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芬皇寺(분황사)
2024년 1월 6일
청량사 신도회 분황사, 불국사, 기림사 사찰순례 동참
경주 芬皇寺(분황사)는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사찰로 ‘三國遺事(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七處伽藍(칠처가람 : 과거칠불인 비바시불 · 시기불 · 비사부불 · 구류손불 · 구나함모니불 · 가섭불 · 석가모니불 시대 사찰터)중의 하나로 634년(선덕여왕 3년) 용궁의 북쪽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당시 분황사는 황룡사와 함께 왕실 차원에서 건립되었으며, 선덕여왕을 비롯한 여러 국왕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신라 선덕여왕은 643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慈藏590~658년)을 분황사에 머물게 하였으며, 645년에는 자장의 요청으로 황룡사탑(皇龍寺塔)을 처음 만들기 시작했다. 창건된 이후 황룡사와 함께 중요 사찰로서 중앙 정부나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신라 불교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현재 분황사에는 모전석탑(模塼石塔), 각종 석불(石佛), 당간지주(幢竿支柱), 팔각우물, 비좌(碑座)등을 비롯하여 건물에 활용된 많은 석재와 기와편들이 남아있어 고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 분황사 입구 남쪽에 세워져 있는 당간지주는 신라시대 분황사 가람의 규모와 배치, 고대 사찰 가람 상에서 당간지주의 배치, 주변 사찰들과의 배치와 방위, 황룡사지는 입구 쪽에 파손되었지만 황룡사의 것으로 보이는 별도의 당간지주가 유존하고 있는 점, 현재의 분황사 가람의 규모가 상당히 축소된 상황이라는 점 등 다양한 측면을 고려할 때 분황사에서 활용하기 위하여 건립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분황사 소속의 당간지주가 확실시된다고 할 수 있다.
*七處伽藍(칠처가람) : ①금교(金橋) 동쪽 천경림(天鏡林) -지금의 흥륜사(興輪寺), ②삼천기(三川岐) -지금의 영흥사(永興寺), ③용궁(龍宮)의 남쪽 -지금의 황룡사(皇龍寺), ④용궁의 북쪽 -지금의 분황사(芬皇寺), ⑤사천(沙川)의 끝 -지금의 영묘사(靈妙寺), ⑥신유림(神遊林) -지금의 천왕사(天王寺), ⑦서청전(婿請田)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 국보, 신라 선덕여왕 2년( 634)>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경주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慶州 芬皇寺 金銅藥師如來立像) - 보물, 1609년(광해군 1) 조성>
‘경주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조선 후기의 유일하고 규모가 가장 큰 금동불 입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1998년 분황사 보광전 해체 수리과정 중 중도리 바닥에서 1616년 '분황사상량기(芬皇寺上樑記)' 및 종도리에서 1680년 '부동명활성하분황사중창문(府東明活城下分皇寺重創文)' 묵서(墨書)가 확인되어 이 약사여래입상이 1609년 5,360근의 동을 모아 제작한 대형 불상임이 확인되었다. 원래 이곳에 봉안되었던 금동약사불은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되었으나, 신라시대부터 이어져온 약사도량으로서 분황사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전란 후 얼마 되지 않아 지금처럼 장대한 규모로 복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이 주목되는 이유는 17세기 초반의 동조(銅造) 불상이라는 점, 규모가 354cm이르는 현존 최대 금동약사불이라는 점, 앞 시기 규범에 따라 입상으로 조성된 정통성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대형 불상이 대부분 소조(塑造, 진흙)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러한 대규모 금동불상은 매우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경주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규모가 커 우람한 형태미를 보이고 있지만, 이와 달리 둥글고 통통한 얼굴에 어깨가 왜소해 전반적으로 동안(童顔)의 형태미를 보여준다. 특히 아이처럼 앳돼 보이는 이목구비는 16세기 불상 양식이, 가슴과 복부가 길쭉한 비례감과 세부 주름 등 신체 표현은 17세기 양식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신ㆍ구 양식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616년과 1680년에 작성된 두 건의 상량문을 통해 1609년에 동(銅)으로 불상을 조성했다는 조성 경위와 불상의 존명까지 분명히 밝히고 있어 이 시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분황사석정(芬皇寺石井)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신라시대>
이 것은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신라시대 우물이다. 우물 틀의 외부는 높이 70cm의 8각,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의 진리를, 우물안의 4각형 격자는 불교의 근본교리인 사성제를 뜻한다.
'삼국유사'에 보면 원성왕 11년에 당나라의 사신이 와서 신라의 호국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본국으로 떠났다. 그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자신들은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에 사는 두 호국용의 아내인데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 사람들이 자신의 남편과 분황사 팔각정에 사는 호국용을 주문을 외워 작은 물고기로 변화시켜 대나무통 속에 넣어 가지고 갔다고 하면서 이를 구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쫒아가서 물고기를 다시 빼앗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어 살게 하였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慶州 芬皇寺 幢竿支柱) - 보물, 통일신라시대>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당간지주들처럼 전체적으로 정연하고 깔끔한 치석 수법과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당간지주의 표면을 고르게 다듬어 마무리하는 등 바깥면을 기교있게 치석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우수한 석공에 의하여 설계와 시공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는 경주 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중요 사찰의 당간지주와 유사한 조영 기법과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이들과 비교하였을 때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관통된 원형의 간공을 상중하 3곳에 마련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 중에서 유일하게 귀부형 간대석을 마련하여 당과 당간에 대한 상징이나 의미를 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