 명나라 사신 공용경이 왔을 때, 중종이 사신 일행을 경회루에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면서 손님을 최선으로 접대하는 풍습에 따라 공용경에게 주산인 백악과 서쪽 인왕산의 이름을 붙여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공용경은 북쪽의 백악을 '공극(拱極)', 서쪽의 인왕을 '필운'이라 하였는데, 이는 '우필운룡(右弼雲龍)'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운룡이란 임금을 상징하므로 임금을 보필할 때 오른쪽에서 한다는 뜻인데,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에서 남쪽을 향해 보면 인왕산이 오른쪽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필운산이라는 명칭은 명나라 사신에게 예의상 요청한 것이므로 이름으로 정착되지 못하고, 산기슭에 필운동과 필운대의 지명만이 남아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인왕산은 한양이 도읍으로 정해지면서 주산인 북악의 서쪽에 있어 우백호에 해당함으로써 일찍부터 주목되었다. 따라서 경복궁을 짓고 도성을 수축할 당시 인왕산 능선을 따라 서쪽 성곽이 축조되었다. 그런데 한양 정도 당시 북악 주산론에 대응하여 인왕산 주산론이 주창되어 필운대 일대가 궁터로 주목되었다.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五山說林)』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고 한다.
태조께서 임금이 된 뒤 (중략) 도읍을 어디에 정하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무학이 점을 쳐서 한양으로 정하고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삼으라 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이 이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이르기를 옛적부터 제왕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다스렸지 동쪽으로 향하였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무학은 "지금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뒤에 가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를 뒷받침하듯 『한경지략』에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하고 있다.
무학이 200년 뒤라 한 것은 곧 임진년(1592)을 가리킨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도성이 무너지고 깨지고 불탔으니 참으로 용케 맞는 말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왕산 주산론은 『태조실록』에는 보이지 않아 그 신빙성에는 문제가 있으나, 인왕산 서편 선바위 전설과 더불어 국초에 불교 세력과 성리학 세력간의 주도권 다툼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이다.
인왕산 주산론을 제치고 북악산 주산론의 시발인 북악산 등산은 창의문(彰義門)부터 시작된다. 창의문은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한다. 서울성곽의 사소문(四小門 / 동소문-홍화문弘化門, 서소문-소덕문昭德門, 남소문-광희문光熙門 또는 수구문水口門)가운데 북소문으로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소문이다.
이곳에 탐방안내소가 있다. 이 탐방안내소에서 탐방서를 작성해 신분증과 같이 통과 신청을 해야 관리자가 신원을 확인한 다음 방문증을 내어준다. 그리고 그 방문증을 목에 둘러야만 북악산 등산이 가능하다는 선임자들의 산행기록을 새겨야만 인왕산 북악산 성벽 종주가 가능하다.
이 탐방안내소를 나가 오른쪽의 북악산을 오르는 입구에는 자북정도(紫北正道), 즉 자하문에서 북악산으로 가는 바른 길이라는 뜻의 바위 표지석이 서 있는데 이 표지석을 통과하면 바로 북악산 등산이 시작된다.
북악산(342m)의 원래 이름은 백악산(白堊山)이다. 경복궁의 북쪽에 있는 주산(主山)이다. 이 주산 바깥 북쪽으로 외사산(外四山) 가운데 하나인 조산(祖山)인 삼각산(三角山), 즉 북한산(北漢山)이 웅장하게 솟아 있다.
북악산에서 성북동 쪽의 내림길을 향하면 중간에 숙정문(肅靖門)을 만난다. 숙정문은 서울성곽의 사대문, 즉 동대문-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돈의문(敦義門), 남대문-숭례문(崇禮門), 북대문-숙정문(肅靖門) 가운데 하나인 북대문이다.
주역의 음양오행에 따르면 북쪽은 겨울을 뜻하는데 겨울에는 춥고, 그 다음해를 기약하려면 씨앗을 땅속에 묻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지혜가 있는 방위인 것이다. 사람의 지혜 역시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므로 '지혜란 드러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처음엔 숙청문(肅淸門)이라 했다가 나중에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다'는 <정(靖)> 자로 바꾸어 현재의 숙정문이 된 것이라고 한다.
숙정문에서 서울성곽을 따라 내려오다가 성 너머로 보면 한때 요정으로 유명했던 <삼청각>이 보인다. 이 삼청각을 현재는 서울시에서 인수해 <삼청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전통 한옥문화공간(식당, 예식장, 공연장, 문화체험장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 산행코스
1코스 : 경복궁역-사직공원 - 인왕산길 - 황학정 - 범바위 - 정상 : (1시간 30분)
2코스 : 독립문역 - 무악동 - 국사동 - 범바위 - 정상 : (1시간)
3코스 : 구 서울여상 - 놀이터 - 정상 : (50분)
4코스 : 문화촌아파트 - 기차바위 - 정상 : (1시간 20분)
5코스 : 옥인동 - 옥인아파트 - 인왕천약수 - 정상 : (45분)
6코스 : 청운동 - 청운아파트 - 산성 - 정상 : (50분)
7코스 : 부암동 사무소 - 성덕사 - 기차바위 : (1시간)
8코스 : 세검정길 유원아파트 옆 - 용천수 - 기차바위 - 정상 : (1시간)
인왕-북악 종주 코스 : 경복궁역-단군성전-인왕사 우측 서울 외곽 성벽길-범바위-인왕산정상-기차바위 갈림길-창의문(자하문)-탐방안내소(신분증 검사-표찰 받기)-백악산 정상-청운대-숙정문-말바위 쉼터-성북동 마전터(총 소요시간 : (9km, 4시간)
▣ 철도교통
서울지하철 1호선, 2호선, 3호선, 4호선 등
인천역 → 부평역 → 신도림 → 서울역 → 종로3가역(3호선지하철 환승) → 안국역 → 경복궁역(1시간 30분 소요)
▣ 주변사적지
[사직단(社稷壇) / 사직공원]
인왕산 남동 기슭에 있는 종로구 사직동 사직공원에 가면 먼저 고색 창연한 정면 3칸의 사직단 정문을 만나고, 이어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3칸의 북문을 들어서면 2기의 단을 볼 수 있다. 그 왼쪽 단(동쪽)이 나라의 국토신을 모시는 사단(社壇)이고, 오른쪽(서쪽)의 단이 오곡신을 모시는 직단(稷壇)인데, 이를 통틀어 사직단이라 한다.
나라의 제사로 사직이 모셔진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며 조선시대 사직제도는 고려 성종 때 정비된 제도를 계승한 것이다. 조선 태조는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고 고대 동양의 옛 도읍지 건설의 정형을 제시한 주례(周禮) 동관(冬官) 고공기(考工記)에 의해 남쪽을 향한 궁궐을 중심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의 배치로, 좌측 동부 연화방(蓮花坊)에 종묘를, 우측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천도 이듬해인 1395년 1월 29일에 사직단 축조공사를 시작하여 2월 27일에 완성을 보았다.
그 후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다가 광해군 원년(1608)에 복구되었다. 광무 1년(1897)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에 오르면서 사단과 직단은 태사단(太社壇), 태직단(太稷壇)으로 높여졌다. 그러나 일제강점으로 1922년 사직단을 중심으로 약 66,619평이 사직공원으로 탈바꿈되어, 1940년 3월 조선총독부고시 제208호 '경성시가지계획공원 제35호'에 따라 정식으로 도시공원이 되었다. 또한 1960년대 도시계획으로 신문(神門)이 뒤로 14m 들어가 그 면적이 더욱 축소되는 등 황폐된 것을 1988년에 고증 발굴하여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공원의 현재 면적은 16만 8,000㎡이며, 현존하는 사직단은 18.4평만이 사적 제12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고, 사직공원 입구의 사직단 정문은 보물 제177호로 지정되어 있다. 공원 안 북쪽에는 단군성전이 있으며, 그 뒷쪽으로 궁술연마장인 황학정(黃鶴亭)이 있다. 황학정(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5호)은 서촌 5사정 중의 하나인 필운동 등과정(登科亭)의 터이다. 원래 이 황학정은 고종 광무 2년(1898) 어명에 의하여 경희궁 내 왕비가 거처하던 회상전 북쪽에 지었던 것을 1922년 일제에 의해 경희궁이 헐리고 궁내 건물들이 일반에게 불하될 때 사직공원 북쪽인 등과정 옛터에 옮겨졌다.
[도성(都城)]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는 도성은 1396년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두 차례 농한기를 이용하여 197,400명에 달하는 각 지방 백성들을 동원하여 축성하였다. 이 때 축성공사는 600척을 1구로 정하여 백악 동쪽에서 천자문의 천(天)자에서 시작하여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백악 서쪽에 이르러 조(弔)자로 마쳤다. 따라서 인왕산 지역에 해당하는 도성 서북지역은 사師)자에서 조(弔)자에 이르는 24구간으로 돈의문에서 창의문을 거쳐 백악 정상까지의 구간에 해당되었다.
그 후 세종년간에 토성 부분을 모두 석성으로 개축할 때 남산 잠두봉에서 인왕산 사이를 석축으로 고쳐 쌓았다. 아울러 인왕산 상봉 못 미쳐 사직공원 쪽에 있는 성을 곡성(曲城) 혹은 굽은성이라 부르는데 세종 4년(1422)에 축성된 것이다. 지형에 따라 쌓아 세 번이나 굽어 있으므로 굽은성이라 불렸다. 현재 군부대가 주둔해 있어 일반인은 접근하기 어려운 반면,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그 후 숙종년간에 서울 도성이 다시 수축되었고, 1961년에 창의문 좌측의 성곽을 보수하고, 1972년에 인왕산 북쪽 방면 석축을 보수하는 등 부분적인 보수공사가 있었다. 1975년에 도성복원계획 아래 인왕산 지역은 청운지구(돈의문 북쪽∼창의문)로 구획되어 복원공사가 진행되었다.
인왕산 지역과 북악을 잇는 고개에는 도성 4소문 가운데 하나인 창의문이 있는데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조선 초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그 문화재적가치가 더욱 높다. 창의문은 실질적인 도성의 북문 역할을 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진입한 문이기도 하다.
[무계정사(武溪精舍)]
인왕산 북쪽 기슭 창의문 밖 부암동 329-4번지는 세종대왕의 셋째 왕자 안평대군의 정자였던 무계정사 터(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2호)로 암벽에 횡으로 '武溪洞'이란 암각이 있다. 안평대군이 '몽유도원도'로 그려진 도원에서 노니는 꿈을 꾼 뒤 그 곳과 같은 자리를 찾았다.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 무계정사라 이름 붙이고 글을 읊으며 활을 쏘았던 장소로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무계정사를 짓기 전에는 효령대군의 집터였으며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의 호를 따서 비해당(匪解堂)이라고도 불렀다.
[석파정(石坡亭)]
인왕산 북쪽 기슭 창의문 밖 부암동고개 종로구 부암동 316-1번지에 위치한 석파정(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은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별장이다. 당초에 철종 때 영의정 김흥근의 별장이었는데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그의 소유가 되었다.
건물의 뒷바위 앞면에 '三溪洞'이란 각자가 있어 '삼계동정자'라 하다가,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된 후 앞산이 모두 바위여서 대원군이 자신의 아호를 '석파'라 하고 정자 이름을 석파정이라 하였다.
6·25전쟁 직후 한때 천주교 경영의 콜롬바고아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던 석파정 경내에는 수백년된 노송이 차일을 친 듯 서 있고, 그 밑에 연자방아 등으로 조경하여 운치를 더하고 있다. 또한 부근의 계곡에는 못을 꾸미고 장대석으로 누대를 만들어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그리고 석파정 여러 집채 중 사랑채도 있었으나 서예가 손재형(孫在馨)이 1958년 종로구 홍지동 125번지에 고가옥을 옮겨 지을 때 뒷뜰 바위 위로 옮겼으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3호 '대원군별장'으로 별도 지정되었다.
[선바위]
선바위(서울특별시 중요민속자료 제4호)는 인왕산 서쪽 기슭에 있는 두 개의 거석이다. 형상이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 같아서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또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이라는 전설, 또는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전설도 있다.
자식 없는 사람이 이 바위에 빌면 효험이 크다고 하여 정성을 드린다. 작은 돌을 붙이면 효험이 더욱 크다고 하여 작은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많이 남아 있다. 이를 '붙임'이라 하며, 이러한 바위를 '붙임바위(付巖)'라고도 한다. 일제가 남산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을 선바위 곁으로 옮기게 한 뒤로 선바위에 대한 신앙은 무속신앙과 더욱 밀착되었다. 국사당은 무신당으로서 굿을 행하는 곳이니 바로 옆에 있는 선바위와 복합적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국사당(國師堂)]
국사당(서울특별시 중요민속자료 제28호)은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으로 현재 종로구 무악동 인왕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원래는 남산 정상에 목멱신사로 있었다. 태조 5년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봉하여 호국의 신으로 삼아, 개인적인 제사를 금하고 국가의 공식행사로 기우제와 기청제를 지냈으며 매년 봄·가을로 초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이미 국가적인 제사를 지내는 일이 없었고, 다만 별궁의 나인들이 치성드리러 오거나 또는 개성 덕물산(德物山)에 치성드리러 가는 사람들이 먼저 이 당을 거쳐가고는 하였다고 한다. 고종 때 명성왕후가 궁중 나인들을 시켜 국사당에 치성을 드리게 하였다는 사실은 궁중 발기(撥記)의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국사당은 1925년 남산에서 현 위치로 이전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신사인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전 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그곳이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국사당이라는 명칭도 무학대사를 모시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전할 때 그 재료를 그대로 옮겨 원형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국사당 안에는 서울특별시 중요민속자료 제17호로 지정된 무신도(巫神圖) 21점과 명두 7점이 있다.
▣ 인근 맛집
[성북동 돼지갈비집(전화 : 02-764-2420)]
37년째 자리잡고 있는<성북동 돼지갈비집>은 갈비, 주물럭, 불백 모두 한 접시에 백반까지 곁들여 무조건 5000원. 신종 메뉴 주물럭살은 1대에 8000원도 넘는 떡갈비맛과 거의 비슷한데도 15년째 값을 올리지 않은 채 박리다매(薄利多賣) 전략 고수하는 곳으로 소문 나 있다.
위치 : 성북초등학교 옆 삼선교와 혜화동 로터리로 가는 삼거리에 위치
[성북동 장터국밥집 - 마전터(전화 : 02-765-7575)]
마전터란 성북동의 옛 이름으로 <마전>이란 광목을 빨아 햇빛으로 표백하던 곳. 이 곳에서 40년 가까이 영업을 해온 옛날식 국밥집으로 찬과 국밥 모두 깔끔하고 정갈하다는 소문이 나 있는 정통 국밥집.
위치 : 성북동 과학고 앞
▣ 정보제공자
서울특별시청 문화재과 : 02-413-96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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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정리 : 서동익
첫댓글 회장님, 자료 정리하여 올리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지난 해 여름 친구들과 함께 올랐었는데(보시고 구미가 당기시라고 참고 
아 '인산 작품방'에 그때 썼던 산행기를 올려보겠습니다) 경복궁, 청와대는 물론 서울의 과거와 현재의 발자취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멋진 코스였습니다. 값진 산행이 될 것임에 틀림없으니 많은 회원님이 함께 했으면 좋겠네요. 저는 참석합니다.
아쉽네요ㅠㅠ 또 출근입니다. 3월이 회계결산 달이라 마니 바쁘네요 ㅠㅠ 모두 안전한 산행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