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학 시집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보도자료
권순학 시인은 대전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제어계측공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동경공업대학에서 시스템과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012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바탕화면』, 『오래된 오늘』, 『너의 안녕부터 묻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와 저서로 『수치해석기초』가 있다. 현재 영남대학교 기계IT대학 전기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권순학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인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는 자연이 파괴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무너진 현대사회에서 꿈과 희망 없이 살아가는 실존적 고뇌가 가장 처절하고 쓸쓸하게 배어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꿈과 희망도 버려야 하고, 야만적인 후회도 버려야 하고, 혼자 잠 자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출근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 인간의 사회적 토대가 다 무너진 25시, 어떤 구원의 손길도 올 수 없는 25시, 권순학 시인은 이 25시를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견디며, 하늘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서정시를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갓 나온 시간을 담금질 뜨개질하는 얼굴아/ 한 모금도 안 되는 것이지만/ 표정을 지워 그리고 버텨,//후회를 지워/ 아무렇지도 않게 미리,/ 그리고 새로 그려 표정을// 누구나 소원을 빌지/ 바람 속 나뭇잎처럼 환호할 그날을// 하얀 정오가 자신을 밟고 울고 있는 것처럼/ 예리한 후회를 버려, 그 뿌리가 무엇이든// 떠나는 저 정오도/ 멈추거나 감추고 싶은 것이 있을 거야 분명/ 그 시작과 끝에 우리가 있을 것 같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오늘도 혼자 잠 깨어/ 혼자 밥 먹고 출근하여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어/ 마치 외딴 고시원 구석방 원생처럼// 보통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티는 거야// 갓 나온 시간을 담금질 뜨개질하는 얼굴아/ 어디선가 치고 있는 회오리/ 후회부터 할까/ 기도를 할까 무엇을 할까 생각해 봐// 가엾은 기도 외에는 미리 버려/ 그리고 야만적 후회도// 그렇다고 끈 떨어진 슬리퍼나/ 짝 잃은 신발은 되지 말아// 막다른 골목에 닿은 바람처럼/ 무지갯빛 끈도 놓을 줄 알아// 그럼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전문
이 시는 어떤 ‘얼굴’을 다룬다. 모든 얼굴에는 다양한 ‘표정’이 있다. 얼굴은 “소원을 빌”기도 하고 “기도를” 하기도 한다. 인간의 얼굴은 ‘시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후회’를 하고 때로는 ‘혼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이유도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권순학은 독자들에게 과거의 표정을 지우고 버틸 것을 주문한다. 그에 의하면 사람들은 새로운 표정을 그려야 한다. 시인은 또한 후회를 지우거나 버릴 것을 제안한다. 지나간 과거의 아쉬움에 매몰되지 말고 눈앞의 현재를 붙잡으라는 메시지는 7연에서 “보통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버티는 거야”라는 진술로 구체화한다. 권순학에 따르면 삶은 그저 버티고 견디며 인내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흘러갈 뿐이다.
새가 보이지 않는다/ 울음이 사라졌다/ 참새도 비둘기도 까치 까마귀까지/ 모두 사라졌다// 이제 아침은 자명종 몫이고/ 새 울음소리는 추억이 되었다// 도시는 나무를 버렸다/ 나뭇잎과 가지 사이사이를 차지한/ 새를 버렸다/ 울음을 버렸다// 들어선 것은/ 밤새 꺼지지 않는 붉은 태양들// 새에겐 허용된 공간이 허공뿐/ 그곳을 찾아 새들은 떠났다// 울음도 떠났다/ 가끔씩 화석 같은 메아리만 들린다// 긴급회의가 이루어졌다/ 동물원에 새를 모시고 오고/ 박물관에 박제를 모셔 두었다/ 그리고 검은 스피커도 숨겨 두었다// 사라진 새들은 그리고 울음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신문과 방송은 난리 법석이지만/ 떠난 새는 깜깜 무소식이다// 빈 칸에는/ 정중동 로또 당첨번호만 남아 있다
―「울음이 사라졌다」 전문
‘부재(不在)’ 또는 ‘없음’에 집중하는 시이다. 눈 밝은 독자라면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다”, “추억이 되었다”, “버렸다”, “허공뿐”, “떠났다”, “화석 같은”, “깜깜 무소식이다” 등에 유의할 일이다. 시인이 지금, 여기에서 주목하는 대상들은 ‘새’, ‘나무’ 등이다. ‘도시’에서 찾기 힘든 새와 나무는 자연을 대표한다. 권순학은 ‘자명종’, ‘붉은 태양들’, ‘로또 당첨번호’ 등이 지배하는 도시에서의 삶을 비판하고 새와 나무가 상징하는 자연을 지향한다. 그의 자연 지향은 부재의 속성을 담은 어휘의 집적으로 극대화된다. 동일하거나 유사한 의미의 단어를 한데 모아서 반복함으로써 시인은 언어의 힘을 확산하고 읽는 이들에게서 설득력을 얻는다.
----권순학 시집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양장, 도서출판 지혜, 값 1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