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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2,390,000명 넓이 2,590 km² 증가율 0.46%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와 축구의 나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이 지구를 움직이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태어난 곳이다. 여러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길러 내었고 피아니스트이며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을 위시한 음악가를 키워냈으며, 그 유명한 영화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플라를 길러 낸 곳이기도 하다. 이 도시가 낳은 최고의 시인이며 소설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공기나 물처럼 영원한 것이다.
이 도시가 낳은 최고의 시인이며 소설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미국문학에서 윌리엄 포크너 처럼 히스패닉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치는 국민적 작가다.
많은 아르헨티나인들은 그들의 수도가 국가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며 실제로 전체 인구의 40%가 이 거대하고 넓게 퍼진 도시의 교외에서 산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연방 수도 구역인 리오 데 라 쁠라따(Rio de la Plata)의 강둑에 위치해 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 있지 않다.
유럽을 꼭 닮은 이 도시의 촘촘하고 규칙적인 시내는 파리를 생각나게 하며 가로수가 서있는 거리나 흔히 볼 수 있는 광장들은 즐겁고 쇠퇴한 우아함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은행원이나 현란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 사이에는 주위를 둘러싼 판자촌에서 온 수척한 거지들과 실업자들을 보게 된다.
시내의 플라사 데 마요(Plaza de Mayo)는 전통적으로 여러 활동이 벌어지는 중심지이며 근처의 아베니다 9 데 훌리오(Avenida 9 de Julio)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대로로 알려져 있는데 보행자에게는 정말 끔찍한 일이다. 아베니다 산타페(Avenida Santa Fe)는 가장 화려한 쇼핑 지역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볼거리에는 아르헨티나의 독립 영웅인 호세 데 산 마르틴(Jose de San Martin)의 무덤이 있는 카테드랄 메트로폴리타나(Catedral Metropolitana)와 오페라, 발레, 클래식 음악회 등이 열리는 세계적 규모의 극장 테아트로 콜론, 그리고 국립 순수미술관, 영화박물관, 아르헨티나의 발자취를 파노라마처럼 그려내는 국립 역사 박물관 등의 많은 박물관들, 화려한 이탈리아 주택지구인 라 보카(La Boca)등이 있다. 라 보카에는 밝게 칠한 나무집들이 리아츄엘로 수로를 따라 늘어서 있다.
마르 델 플라타(Mar del Plata)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사람들에게 여름이 의미하는 것이 해변이라면 그들이 생각하는 해변은 바로 마르 델 플라타일 것이다.
수도에서 400km 떨어져 북대서양에 자리한 이 지역 해변은 8km 정도 길이에 화려한 저택(이 지역이 상류층 지역임을 반영한다)과 새로운 중급 휴양지 시설이 섞여있다.
부두 주위의 낚시에 신경을 쓰는 강치들도 보이며 로우르데스(Lourdes)의 가짜 조가비 집은 이 지역이 조잡한 낙원 같은 곳임을 말해준다.
아르헨티나에 대해 이야기할 때 탱고나 가우쵸(남미의 카우보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들어봤을 테지만 대부분의 여행자들에게 가장 주요한 구경거리는 이 나라의 놀라운 자연이다.
북쪽 사막에서 남쪽의 안데스산맥까지, 그리고 이구아수(Iguazu)폭포에서 장엄한 파타고니아(Patagonia)황야까지 이 나라의 자연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것들 위에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가 있는데 이 도시는 세련된 모습으로 유명한 동시에 유럽을 흉내 낸 도시로 조소를 받기도 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실 아르헨티나에 사는 대부분 이민자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유럽에서부터 소위 말하는 신세계로 건너올 때 유럽의 문화적인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아르헨티나는 유럽인들이나 북미인들, 그리고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느껴지며 상대적으로 특별히 달라 보이지 않는다.
현지 사람들과 공감대를 가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아마 축구에 대한 관심과 민첩한 축구 기술일 것이다.
통계 자료
국명 : 아르헨티나 공화국(Republica Argentina)
면적 : 2,776,653 sq km
인구 : 3400만 명 (인구 성장률 1.2%)
수도 :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구 12백만 명)
인종 : 유럽인 후손 85%, 메스티조 15%, 인디언과 기타 소수민족
언어 : 스페인어와 17가지의 토착 언어
종교 : 로마 카톨릭 93%, 개신교 2,5%, 유태교 1.5%, 우크라이나 카톨릭, 아르메니아 정교
정체 : 공화제
지리 및 기후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길고 가늘어지는 아래 부분 중 동쪽 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 나라는 커다란 나라로 세계에서 여덟 번째 큰 나라이며 남미에서는 두 번째로 큰 나라이다.
국경은 서쪽으로 칠레(안데스산맥으로 나뉘어 있다)와 접하고 있으며 우루과이, 파라과이, 브라질, 볼리비아와는 북쪽과 동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다(강들에 의해 나뉜다). 또한 칠레와 띠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의 연안 섬 영토를 공유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말비나스(Malvinas, 영국에서는 포크랜드로 부름) 섬의 영유권을 놓고 다투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세부 지형은 고도와 위도에 의해 영향을 받고 변한다.
아르헨티나는 크게 네 지형으로 나뉘는데 서쪽의 안데스산맥(건조한 분지와 포도로 가득한 구릉, 빙하 산맥과 디스트릭트 호수), 동쪽의 비옥한 저지대(아열대 우림), 중앙 팜파스(다습하고 건조한 기후가 섞인 넓은 평원), 그리고 파타고니아(목가적인 대초원과 빙하 지역이 함께 공존하는 곳) 가 그것들이다.
22곳의 국립 공원은 이런 다양한 환경의 광대한 지역들과 카이만(또는 야카레, 중남미산 악어), 퓨마, 과나코(안데스산맥 라마의 사촌격으로 저지대에 사는 동물), 레아(타조 비슷한 동물), 안데스 콘도르, 홍학, 여러 바다 포유동물, 마젤란 펭귄 같은 보기 힘든 조류 등 독특한 동물들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
가시 숲, 원시 열대 우림, 한창 꽃을 피우는 선인장, 광대하게 퍼져 있는 칠레 소나무 숲, 남쪽의 해변 등도 또한 보호되고 있는 곳들이다. 아르헨티나의 기후는 북쪽의 아열대에서 다습한 중앙, 그리고 남쪽의 추운 지역까지 걸쳐 있다.
안데스산맥 지역은 불규칙한 강우량, 여름의 봇물같이 쏟아지는 홍수, 타는 듯한 더위, 높은 고도에서의 눈, 그리고 뜨겁고 건조한 바람인 손다(Zonda) 등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저지대는 늪지대 숲과 고원 사바나를 이어갈 만큼 충분한 비가 쏟아지지만 강우량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감소하며 동쪽에서는 낮은 여름 홍수가 일반적이다.
겨울의 건기도 확실하며 여름의 불볕더위는 무지막지할 정도이다.
편평한 팜파스 지역도 또한 홍수에 취약하며 파타고니아 동쪽은 연중 내내 온화하며 남쪽은 얼음처럼 차갑다.
역사
콜롬부스 이전 시대의 아르헨티나에는 디아기따 같은 인디언 부족들이 정착해 있었으며 유목민족에 의해 사냥터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인디언의 저항은 스페인인의 침략과 개척을 억제하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580년까지 시의 건립에 난항을 겪었으며 200년 동안 오지로 남아있었다.
인디언 인구가 줄어가고 불균형하게 분포되면서 노동력을 착취하기 어려워지자 아시엔다(hacienda)로 알려진 거대한 목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목장은 전설적인 가우쵸의 탄생이나 몇몇 행운아들이 거대한 부를 축적하는 기반이 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스페인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를 받기에는 너무 커버렸다는 인식하에 1776년에 리오 데 라 쁠라따(Rio de la Plata)의 새로운 총독령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간섭에 대한 계속된 불만으로 1810년 5월 25일 혁명이 발발하였고 결국 1816년 독립하게 되었다. 독립에 따라 곧 스페인 지배하에서 감추어지던 극심한 지역적 불균형이 드러나게 되었다.
내륙의 연방주의자들(보수적인 지주, 가우쵸나 도시 노동계급에 의해 지지를 받던)은 지역별 자치제를 지지하는 반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단일주의자들(유럽의 수도, 이민, 사상들이 유입되는 것을 환영하던 대도시 거주자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앙 집권을 주장하였다.
명목만 연방주의자인 후안 마누엘 로사스(Juan Manuel Rosas)의 비참하고 압제적인 지배 이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단일주의자들이 득세하였으며 1853년 단일주의 헌법하에 성장과 번영의 새 시기를 구가하였다.양들이 수입되었고 팜파스는 곡물 농작물의 경작을 위해 이용되었다.
유럽의 이민자, 외국 투자와 무역은 새로운 자유주의의 보증 표시가 되었다.
그러나 과다한 외국의 이권으로 경제는 특히나 세계 경제의 흐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고 부는 소수의 손에 집중되었으며 소자작 농지가 실패하면서 실업률도 올라 농부는 일자리를 잃고 도시로 향하게 되었다.20세기의 최초 10년 동안은 문민 정권의 약화, 경제 정책 실패, 지주 엘리트에 대한 지속적인 분노, 영국 자본에 대한 불신 등이 두드러졌으며 이로 인해 독재자 후안 페론(Juan Peron)의 집권으로 이어지게 되는 1943년 군사쿠데타가 발발하였다. 노동부의 한직을 차지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한 대령이던 그는 1946년과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에 못지 않게 유명하고 카리스마적인 힘을 가지고 있던 그의 아내 에바와 함께 페론은 국내 산업화와 자결권을 강조하는 긴축 경제 계획을 실시하였고 이는 보수적인 민족주의자들이나 노동계급 양쪽에 호응을 얻었다.
그의 정당은 1955년 군사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으며 페론은 스페인으로 추방당했고 이후 30년 동안 많은 피해를 가져온 군사 정권이 잠시 문민 정부가 들어선 기간을 제외하고 계속해서 지배하였다.
페론은 1973년 잠시 정권을 찾았지만 1974년 재임 중 사망했고 그의 세 번째 아내 이사벨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들과 정치적 불안정이 증대하면서 파업과 납치, 게릴라전이 발생하였다. 이사벨의 정부는 1976년 붕괴되었고 새로 군사 정부가 들어서 공포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1976년에서 1983년까지는 더러운 전쟁(Dirty War)의 시기로 묘사되고 있다.
반대와 비판세력은 정부와 관계가 있는 반군사적인 암살대에 의해 제거되었고 10,000명에서 30,000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사라졌다.
이 시기에 가장 유명한 희생자들은 사라진 가족들을 위해 용감하게 공개적인 감시활동을 벌였으며 때로는 그들 자신도 행방불명 된 여성들의 그룹인 마드레스 데 라 플라사 데 마요(Madres de la Plaza de Mayo)이다.
이러한 내부적인 갈등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남대서양에서 진짜 전쟁이 벌어지면서 끝이 나고 말았다(말비나스 또는 포클랜드 전쟁). 레오폴드 갈띠에리(Leopold Galtieri) 장군은 아르헨티나의 소름끼치는 정치적 부패와 경제적 실수를 감추기 위해 영국으로부터 말비나스를 점령했다.
양국에서 터져나온 격앙된 민족주의 감정은 영국이 이 조그만 땅덩이를 지키러 소함대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은 영국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 사건은 양쪽에게 모두 부끄럽고 값비싼 일화가 되어버렸다. 안팎으로 불명예스러운 실패를 거듭함으로써 아르헨티나의 군사 정권은 물러나게 되었고 1853년의 헌법체제로 돌아가게 되었다. 현재의 대통령은 페론주의자인 메넴으로 경제적인 변화 국유 산업을 사유화하고 외국 투자자에게 경제를 개방하는 -를 추구하고 있으며 인플레이션을 5000%에서 4%까지 내렸다.
메넴은 1995년 선거에서 손쉽게 재 당선됨으로써 40년 만에 최초로 연임을 하게 된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말비나스의 영유권은 아직도 분쟁의 씨앗이 남아있다.
1995년 6월 아르헨티나의 외무장관은 2000여명의 섬 주민들에 대해 그들의 국적을 바꾸는데 각각 US $800,000을 제공하면서 이 섬을 사겠다고 제의했다.
이 문제는 영국이 이곳 연안에 유전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더욱 복잡하게 얽혀있으며 앞으로도 분쟁의 소지가 많이 남아있다.
경제
GDP: US$283 billion 1인당 GDP: US$6800 인플레이션: 1%
주요 산업: 식품 가공, 농업경제 주요 교역국: 미국, 브라질, 네델란드, 독일, 이탤리
유럽의 영향은 아르헨티나의 미술, 조각, 문학, 생활 전반에 걸쳐 깊숙이 스며있다.
그러나 특히 문화의 분야에서는 양쪽 문화의 교류가 진행되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훌리오 코르타사르(Julio Cortazar), 에르네스토 사바스토(Ernesto Sabasto), 마누엘 푸이(Manuel Puig), 오스발도 소리아노(Osvaldo Soriano)등의 국제적인 작가들을 배출하고 있다.
많은 아르헨티나인들이 유럽에서 교육을 받기 때문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특히 미술, 음악, 조각 등에서 유럽의 문화적 사조를 자의식을 가지고 쫓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이 도시 내에는 많은 중요한 미술관들이 자리하게 되었고 연극 문화도 원기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영화도 국제적인 성장을 달성하였고 지난날 '더러운 전쟁' 의 악몽을 쫓아내는 수단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아마 가장 알려진 아르헨티나의 대중 문화는 탱고일 것이다
이 춤과 음악은 전 세계적으로 낭만적인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민속 음악도 번창하고 있다.
스포츠는 극단적으로 아르헨티나 인들에게 중요한 것이며 축구는 단순한 경기를 넘어 전 국민이 열광하는 운동이다. 아르헨티나는 1978년과 1986년 월드컵에서 우승했으며 그 주역인 디에고 마라도나(Diego Maradona 체게바라 이후에 가장 유명한 아르헨티나인일 것이다)는 지난 10년간 수많은 팬과 파파라치, 신문 기고가 등을 몰고 다녔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공식적인 국교인 아르헨티나의 카톨릭은 공식적인 교리에서 벗어난 대중적인 신앙으로 가득하다.
심령주의나 죽은 자에 대한 숭배가 깊이 자리잡고 있으며 친척이나 유명한 사람들의 묘에 참배 가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공식 언어는 스페인어이지만 몇몇 이민 사회에서는 정체감을 상징하듯 그들의 언어를 보존하고 있다.
이 나라의 가장 큰 단일 이민 사회임을 반영하듯 이탈리아어는 널리 통용되며 BBC 영어도 영국인 이민 사회에서 쓰여진다. 토착 언어로는 케츄아, 마푸체, 과라니, 토바스, 마타코스 등을 포함해 17가지가 존재한다. 아르헨티나의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고기로 이때의 고기란 소고기를 의미한다.
빠릴랴다는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양, 창자, 젖통 등 모든 부분이 다 들어가 있다.
채식주의자에게는 지옥이 될만한 이 나라에서 이태리 요리인 뇨치(노키스) 같은 음식은 그나마 반가운 대안이 될 것이다.
절묘한 아르헨티나의 아이스크림(엘라도)는 특별히 언급할만한데 이 역시 이태리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결과이다. 파라과이의 차인 마테차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의식적인 의미가 있는데 만약 권유를 받게 되면 이는 특별한 환영을 표시하는 것이다.
호랑가시나무와 비슷한 이 잎은 정성 들여 준비되며 같은 조롱박에다 마신다.
축제 및 행사
놀랍게도 아르헨티나에는 축제나 행사가 드물며 대부분의 공휴일은 카톨릭의 종교 의례와 관련이있다. 크리스마스와 신년, 부활절 기간에는 모든 것이 휴업한다.
성도 기념일과 각 주의 공휴일도 다른 중요한 행사로 5월 25일은 1810년의 5월 혁명을 기념하며 6월 10의 말비나스의 날, 10월 12일은 콜롬부스의 날이다.
여행자 정보
비자: 대부분의 외국인은 비자가 필요 없으며 원칙적으로 무료에 갱신할 수 있는 90일 여행자 카드가 입국시 주어진다. 보건 위생: 콜레라는 북부의 아열대 지역에서 위험하다.
시간대: 한국보다 12시간 늦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일광절약 시간대를 운영한다
전압: 220V, 50Hz
도량형: 대부분 미터법이지만 지방에서는 레구아(리그, 대략 5km)도 이용한다.
경비 및 환전
통화: 페소
아르헨티나는 비싼 나라이다
너무 비싸서 아르헨티나인들은 휴가를 보내기 위해 미국처럼 싼 나라로 떠난다.
그렇다고 해도 음식이나 숙소, 교통 등은 미국이나 유럽보다 싸기 때문에 검소한 여행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검소하게 여행해도 하루에 US$35 이상은 들며 좀더 편한 호텔에서 자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다면 적어도 하루 US$80불은 써야 한다.
과거에 아르헨티나의 화폐는 엄청난 인플레이션 때문에 여행자들에게 골칫거리가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 전문가가 한 자릿수 인플레이션이 기대된다고 말할 때는 일년이 아니라 한 달을 기준으로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경제가 안정되면서 인플레이션은 별로 문제가 되고 있지 않다. 아직도 예전의 경제적인 불안정에 대한 기억이 있으므로 현명한 여행자라면 외환 시장과 경제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한번쯤 살펴볼 필요는 있다.
미국 달러는 어느 곳에서나 거의 법정화폐처럼 쓰이며 미국 달러를 페소로 바꿀 필요는 거의 없다.
만약 환전할 필요가 있을 때는 미국 달러가 가장 바꾸기 쉬운 화폐이다
오직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만 별 어려움 없이 유럽의 화폐를 바꿀 수 있다.
비자와 마스터카드는 널리 통용되는 신용카드이다.
레스토랑에서의 팁은 제대로 서비스를 받았을 때에 10% 정도 주는 것이 관습이다.
북서부 안데스산맥 지역의 공예품 시장을 제외하고는 흥정은 별로 흔하지 않다.
아르헨티나로 가는 길
아르헨티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밖에 있는 에세이사(Ezeiza) 국제 공항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걸친 뛰어난 항공 노선을 보유하고 있다. 출국세는 US$13이며 국제선에 적용된다.
우루과이행 비행기는 US$5이다. 인접국인 우루과이, 브라질, 파라과이, 볼리비아, 칠레와는 많은 육로와 수로로 건널 수 있다.
칠레에서는 보통 안데스 산맥을 통과하는 하이킹을 이용하며 볼리비아로는 라 끼아카(La Quiaca), 따리하(Tarija), 뽀시토스/야키바(Pocitos/Yacuiba) 등의 국경도시를 지나 여행하게 된다.
파라과이는 버스나 강을 이용하여 도착하며 가장 일반적으로 브라질로 건너가는 방법은 포스 도 이과쿠(Foz do Iguacu)나 우루과이아나(Uruguaiana)를 지나는 것이다.
우루과이는 다리나 배로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우루과이의 콜로니아(Colonia)가 연결되어 있다.
국내 교통편
세 개의 아르헨티나 항공사들은 이 커다란 나라의 거리를 크게 좁히고 있다.
아에로리네아스 아르헨티나스는 국제선뿐 아니라 국내선도 운영하며 아우스트랄은 국내선만 취급하고 리네아스 아에레아스 델 에스타도는 주로 파타고니아로 운행된다.
가격이 비싼 만큼 할인가격이나 에어패스의 기회를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아르헨티나의 국내선 세금은 US$3이다. 장거리 버스는 빠르고 편안하다.
몇몇 버스는 심지어 차내에서 식사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금은 비싸며 상당히 많이 변동한다.
이 나라의 비싼 철도 체계는 불행히도 지방 정부에의 자금지원이 줄어들고 전세계적인 현상인 사유화가 증가함에 따라 위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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