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8년 10월 선전관 박기정이 찬술한 처사 엄천운의 묘표
처사 엄천운의 묘표(處士 嚴天雲의 墓表)
故忠臣贈參判嚴公興道寧越人也在昔天順丁丑端宗大王昇遐于越中公時以郡戶長奮忠於倉卒之際忘身於震湯之中奉藏劒潟訖 與子好賢避居于嶺外之酒泉子孫仍家焉而畏幻隱晦至變鄕貫名字人未有知之者過百有餘年始稍稍出于世旴亦悲 且奇矣越之古老至今傳其事邑士嚴永泰錄之額詳皆可考也 自參判公五傳而有曰天雲字晶卿天姿純實孝友兼備家甚貧躬自耕樵而未嘗有憂若之色克勤於定省之節雖紛擾急遞之際行之如一與其弟天豪至老同居常存大被衾也之樂終身隱遯不出人以嚴處士稱之於乎公之居家篤行亦豈無所自而然乎哉參判公之孫曰將仕郞和於公爲曾祖祖希齡考漢義枇竺山全氏學生喆之女也公生于隆慶戊辰歿于崇禎甲戌壽六十七葬于郡西紫陽洞癸坐原聚潘南朴氏殷之女謹守閨儀奉君子無違生後四年歿與公同年墓用附左之禮男二人長壽日有二男成敏成德次壽吉有四男啓功郞承善贈掌樂正一善後善益善內外曾玄以下多不能盡記惟其奉先睦族克紹其家承善之曾孫昌伯一善之孫聖化最焉一善之贈官以曾孫重昌壽秩也重昌之子尙寬與昌震重彬鳩財伐石欲侈其先墓請銘於余余固不文然於參判公實爲曠世之感嘗謂公之危忠苦節與六臣同歸而論其保有珠邱之功尤有異焉違矣哉今於公之孫徵後之文何可辭爲就其狀略加刪潤而勤書參判公當日樹立기後孫韜晦之實以歸之遂爲銘曰酒泉之西義山之陽是惟忠臣遺裔之藏後之過者勿夷傷
參判朴基正撰
<譯文>
故忠臣參判嚴公興道(고충신참판엄공흥도)는 영월사람이다.
옛 천순정축년(一四五七)에 단종대왕이 영월에서 승하하셨을 적에 공이 그때 고을의 호장으로서 창졸간에 분충하고 진탕 중에도 내몸을 잊고 시신을 안장한 후에
아들 好賢(호현)과 더불어 嶺外之酒泉(령 밖의 주천? 예천?) 땅에 피신하여 자손들이 이에 집을 이루었으나 두려워 숨어 지내어 貫鄕(관향)과 이름과 자를 고침에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백여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조금씩 세상에 나갔으니 아! 슬프고 또한 기특한 일이로다.
영월의 고로들이 지금에 이르도록 그 일을 전하고 고을의 선비 嚴永泰(엄영태)가 자못 상세하게 기록하였으니 모두가 가히 고증되는 일이다.
參判公(참판공)으로부터 五대를 내려와서 天雲(천운)이 있었으니 자가 晶卿(정경)이요 천자가 순실하고 효우가 겸비하였다.
집이 매우 빈궁하며 몸소 농사짓고 땔감을 날랐으나 일찍이 근심하고 고생스러워 하는 빛을 낸적이 없었고 어버이 섬기는 일에 극진하였으며 비록 얽히고 급한 때라도 여일하게 행동하였다.
아우 天豪(천호)와 노인이 될 때까지 동거하여 항상 한 이불 속에서 같이 잠자고 지내며 종신토록 그 몸을 숨겨 내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嚴處士(엄처사)라 칭하였다.
오회라
공의 거가독행이 어찌 스스로 할 바가 없어서 그러했는가.
參判公(참판공)의 손자는 將仕郞和(장사랑 화)이니 공에게 曾祖(증조)가 되고, 祖(조)는 希齡(희령)이요, 考(고)는 漢義(한의)이다.
비는 竺山全(축산전)씨이니 학생 喆(철)의 녀이다.
공은 隆慶(륭경) 무진(1568년)에 나서 숭정갑술(一六三四 1634)에 몰하니 수가 六十七(67)이요.
고을 서쪽의 紫陽洞(자양동)의 계자원에 장례지냈다.
潘南朴(반남박)씨 殷(은)의 딸을 취했는데 규중예의를 잘 지키고 봉군자에 어긋남이 없었다.
公보다 四년후에 나고 公과 같은 해에 몰하니 묘를 합장하였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인 壽日(수일)은 두 아들 成敏, 成德(성민, 성덕)을 두었고,
차남인 壽吉(수길)은 넷 아들을 두니 啓功郞承善(계공랑 승선)이요 贈掌樂院正(증장락 원정)이니 一善(일선)과 後善益善(후선익선)이다.
내외의 증·현손이 하도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생각컨데 조상을 받들고 일족과 화목하며 그 집을 잘 지켜온 사람은 承善(승선)의 증손 昌伯(창백)과 一善(일선)의 손 聖化(성화)가 가장 두드러지며 一善(일선)의 贈官(증관)은 증손 重昌(중창)의 壽秩(수질)로 받은 것이다.
重昌(중창)의 자 尙寬(상관)이 昌震重彬(창진, 중빈)등과 더불어 재화를 모아 돌을 깎아 선조의 묘를 꾸미고자 나에게 명해 줄것을 청하니 내가 불문이나
그러나 참판공은 실로 세상에서 드물게 보는 충절이라 일찍이 이르기를 公의 위충고절은 六臣(육신)과 한가지요 그 능침을 보존하고 있게 한 공은 더욱 특이함이 있지 않은가.
아름답구나
이제 공의 후손에게 뒤를 밝혀주는 글을 내가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그 기장에 약간의 가감을 하여 삼가 쓰노니, 참판공의 그때 세운 장한 일이 후손들의 은둔의 과실이 되어 돌아 왔도다.
명하여 가로데
예천땅 서쪽 義山(의산)의 양지는 시유 충신 후예의 묘소이니 후세에 지나는 자 다치지 말고 상하지 말찌어다.
通訓大夫行弘文館校理知製敎(통훈대부 행홍문관교리 지제교) 겸 經筵侍讀官春秋館記註官漢學敎授中學(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 한학교수 중학) 敎授文臣(교수문신) 겸 宣傳官朴基正(선전관 박기정)이 찬하고
進士東陽申紹陽(진사 동양 신소양)이 쓰다.
숭정후三무신(一七八八) 1788년 10월 일에 세우다.
원문출처 : 영월엄씨 대종회
渭滿門 世居 由來와 文化遺蹟(위만문 세거 유래와 문화유적)
寧越嚴門 軍器公派 忠毅公系(영월엄문 군기공파 충의공계)
聞慶市 山陽面 渭滿里 世居 由來와 文化遺蹟
(문경시 산양면 위만리 세거 유래와 문화유적)
문경시청 문화예술과:엄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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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해역
묘표 개요
위치: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위만리 116 (의산 7부 능선)
건립 시기: 1788년 (조선 정조 12년)
피장자: 엄천운 (1568 ~ 1634, 자는 창경)
주요 기록 내용
엄흥도 선생의 후손, 처사 엄천운(處士 嚴天雲, 1568~1634)의 묘표(무덤 앞 비석) 뒷면 기록입니다.
엄천운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약 140여 년 뒤인 1788년(정조 12년)에 후손들이 선조인 엄흥도의 충절과 그 후손들이 숨어 살아야 했던 애환을 기록하기 위해 세운 금석문입니다.
가계 배경: 단종 승하 시 영월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했던 영월엄씨 충의공 엄흥도의 후손입니다. 문경 위만리에 처음 정착한 엄한의의 맏아들입니다.
전면 명문: 가운데에 '처사영월엄공천운지묘(處士寧越嚴公天雲之墓)'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후면 행적(음기): 엄천운의 자질이 순실하고 효성과 우애를 겸비했다는 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몸소 농사를 짓고 땔감을 날랐으나 어버이를 섬김에 극진하였고, 아우 천호와 함께 우애 깊게 늙어갔던 인품을 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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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박기정 선생은 정조의 어명으로 영월도호부사에 임명되었는데(▷ 박기정(朴基正) 신해년(辛亥年, 1791년 정조 15) 3월 11일 정조임금의 특별교시로 영월부사를 제수 받아 같은 달 28일에 부임하였다. 계축년(癸丑年, 1793년 정조 17) 6월 24일 만기를 채우고 이동되었다.)
영월도호부사 임명 3년 전에 찬술된 묘표문입니다.
重昌(중창)의 자 尙寬(상관)이 昌震重彬(창진, 중빈)등과 더불어 박기정 선생을 어떻게 알고 찾아갔고 묘표문 찬술을 청원하였을까요?
인연이 있으면 필연, 반드시 만나게 된다는 말이 있듯이
영월부사로서 정조임금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단종 유적과 관련인물들의 역사되찾기를 시행했던 박기정 선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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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신소양(東陽 申紹陽)은 정조 대의 문화유적인 처사 엄천운 묘표(處士嚴天雲墓表)의 비문을 직접 글씨로 쓴 서자(書者)이자 조선 후기의 문인입니다.
1. 주요 인적 사항 및 배경
성명: 신소양 (申紹陽)
신분: 진사(進士) (과거 시험인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 자격을 얻은 지방의 유력 지식인 계층)
관향/거주지 (동양): 본관 혹은 연고지가 '동양(東陽)'임을 뜻합니다. 조선 시대 지명에서 '동양'은 경상북도 상주에 있던 옛 고을인 함창(咸昌)의 별호(別號)로 자주 쓰였습니다.
신소양은 정조 연간에 영남 지역(상주·함창·예천 일대)에서 주로 활동했던 재지 사족(在地士族)입니다.
2. 엄천운 묘표에서의 역할
건립 시기: 1788년 (조선 정조 12년, 무신년)
역할: 홍문관 교리를 지낸 문신 박기정(朴基正)이 지은 묘표 문장을 국가유산 지식이음 자료에 기록된 대로 신소양(申紹陽)이 정성스러운 서체로 받아 적어 비석에 새기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이 지역 유림(儒林)과 영월 엄씨 문중은 단종의 충신 엄흥도와 그 후손들의 행적을 선양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는데, 서예에 능하고 학문적 명망이 있던 진사 신소양이 서자로 참여하여 그 정통성을 더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