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지정사항 ; 제주도 기념물 23-1호(1973년 4월 3일 지정)
위치 ; 성산읍 온평리 1355-1번지
시대 ; 조선
유형 ; 방어유적(봉수-연대)
연대는 옛날 적이 침입하거나 위급한 일이 있을 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방호소나 수전소 등 군대가 주둔한 곳에 연락을 취했던 통신망의 하나이다. 연대는 바닷가의 높은 지대에 석축 사면으로 쌓았고 상단 중앙에 대(봉덕)를 만들어 사용했었다. 봉수와 연대는 각각 별도로 했는데 평상시 1개, 황당선 출현 2개, 근경에 이르면 3개, 犯境이면 4개, 접전할 때 5개의 연기 또는 불꽃을 피워 연락했다. 연대의 규모는 높이 4m, 가로 8m, 세로 10m로 여기에는 별장 6인과 망지기 12명이 배치되어 교대로 지키고 있었다.
영혼포연대는 신산-온평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바다쪽으로 난 농로로 600여m 지점 소나무 숲 사이에 있으며, 보수한 흔적 없이 원형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다. 연대의 규모는 상부 9.9m×9.4m, 하부 10.4m×10.5m, 높이 3.6m인 사다리꼴이며 뒤편(북쪽)으로 계단이 있어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위에는 화덕 자리가 있다. 여기에는 측량기점이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축조 방법은 허튼층쌓기이며 모서리는 높이 23cm, 폭 62cm의 큰 판석에서부터 높이 10.2cm, 폭 33cm의 작은 판석으로 한 바른층쌓기이다. 모서리 부분에는 넓고 길쭉한 돌을 쌓아 무너짐을 방지하였다. 동으로 협자연대와 교신하였는데 이 연대에 올라서면 협자연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말등포'란 이름은 사실은 온평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신산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산리의 옛 이름이 '그등애'이며 이 말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끝 말'자를 써서 말등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온평리 해안 언덕에도 연대를 설치하고, 신산리 해안 언덕에도 연대를 설치했었다. 그래서 1679년에 제주 안핵겸순무어사로 임명을 받은 이증(李增)이 제주도에 도착해서 순력할 때(1680년 2월 18일 오후)에 〈옛정의현에서 말을 멈추고 두루 구경한 다음 35리를 가면서 수산봉수, 협재포 동변 연대, 迎婚浦(영혼포) 서변 연대와 末等浦(말등포) 서안 연대, 독재(獨才)봉수, 남산봉수를 지나 정의성에 저물어 들어갔다〉(古旌義駐馬周覽 行三十五里 過首山烽燧 挾才浦東邊烟臺 迎婚浦西邊烟臺 末等浦西岸烟臺)고 썼다. 迎婚浦(영혼포)는 열운잇개 곧 지금의 온평리 포구를 이르고, 末等浦(말등포)는 그등애 곧 지금의 신산리 포구를 이른다. 그러니까 17세기말에는 온평리 포구 서쪽과 신산리 포구 서쪽에도 연대가 있었다. 지금의 말등포연대는 온평리 서쪽에 있으므로 이증이 쓴 글에 따르면 영혼포연대이다. 말등포연대는 신산리의 서쪽 해안 어느 곳엔가 있었을 것이다.
한편, 1698∼1703년경에 그려진 여지도의 제주목 지도에는 지금의 성산읍·표선면·남원읍에 해당하는 곳에 붉은색으로 연대 표시가 되어 있으나 이름이 적히지 않아 구별하기 힘들다.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한라장촉에도 영혼포연대와 말등포연대 2곳이 다 그려져 있다.
1709년에 만들어진 탐라지도병서의 지도에도 연혼촌(온평리)과 영혼포가 나란히 나와 있는 곳에 연대 표시가 있고, 말등촌(신산리)과 말등포가 나와 있는 곳에도 연대 표시가 있다.
오늘날 제주도 연대를 조사하여 기록한 자료에는 온평리 서쪽 연딧동산에 있는 연대 즉 남사일록에 적힌 영혼포서변연대를 末等浦烟臺(말등포연대)라 하고 있는 것이다. 말등포서안연대에 대한 조사 기록은 없다.
《작성 2004.12.05. 보완 2026.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