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비호
오늘날의 다산이 있기까지에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그 중 무시할 수 없는 이가 바로 정조이다.
개혁 군주이자 뛰어난 학자였던 정조는 오늘날의 사상범이라 할 수 있는 '천주학쟁이'라는 붉은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다산을 보호해 준 방패막이이자 동시에 경전에 관해 서로 토론하고 잘못된
점을 비판하였던 학문적 스승이자 친구였다. 또 스러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의기투합하였던
정치적 동지였다.
하지만 다산은 1801년 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처자들을 데리고 고향 마재로 낙향한다.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도록 뒤에서 충동질하던 벽파가 이에 반대하던 자신을 포함한 남인 시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자신이 머무르는 집을 조심하며 살겠다는 뜻에서 '여유당 與猶堂'이라 부르고 "선인들 남기신 글 다시금 읽으며 남은 생애 이 가운데다 내 맡기리라"하며 분주한 벼슬살이로 하지 못한 공부에 열중한다. 낙향하여 학문에 열중하고 있는 어느 날, 규장각 서리가 보자기에 뭔가를 들고 밤늦게 찾아왔다. 정조가 보내준 <한서선 漢書選> 10권이었다. "너를 잊지 않고 있으니 세상이 조용해질 때까지 보내 준 책을 읽으며 학문에 정진하라"는 정조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였다.
정치관료로서의 만남
10살 연상인 정조와의 인상적인 만남은 1784년 23살의 나이로 성균관 학생으로 있을 때였다. 정조가 <중용>에서 의심스러운 80조(70조-이광용)를 기술하고 이에 대한 답을 적어 올 것을 숙제로 내주자 서학을 포함하여 폭넓은 독서를 한 사람으로, 사적으로는 큰형 정약현의 처남으로 자신과는 사돈 사이인 이벽과 상의하여 <중용강의>를 지어 바쳤다. 여기에서 다산은 인의예지의 사단(四端)은 理가 發해서 나온 것(四端理發)이라는 퇴계를 비롯한 기존의 일반설을 뒤집고 氣가 發한 것(四端氣發)이라는 율곡의 說을 주장하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에서 자신과 생각이 일치함을 확인한 정조는 "세속의 흐름을 벗어나 독창적이며 논리가 명확하여 첫째로 삼는다"고 하고 다산을 불러 크게 칭찬하였다. 이후 성균관에서 보는 시험에서 출중한 성적을 내어 임금으로부터 많은 서적을 하사받은 '우등생'이었던 그는 나중엔 당시 규장각에서 인쇄한 책은 다 받아 더 받을 책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나이 28세인 1789년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종7품인 희릉직장으로 시작한 벼슬길은 정조의 총애 아래 잘 닦은 신작로를 달리는 것처럼 순조로웠다. 과거에 합격한 바로 그 해에 초계문신으로 뽑힌다. 정3품 아래의 당하문관 중에서 문학에 재질이 있는 자를 뽑아 국왕이 직접 지도 · 편달하면서 재교육하는 제도인 초계문신제는 정조의 강력한 개혁정치를 뒷받침할 신진 엘리트 관료집단을 양성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초계문신들과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서 직접 얼굴을 맞대고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면서 정조는 개혁의 필연성을 설파하고 그 방법과 방향을 함께 모색하였을 것이다. 당파싸움으로 날이 새고 지는 암울한 상황을 개혁의 중심세력이라 할 이 신진엘리트들의 도움아래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정면돌파하고자하는 정조의 야심이 숨어 있는 것이다.
기술관료로서의 만남
정치관료로서의 이러한 만남 말고도 다산은 기술관료로서도 정조와 만난다. 다산은 자연과학과 기술, 특히 이용후생과 관련된 기술분야에서는 독창적인 업적을 남겼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거기에 성(화성)을 만들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신도시'개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죽어 간 아버지를 새롭게 이장하고 그곳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또 매년 참배하는 것에는 할아버지(영조) 때부터 실시해
온 탕평정치를 정착하여 망국적 당쟁을 일소하고자 하는 정조의 포부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당쟁의 약화 내지 일소는 자연스럽게 왕권의 강화로 이어져 신진 엘리트 관료들의 후원아래 정조는
자신의 개혁프로그램을 차근차근 그러나 과감하게 실행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이러한 정조의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는데는 다산처럼 자신과 개혁적 성향을 함께하면서도
과학기술에 능통한 관리가 필요하였다.
매년 봄 화성의 현륭원(사도세자의 묘)에 능행(陵幸)하기 위해서는 한강을 건너야 하는데, 여기엔 배다리(舟橋)가 필요하였다. 한강 폭만큼의 선박을 가로로 이어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수백명의 능행 행렬이 지나가도록 배다리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비용은 둘째치고 안전상의 문제가 심각한 것이었다. 정조의 왕조개혁 구상과 직결된 배다리를 완벽하게 만들어낸 다산은 더욱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된다. 배다리에 이어 다산의 기술적 역량이 발휘된 사업은 화성(수원성) 축조이다.
1792년 겨울 부친상으로 3년상을 치르고 있던 중이던 다산은 정조로부터 화성축조를 위한 기술적 설계를 지시 받고 기존의 조선과 중국(청나라)의 성제를 바탕으로 벽돌을 이용하고, 성벽의 중간부분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등 독창성을 발휘해 좀 더 선진화된 성제를 보여줬다.
또 정조가 직접 하사한 책을 비판적으로 연구하여 기중기를 설계하여 4만냥 이상을 절약하고 일반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지 않게 하였다.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고
그 신하를 따뜻이 보살펴 주었던 정조와 다산의 아름다운 만남은 당쟁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에
막혀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만다.
정조가 죽었다는 갑작스런 천붕(天崩)의 소식에 접한 다산은 얼마전 하사한 그 책이 "신하와 영결(永訣)하시며 내리신 선물"이라며 통곡하였다. 정치관료로서 그리고 기술관료로서 賢君 정조와 의기투합하였던 다산은 바로 '정조스쿨'이라 할 수 있는 초계문신에 뽑혀 그와 함께 참혹한 백성들의 현실에 가슴아파하며 모순투성이인 봉건왕조의 개혁에 헌신하였으나 두터운 당쟁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머나 먼 유배길을 떠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