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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서론 2.윤증 3.명재고택 4,감상 5.참고자료 |
1.서론
연휴라 3시간째 천안, 버스 위에 머물렀다. 자칫 지루할 뻔 했었지만 버스 속 교수님의 작은 강의로 이겨낼 수 있었다. 교수님께서 그 전날 있었던 5-6시간을 역사 속에서 바라본 시각으로 이야기하셨다. 끊임없이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었던 연륜과 지혜가 그리고 스킬을 엿볼 수 있었다. 교수님 이야기를 들으니 평양냉면도 먹고 싶었고 DDP도 다시가보고 싶었다. 버스 안에서 작은 세미나도 가졌었는데 이 또한 많은 것을 배웠다. 역사는 객관적 시선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왕실이야기부터 조선양반이야기 까지 두루 배울 수 있었다. 또한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신 말이 지금까지도 맴도는 데, 계급의 차별에 대해서 중국은 없고 일본은 심하다는 것이다. 일본은 사무라이 정신으로 세금을 받는 것이 권리이자 의무라 하였다. 하지만 극단적 계급화에도 한때 전성기를 누렸었고 지금의 장인정신과 중소기업의 강화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과 우리나라의 지금 상황은 어떠한가? 평등과 계급. 나 또한 양반의 평가를 좋지 않게 보는 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탐관오리가 있는 반면 훌륭한 양반들이 많았으며 양반의 정신은 고귀하다. 우리는 오늘 고귀한 양반 중 벼슬에 욕심을 두지 않은 명재고택으로 갔다.
2.윤증
윤증은 조선 후기의 학자, 정치인, 사상가이다. 본관은 파평. 자(字)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당색은 서인, 소론의 영수이다. 벼슬보다는 평생을 학문과 교육에 뜻을 두었다. 효종 때 내시교관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현종과 숙종 때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잠깐 몸을 담고 사퇴하는 것을 반복하였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가 죽자 묘갈명(墓碣名)을 윤증의 스승 송시열에게 부탁했지만 송시열은 병자호란 당시 친구와 친척, 부인이 모두 강화도에서 순절했는데 윤선거만 홀로 살아서 나온 일을 두고 윤선거를 경멸하였다. 윤선거의 묘비명 내용 중에 자신은 덕이 부족하여 윤선거가 피신한 뜻을 알지 못하겠다며 야유하는 뜻을 적자 윤증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시정이나 삭제를 요구했으나 송시열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 일로 감정이 상한 윤증이 송시열을 비판함으로써 사제간의 의리가 끊어졌는데 이를 '회니논쟁'이라 부른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역모를 날조한 김익훈, 김석주에 대한 처벌문제와,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로 서인이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리될 때 그는 소론에 가담하였으며, 이후 그를 지지하는 사류(士類)들에 의해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3.명재고택
명재고택은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위치하는 파평 윤씨의 한 종가이다. 명재고택의 입지는 특별한 장소성을 가지고 있다. 곧, 노성 향교가 명재고택의 왼쪽(서쪽)에 자리잡고 있고, 노성 궐리사가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다. 궐리사란 공자의 영정을 봉안한 건물을 이르는데, 우리나라에는 수원과 노성 두 곳에 있다. 노성산 또한 공자가 고향 노나라에서 이름을 유래한 것 공자의 고향을 논하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명재고택은 18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윤증의 제자들이 1709년에 완공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1725년, 명재의 손자가 입주하였다. 명재고택은 ㄷ자 모양의 안채와 일자형의 중문 간채가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사랑채가 연결되어 있고 사랑채 후면, 높은 곳에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고택의 왼쪽에는 장방형의 연못이 있고 성이 둥글게 자리 잡아 있는데 이는 물이 고여 썩지않게 하기 위한 과학적 장치이다. 또한 성이 3개로 도교신성사상 또한 내포하고 있다. 지금은 중요민속자료 190호로 생생문화재로써 여러 체험행사와 양반의 삶을 가르쳐오고 있다.
명재고택은 아담한 사이즈로 구석구석 과학이 깃든 옛 조상의 지혜를 엿 볼 수 있었다. 명재고택에는 나무와 풀이 없었는데 이는 나무와 풀이 햇볕을 받아 집안을 덥게 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困을 피하기 위함이다. 굴뚝이 낮은 이유는 매일 밥 지어먹고 따뜻하게 지내기 동네사람들에게 미안하기 위함이고 또한 연기로 인해 벌레를 쫓을 수 있었다. 빛을 이용하기 위해 지붕을 기울여 놓아 햇빛, 바람을 과학적으로 이용하였고 구들장을 아랫목에 간격을 좁게 두어 공기가 순환되게 하여 건강을 챙겼다. 남향이기 때문에 창문이 많았으며 창문이 커서 문과의 혼동이 없어야 했다. 창문은 걸림이 존재하는데 사랑채에서 걸림은 팔을 기대기에 딱 좋은 사이즈였으며 창문 또한 현대 최고의 비율인 16:9로 되어있다. 손자, 아버지, 할아버지 방이 이어져 서로를 감독할 수 있었고 손자의 방은 머름을 높혔다. 문은 미닫이와 여닫이 형태로 되어있어 방을 분리하거나 조립할 수 있었다. 안채는 안방마님의 시선에서 모든 것이 파악할 수 있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문턱이 높아 신발을 보고 신분을 확인하였고 사랑채의 동선파악으로 가족의 건강과 손님을 대접에 신경을 썼다. 천장을 조금 낮았는데 이는 좌식하는 양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으며 윗목에 들어갈 때 어르신께 인사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장을 퍼낼 때마다 사당방향으로 구성되어 항상 사당에 인사를 하게끔 구성해 놓았다.
명재고택 가는 길에는 윤증 어머니를 기리기 위한 정려문이 세워져 있다. 이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윤증 어머니는 왜에게서 죽기보단 자결을 택했다. 이때 당시에는 자결이 절개를 지키는 이상한 사회였다. 정려문이 더 값진 이유는 마을이 면세를 받았다는 점이다.
4.감상
사실 난, 양반의 집에 다녀온다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매우 특별했다. 곳곳에 깃든 현대 과학을 보고선 양반의 높은 지식에 감탄을 지어냈고 분명 무척이나 더운 날씨임에도 고택 안에 들어서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에어컨 마냥 불어왔다. 이래서 풍수지리를 무시 못하는구나 싶었다. 사랑채가 현존하는 사랑채 중 으뜸이라 교수님께서 하셨는데 매우 동의하는 바이다. 사랑채 안에 앉아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경치들이 춤을 추며 한 편의 화폭처럼 보여진다. 왜 양반들이 물아일체를 말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 또한 사랑채에 앉아 있자니 시를 한 수 읊고 공부하고 싶었다. 정화된 느낌이었다.
우리가 운이 정말 좋았던 것이 전통혼례식을 간접체험 할 수 있었다. 혼례는 원래 복잡하다고 한다. 요즘 이혼율이 증가하는 것을 보고 안타깝다며 전통혼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셨다. 하지만 의문을 가진 것이, 그때에는 이혼 시스템이 잘 안 갖춰져 있을뿐더러 여자로 살아가기에는 힘든 시대였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에 의해서가 아닌 누가 맺어준 혼례이기 때문에 전통 혼례가 이혼율을 막는다는 건 동의하지 못한 바이다.
또한 해시계를 볼 수 있었다. 양반이 직접 터득하고 만든 시계는 처음 보았다. 노벨상까지 노렸다고 했는데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했었다. 그때 당시 시계는 2시 30분이었는데 해시계는 2시를 가리켰다. 이때 동경시를 처음 알았는데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로 지냈었기 때문에 동경시를 사용하며 이는 30분이 늦는다고 한다. 즉, 해시계가 정확히 우리나라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는 계절마다 다르게 설계되었다고 하니 정말 위대한 보물이었다.
답사를 가게 되어 정말 다행이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 가지 더 느낀 것이 있다면 조금은 슬펐다. 윤증 양반의 13대손 후손이지만 지금은 아저씨가 되어버린 지금의 상황이 아이러니하다고 할까나. 국가유공자와 양반의 자제들은 국가에서 부름을 받지 못하고 각자 힘겹게 처절하게 전통과 지혜, 그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이러한 멋진 곳, 멋진 정신을 모든 사람들이 누려야 마땅한데 서구의 문화가 당당히 자리잡고 있는지 모르겠다. 문화재 보수비로 한계라 힘들다는 기사를 보았다. 사람들의 관심과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 생각하였다. 답사를 통해 우리의 것을 알고 배웠다. 양반의 정신은 섬세하다. 배려가 돋보이고 모든 것이 헛되지 않다. 양반의 정신과 과학이 깃든 고택을 마음에 품으며, 정말이지 그 고즈넉한 풍경은 잊지 않을 것이다.
5.참고자료
http://ko.wikipedia.org/wiki/%EC%9C%A4%EC%A6%9D
http://ata.hannam.ac.kr/korea/k-house/yun/yun-k.htm
첫댓글 개인적인 소감이 좋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