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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쿠바의 사회주의에 대한 재검토
-지속되는 혁명으로서 북한과 쿠바
인문사회의학 석사 4학기 박 영민
1. 머리말: 북한과 쿠바에 대한 상반되는 시선들
북한 현대사를 연구하기 위해서 어떤 자료를 살펴봐야 하는가의 문제에 봉착할 때가 많다. 지리적으로 북한과 국경을 접하고 있고, 역사적으로 친연성을 가지며, 민족적으로는 동일하다는 제반 여건이 오히려 연구에는 장애로 작용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세계에서 유일하게 북한을 자유로이 방문하는 것 자체가 국가보안법에 의해 통제된 곳이 남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내전의 상흔이 현존하는 상황에서 70년에 가까운 분단으로 희미해진 민족 관념을 고려한다면, 연구자로서 우호적인 환경에 놓인 것이 아님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내부자로서의 이런 한계 속에서 소련과 미국의 기밀 해제된 문서들의 가치는 부각되지만, 그 자체로 이미 일정한 시각에서 작성되었음이 간과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구 소련의 기밀 해제된 문서들이 자료로 활용되자 오히려 북한 현대사 연구에서 대립되는 견해들의 강화에 그쳤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1] [2] 즉, 새로운 외부 사료의 발굴이 그에 부응하는 진전된 북한사 인식을 가져오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한 내부에서 생산된 자료들의 사료적 신뢰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적극적 수용에 기초한 연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3] 이런 상황에서는 사료를 부정적 또는 실제의 반전된 이미지로서만 해석해야 하는 자기검열이 없는 남한의 연구자가 과연 있을 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남북한이 아닌 외부자의 시선이 객관적이라는 신화적 믿음도 북한사 연구에서는 무너져 버릴 수 있다.[4] 따라서 기광서의 “안타깝게도 분단 70년이 지난 오늘의 현실에서도 북한에 대한 ‘자기검열 없는’ 객관적 접근은 요원해 보인다.”는 지적은 오늘날 북한사 연구자들에게 뼈 아픈 자기반성을 요청하고 있다.[5]
한편, 쿠바에 대해서는 북한과 비교를 위해 이상화하거나 낭만적인 관점에 기초함으로써 마찬가지로 균형을 잃은 관점이 드러난다. 즉, 쿠바는 현실적으로 사멸해 버린 사회주의 국가들의 계보 속에서 살아남은 현존하는 국가로서, 북한이 향후 지향해야 할 이정표로서 제시된다. 이를테면, 경제개혁 분야에서 쿠바는 만성적 식량공급을 겪는 북한이 따라야 할 모델로서 연구되고 있다.[6] 이 과정에서 쿠바의 성공이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비판적 견해들이 은폐되고 만다. 대표적인 북한과 쿠바의 비교사 연구자인 신석호도 지속불가능한 국가체제로 이미 전제된 북한의 정책적 무능력과 폐쇄성을 강조하기 위해 쿠바 경제개혁의 공과를 공정하게 다루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7] 신석호는 정치경제적 위기인식이나 이에 대한 정책대응의 문제에서 양자간의 차이를 부각하고 있지만, 양국 모두 군부를 전면에 내세워 경제난을 극복하려 했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는다.[8]
무엇보다 쿠바의 카스트로가 2005년의 연설에서 혁명의 자기파괴적 측면을 최초로 언급했을 때, 특별한 시기를 거치면서 표출된 쿠바 체제의 모순을 강조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9] 남한의 학계에서 ‘고난의 시기’ 동안 김정일 체제가 드러낸 부정적 측면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동일한 시기 쿠바에 대해서는 관대한 경향이 있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양국의 2세대 지도자들이 군부를 개혁의 전면에 내세웠다는 공통점을 주장하는 연구도 쿠바를 군부 주도 개혁의 모델로서 제시하기 위해 언급할 뿐이다.[10] 결국 이렇게 도입된 쿠바 사례는 근본적으로 양자 모두에 대해 왜곡된 이해를 불러올 위험이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북한과 쿠바에 공통적으로 관련된 개념들을 분석함으로써, 기계적인 비교를 넘어 편견과 고정관념들을 재검토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이를 통해, 양자를 관통하는 개념들에 담긴 기존의 관점에 담긴 무지와 무비판적인 측면을 드러낼 수 있다면, 비교연구를 위한 새로운 접근이 가능할 것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요컨대 현존하는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과 쿠바의 존속을 지속적 변화와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함으로써 양자의 역사적 경험이 지속가능한 세계를 꿈꾸는 인류에게 던지는 화두를 제시해 볼 것이다.
2. 몇 가지 개념들에 대한 분석
1) 민주주의
북한과 쿠바를 통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자. 식상할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월가 점령 시위나 아랍의 봄, 남한의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최근 몇 년 사이 전세계적으로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인민 혁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누려왔다고 믿었던 민주주의의 기원에 대한 특별한 고민이나 다른 대안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11] 그렇다면, 미국의 반식민지 상태로 지배되다가 혁명을 통해 독립한 쿠바를 통해, 오히려 미국식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12]
20세기 쿠바혁명을 시작으로 21세기 사회주의의 새로운 실험장으로 탈바꿈한 라틴아메리카를 이해하는 데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는 중요하다.[13] 오랫동안 쿠바의 정치체제를 현장연구와 접목해 심층적으로 연구해 왔던 오거스트는 쿠바와 미국의 민주주의를 참여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로 구분한다. 여기에서 핵심은 선거를 통한 참여 이외에 지속적인 인민의 정치적 권리 행사가 가능한가의 여부이다.[14]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대의제 선거제도가 갖는 외양적 동일성이 아니라 실제로 참여하는 과정이 충분히 보장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15] 최근 남한의 국회의원 선거제도와 관련한 담론에서 알 수 있듯이, 대표성의 심각한 훼손을 방지할 새로운 선거제도의 필요성은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시사하고 있다.
정치적 권력의 행사가 경제적 부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유일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정치제도로서 모든 국가들의 경제적 조건에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은 불합리한 것임이 분명하다. 아담 스미스가 근대의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의 일단을 내비쳤을 때, 이미 정치와 경제는 불가분적 관계에 있음을 전제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다른 정치경제적 경험을 가졌던 국가들을 특정 체제의 우월성을 전제한 채 분석하는 것은 출발점 자체가 잘못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물론 쿠바의 정치적 현실을 비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비판의 잣대가 미국이나 서구 중심주의적 관점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16] 오히려 쿠바혁명을 비롯한 제 3세계 인민의 저항들이 숱한 정치적 담론들을 추동하는 계기로 작동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결국 미국에서 라틴아메리카 연구를 분출시켰던 것은 순수한 학문적 관심의 발로라기보다는 바로 쿠바혁명의 여파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17] 따라서 미국으로 대변되는 서구중심주의를 넘어, 쿠바를 비롯한 다른 국가의 경험까지도 포괄하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18]
예를 들어,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를 둘러싸고 벌어진 쿠바 혁명 직후의 상황을 살펴보면, 대의제 민주주의에 젖은 통념과는 낯선 장면과 마주하게 된다. 쿠바 혁명 직후 카스트로가 선거에 회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반면, 반체제 온건파들은 미국식 다당제에 입각한 선거제도를 통해 혁명 이후의 정국을 주도하려고 했다.[19] 선거를 통한 대의제에 기초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이 익숙한 우리에게는, 선거를 거부한 카스트로의 태도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부정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연 선거는 어떤 경우에도 거부되거나 비판될 수 없는 정치제도로서 모든 나라의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수용되어야 할까?
선거가 쿠바 인민이 성취했던 혁명을 정당한 절차라는 이름 하에 전복하는 장치에 불과했음을 쿠바 인민들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미국 측에서 기록된 보고에도 드러나 있다.[20] 혁명은 이뤄졌지만, 여전히 온건파라고 불리던 반혁명적 정치세력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위험이 상존했다면, 이 때 선거가 무비판적으로 수용될 수 없음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쿠바의 사회주의체제가 안정화 된 이후 선거가 등장하게 되었을 때 다수의 쿠바 전문가들이 미국식 제도가 수용된 것으로 해석한 것이 얼마나 자의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21] 왜냐하면, 선거는 인민의 정치적 의사가 제대로 반영될 수 있을 때, 민주주의의 장치로서 기능하는 것이지, 미국식 민주주의라는 이유로 무조건 수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북한의 토지개혁 시기에 선천군의 농민위원회 선거 양상을 보면, 쿠바와는 정반대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22] 일제 강점기 때부터 선천군은 사회주의 세력보다는 기독교, 민족주의 세력이 강력했던 지역이었으나, 46년 3월의 선거를 통해, 빈농과 소농을 대변하는 농민위원회의 인적 구성이 가능해졌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에서 선천군 인민은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할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소련군의 지원 하에 추진된 토지개혁이라는 점에서 일제 강점기에 억눌렸던 지주계층에 대한 분노가 표출될 수 있는 환경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또한, 토지개혁의 법령이 이미 공포된 시점에서, 지주층이 침묵하거나 월남을 택했던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23] 쿠바와의 차이를 논해 본다면, 앞서 언급한 시기 쿠바의 토지개혁은 1959년 1차 시기에 402헥타아르(약 402정보)를 상한으로 하는 사적 소유를 인정한 상태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24] 토지개혁과 산업시설의 국유화 조치로 인해 혁명에 적대적인 입장으로 전환한 미국의 압박 속에서 치러질 선거는 기득권층의 반동적 시도로 혁명이 좌초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경제적 기반을 아직 잃지 않은 기득권층이 미국과 보조를 같이 하면서 쿠바 혁명의 분열을 꾀했던 반면, 북한의 경우 소련의 지원과 농민조직의 활발한 참여를 통해 개혁이 추진됨으로써 지주 계급의 물적 토대가 상실되어 갔다는 차이점이 드러난다.
요컨대, 쿠바와 북한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민주주의와 같은 고정관념에 기초한 정태적 분석들이 드러내는 한계를 깨닫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분야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19세기 말의 생리학자 끌로드 베르나르의 견해가 떠오르는 것은 왜 일까? 그는 과학혁명을 고착화되고 단절적인 개념이라고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끊임없이 갱신되는 ‘과정으로서의 혁명’을 생리학에서 추구했다. 인간 사회의 혁명도 끊임없이 현재 진행형으로 진화해 가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쿠바 혁명 이후 반세기가 흐른 지금까지도 많은 연구자들이 쿠바 혁명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과정으로서의 혁명’이라는 새로운 관점에 천착하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25]
베르나르를 오랫동안 연구했던 의철학자 깡귀엠은 “만약 실수가 그 근원에 있어 실패를 의미한다면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유전적 정보가 복제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오히려 생명성의 불가피한 특성이라고 보았다.[26] 그렇다면, 혁명이란 사실상 시행착오 자체가 행동의 방식으로 간주되는 실험이라고 본 오거스트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다.[27] 자연과학과 인간과학이 공통적으로 파악한 진리 즉, 미시적 물질 세계의 법칙이 거시적 인간 행동의 양태와 접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가능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상적 생물 종을 정의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특정한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쿠바와 북한을 바라보는 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고정불변의 민주주의 개념들을 발굴하려 노력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형성을 끊임없이 변신하는 과정으로서 또는 계기로서 새롭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2)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경제봉쇄를 수십 년 동안 주도했던 미국의 시선으로 80-90년대 북한과 쿠바의 경제 개혁을 바라본다면 어떤 결론이 도출될 것인가? 당연할 지도 모르지만, 봉쇄의 주체로서 미국의 존재는 철저하게 은폐되는 동시에, 모든 문제의 근원은 사회주의 중앙계획경제(Centrally Planned Economy)의 근본적 한계로 설명된다.[28] 결국 시장경제에 기초한 자본주의를 이상향으로 하는 목적론적 도식에 따라, 시장경제 도입과 공공부문의 민영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29] 소련 및 동구권의 붕괴로 인해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당연히 여기는 논리적 구조는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북한과 쿠바는 사회주의체제라는 거시적 틀을 제외한다면, 지정학적, 기후학적, 경제적, 정치적 측면들에서 소련이나 동구권과는 상이한 조건들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수십 년간의 경제봉쇄에도 쿠바와 북한이 동구권의 급진적 개혁-개방이 아니라 점진적인 노선을 취했던 것에 대한 원인을 찾아 봐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로페스의 연구를 비롯해 동구권 붕괴 직후 90년대 초반에 이뤄졌던 영미 학계의 쿠바 연구들이 시장경제를 전제한 채 제시하는 주장들은 비판적으로 수용될 필요가 있다. 이미 2008년의 세계적 금융위기로 촉발된 월가 점령 시위와 사회주의자 샌더스가 일으켰던 열풍에서 알 수 있듯이 시장만능주의를 기초로 하는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인민들이 서구에서도 낯설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30]
사회주의는 쿠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에서 단순히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의미를 넘어, 자본주의에 토대를 둔 제국주의 열강에 맞서는 탈식민의 저항 담론으로서 제기된 것이다.[31] 또한, 18세기 말 미국과 프랑스에서 촉발된 세계적 혁명의 연장선에서 본다면, 쿠바 혁명은 비서구세계의 식민지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를 창조한 결과이기도 했다. 통념과는 달리 쿠바혁명이 애초부터 사회주의를 표방한 것은 아니었다.[32] 오히려 59년 쿠바의 토지 국유화 방침으로 미국이 반정부 투쟁을 지원하면서, 소련과 사회주의를 매개로 연대하게 된 것이다. 이후 1961년의 쿠바 망명자들을 앞세운 피그만 침공은 미국과 쿠바의 길이 얼마나 달랐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쿠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의 반제국주의 독립 투쟁의 역사는 19세기 이래 지속된 기나긴 투쟁의 역사였다. 따라서 쿠바 혁명은 20세기에 발생했지만, 보다 폭넓은 시공간의 관점에서 조망해 볼 필요가 있다. 그 투쟁의 역사에서 사회주의는 인민의 관점에서 독립 운동을 추동했던 담론이었다. 이것이 바로 남한에게는 여전히 열린 자세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사회주의가 라틴아메리카에서는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유이다.
공산주의 이론을 주창했던 칼 막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과도기적 단계로 사회주의 혁명을 예견했던 서유럽의 산업사회에서는 정작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33] 이는 계급모순과 경제적 요인만으로 현실 사회주의의 발생을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든 소련으로 대변되는 사회주의든 이상화해 버리면, 현실의 숱한 개별 국가들에서 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34] 오히려 현실 자본주의가 식민지인들의 해방투쟁을 통해서 그 모순이 보다 첨예하게 드러나자, 대항담론으로서 사회주의가 러시아나 쿠바를 비롯한 상대적으로 덜 산업화된 국가들에서 발생하게 된 것이다.[35] 이들 국가들에게 자본주의란 침략자의 경제적 수탈의 논리일 뿐,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속 자유로운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이상적 체제가 아니었다. 억압과 착취를 의미할 뿐인 자본주의를 겪은 이들이, 이에 대해 비판적인 사회주의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
쿠바와 라틴아메리카를 대상으로 사회체제와 복지제도에 대한 만족도 조사를 살펴보면, 이런 역사적 경험이 어떻게 인민에게 반영되어 있는가를 엿볼 수 있다.[36] 쿠바가 일당독재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체제에 대한 지지는 절반에도 못 미치나, 교육과 의료 체계가 무상으로 이뤄지는 것에 대한 전폭적 지지는 무엇을 의미할까? 체제의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생활의 수준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은 사회주의를 이데올로기적 선악 구도로 판단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37] 어떤 경제적 제도를 선택했든지 그것에 대한 가치판단은 사회적으로 어떤 필요에 부응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이뤄져야 한다. 모든 국가는 어떤 정치경제적 제도를 채택했든지 간에 고유한 문제점을 안고 있기 마련이다. 2000년 갤럽 조사에서 라틴아메리카 다수의 국가들에서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를 선호했다고 했다는 결과가 나왔다.[38] 자본주의의 신화와 사회주의에 대한 고정관념에 젖어 정해진 결론들을 비판 없이 수용하기보다는, 그들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오늘날 북한의 정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어떤 자료에 기초할 것인지에 따라 극단적인 결론으로 갈리게 될 것이다. 냉전을 지극히 이분법적 양대 세력들의 충돌로서만 이해하고 있는 통념에서 본다면,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부정적인 의미에서 불변적인 국가로 보인다. 그러나 50년대 중소 분쟁, 60년대 데탕트, 70년대 탈냉전의 흐름들을 돌이켜 봤을 때 실제로 극단적인 양대 세력의 충돌 이면에 자리한 다중적 흐름들이 있었다. 따라서 80년대말 90년대 초 사이의 동구권과 소련의 해체야말로, 오늘날의 냉전적이고 타성적인 사고를 고착화시킨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분명 이 시기에 인류의 삶을 관통하는 새로운 조류가 등장했던 것이 아닐까?[39] 물질적으로는 이제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가로지르면서 경제적 발전에 좌우 할 것 없이 경쟁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40] 반면, 사상적 측면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의 승리를 최종적으로 역사적 귀결점이라 여긴 미국의 우파 지식인들 사이를 비집고 포스트 모더니즘이 유행하기 시작했다.[41] 사상적으로 아직 주류에 들지는 않았지만, 교조적인 경향에 저항하는 흐름들이 뚜렷이 드러난다. 물질적으로는 경제적 욕망에 보다 빠져드는 시대로 접어드는 시기의 북한이 모든 외부적 파고에 불변적인 체제로 남아 있으리라는 가정 자체를 이제는 의심해 볼 때가 되었다.
그렇다면, 북한이라는 체제에서 이 시기의 변화를 바라볼 수 있다면 역시 경제적 욕망이 어떻게 분출했는가를 봐야 할까? 왜냐하면, 정치체제가 안보적 위험이 증가함에 따라 더욱 보수적으로 국가주의를 추동했다면, 경제는 결국 먹거리의 문제라는 특징을 지니기 때문이다. 사실 정치와 경제 모두 인민의 생활 수준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일종의 테크놀로지로 볼 수 있다면, 경제적 탈출구마저 없었다면, 북한 체제가 벌써 무너졌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인민들이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의 포로로서의 삶 보다는 개인의 실질적 생계수단을 찾아 활동했던 새로운 공간들의 창출에 주목해야 한다.[42] 이제 북한은 더 이상 물질적 부의 경쟁 상대로서 남한을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도덕적 우월성에서 비롯된 체제 정당성에 집중함으로써 배급체계를 비롯해 무너진 국가체제의 허약함에 대처할 수도 있다.[43]
북한의 사회주의 경제상황을 직접 파악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이므로, 보다 포괄적인 경향성을 평가해 볼 수 있는 인구통계학적 변화를 토대로 내부의 변화를 추측해 보자. 신뢰할 수 있는 국제기구들의 인구통계는 북한이 선군시기를 지나서 현재까지 완만하긴 하나 지속적인 인구증가세를 보였음을 명확히 보여준다.[44] 이런 추세는 성숙기에 접어든 소위 선진국에서도 마주칠 수 있는 경향이다. 북한의 이런 변화는 이례적인 것이라 아예 무시하거나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일까? 다른 여타의 국가들과 북한을 비교하는 담론들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이질성 자체를 이상화함으로써 분석 자체가 작동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역사적 문화적 경험을 통해 이룩한 북한이라는 현실 속 국가가 처한 상황들이 전세계 많은 국가들이 지나왔거나 지금도 겪고 있는 현실과 소통 불가능한 것이라는 전제를 버려야 한다. 무엇보다 인민이 국가에 대해 갖는 견해와 국가가 선전 선동하는 문구들이 불일치하는 것에 대해 다른 국가의 경우보다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편견을 극복해야 한다.[45] 어느 체제든 인민은 국가에 대해 호불호의 감정을 동시에 가질 수 있고, 외부에서 보듯이 획일적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핵심은 통념과는 달리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양가적 견해를 가진 북한 인민들이 국가적 정체성을 70년 넘게 자생적으로 형성해 왔다는 사실에 있다.
3) 토지개혁
혁명을 어떻게 정의하든지, 토지개혁을 통해 재분배가 이뤄져 인민에게 물질적 토대가 마련됐음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프랑스 혁명사 연구자인 아귈롱은, 프랑스의 정치가 쥘 페리의 말을 인용해 “최초의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준 것은 첫 번째 토지, 두 번째는 선거권, 세 번째는 지식이다”라고 지적했다.[46] 또한, 이 과정에서 이뤄진 토지 재분배의 과정은 19세기 내내 진행되어 온 장기적 변화라고 보았다. 1789년 혁명 후 거의 1세기가 넘은 시점에서 쥘 페리가 돌아본 혁명에 대한 평가에서 토지가 제일 먼저 등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구한말 조선에서 끊임없이 이어졌던 민란의 연장선에서 북한의 토지개혁이 갖는 중요성을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뜻한다.[47] 또한, 쿠바의 경우에도 혁명 이전의 경제가 미국의 소비재 수요에 종속된 담배와 설탕과 같은 대규모 토지 이용을 필요로 하는 특성을 보였던 점에서 토지개혁이 중요하게 고려될 필요성을 시사한다.[48]
북한은 해방 후 46년에 이뤄진 토지 개혁에서 모든 소작지의 몰수뿐만 아니라, 5정보 이상을 소유한 지주의 경우, 생산설비까지 몰수하도록 했다.[49] 그런데, 이 시기 북한 토지 개혁의 특이한 점은, 소련식의 국유화가 아니라 농민에게 토지의 소유권을 귀속시켰다는 점에 있다. 농민에게 소유권을 이전한 점은 다른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 공통적인 측면이지만, 몰수와 분배의 방식에서 개별적인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50] 반면, 쿠바는 혁명 후 1959년과 1963년에 실시된 토지개혁을 통해 5카바예리아(약67정보) 이상의 모든 개인 농장을 국유화 했다.[51] 시대적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무상몰수의 기준에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물론,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1호당 경지면적이 다른 국가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는 농업환경의 조건을 고려해야 함은 분명하다.[52] 덧붙여, 쿠바는 혁명 이후에도 설탕 생산을 위해 대규모 영농방식에 의존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비록 혁명 초기, 설탕에 의존했던 단일경작을 탈피하려 했지만, 실패로 귀결되자 설탕산업으로 다시 복귀하게 된다.[53] 이러한 설탕산업에 기초한 대규모 영농시스템은 소련의 붕괴로 원조경제가 중단될 때까지 지속된다.[54]
쿠바와 북한의 토지개혁은 프랑스가 19세기 내내 지난한 변화를 통해서야 농민적 토지 소유를 실현했던 것에 비해 단기간에 이뤄졌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는 북한과 쿠바 모두 토지 개혁과 혁명 이후 반대세력들이 국외로의 탈출을 감행했다는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55] 왜냐하면, 쿠바에게는 미국으로의 망명이, 북한에게는 남한이라는 선택지가 토지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이 자의든 타의든 이주할 계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유상매수를 실시하면서 지주계급의 자본가로의 전환을 모색했던 동유럽의 사례와 비교해 봤을 때, 북한과 쿠바는 모두 토지개혁으로 인민의 물적토대를 재분배하는 것에 보다 철저했음을 보여준다.[56] 이는 후일 동유럽과는 달리 북한과 쿠바가 오랫동안 체제를 유지하게 됐던 물질적 토대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57]
4) 쿠바와 북한에게 미국이라는 존재
혁명을 통해 탄생한 쿠바도 여타의 많은 국가들처럼 다양한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58] 90년대의 소위 ‘특별한 시기’ 이전에도 문제는 있었겠지만, 고통스런 경제적 봉쇄와 원조경제 중단으로 파국에 처했던 특별한 시기를 거친 후, 보다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는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를 통해, 쿠바가 자립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던 새로운 현실에 맞서 고군분투를 벌여온 과정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진정 되물어야 할 질문은 이런 고통스런 조건들을 전제하는 것이 합리적인가에 있다. 냉전은 끝났고, 쿠바가 더 이상 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미국 자체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제봉쇄 해제나 적극적인 관계 복원의 노력을 벌이지 않았던 미국의 태도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59] 오바마의 대쿠바 화해 분위기는 트럼프의 집권과 더불어 중단되었다. 아르헨티나의 대문호 보르헤스의 단편소설집 ‘불한당들의 세계사’라는 제목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미국의 불합리하다 못해, 파렴치한 외교정책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미국 남부에 엄청난 재난이 닥쳤을 때였다. 당시 쿠바는 인도적 차원에서 자국의 의료진 1000명을 구호복구 사업에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60] 그러나 당시 부시 행정부는 이런 쿠바의 제안을 거절했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라 자신했던 미국이 적성국가였던 쿠바로부터의 지원을 거부하는 것이야 이상할 것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재난 수습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쿠바의 제안을 마냥 거부하는 것만이 해결책은 아니었을 것이다. 진정 대재난에 허덕이던 미국 이재민들을 생각했다면,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못할지언정 비난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을 것이다.[61] 더욱이 부시 정권이 상처입은 자존심에 대해 치졸한 방식으로 보복을 가했던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정황이 있었다. 2006년 발표된 ‘쿠바 의료인 임시입국허가 프로그램’에 따르면, 해외에서 일하는 쿠바 의사들의 긴급 망명권을 허용하고 미국 내 입국을 보장하는 정책을 발표했다.[62] 분명 자본과 아메리칸 드림의 유혹에 쿠바 의사들이 흔들렸을 것임은 분명하지만, 실제 선택한 이들의 결말은 미국 정부의 선전만큼 행복한 것도 아니었다. 과연 이런 일련의 사실들이 언론에 의해 제대로 보도되어 왔다고 할 수 있을까? 쿠바와 북한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반세기 가까이 이렇게 대치해 왔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 미국은 쿠바를 안보의 위협이 되는 대상이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국가로서 규정한다. 물론 그 이면에는 59년 쿠바 혁명 이후 미국의 자산이 몰수된 것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과 재미쿠바재단(FNC-A)과 같은 반쿠바 단체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감춰져 있다. 무엇보다, 냉전 해체 이후의 대쿠바 정책은 미국 내부의 정치적 지형에 따라 좌우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모순적인 정책과 불합리한 외교적 자세로 일관하는 미국이 쿠바에 관심을 갖는 때가 있다면, 대통령 선거와 같은 대형 정치적 이벤트에서 이슈를 선점하기 위해서였다.[63] 쿠바와의 전향적 외교적 전환을 이끌었던 오바마가 대쿠바 정책이 실패였음을 인정할 정도로, 쿠바는 미국에게 정상적 국가로 존중 받지 못했다. 미국의 경제봉쇄를 50년 넘게 버티면서, 누적된 숱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점을 드러낸다고 해서 이를 객관적으로 비판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오히려 객관성의 틀에 갇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미국의 존재에 눈감는 것이 불합리해 보인다.
마찬가지로 북한도 미국과의 적대 관계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것과 더불어 근거 없는 이미지들로 덧씌워져 있다. 막강한 군사력, 비이성적이고 공격적인 전시태세는 실제 국방비 예산이나 첨단무기 현황을 비교해 보면 과장된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64] 벼랑 끝 전술에 대한 지난친 폄하도 마찬가지다.[65] 약소국들의 고전적 외교전략이 바로 북한의 방식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무기 판매국이나 확산국가로 보는 시선은 이중적 잣대의 소산일 뿐이다. 미국과 한국의 방위산업은 ‘수출산업’으로 여겨지지만, 북한의 무기판매는 유독 전쟁을 야기하는 불량국가의 이미지가 덧씌워진다는 것을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현대 과학 기술의 정점에 방위산업과 우주항공분야가 있다는 점에서 북한이 비교우위를 가진 기술을 해외로 상품화해 판매하는 것을 특이하게 바라볼 이유가 없다. 더욱이 2008년 부시 행정부 때 북한은 이미 공식적으로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되었다.[66] 이미 2006년 핵실험으로 촉발된 미국의 해상봉쇄로 무기수출 규모는 급감해 있는 상태이다.[67]
특히 북한 인권 문제는 미국이 강력히 제기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의문을 품는 것 자체가 논쟁을 부르는 경향이 있다.[68] 심지어 대표적인 국제인권감시 기구인 유엔인권이사회(UNHRC)의 보고서조차도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근거 없이 비판하기도 한다.[69] 이에 대한 근거로 활용된 국제 식량원조에 대한 실제 상황은 북한 실정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기초로 하고 있다. 이를 분석한 스미스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 정부에 의해 북동부 지역이 구호식량의 배분에서 제외됐다는 주장은, 당시 기금 부족으로 우선순위가 주로 농업가구에 집중됐기 때문에 발생한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70] 이런 왜곡을 통해 식량 배분으로 북한 정권이 사회를 통제하고 있다는 비판을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북동부 지역이 김일성의 주요 지지기반이라는 점과 이 지역 출신들이 북한 정치권에서 강력한 집단을 형성했음을 감안하면 이런 주장들의 신빙성은 더욱 떨어질 수 밖에 없다.[71]
무엇보다 반복적으로 거론되는 주장들 중 하나는 구호식량이 북한의 군부와 엘리트 계층으로 전용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최악의 기근 시기에도 전체 수요량의 80%이상을 자체 생산해 군부에 우선적으로 공급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취약계층에서의 부족이 국제식량원조를 불러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72] 즉, 북한이 경제봉쇄로 식량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체수요의 일부만 부족해도 대규모 기근이 초래될 수 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만일 군부에 식량을 공급하지 않았다면, 선군정치를 표방했던 1990년대 중반에 체제 안정성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라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해석일 것이다. 사실, 국제 식량 원조품이 현금화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며, 북한의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시장체제를 통해 진행된 것이 아니라 식량배급체계의 파열에서 발생했다는 점이다.[73] 이런 왜곡된 이미지들이 과연 미국이라는 존재를 배제한 채 발생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5) 사회복지
오늘날 북한을 어떻게 평가하든지 간에 소련의 대외원조가 급감하기 전까지 사회주의 국가로서 북한의 일상적 복지수준은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다.[74]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이 기본적으로 모든 인민에게 적용됨으로써 식민지 시기의 기대수명이나 인구 1만명 당 의사 수, 전염병 예방과 같은 지표에서 괄목한 만한 성취를 보였기 때문이다. 2018년 북한에서 발간된 의학잡지에도 나와 있듯이, “사회주의의학은 본질에 있어서 예방의학이며 병을 미리 막고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 증진시키는 것은 사회주의의학의 기본임무이다.”라고 제시되어 있다.[75] 첨단 의술로 불치병을 치료하고, 유전자 기술을 활용해 암 치료에 매진하는 남한의 의료가 추구하는 바와는 분명한 차이가 느껴진다. 발병을 하고 난 뒤의 치료에 집중할 것인가와 예방의학과 공중보건에 집중할 것인가의 문제는 의료시스템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의료서비스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의 차이가 더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1989년에 들어서야 전 국민 건강보험이 적용된 남한의 경우, 여전히 민간보험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보장성도 OECD국가들의 평균에 한참 못 미쳐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76]
의료와 교육 및 주거를 국가가 무상으로 공급해야 한다는 철학이 사회주의 북한에서는 당연하게 추진되어야 할 목표지만, 남한 사회에서는 산업사회의 성장이 정체기에 들어선 오늘날에서야 중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90년대 이후 북한의 사회보장제도가 붕괴된 것을 기준으로 남북한을 비교 한다면, 의미 없는 논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붕괴가 내부적 비효율성만큼이나 경제봉쇄와 원조경제의 중단과 같은 외부적 변수에 기인한 측면도 크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90년 이전까지 각종 사회보장 지표들의 추세는 북한이 꾸준한 성과를 내왔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77] 특히 북한의 의료제도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특징은 1969년부터 시행된 시군 별 의사담당구역제와 민간요법을 적극 도입한 동서의학 협진을 들 수 있다.[78]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 2012년까지 식량원조의 부족과 부정기적인 공급에도 불구하고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의 통계들은 원조를 요하는 긴급상황은 해소됐음을 보여준다.[79] 예를 들어, 기대수명의 경우 1994년 66세를 시작으로 꾸준한 증가세를 확인할 수 있으며, 2016년 기준 72세였다.[80] 또한 유엔아동기금(UNICEF)에 따르면, 2016년을 기준으로 북한의 아동실태는 인도와 인도네시아보다 높은 조사대상국 202개국 중 88위였다.[81] 무엇보다 1996년에서 2016년까지의 추세는 모든 지표에서 현저한 개선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실제적 자료를 토대로 비춰볼 때, 북한도 서서히 고난의 시기 이전 수준으로 삶의 질이 회복되어 가는 과정임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만일, 일련의 국제기구들의 공식 통계가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부족하다고 의심된다면, 이에 준하는 반박자료를 제시해야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남북한 교류의 확대가 점차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북한에 대해 90년대 관점으로 남한의 인식이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쿠바의 경우, 사회복지제도의 측면에서 국제기구들과 선진국들마저 경탄할 만한 사례를 제공한다. 쿠바의 복지제도에 대한 다양한 저서들은 쿠바 의료제도를 비롯한 사회보장 제도가 ‘특별한 시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새로운 도약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82] 앞서 북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쿠바의 의료제도에 초점을 맞춰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혁명 직후, 쿠바는1962년 전문 과목을 갖춘 종합진료소의 기능을 사회복지제도와 결합시켰으며, 1974년 지역사회기반 의료모델과 종합진료소의 교육연구기능을 강화했다.[83] 또한, 1, 2차 의료간 서비스 질의 차이가 문제시 되자, 1984년 가족 주치의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생활습관을 비롯한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의 개선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84]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지역사회 공동체에 의료인력이 성공적으로 융합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는 의료수가에 대한 투쟁을 빌미로 환자에 대한 진료를 거부하겠다는 남한의 의사들과는 다른 철학에 토대를 둔 의료체제라 평가할 수 있다. 쿠바에서 의사는 단순히 질병을 치료하는 기술인력이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건강과 관련된 제반 상황을 관리하면서 동시에 참여하는 공동체 일원으로서 존재한다. 현대 질병의 상당수가 만성질환과 전염병에서 비롯되는 상황에서, 지역사회에 기초한 1차 의료에 초점을 맞춘 쿠바의 모델은 남한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특별한 시기’ 쿠바는 의료인력을 수출한다는 전대미문의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된다. 2005년 기준, 68개국에서 의료원조와 지원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1999년에는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ELAM)을 설립해, 쿠바의 의료철학을 라틴아메리카 지역 전체에 전파하는 구심점으로 만들었다.[85] 미국의 봉쇄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이러한 대외적 발상의 전환은 라틴아메리카 세계와의 연대야말로 결국 쿠바가 고립되지 않으면서 공존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GDP의 급격한 성장에 비해, 초라한 남한의 대외원조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쿠바의 대외 원조를 추진한 연대의 정신은 70년대 북한의 제3세계 연대의 기치와 함께 남한 사회가 배워야 할 외교적 자세가 될 것이다.
3. 맺음말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북한과 쿠바를 연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료를 조사하고 해석하는 작업에 그칠 수 없음을 깨닫는 되었다. 그것은 남한 사회에 뿌리깊게 자리한 거대한 편견과 맞서면서, 동시에 내 안에 고착화된 타성적 사유를 극복하는 것이 선행될 때 가능할 것이라 여겨진다. 최근 남북한의 전면적 교류 분위기에 들떠 경제적 타산에 함몰되기는 쉬워도, 정작 북한에 대해 아는 것이 신기루에 불과하다면 만남의 기쁨이 실망으로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북한과 쿠바와 같은 현존하는 국가들의 반 세기가 넘는 역사를 몇 장의 글줄로 요약하거나 섣부른 해석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다. 더구나, 제도교육과 3년 반이라는 병역을 통해 북한과 사회주의에 대한 선입견에 고착화된 남한에서 보낸 시간들이 ‘혁명’이나 ‘인민’, ‘사회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일상적으로 내뱉는 것에 자기검열의 습관에 은연 중에 빠져 있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사회적 연대’, ‘과정으로서의 혁명’, ‘일상에서의 혁명’처럼 어디서나 마주치게 되는 혁명에 대한 담론들 없이는 존재하기가 불가능한 사회가 우리 곁에 오랜 세월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은 충격이기도 했다. 이렇게 절대적인 것이라 인식되어 극복할 수 없게 느껴지는 북한과 쿠바의 이질성을 재검토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 안의 타성을 혁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2004년 4월 초쯤 쿠바 아바나의 말레꽁 해변을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렀던 시절을 떠올려 본다. 그렇게 한 달을 쿠바에서 보내면서 내가 체험했던 미시적 일상과 발제에서 정신 없이 훑었던 거시적인 담론들이 얼마나 일치했었는지를 되묻게 된다. 앞서 스미스가 북한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인민의 일상과 체제 선전의 문구와는 괴리가 있기 마련이다. 이를 테면, 거리에서 관광객 신분으로 1달러 지폐를 자유롭게 썼던 그 시절 쿠바는 달러 상용금지였다는 사실을 이번 연구를 통해 알게 됐다. 법과 제도가 일상생활과 불일치 하는 현상은 사실 어디에서나 흔한 것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연구자로서는 오히려 외면하면서 고정된 사고의 틀 속에 갇히게 되는 모순과 마주하게 된다. 책에서 마주했다면 혼란스러웠을 사회주의 체제의 거대했던 그 불일치가 실제로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웠던 쿠바에서의 불법체류 한 달을 떠올려 본다. 그 해 6개월을 쿠바를 포함해 중남미를 배낭을 메고 돌아다니면서, 경제 봉쇄된 쿠바를 위한 라틴아메리카 인민들의 거리공연과 자주 마주쳤다. 아마 그 때가 연대란 무엇인지를 조금 깨닫게 된 시절이었을 것이다.
쿠바 인민들이 혁명에 대해 갖는 모순적 느낌들을 가까이에서 그들의 목소리로 들었던 터라, 각종 논문과 책들에서 어느 한 쪽을 강조하는지를 파악하기는 수월했다. 그렇다고 나의 관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그러나 동등하게 공과를 늘어놓고, 객관적인 평가를 한다는 주장에도 설득되기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북한과 쿠바가 마치 90년대에 그 파국을 원했던 것처럼 전제한 채로 서술했던 숱한 연구들에서 탈출구는 개혁과 개방만이 유일한 듯 보인다. 쿠바나 북한 인민 누구도 ‘고난하고도 특별한’ 그 시기를 겪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한 체제가 반 세기가 넘게 지속되는 데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적 선악구도에 젖어 붕괴를 은밀히 암시하면서 겉으로는 객관적인 듯한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학문적으로 나태함을 넘어 도덕적으로 불의한 일을 공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 보수 정권들에서 남북 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북한체제 붕괴론을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전제하며 발표된 논문들을 보면서, 남북한이 만난다 해도 제대로 이해될 것인지 의문이 들었을 때가 많았다.
북한과 쿠바의 고통스런 시기들을 전후로 살펴보게 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결국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물음이다. 통념과는 달리, 북한의 김정일 체제는 김일성 시대의 국가주의가 쇠퇴하고, 인민의 아래로부터의 역동성이 분출하게 된 시대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카스트로의 우려에서도 드러나듯이 혁명을 위협하는 내부적 동요가 새로운 사회변동 가능성을 낳고 있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국가주의라는 틀 속에서 인민의 행동이 규정된 사회가 해체되면서 이들 국가의 인민들은 모두 ‘시장경제’라는 신기루를 향해 뛰어들고 있는 것일까? 탈북자들의 상당수가 남한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북한의 대안이 남한으로 획일화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한편, 관광산업의 침투로 자본주의에 물들어 가는 쿠바도 혁명의 내부 붕괴 가능성을 고민했었다. 파편화된 개인을 선호하는 자본주의는 이들을 ‘공정한 시장’의 참여자로서 치켜세우겠지만, 그것이 바로 또 하나의 구속과 속박이 될 수도 있다. 스피노자는 ‘제국 속의 제국’을 말하면서, 필연적인 삶의 조건을 무시한 채 무제한적인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개념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했었다. 인간에게 필연적인 조건인 자연적인 환경을 포함해 사람들의 연결망 즉, 공동체를 어떻게 새롭게 구축할 것이냐의 문제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이는 경제적 탐욕에 젖어 있는지도 모른 채, 사회적 연대는 노동자에게만 전유된 것이라 착각하는 남한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북한과 쿠바의 극심한 경제적 궁핍 상황을 전후로 어떻게 공동체가 재구축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향후 별도의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종래의 공동체의 개념으로는 분석이 쉽지 않은 북한과 쿠바의 공동체 문화에 대한 연구가 향후 남북한의 이질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공동체들이 일방적인 수용과 포획의 길을 넘어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
요컨대, 우리는 북한과 쿠바가 혹독하게 겪었던 빈곤과 재난의 경험을 통해 자원고갈 시대의 저성장 속에서 지속 가능한 사회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석유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와 자연재해가 빈발하는 상황에서도 버텨낼 수 있다는 것은 우연히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북한과 쿠바의 경험이 저성장 복지국가의 단초를 제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때 스러져 간 두 국가의 인민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두 국가의 인민 누구도 이 경험을 원치 않았지만, 할 수 밖에 없었고, 아마도 그 궁핍 속에서 새로운 생존의 기술을 전세계 인류에게 돌려 주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 소통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을까?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라는 직업도 돈벌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의사들을 만들어낸 남한 사회가 스스로 바뀔 수 있을까? 의사가 마을 공동체와 한 몸이 되어 사회적 연대 속에서 건강을 실천하는 세계를 직접 만난 나 자신도 그런 세계가 실제로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아직은 회의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결국 한 두 번의 접촉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될 수 있는 공동체의 연대 속에서 변화를 느껴야 한다. 통일이든 남북교류든 남한이 의료제도를 비롯한 사회복지 즉, 공동체의 삶에 대한 새로운 틀을 고민할 때, 남한은 북한이라는 또 다른 세계와 부단히 마주침으로써 혁명을 겪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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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광서(2015), 380쪽
[2] 김성보(2004), 170-173쪽, 기광서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외부 문서에 대한 편중된 시각을 지양한 연구로, 소련과 미국의 자료들을 활용하되, 북한사에 대한 내인론과 외인론의 융합을 시도했다.
[3] 북한 자료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연구로, 한성훈(2013)의 논문을 들 수 있다. 북한 사회과학원 민속학 연구소의 지역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50-60년대 사회주의 근대성이 북한에서 어떤 문화적 양상을 띠었는지를 분석했다.
[4] 기광서(2015), 392-393쪽. 국제정치학계에까지 만연한 소련의 하수인이라는 이미지와 소련의 존재에 대해 치밀한 접근을 시도하지 않는 진보사학계 모두를 비판하고 있다. 두 관점의 극복이 북한사 연구의 초석이라고 본다.
[5] 위의 논문, 398쪽.
[6] 김연철(2002), 234-236쪽.
[7] 신석호(2008), 272-274쪽; 신석호(2008-1), 97쪽, 쿠바와 북한의 경제위기 이전의 경제정책을 비교하기 위한 분석 틀로 각각 메사-라고와 양문수의 연구결과를 그대로 수용하는데 각 연구의 결과들에 대한 비판적 해석이 부재함으로써 양자간의 기계적 비교에 그친 한계를 갖는다.
[8] 김연철(2013), 47-48쪽. 쿠바와 북한의 경제개혁 과정에서 군부의 역할 변화에 주목하나, 쿠바가 북한의 모델로서 제시되는 측면은 공통적이다.
[9] 오거스트(2013), 220-221쪽.
[10] 이경화(2015), 843-844쪽.
[11] 최자영(2018), 259-267쪽, 고대 그리스 민주정 연구자인 저자는 근대적 통념과는 달리 민주주의의 기원이라 여겨지는 폴리스 사회는 혈연과 지연과 같은 전통 부족 사회의 전통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정치를 공적 영역에서의 별개의 행위로 파악하는 것은 고대에 대한 근대적 신화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근대 국가의 정치권력에 준하는 체제가 존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 공법보다는 개인 간의 민법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사실상 공법과 사법 간의 구분 또한 명확하지 않았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2] 오거스트(2013), 30쪽.
[13] 위의 책, 31-32쪽.
[14] 위의 책, 34-35쪽, 쿠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들의 헌법에서 등장하는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정작 미국의 헌법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한다.
[15] 최자영(2018), 91-98쪽, 오거스트와 같은 맥락에서 남한의 대의민주정치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고대 그리스에서 절차로서의 민주정치제도인 국민소환, 국민발안, 국민투표권이 달성된 정도를 높이 평가한다.
[16] 오거스트(2013), 37-40쪽, 오거스트는 이러한 미국중심주의가 어떻게 16세기 이후 유럽중심주의가 등장함으로써 진화함으로써, 북반구 중심의 앵글로색슨-게르만-백인 인종 우월주의를 내포한 사회과학이 야기한 해악들을 지적한다. 무엇보다 이런 폐단들이 너무나 은밀하게 작동되고 있다고 본다.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에서 연구했던 이들이 사미르 아민, 이매뉴얼 월러스틴, 아니발 키하노와 같은 학자들이었다고 평가한다
[17] 위의 책, 39쪽. 라틴아메리카 연구가 미국의 대외정책과 긴밀한 연관이 있으며, 그 정점에는 쿠바 혁명이 있음을 지적한 몬트리올 대학의 모린 교수의 견해를 인용하고 있다.
[18] 최자영(2018), 9-12, 민주정치를 ‘절차’와 ‘내용’이라는 축으로 나누면서, 누가 정치적 의사 결정의 주체가 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남한의 촛불 혁명 이후의 정치적 방향을 제시한다.
[19] 오거스트(2013), 191-194쪽.
[20] 위의 책, 196쪽.
[21] 위의 책, 197쪽, 오늘날 쿠바의 선거제도에 미국 제도언론의 아전인수식 해석을 비판한다.
[22] 김성보(2004), 212쪽, 선거가 제대로 치러지지 못한 운종면의 경우 지주세력이 강력했다는 것은 빈농계층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동기를 제약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개별 지역의 사회적 조건이 인민의 참여를 제약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23] 위의 논문, 215-216쪽.
[24] Wright(2009), 54쪽.
[25] 오거스트(2013), 41쪽, 특히 쿠바 철학연구소 연구원 리오스의 ‘탐구(busqueda)의 혁명’이라는 표현은 지속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가는 혁명을 적절히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26] 깡귀엠(1972)/여인석 역(1996), 307-312쪽, 유전적 정보 이상으로 인한 생명체의 실수를 부정적 가치로 고착화하지 말 것을 지적한다. 실수는 생명체에게 본질적이고 불가피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27] 오거스트(2013), 42쪽.
[28] Perez-Lopez(1994), pp. 239-244.
[29] Perez-Lopez(1994), pp. 245-259.
[30] Abrahams(2011), 174-177,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쿠바가 마주하게 된 규제가 새롭게 강화되는 중인 세계 시장의 흐름을 분석하고 있다.
[31] 촘스키(2011), 26쪽.
[32] 위의 책, 68쪽, 50년대 소련과 코민테른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무장혁명을 지지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체 게바라가 사회주의의 도덕적 정신적 가치들을 강조하면서 소련식 경제적 사회주의를 비판했음에 주목한다. .
[33] 위의 책, 27쪽.
[34] 위의 책, 26쪽, 순수한 이론으로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현실에 존재할 것이라는 환상을 비판한다.
[35] 위의 책, 28-29쪽.
[36] 촘스키(2011), 31-32쪽, 저자는 여론조사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간의 비교를 통해 의미 있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이하 논의는 조사결과의 통계를 바탕으로 한다.
[37] 우드(2002)/정이근 역(2002), 15-25쪽, 막시즘을 연구하는 이들마저도 시장이라는 환상에 젖어 자본주의에 대한 통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자본주의는 자연발생적인 것도 아니며, 역사적으로 도달할 최종적 귀결점이 될 수도 없다고 본다.
[38] 촘스키(2011), 32쪽.
[39] 네그리, 하트(2001), 186-189쪽, 70년대 베트남을 비롯한 아프리카의 반제국주의 저항 운동이 낳은 민족해방된 독립국가를 일종의 독이 든 선물로서 규정한다. 즉, 제국주의에서는 벗어났지만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근대화에 포획된 상황으로 본다. 결국 근대화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자본에 포획된 세계상을 피력한다.
[40] Amstrong(2013), pp.268, 1984년부터 이미 남한에서부터 대우와 같은 재벌들이 동구권과 소련으로의 진출을 모색해 80년대 후반에는 헝가리와 최초로 수교를 맺고 90년대 초에는 소련까지 아우르게 된다. 이는 70년대 석유파동이 낳은 경제 침체기에 새롭게 시장을 개척할 필요가 있었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41] 포스트 모더니즘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분명한 것은 대부분 유럽 대륙 철학 특히 프랑스 철학을 배경으로 했던 이 용어가 프랑스가 아니라, 영미권의 비평가들에 의해 규정됐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라투르 같은 과학철학자는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근대성’조차 의심해야 한다고 본다.
[42] 스미스(2015), 355쪽. 선군정치 시기에 접어들면서 정치적 고착성의 증대와는 달리, 제한적이나마 자유롭게 인민에게 개방된 경제저 공간이 북한에서 생성되었음을 시사한다.
[43] 위의 책, 356쪽.
[44] 위의 책, 357-358쪽; 세계은행의 2017년 자료 참조, https://data.worldbank.org/indicator/SP.DYN.LE00.IN(2018.12.07 검색)
[45] 위의 책, 358-360쪽.
[46] Agulhon(1973)/Lloyd(1983), pp.7-8.
[47] 김성보(2000), 15-41, 지주제와 근대적 농민적 토지소유가 세계사적 문제임을 지적하면서 북한 경제구조 특히 농업 구조의 변화를 구한말 다양한 토지개혁론의 연장선에서 바라본다.
[48] 촘스키(2011), 49-54쪽, 77-80쪽.
[49] 김성보(2000), 151-155쪽. 1정보는 약 1헥타아르
[50] 위의 책, 195-199쪽.
[51] 촘스키(2011), 87쪽; 김연철(2002), 123쪽. 5카바예리아=67헥타아르=약 67 정보; 김성보(2000), 196쪽, 개별 국가의 차이는 있지만, 동유럽의 경우 50헥타아르를 토지 수용의 기준으로 했다.
[52] 김성보(2000), 145-150쪽, 농업의 영세성으로 북한의 초기 토지 개혁이 자작농 육성에 초점을 맞췄음을 보여준다.
[53] 박한울(2012), 92쪽, 세계은행의 1960-2012년까지의 설탕가격 추이에 따르면, 1960-1963년 사이에 최저가격을 기록했다는 것이 실패의 원인으로 제시될 수 있다.
[54] 김연철(2002), 124-125쪽; Wright(2009), pp. 53-54, 혁명 이후 농업의 산업화 필요성으로 대규모 기계화와 화학비료 의존성이 심화되어감을 지적한다.
[55] 김성보(2000), 156-159쪽; 촘스키(2011), 141쪽.
[56] 김성보(2000), 195-199쪽, 무상몰수를 실시한 유고, 알바니아, 루마니아의 경우, 전근대적 지주제 경영이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57] 위의 책, 284-285쪽, 동유럽에서 자본주의 요소들이 경제구조 내에서 계급갈등의 문제점을 야기하게 됨을 지적한다.
[58] 김기현(2014), 284쪽. 90년대 이후 사회주의적 비효율성, 불법 행위 증대, 도덕적 질서 붕괴들을 들고 있다.
[59] 위의 책, 223-224쪽. 각주2에서 1998년 미국방성의 보고서에서 쿠바가 미국의 안보에 실질적 위협이 아님을 인정했으며, 이미 90년부터 미의회에서 그런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본다.
[60] http://edition.cnn.com/2005/WORLD/americas/09/05/katrina.cuba/ CNN보도에 따르면, 카스트로는 국내 방송 연설에서 태풍 피해를 입은 미국에 의료진과 구호품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2018.12.16 검색)
[61] http://www.nbcnews.com/id/9311876/ns/us_news-katrina_the_long_road_back/t/katrina-aid-cuba-no-thanks-says-us/#.XBZLIYszbIU, NBC보도.(2018.12.16 검색)
[62] 김기현(2014), 113쪽.
[63] 위의 책, 226-243쪽. 민주당의 클린턴이든, 공화당의 부시든 미국의 양당제는 쿠바를 독립국가로서 정당한 외교의 상대국으로 인정했던 적이 없었다.
[64] 스미스(2015), 45쪽, 2009년 기준 남한의 방위비는 북한의 4배이다.
[65] 스미스(2015), 46쪽.
[66]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2016), Country report on terrorism 2016, p. 79, 2008년 이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은 빠져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67] 스미스(2015), 48쪽
[68] 스미스(2015), 351쪽, 북한 인권 문제가 정치화할 경우, 양극단의 견해만이 강조되어 제대로 된 논의가 되지 않음을 지적한다.
[69] Smith(2014), pp. 132-138, 유엔 인권이사회 (UNHRC)의 2013년 보고서가 어떻게 왜곡된 통념에 기초해 확대해석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유엔 산하 기구들 사이에 북한에 대한 인식 수준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해당 보고서는 UNHRC 22 session, A.HRC.22.57 참조.
[70] 스미스(2015), 50-51쪽, 98년 이후 기금 사정이 좋아져서 현재는 북동부를 최우선 순위로 대상으로 삼았다.
[71] 위의 책, 52쪽.
[72] 위의 책, 52-53쪽, 북한의 식량 배급체계가 평양의 계획과 달리 지방에서 실제로는 노동력의 핵심인력 위주로 배분됨으로써 취약계층인 임산부나 수유기 여성과 아이들이 후순위로 밀렸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이 과정에서 관료들의 전용에 의한 암시장 거래의 가능성도 지적한다.
[73] 스미스(2015), 53-54쪽. 구호 식량의 현금화는 식량 원조에서 드문 일이 아니며, 북한의 경우 협정 위반의 소지는 있어도 반인도적 범죄로 분류되는 것은 지나치다고 본다.
[74] 위의 책, 177-179
[75] 과학백과사전출판사(2018), 3쪽.
[76] 신영석(2017), 6-7쪽.
[77] 김병연(2018), 196쪽.
[78] 위의 책, 197쪽.
[79] 스미스(2015), 55-56쪽, 국제기구들의 기대수명과 영양실태 조사 자료에 기초해 북한의 식량수급이 긴급한 단계를 지났음을 지적한다.
[80] 세계은행의 2017년 자료 참조, https://data.worldbank.org/indicator/SP.DYN.LE00.IN(2018.12.07 검색)
[81] 유니세프 통계 참조, https://data.unicef.org/resources/state-worlds-children-2017-statistical-tables/
[82] 테일러(2009), 156-171쪽.
[83] 화이트포드(2008), 59-61쪽.
[84] 위의 책, 61-65쪽.
[85] 테일러(2009), 158쪽, 2004년 88명의 미국의 저소득층 학생들까지 전액장학금을 받으며 배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