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한 야경*
김 정 원
땅이 얼고 찬바람 부는 저녁
광주 북구 일곡동 한길에서
맨손으로 생선을 파는 할머니에게
분홍빛 장갑을 벗어주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아이
— 애지사화집, 『굴뚝꽃』에서
김정원│전남 담양 출생│2006년 『애지』로 등단│시집 『줄탁』, 『거룩한 바보』, 『환대』, 『국수는 내가 살게』│수주문학상 등 수상│한국작가회의 회원│한빛고 교사│이메일 moowi21@hanmail.net
무명씨의 귀환
박 은 주
예상치 못한 버그로 무명씨가 태어납니다
투서 한 장 보내지 않고 마감하는 하루
내 이름을 듣는 건 그림자 떼어내기보다 어렵습니다
죽었다 다시 살아나 흔들림만으로 당신 곁을 떠돕니다
신호가 오지 않아도 진동을 느끼는 당신의 눈꺼풀
당신이 찾지 않으면 나는 안전합니다,
덧칠되고 일그러지며 나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 되고
케이블을 돌고나면 다른 사람이 됩니다
삭제되지 못한 여기와 지금이 헤매는 공간
구경꾼으로 남는 이번 생의 임무를 잘 해내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이름에 묻혀 무명입니다
살아있는 나를 모르니
다른 이름도 버릴 시간입니다
— 애지사화집, 『굴뚝꽃』에서
박은주│2016년 『애지』로 등단│시집 『방아쇠를 당기는 아침』│한남대학교 사회문화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이메일 ending_2001@naver.comt
미더덕
남 상 진
너는 눈물 한 방울로 태어났다
보잘것없는 난생의 몸으로
막막한 물속 세상에서
파도를 견디며 살아내기란
눈물을 제 살 속으로 말아 넣는 일
짜디 짠 바닷물을 들이마시고
삼키지도 뱉어내지도 못하고 연명하던 시절
깊은 수심의 물속을 견디는 일은
스스로 빈틈을 여며 단단해지는 것
태풍이 몰려와도
바위의 멱살을 부여잡고 버티던 하루가
물속에서 눈물 한 방울로 맺혔을까?
누군들 제안에 눈물 자루 하나 키우며 살지 않을까
아름답고 붉은 석양은
늘
수면 위만 비추는 멀고 먼 그림 속 세상
밀려오는 세파에 온몸으로 맞서고
일렁이는 너울에 흔들리며 키워온
단단하고 둥근 집
껍질 한 꺼풀 벗겨
입안에 넣고 깨물면
툭!
숙성된 향기가
온몸으로 번지는 너는
깊이 발효된 맛으로
오래된 봉인을 푼다
— 애지사화집, 『굴뚝꽃』에서
남상진│2014년 『애지』로 등단│시집 『현관문은 블랙홀이다』, 『철의 시대 이야기』
블랙 스완
최 혜 옥
네온 길을 걷다가 색깔을 잃었어
속도를 따라잡다 말을 잃었지
두 팔 어긋 뻗어 부호를 만들고
눈맞춤 떼지 않고 신호를 보냈지만
아무도 믿지를 않아
사랑은
할 때마다 매번 첫사랑
그래서 늘 어리석지
세기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뜻밖의 일, 블랙 스완
어둠이 쏟아지는 불꽃을 삼키며
하얗게 웃네
날개를 접고 접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가 아니야
눈을 감기 위해 웃지
빛에 탄 말들이 검은 깃털로 나부끼고
목이 쉬도록 나팔을 불어도 듣지를 않아
통념이 우거진 콘크리트 밀림 속
회색코뿔소는 다시 덩치를 키우네
아니어도 아닌 게 아닌
블랙 스완, 세기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사랑은
할 때마다 매번 첫사랑
또 다시 눈이 멀지
— 애지사화집, 『굴뚝꽃』에서
최혜옥│충남 보령 출생│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2018년 『애지』로 등단│시집 『왼손의 애가』│이메일 whatdo12@naver.com
쑥
박 성 진
쑥이 돋았다
논두렁도 개울가도 산비탈도 아닌
히로시마 평화공원
원자폭탄 떨어진 자리에 한 잎 두 잎 돋았다
잿더미가 되어버린 시체 위며 허물어버린 집
심지어 불타버린 고목나무 뿌리 사이에서도
푸른 잎으로 쑥쑥
돋아났다
그는 지금 봄을 기다리는 중일까
한국병원 304호 중환자실,
링거를 꽂은 채 잠든 사내
바짝 야위었다
방사능처럼 퍼져나간 암세포로
근육도 피부도 조직도 궤사 상태란다
손 끝으로 툭
날아가버릴 듯 위태로운 몸을 보며
그이 몸속 어딘가에
쑥 한 포기
몰래 가져다 심어주고 싶은 날
창밖을 서성이던 달빛 몇 줌
사내의 이마를 조용히 핥고 지나간다
날이 새면
사내의 몸은 논두렁이 될까 개울이 될까
쑥내음 가득한 산비탈이 될까
황폐해진 저곳에
여린 새순들이 한 잎 두 잎 돋아나진 않을까
겨울이 지나갈 듯 말 듯 위태로운
2월의 마지막 밤이었다
— 애지사화집, 『굴뚝꽃』에서
박성진│광주 출생│2013년 『애지』로 등단│이메일 yourdream@silwel.or.kr
두고두고
조 옥 엽
아침이슬 방울져 내리는 숲길을 천천히 걷는데
갑작스레 미묘한 기류가 뛰어들더니 내 코끝에서 너울거렸습니다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니 놀랍게도 바로 두어 발쯤 떨어진 풀숲에
여리여리한 아기 고라니 한 마리가 서 있었습니다
내가 깜짝 놀라 움찔하는 순간 저도 소스라쳐 출렁, 동공에 파도가 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몸을 날려 섬광처럼 사라져 버렸지요
기적 같은 찰나의 만남
뜻밖의 조우에 부르르 떨며 전율하는 내 혼
드물게 아주 드물게
아니, 내 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이 기막힌 행운을
이 불꽃 같은 순간을
나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아니 말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아기 고라니와 나 둘이서만 단둘이서만 간직하기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천년의 시간이 흐르고 만년의 시간이 올 때까지 두고두고 두고두고
— 애지사화집, 『굴뚝꽃』에서
조옥엽│2010년 『애지』로 등단│시집 『지하의 문사』│이메일 chookyup@hanmail.net
붉은 맨드라미 아래
유 계 자
사랑니에서 통증이 왔다
의자는 스스로 나를 눕힌다
반사경을 쓴 의사가 차가운 치경으로 혀를 누르자 눈부신 조명이 입안을 환히 밝힌다
사랑이 읽히고 있다
붉은 맨드라미 아래서 한 사람을 기다리다 맨드라미가 되어가던 기억이 뢴트겐의 그림자에 복사되는 저녁
바람의 뒷골목에서 두근거리던 붉은 눈동자가 보인다
아픈 것들은 쉽게 뽑히지 않는데, 넘어지면 일어나기 어려운 뿌리가 쉽게 뽑혔다
돌아오는 길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던 한 사람의 이름이 희미해져갔다
보지 않고 잊을 수 있다면 보고 있어도 잊을 수 있는 것이다
— 애지사화집, 『굴뚝꽃』에서
유계자│2016년 『애지』로 등단│시집 오래오래오래│이메일 poem-y@hanmail.net
파놉티콘
김 연 종
1
열 살 남짓 아이들이
강아지풀을 입에 물고 있다
도란도란 책상에 앉아 나란히 눈을 감았다
교실 벽에 낙서한 강아지풀은 연필심처럼 자라난다고
갓 부임한 선생님이 잔뜩 겁을 심어 주었다
한바탕 회오리바람에
강아지풀들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두 명은 입에 넣기 전에 강아지풀 줄기를 잘랐다
한 아이는 기어이 강아지풀을 입에서 빼지 못했다
세 명의 아이들이
담벼락의 낙서를 모두 지우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2
지문채취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세숫대야에 오랫동안 손을 담갔다
사라진 죄들이
소용돌이 치며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지은 죄가 또다시 닳아질까 서둘러 지문을 찍었다
귀가 훤히 드러난 증명사진을 찍고 나서야
머그샷의 주민등록증은 완성되었다
감옥 같은 일생이 감쪽같이 지나간다
그들은 미래의 죄를 미리 고백하고
아무도 욕하지 않으며 가만가만 늙어간다
3
아파트를 탈출한 남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임금체불로 사라진 수위 대신
현관의 감시카메라가 문안 인사를 한다
시동을 켜자마자
사이드미러가 쥐고 있는 손바닥을 편다
내비게이션이 길을 안내하고
블랙박스가 현장을 생중계 한다
거리에서
지하 통로에서
빽빽한 스케줄의 사무실에서
아이돌 같은 하루를 보내다가
수천 번의 영상에 찍혀 조금씩 죽어간다
— 애지사화집, 『굴뚝꽃』에서
김연종│2004년 문학과 경계로 등단│시집 극락강역, 히스테리증 히포크라테스, 청진기 가라사대│산문집 닥터K를 위한 변주│제3회 의사문학상 수상, 2018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현재 의정부시 김연종 내과의원 원장
할머니의 컬러프린터
조 재 형
외갓집 뒤꼍에 손바닥만 한 텃밭
할머니가 사용하는 프린터
할아버지 유품인데 철따라 식물도감을 펴낸다
오래된 중고인데 멀쩡하다
호미와 괭이가 수리를 도맡는데
부지런한 틈바구니에서 쉴 틈이 없다
이런 텃밭을 고장나게 하다니
잡초는 나쁜 녀석들이다
호미에게 야단을 맞아도 그때뿐
뽑아내도 뽑아내도
돌아서면 들이대는 골칫덩이다
때때로 갈아 끼우던 잉크는
할머니의 땀방울이다
직장에서 쫓겨난 막내 삼촌 걱정으로
남몰래 훌쩍이던 눈물이 보조 잉크다
함박눈 펑펑 내리는 한겨울이면
텃밭은 시동을 꺼놓는다
눈사람을 마당에 세워두고
옛날이야기를 점검하기 위해서다
그런 텃밭이 요사이 시무룩하다
요양원으로 뽑혀간 할머니 때문이다
과일이랑 채소를 더 이상 찍어낼 수 없다
봇짐을 정리해 오려고 주말에 들렀거든
그런데 글쎄
작동을 멈춘 텃밭에서
철모르는 잡초들만 신바람이 났더라
— 애지사화집, 『굴뚝꽃』에서
조재형│2011년 『시문학』으로 등단│시집 『지문을 수배하다』│이메일 yosepj@hanmail.net
드라이플라워
박 언 숙
영원히 변하지 않겠다는 굳은 약속
바람 앞에 지킬 수 없음을 알게 된 후
마음은 여려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여자
온 몸 물에 젖어 날마다 새파랗게 떨던 여자
마침내 마음자리 묶어 거꾸로 매달려진 여자
짓궂은 바람이 쉴 새 없이 흔들어대는 창가
솜털 하나 빠짐없이 꼿꼿이 날 세우는 여자
길고 지루했던 생애 마음은 버리고 몸만 남긴 채
꼬장꼬장한 영혼의 뼈대만 아프게 버티고 있다
질끈 봉인한 은밀한 추억 한결 느슨해지고
수시로 그렁거리던 눈물 흔적 하얗게 지운 오후
드디어 저 여자 영생불멸에 드는가 보다
잠시 캄캄하고 부쩍 가벼워졌다
오, 저런
부서지는 기억일랑 그저 바라보기만 하라고
저 허공이 붙들고 있는 등신불 같은
— 애지사화집, 『굴뚝꽃』에서
박언숙│경남 합천 출생│2005년 애지로 등단 │이메일 sopia62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