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창 39장 1-10절
설교제목 : 형통한 자가 되어
세상을 뒤흔드는 권력의 망령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이번 주는 완연한 봄을 느낄 수 있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마음에 품고 건강한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연의 흐름과는 달리, 세상사는 어수선하고 혼란하기만 합니다. 그래서인지 복잡한 세상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트럼프는 “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 기치를 들고, 미국인을 완벽하게 현혹했고, 대중의 무의식적 권력충동을 가슴에 안고서 관세전쟁과 평화조약을 거칠게 몰아붙이며 전 세계를 혼돈의 소용돌이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세계를 뒤흔드는 권력의 망령이 깨어났습니다. 권력으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며 외줄타기 왕좌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국제사회의 현실과 맞물려 한국도 헌재의 탄핵결정을 기다리며 어수선한 정국을 보내고 있습니다. 3개월간 나라를 혼돈으로 몰아갔음에도 수감되어 나오면서, 손을 들며 웃음을 짓는 대통령의 모습에 무의식적인 인간의 전형을 발견했습니다. 전체국민과 나라에 대한 자기반성적 태도를 전혀 지니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는 무지는 가장 큰 죄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무지는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게 하고, 내면의 법칙을 위반하게 합니다. 내가 안다고 주장하고, 내가 무조건 맞다고 설파하는 자들은 어쩌면 가장 큰 죄 속에 허욱적대고 있음을 기억하며 살아갔으면 합니다. 반성하지 않는 자는 언제나 무의식적 권력충동과 권력 마귀의 먹잇감이 될 수 있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갔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희망찬 봄이 선물처럼 다가왔듯 희망과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길 소망해 봅니다.
내려감
창세기 39장은 38장에서 유다와 다말이야기에서 단절된 요셉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꿈과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온 요셉을 죽이려고 구덩이에 쳐넣었습니다. 하지만 형제 중 유다는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아넘기자고 제안했고, 요셉은 노예로 팔려 이집트로 끌려 내려갔습니다. 요셉은 이집트 바로의 경호대장이었던 보디발의 노예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런 이집트로의 하강은 요셉을 다시 정련하고 순진무구한한 삶의 태도를 교정하기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내려감은 부모의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정신을 자각하고 자신을 근본적으로 스스로 일깨워 세우기 위한 강제된 속박상태입니다. 근본적으로 버려지고 속박당할 때 무언가가 구체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응고의 작업입니다. 어떤 물질이 응고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그곳에 갇혀야만 합니다. 바닷물에서 소금을 추출하고 응고시키기 위해서는 그릇(용기)이나 틀에 갇혀야 하고 그곳에서 수분이 증발하듯 자신의 정서와 충동들을 고정시켜 분리시켜야만 합니다. 그럴 때 진정으로 감추어진 내면의 것이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어떤 하나의 결실을 맺기 위해서 오랜시간 연습하고 고단함을 견뎌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답답하지만 내려가서 속박당해야 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든든한 배경이었던 아버지와 분리되었지만, 노예로 떨어질 때 영적인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진정으로 연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자신보다 위대한 인격과 힘과 연결을 시도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종교적 본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아이들을 향한 바람과 기도는 제가 저들을 도울 수 없는 시간이 도래하고, 떠나야 할 때 자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힘과 자원을 얻어 자신들의 인생을 충분히 살아내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 하강의 시간에 자신의 진정한 힘을 키워냈고, 가족과 세상을 구원할 그릇으로 준비되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이집트로의 내려감과 노예살이는 개성화를 위한 전제조건이며, 더 큰 하나님의 드라마를 성취하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배신과 속박, 고통의 시간이 불현듯 다가올 때, 그때가 또다른 하나님의 드라마를 이루어가야할 때임을 마음에 품고 그 내려감의 시간을 살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형통한 자
화려한 옷이 벗겨지고 부모 형제도 모두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요셉에게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2절과 3절에 아주 분명하게 그것을 진술합니다.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셔서, 앞길이 잘 열리도록 그를 돌보셨다. 요셉은 그 주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 주인은,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며, 요셉이 하는 일마다 잘 되도록 주님께서 돌보신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성경에서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게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합니다. 배신당하고,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주님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이 결정적인 진술을 우리가 마음에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외적 자원이 바닥나서 지치고 힘들 때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자신에겐 아무도 없고,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자기 절망과 외로움을 호소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아의 착각과 알지못함일 뿐입니다. 예전에도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제가 스위스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내 삶과 가족들을 부양해야할 책임으로 무거움을 가지고 있을 때 저의 스위스 분석가는 저에게 아주 힘주어 두가지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네 뒤에는 200만년 된 Great Man이 있다.”
“너는 내담자가 없을 때 너의 창조적인 작업을 하면 된다.”
바로 그 위대한 인격이 누구겠습니까! 네 뒤에 하나님이 있으니 그분이 너를 지지하고 너를 이끌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힘은 바로 그곳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외적 자원이 아니라 내적 자원에서 진정한 인격은 자라가고 꽃을 피워가는 것입니다.
요셉은 주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외부적 자원이나 환경적 조건으로 보면, 요셉의 삶이 전혀 좋은 것이 없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굴욕적이고, 지긋지긋하고 보잘것 없어 빨리 도망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요셉과 함께하셔서 형통한 자가 되니, 그가 존재하고 머무는 곳에서 일이 원활하고 잘되게 되었습니다. 비록 버림받고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최선을 다하여 주인의 집 일을 돌볼 때 모든 것이 형통한 것을 그 집 주인인 보디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숨길 수 없는 요셉의 인격이 드러난 것입니다. 힘들고 고달프고 지칠 때 그 사람의 인격의 진면모가 밝히 보입니다.
우리는 형통한 삶을 기대합니다. 모든 것이 잘 되기를 기도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요셉을 통하여 일러줍니다. “내가 형통한 사람이 되면, 모든 것이 잘되어집니다.” 전체 정신과 조화로움을 가지며 사는 사람은 외부 세계에도 어떤 영향력을 자연스럽게 드러냅니다. 모든 외적 자원이 바닥나고 내어쫓겨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환경의 형통을 기대하기 앞서, 내가 형통한 자가 되길 기대했으면 합니다. 내면의 법칙, 하나님의 법과 조화롭게 되기를 먼저 기도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셉이 하는 일마다 모든 것이 잘 되니, 주인은 요셉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니 주인 보디발은 요셉을 신뢰하게 되고, 집안 일과 재산을 모두를 관리하게 합니다. 물건이나 다름없는 소모품 취급받던 노예 청소년이 주인 보디발의 집안의 실세가 됩니다. 이것은 인격의 저력입니다.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진실하게 삶을 일구어낸 자가 성취하는 놀라운 결실입니다. 형통한 자가 되어 삶을 최선으로 일구어내면 노예의 삶의 자리에서도 꽃이 피기 시작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어떤 권사님이 가난한 지하 단칸 방에 살면서 자신이 빌라집을 살 수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분은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설거지 일을 했습니다. 부지런함은 기본이고, 설거지를 하나 하더라도 대충 물로 행궈내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손으로 그릇의 세제를 닦아내며 설거지를 했습니다. 식당사장은 그분의 그런 모습을 좋게 여기어 점점 더 많은 배려를 했고 믿고 주방 일을 맡겼다고 했습니다. 음식을 하나 만들어도 자신의 마음을 담아서 성심성의껏 했고,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 이뻐하셨는지 이렇게 집까지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형통한 자가 일구어낸 아름다운 열매일 것입니다.
유혹받는 요셉
그런데 모든 것이 잘되어갈 때 요셉에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잘생겼습니다. 주인에게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기 시작합니다. 요셉을 그녀의 침실로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요셉은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모든 것을 관리하게 맡겼지만, 주인의 부인만은 나의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이런 일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대한 것 이상으로 삶의 잘 흘러가고 있을 때, 때로 힘이 생성되었을 때, 그 이면에 유혹의 시험이 닥칠 수 있음을 제시합니다. 가장 위험할 시간은 정점으로 올라서려할 때이며, 무언가 성취되었을 때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주인의 아내의 유혹은 요셉에겐 위험한 영혼과 물질의 시험입니다. 영웅이 겪게 되는 난관입니다. 아니마와 세상, 물질에 유혹받고 있는 소박하고 순수한 젊은 청년, 혹은 자아는 종이 아닌 충분한 남성으로서 성장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유혹 앞에 놓이게 됩니다. 여인을 탐하는 범죄와 영웅주의, 지혜로움과 비겁함이 분리되지 않고 뒤섞이게 되면 대단히 위험한 순간입니다. 만일 아름다운 젊은 여인의 유혹이라면 그것에 굴복하는 것은 성숙을 꾀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남성에게는 새로운 잠재력, 아니마를 발달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외적 성취와의 동일시가 일어나고 주인과의 대등한 권력의 위치에 서면, 주인의 아내와 관계함으로 주인을 배반하게 되고 그것은 치명적인 자기 성장의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탐닉과 아니마의 지배와 종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위험한 초대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요셉에게는 잠재력을 최대로 성취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자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에게 유혹하는 실체가 어떤 존재인지를 분별하였기 때문에 아니마의 초대를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무분별하게 일어나는 성적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아니마가 유혹하는 정서적 충동으로부터 벗어나 더 높은 발달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침실에서 유혹은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에서 벌어지는 매혹과도 같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외계로 투사되는 이런 아니마의 투사에 사로잡혀 자신의 발달이 저지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건강한 창조력보다는 공상적 세계에 부착되어 비현실적 세계로 도망치고, 심한 의존적 탐닉과 중독에 빠져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없게 됩니다. 현실에 적응하기보다 온라인 게임이나 영상에 부착되어 자신의 발달이 저지되는 젊은이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무언가가 잘 되어갈 때 유혹이 일어남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내 안에 일어나는 유혹이 무엇입니까? 나는 어디에 서 있고, 나를 유혹하는 실체를 알아차리고, 그 유혹에서 달아나 더 높은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