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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나는 진화 윤리학에 대한 나의 생각을 개략적으로 쓸 것이다.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거칠다. 개념적으로 거칠 뿐 아니라 증거도 부족하다.
하지만 나는 이 큰 그림이 옳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다. 이 확신을 뒷받침할 모델을 만들어 내고 증거를 모으는 일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내가 매달리고 싶은 작업이다.
내가 진화 윤리학 문헌을 아직 많이 읽어보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 글에서 쓴 내용 중 일부가 상당히 독창적이라고 믿고 있다.
도덕성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극단적인 선천론에 가깝다. 이름 있는 진화 윤리학자들 중에 나보다 더 선천론적인 사람을 아직 못 봤다.
나는 죄책감과 도덕적 분노 같은 감정뿐 아니라 “살인하지 말라”, “강간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와 같은 규범도 선천적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살인이 강간보다 더 심각한 범죄다”와 같은 식의 규범의 심각성에 대한 판단도 선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문화권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인간 본성인 것이다.
그리고 도덕 감정, 도덕 규범, 규범의 심각성에 대한 평가 모두 자연 선택의 산물인 적응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입장은 극단적인 선천론(nativism)에 가까울 뿐 아니라 극단적인 적응론(adaptationism)에도 가깝다.
그리고 나는 집단 선택론을 도덕성의 진화에 끌어들이는 것을 싫어한다. 1966년에 George Williams의 『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 A Critique of Some Current Evolutionary Thought』가 출간된 이후로 집단 선택론은 진화 생물학계에서 힘을 많이 잃었는데 유독 진화 윤리학계에서는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 다른 영역에서는 집단 선택론을 거의 끌어들이지 않았던 다윈도 인간의 도덕성을 설명할 때에는 집단 선택론을 끌어들였다.
20세기 후반에 생물의 이타성의 해명에 대해 진화 생물학자들은 큰 진전을 이루었다. 친족 선택 이론과 상호적 이타성(reciprocal altruism) 이론이 대표적이다. 두 이론의 바탕에는 이기적 유전자 즉 개체군 유전학(population genetics)이 놓여 있다. 생물이 속임수나 오작동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이며 의도적으로 남을 도울 때에는 결국 자신 안에 있는 이기적 유전자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좀 더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친족 선택 이론이나 상호적 이타성 이론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남을 돕도록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가 그렇지 않은 유전자에 비해 유전자 풀에서 더 퍼지는 경향이 있도록 선택압(selection pressure)이 작동한다.
온갖 종의 생물들이 보이는 이타성의 패턴이 친족 선택과 상호적 이타성에 부합한다.
인간의 예를 살펴보자. 먼저 친족 선택과 관련된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인간은 더 가까운 친족일수록 더 잘 돕는 경향이 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이 자식의 부모 사랑보다 더 크다. 노인이 되면 자식이나 손주에 대한 사랑이 더 극진해진다. 자식이 사춘기 무렵일 때 부모의 자식 사랑이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의붓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친자식에 대한 사랑이 더 크다.
상호적 이타성에 관련된 것을 살펴보자. 친구가 배신하면 절교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자식이 배신한다고 자식을 져버리는 부모가 거의 없는 것과 대비된다. 친구가 자신에게 잘 해주면 고마움을 느낀다. 고마움을 느끼면 보통 은혜를 갚는다. 사람들은 더 우월한 사람을 친구로 사귀고 싶어한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이상하다. 그리고 나는 친족 선택과 상호적 이타성을 끌어들이지 않고 이 모든 것을 그럴 듯하게 설명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이것은 친족 선택과 상호적 이타성과 관련된 선택압이 인간의 진화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음을 시사한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인간의 이타성이 결국 유전자의 빈도를 높이는 것과 관련된 최적 전략에 가까운 것에 불과하다는 친족 선택 이론과 상호적 이타성 이론은 많은 사람들의 경악과 분노로 이어졌다.
나는 도덕성도 비슷한 식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이기적 유전자가 친족애에 대한 메커니즘을 자연 선택을 통해 주조했듯이 도덕성에 대한 메커니즘도 주조했다는 것이 그 골자다.
도덕성은 빈번히 상호작용하는 개체들 사이에서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여기서 개체(individual)는 아주 폭넓은 개념이다. 하나의 유전자가 개체일 수도 있고, 하나의 세포가 개체일 수도 있고, 한 명의 인간이 개체일 수도 있고, 하나의 개미 군체(colony)가 개체일 수도 있다. 나는 인간뿐 아니라 다른 동물들에게도 도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식물에게 도덕성이 있을 가능성도 선험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식물 진화 윤리학이라는 분과가 나중에 생길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서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두 개체가 상호작용할 때 이기적 유전자를 위한 최적 전략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식의 최적 전략을 취하도록 하는 선택압이 작동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선택압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진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그 최적 전략이 규범이 될 때가 있다.
대다수 개체가 어떤 최적 전략을 취한다고 해서 그것을 도덕성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처벌이 있어야 도덕성이다. 어떤 사람 A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자.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A에게 도덕적 분노를 느낀다. 이것은 처벌로 이어질 때가 많다. 그리고 A는 보상을 하거나 처벌을 감수한다. 이것은 죄책감이라는 감정 때문이다. 처벌, 보상, 처벌 감수 등이 개입될 때 ‘잘못’이라는 개념도 성립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개체는 처벌을 하려고 하고 처벌을 감수하려고 할까? 왜 잘못을 저지는 개체는 남들이 자신을 처벌하려고 할 때 반격하지 않을까?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반격하지 않고 처벌을 감수하는 것이 최적 전략에 가깝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규범 자체가 최적 전략에 가깝도록 진화했다. 따라서 그 규범을 어겼을 때에는 어긴 쪽에서 보상하거나 처벌을 감수하는 것이 최적 전략에 가깝다. 또한 손해를 본 쪽에서는 처벌을 하거나 보상을 받는 것이 최적 전략에 가깝다.
편의상 서열이 높은 개체를 윗개체로, 서열이 낮은 개체를 아랫개체로 부르겠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에서 힌트를 얻어서 만든 단어다.
서로 모르는 같은 종의 개체들을 한 우리에 넣으면 한 동안 싸움이 일어난다. 그러다가 서열이 정해지면 상당히 평화롭게 지낸다. 이런 현상을 본 사람들이 서열의 진화적 기능이 평화 유지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집단 선택론을 끌어들여서, 평화롭게 지내는 집단이 맨날 싸움만 하는 집단보다 더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동물이 그런 식으로 진화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는 개체 선택론으로 서열의 규범을 설명하는 쪽을 지지한다. 서열의 규범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윗개체가 아랫개체를 착취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 물론 이것이 서열의 핵심 측면이긴 하지만 다른 측면도 있다. 윗개체가 아랫개체를 착취하는 것에도 한계가 정해져 있다. 한편으로 아랫개체가 윗개체와 맞먹으려고 하면 윗는 “건방지다”라는 생각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윗개체가 아랫개체를 너무 많이 착취하게 되면 아랫개체는 “너무 하는 것 아냐?”라는 생각을 한다. 서열의 규범은 윗개체가 착취하는 것을 어느 정도 보장하지만 어느 정도까지만 보장한다.
서열을 결정 짓는 것은 결국 힘이다. 그 힘이 단순히 자신의 근력에서만 나오는지 동맹자들의 근력에서도 나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든 육탄전을 벌였을 때 누가 이기느냐가 대체로 서열을 결정한다. 아랫개체의 입장에서 볼 때 윗개체와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것은 최적 전략이 아니라. 왜냐하면 결국 육탄전을 벌였을 때 자신이 질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윗개체와 동등한 대우를 받겠다고 부상의 위험을 안고 질 확률이 높은 싸움을 벌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아랫개체의 처지가 이렇기 때문에 윗개체는 어느 정도 안심하고 착취할 수 있다.
하지만 윗개체가 한계를 모르고 끝없이 착취하는 것 역시 최적 전략이 아니다. 만약 윗개체가 어느 정도의 한계 이상으로 착취한다면 아랫개체에게는 덤비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이다. 쉽게 말하자면 굶어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마찬가지다. 자원을 너무 많이 빼앗길 판이라면 부상의 위험을 무릎 쓰고 승산이 적은 싸움에 뛰어드는 것이 가만히 앉아서 몽땅 빼앗기는 것보다 더 나은 전략인 것이다. 아랫개체의 이런 처지 때문에 윗개체는 보통 어느 정도 한계 이상으로는 착취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은 평화가 유지된다. 윗개체는 어느 정도만 착취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아랫개체는 더 이상 착취 당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한다. 서열의 규범은 단지 “윗개체가 아랫개체를 착취할 권리가 있다”만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규범에는 질적인 측면뿐 아니라 양적인 측면도 있다. “서열이 높은 개체는 이 정도 한계 내에서만 착취할 수 있다”는 식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 한계는 어떻게 결정될까? 윗개체와 아랫개체 사이의 힘의 차이와 같은 온갖 요인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이런 논리를 생각해 볼 때 서열의 규범을 어긴 개체는 처벌을 감수하는 것이 반격하는 것보다 더 나은 전략이다. 애초에 착취의 정도가 힘의 차이 등을 비롯한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따라서 윗개체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너무 많이 착취했을 때 사과하는 것이 아랫개체와 대판 싸우는 것보다 유리한 전략이다. 윗개체의 이런 입장 때문에 아랫개체의 처벌 욕구가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아랫개체가 윗개체에게 건방지게 굴었을 때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인간에게서도 서열은 관찰된다. “건방지다”라는 단어는 인류 보편적인 것으로 보이며 나는 건방짐에 대한 분노 메커니즘이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 선천적 인간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많은 종에 비해 인간은 상당히 평등한 편이다. 인간의 규범 목록에는 평등과 공평성의 규범이 눈에 띈다.
인간은 침팬지에 비해 왜 그렇게 평등한가? 내가 보기에는 결혼의 진화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 같다. 짝짓기 체제를 여러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일부일처제-하렘의 이분법도 상당히 쓸모 있는 구분이다. 인간은 극단적인 일부일처제에 상당히 가까운 종이다. 반면 바다 코끼리는 극단적인 하렘 체제에 가까운 종이다. 하렘 체제에 가까울수록 서열에 집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높은 서열로 엄청난 것을 얻기 때문이다. 반면 일부일처제에 가까울수록 높은 서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인간의 결혼이 왜 진화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인간은 결혼을 하고 침팬지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 인간에 비해 침팬지는 하렘 체제에 더 가깝다. 따라서 인간의 경우 엄격한 서열이 완화되어 평등과 공평성의 규범이 강화되도록 하는 방향의 진화가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랑우탄에 비해 인간은 강간을 훨씬 덜 하는 종이다. 그 이유는 오랑우탄이 단서성 동물인 반면 인간은 사회성 동물이며, 오랑우탄이 결혼을 하지 않는 반면 인간은 결혼을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요컨대 오랑우탄 암컷은 혼자 사는 반면 인간 여자에게는 주변에 친족과 남편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강간 전략은 덜 효과적이다. 강간했다가 여자의 친족, 친구, 남편에게 보복을 당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오랑우탄 수컷은 이런 걱정을 별로 안 해도 된다. “강간하지 말라”라는 규범이 인간에게 진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강간하는 것이 크게 유효한 전략이 아니라는 사정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어떤 말벌의 번식 규범을 소개하겠다. 『Levels of selection in evolution(Laurent Keller 편집)』의 「Dynamics of Conflicts within Insect Societies」에 간략하게 나와 있다.
「Dynamics of Conflicts within Insect Societies」
그 말벌의 경우 윗개체가 더 많이 번식한다. 하지만 아랫개체도 어느 정도 번식을 한다. 번식과 관련된 서열의 규범이 있다. 이 서열의 규범에는 아랫개체를 위한 규정도 있는 것 같다. 실험자가 아랫개체의 알을 없애면 아랫개체는 윗개체에게 대든다. 아마 윗개체가 자신의 알을 죽였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너무 하는 것 아냐?”라는 식의 도덕적 분노가 있는 것이다. 말벌의 도덕적 분노가 인간의 도덕적 분노와는 양상이 매우 다르겠지만 그 기능에서는 비슷한 면이 있다. 이 분노 메커니즘 때문에 서열이 낮은 말벌은 보통 때와는 달리 윗개체에게 대들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최적 전략을 고려한 분석이 도덕 규범의 진화를 설명할 가망성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는 “거짓말 하지 말라”를 비롯한 다른 온갖 규범들도 이런 식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적어도 이런 식의 분석 방식이 도덕성을 해명하려고 한 지금까지 알려진 시도들 중에 가장 가망성이 커 보인다.
결국 도덕성은 게임 이론의 힘 앞에 자신의 비밀을 노출하게 될 것이다.

첫댓글 살인하지 말라 -> 내집단의 구성원을 살인하지 말라 ...저의 지적은 그냥 무시하시네요. 제가 보기에 덕하님이 논하시는 낙천적인 도덕성 운운도 모두 내집단의 논리에서만 통용되는 것입니다. 인류는 언제나 외잡단의 인간을 죽이고 약탈하는 내집단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취급해 왔습니다. 인류 역사에 전설로 전해지는 영웅들의 업적을 보세요. 외집단을 효율적으로 죽이고 약탈하고 승리를 쟁취한 내집단의 구성원입니다.
그냥 "살인하지 말라"라고 한 것은 포비즘 님의 지적이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냥 짧고 거칠게 쓴 것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냥 "거짓말 하지 말라"라고 표현한 것도 선의의 거짓말(white lie) 등에 대해 제가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종주의 또한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에 뿌리를 내린다고 봅니다. 생김새나 피부색이 조금만 다르다고 외집단으로 취급하며 모조리 죽이고 약탈하고 잡아먹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지요. 인디언 멸종, 호주 원주민 멸종, 제국주의 학살, 끊임없는 민족 분쟁, 전쟁 등은 가까운 증거입니다.
인간이 피부색이 다른 타인종을 멸시하도록 진화했을 리가 없습니다. 사냥-채집 사회에서 다른 인종을 볼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을 모조리 학살하고 잡아먹은 것을 고려한 문장인데요. 네안데르탈인 뿐이겠습니까마는. 이건 약간 논외인 것 같아 패스하겠습니다.
현생 인류가 네안데르탈인을 모조리 학살하고 잡아먹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비슷한 생태적 지위(niche)를 차지하다 보니 한쪽이 경쟁에서 밀려서 멸종했을 가능성이 더 그럴 듯해 보입니다. 물론 현생 인류가 네안데르탈인을 한 명도 잡아 먹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네안데르탈인 멸종원인은 현생인류 탓?
http://news.jknews.co.kr/article/news/20090518/4509477.htm
영국서 9천년 전 식인흔적 발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40&oid=001&aid=0002806353
독일 남서부 고대 유적지에서 7천년전 대규모 식인 행위의 흔적 발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3012172
인류조상은 식인종? 同族먹는 단백질 보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9&aid=0000286126
학계에서 선조의 삶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설마 아주 가끔 간식으로만 먹었을까요?
저는 과거나 현재에 식인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인간(또는 네안데르탈인)을 많이 잡아 먹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동물에 비해 인간을 잡아 먹기가 더 힘들기 때문입니다. 더 쉽게 잡아 먹을 수 있는 동물이 있다면 뭐하러 인간을 잡아 먹는 훨씬 더 위험한 짓을 하겠습니까?
사실 저의 논점에 근거하면 굳이 잡아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먹는 것이 더 극적인 효과를 주지만) 아무튼 학살의 근거는 확실하지요. 단지 저는 낙천적인 선천론이 너무 순진하다고 봅니다. 인간이 서로 죽이기 힘들다고 전쟁을 자제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저는 이런 주제를 다루면 항상 우리 본성의 뿌리인 선조의 삶을 고려합니다. 선조의 삶은 전쟁과 살상의 연속이었습니다. 동족도 잡아먹었다는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뇌에서 공포라는 감정이 가장 영향력이 크지요) 낙천적인 선천론 운운은 들어맞지 않아요. 제가 뭘 잘못 이해하고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1) 하지만 이 학설이 인정 받기 위해서는 더 많은 증거자료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2) 그러나 셜팅 박사는 이 시기의 다른 인골과 동물 뼈를 더 찾아내
이들도 같은 방식으로 다뤄졌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식인설이 입증될 것이라고 말했다
3) 연구진은 그러나 신석기 시대 초기는 중부 유럽에서 농업이 시작된 시기여서
식인 행위는 극단적인 기근 시기에 예외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일부 과학자들은 뼈에서 살을 발라낸 것은
당시 매장 의식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식인 가설을 반박하고 있다
4) 콜링지 교수는 광우병에 대한 연구조사를 하던 중 이 같은 사실을 추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위의 글은 포비즘님이 알려진 주소에서 나온 내용입니다. 가설이고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도 아닌데 제목이 식인흔적이라고 하니까 이상합니다. 그리고 선조의 삶은 전쟁과 살상의 연속맞습니다만 역사를 살펴보면 오직 한 사람의 의지에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따른 것이었습니다.
옳지 않다. 고 생각하지만 자신을 통제하거나 권위있는 사람에 의해서 묵살된다.
는 것을 증명한 스탠리 밀그램 실험이 있습니다.
EBS 다큐프라임 '아이의 사생활' 에서도 비슷한 실험을 했습니다.
교사가 아이에게 사진을 보여주면서
' 선생님의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유일한 사진이야'
'이거 찢어 줄래? ' 순간 아이는 흠짓 놀랍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부탁하니까 눈치보면서 살살 찢습니다.
(물론 소수의 아이는 싫다고 거절합니다.)
또 다른 도덕성 실험
10개월 아기에게 비디오를 보여줍니다.
동그라미가 산을 헉헉 거리면서 힘들게 올라가자 세모가 나타나서 밑에서 올려줍니다.
다음 장면
동그라미가 어렵게 산 정상에 오르자마자 네모가 밀어버립니다.
10개월된 아기에게 네모와 세모중에 고르라고 주었더니
모든 아기가 세모를 선택했습니다.
색을 바꾸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실험이 있었군요. 도덕성의 선천성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