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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시(榮州市)
○ 소수서원(紹修書院)
- 지정번호 : 사적 제55호 (1963.01.21)
- 소 재 지 :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2
- 시 대 : 1542년(中宗 37 癸卯)創建, 1550년(明宗5 庚戌)以御筆額 書院懸額始此.
- 제 향 : 안 유(安 裕: 初名珦 號晦軒 高麗太學士 諡文成 文廟配享).
안 축(安 軸: 號謹齋 僉議贊成事 諡文貞).
안 보(安 輔: 軸弟 政堂文學 諡文敬).
주세붕(周世鵬: 號愼齋 戶叅 中樞府同知事 諡文愍).
소수서원은 고려시대의 명신이며, 학자인 회헌 안향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 풍기 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사묘(詞廟)를 세우고 그 이듬해 안향 선생을 봉안하며 학사를 이건하여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중종 39년(1544)에는 안축, 안보를 배향하였으며 명종 3년(1548)에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명종 5년(1550) 소수서원으로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으며, 그후 인조 11년(1633) 주세붕을 추향하여 향사를 지내고 있다. 서원은 옛 숙수사지의 넓은 터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동쪽의 죽계를 끼고 정문인 사주문을 들어서면 강학당이 있고, 그 뒤로 동․서재가 한채로 된 직방제와 일신제가 자리잡고 있다. 동․서재 좌측에는 서고와 전사청이 있고, 그 뒤로 영정각이 놓여 있다. 강당 서쪽에 담장으로 별도 구획된 공간에 문성공묘가 있고, 강당 동쪽 모서리에는 학구재와 지락재가 ᄀ자형을 이루고 있다.
서원 일곽 뒤편에는 별도로 구획된 담장내에 유물관, 관리사, 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한편 사주문 입구에는 경렴정이 있고, 죽계 건너편 물가에는 취한대가 주위의 송림과 어울려 수려한 경관을 자아내고 있다. 강학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굴도리 초익공 건물이다. 평면구성은 마루방 3칸과 온돌방 1칸이고, 사면에는 폭이 좁은 쪽마루를 돌렸다. 상부가구는 5량가이고, 잘 치목한 대량위에 주두와 초각보아지를 끼운 동자주를 두어 종량과 중도리를 받쳤다. 종도리는 소로를 끼운 파련대공 위에 올려져 있다. 마루방부분의 창호는 사분합 들문이고, 온돌방 부분에는 고식의 문틀을 잘 간직하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동․서재는 한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면 6칸, 측면 칸반의 납도리 소로수장집이다.
평면구성은 가운데 2칸 마루방을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 2칸을 두었고, 온돌방앞에는 툇마루를 깔고 헌함을 세웠다. 상부가구는 5량가이고,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학구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간결하고 아담한 3량가 납도리집이다.
이 건물은 주세붕의 문인인 송간 황응규(자 : 중문, 1518~1598)가 건립하였다. 평면은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 1칸씩을 두었다.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지락재는 창석 이준이 광해 5년(1613)에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건립하였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3량가 납도리집이다. 평면은 북쪽 끝방의 온돌방에 연달아 개방된 마루 2칸을 두었다.
○ 도강서당
- 지정번호 : 기념물 제131호 (1999. 3. 11)
- 소 재 지 :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 364-7
- 시 대 : 1900년경
본 건물은 구한말 독립운동가이며, 이 지역의 대표적인 석학거유인 김동진(1867~1952)이 후진양성을 위해 1900년경에 건립한 서당이다. 김동진의 본관은 선성, 자는 국경, 호는 정산이다.
그는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유림의 한사람으로 소수서원 원장을 3번이나 역임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1913년 독립의 군부 설립 가담과 1919년 파리장서사건에도 주동인물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공적으로 1993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제1956호)을 추서받기도 하였다. 건물은 약 40여호 자연부락인 도탄마을의 뒤쪽 야산에 배산하고, 전방의 넓은 뜰을 바라보며 동남향하고 있다. 서당 뒤쪽에는 김동진의 묘가 있다. 서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 2통칸을 꾸민 중당협실평면이다. 건물 사면에는 폭이 좁은 쪽마루를 깔아 돌렸다. 상부가구는 5량가이고,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 이산서원(伊山書院)
- 소 재 지 : 영주시 이산면 내림리
- 시 대 : 1558년(明宗13 戊午)1574년(宣祖7 甲戌)賜額.
- 제 향 : 이 황(李 滉: 號退溪 贈領相 諡文純 文廟配享).
영주시 이산면 원리(院里:지금의 휴천1동 속칭 구서원)에 1558년 (明宗 13)에 군수 안상이 창건하였고 1572년(宣祖 5)에 묘우(廟宇)를 세워 퇴계를 제향(祭享)하다가 1574년(宣祖 7)에 사액(賜額)되었고 1614년(光海 6)에 내림리 임고의 송진 사상헌(宋進士尙憲)의 밭과 상환(相換)하여 이건(移建)하였다. 1871년(高宗 8)에 서원 훼철령(毁撤令)에 의하여 회철 (毁撤) 되었다.
○ 삼봉서원(三峯書院)
- 소 재 지 : 영주시
- 시 대 : 1654년(孝宗5 甲午)創建.
- 제 향 : 김이음(金爾音: 號三路 參判).
이 해(李 瀣: 號溫溪 大司憲 贈禮判 諡貞愍).
김개국(金盖國: 正郎).
김 융(金 隆: 叅奉).
김이음(金爾音)
?∼1409(태종 9). 본관은 함창(咸昌), 자는 백옥(伯玉), 호는 삼로(三路)로서 김용(金勇)의 아들이다.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공민왕 23년(1374)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우왕이 즉위한 뒤 1376년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며, 폐가입진의 명분으로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지평에 올랐다. 1391년 문하사인을 지내고 조선이 건국된 뒤 우사간을 거쳐 1405년 강원도 관찰사로 외지에 부임되었다. 그 후 호조 참판으로 내직에 옮겨졌다. 효행이 지극하여 정문이 세워졌으며, 영주의 삼봉서원(三峯書院)에 배향 되어있다.
○ 장암서원(壯巖書院:狀岩書院)
- 소 재 지 : 영주시 문수면 적동리 장암
- 시 대 : 1691년(肅宗17 辛未)創建.
- 제 향 : 홍익한(洪翼漢: 號花浦 贈領議政 諡忠正),
오달제(吳達濟: 號秋潭 贈領議政 諡忠烈).
윤 집(尹 集: 號林溪 贈領議政 諡忠貞. 俱三韓三斗 三學士).
○ 우계서원(迂溪書院)
- 지 정 : 문화재자료 제475호
- 소 재 지 :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55-1
- 시 대 : 1665년(顯宗6 乙巳)創建.
- 제 향 : 이덕홍(李德弘: 號艮齋 縣監 贈?判).
이현보(李賢輔: 號聾巖 知中樞 諡孝節).
오계서원은 선조 3년(1570)에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이 학문연마와 심신수련을 위해
건립한 「오계정사」의 후신이다. 여러차례 이건과 중건을 거쳤다. 사림의 공론으로 현종 6년(1665)
10월 2일에 道存祠를 建立하고 艮齋 先生의 位牌를 奉安한 후 1692년 迂溪書院으로 昇格되었다. 1699년과 1707년의 대홍수로 물길이 바뀌어 書院이 浸水 被害가 있자 1711년(肅宗 37)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 였으며, 경종 4년(1724)에 그의 장자인 선오당(善迂堂) 이시(李蒔, 1569~1636)를 배향하였다.
고종 8년(1871-신미)에 훼철(毁撤)되었다가 무오년(1978)에 복향하였다. 서원내에는 사당인 도존사 (道存祠)와 강당인 명륜당(明倫堂), 동재인 관성재(觀省齋), 서재인 험위료(驗爲僚), 정문인 입도문(入道門)이 있고, 서원밖에는 군자정(君子亭)과 관리사가 있으며, 서원입구 양쪽 언덕에 연어대(鳶漁臺)와 활발대(活潑臺)가 있다. 간재 이덕홍의 본관은 영천(永川)이고, 자는 굉중(宏仲)이다. 영춘현감을 역임하였고 임란시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성호종일등공신(聖扈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퇴계의 수제자로 학문이 뛰어나 퇴계가 죽음을 앞두고 모든 서책을 간재에게 맡기라는 유언을 남겼다.
퇴계의 명으로 선기옥형(璇璣玉衡-渾天儀)을 제작하여 천리연구에 활용하였으며, 임진왜란시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에는 귀갑선도(龜甲船圖-거북선 설계도)가 있는데 이는 현존하는 유일한 거북선 원형 설계도이다. 주역과 심학(心學)에 능하여 퇴계학의 종지(宗旨)를 집대성하였으며, 저서로는 「계산기 선록(溪山記善錄)」,「간재집」등이 있다. 선오당 이시의 자는 중립(中立)이고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재주가 뛰어나 14세에 이미 경서를 읽었으며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오계서당을 개설하여 성학을 연마하며 제자를 길렀는데 제자 93명중 향시 에 10명 문과에 5명이 급제하엿다. 「오계서당 강회록」에 의하면 12회의 강회를 열어 당시 이름난 석학 232명이 참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 33년(1757)에 통훈대부 사복시정(通訓大夫 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 의산서원(義山書院)
- 소 재 지 : 영주시
- 시 대 : 1674년(顯宗15 甲寅)創建.
- 제 향 : 이개립(李介立: 號省吾堂 縣監).
김응조(金應祖: 號鶴沙 大司諫).
김응조(金應祖)
1587(선조 20)∼1667(현종 8).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 또는 아헌(啞軒)이다. 산음 현감 김대현(金大賢)의 아들로 안동에서 출생하였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광해군 5년(1613) 생원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으로 문과응시를 포기하였다가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병조 정랑 · 흥덕 현감 · 선산 부사를 역임하고, 1634년 낙향하였다가 1638년 다시 기용되어 지평 · 장령 · 헌납 · 수찬 · 교리 · 집의 · 사간 · 응교 · 공조 참의 · 대사간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한성부 우윤에 올랐다.
인조 · 효종 · 현종 삼대에 걸쳐 벼슬을 지내면서 시무책을 건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일찍이 유성룡(柳成龍) · 장현광(張顯光)에게서 학문을 익혀 문장에 뛰어났다. 안동의 물계서원(勿溪書院), 영천의 의산서원(義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학사집(鶴沙集)》 · 《사례문답(四禮問答)》 · 《산중록(山中錄)》 · 《변무록(辨誣錄)》이 있다.
○ 귀산정사(龜山精舍)
- 소 재 지 : 영주시
- 시 대 : 1621년(光海13 辛酉)創建.
- 제 향 : 김 담(金 淡: 號撫松軒 吏判 諡文節).
박승임(朴承任: 號嘯皐 都承旨).
김 륵(金 玏: 號柏巖 吏叅 贈禮判 諡愍節).
김영조(金榮祖: 號忘窩 吏叅).
박승임 (朴承任)
1517∼1586(중종 12∼선조 19)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중보(重甫), 호는 소고. 본관은 나주(羅州). 경상북도 영주(榮州) 출신. 1540년(중종 35) 24세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예문관·승정원·홍문관 등에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당시 세도가인 윤원형(尹元衡)의 횡포가 날로 심해져 벼슬을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547년(명종 2) 예조정랑에 다시 임명되고, 1548년 현풍현감이 되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썼다. 1573년 도승지, 1576년 다시 도승지, 1583년에는 대사간이 되었다. 그는 평소 과묵하였으며 항상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렸다. 《논어》와 주자서(朱子書)를 탐독하였고 이황(李滉)을 스승으로 모셨다. 시문에 능하여 한때 많은 시작활동이 있었으나, 중년 이후로는 사람을 부박(浮薄)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이를 중지하고 심학(心學)에 주력하며 실천적 수행에 힘썼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는데, 그의 성리학적 견해는 이황의 학설을 따라 주리론(主理論)의 경향을 보였다. 저서로 《성리유선(性理類選)》 《강목심법(綱目心法)》 등이 있다.
김륵(金玏)
1540∼1616(중종 35∼광해군 8) 조선 중기 문신.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栢巖). 본관은 예안(禮安). 경상북도 영천(永川) 출생.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76년(선조 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전적·정언 등을 지냈다. 1580년 홍문록(弘文錄)에 등록되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어 <시무16조(時務十六條)>를 상소하였다. 1599년의 형조참판·충청도관찰사 때에는 형조참의를 거쳐 안동부사(安東府使)가 되었다가, 이어 도승지·한성부우윤·대사성을 지냈다. 1594년 동지의금부사·이조참판을 역임하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어 <시무16조>를 상소하였다. 1599년 형조참판·충청도관찰사를 지내고 1612년 하절사(賀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뒤 대사성에 이르렀다.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고 사묘(私墓)의 일로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강릉으로 유배가게 되었으나 대신들의 변호로 풀려났다. 영천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백암문집》이 있다. 시호는 민절(敏節).
김영조 (金榮祖)
1577∼1648(선조 10∼인조 26) 조선 중기 문인. 자는 효중(孝仲), 호는 망와(忘窩). 본관은 풍산(豊山). 1612년(광해군 4) 문과에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으나, 광해군의 혼란한 정치를 보고 10여 년간 은거하였다. 1623년(인조 1)에 인조반정으로 복관, 예조·병조의 낭관(郎官)에 이어 3사(三司)의 벼슬을 역임하고 6차례나 어사(御史)로 나갔다. 대사간을 거쳐 부제학, 병조 및 형조참판, 우승지·대사성에 이르렀으나, 1642년(인조 20)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부정이 발각되어 파직당하였다. 경상북도 영천(榮川)의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망와집》이 전한다.
○ 사계정사(泗溪精舍)
- 소 재 지 : 영주시 영주동
- 시 대 : 1703년(肅宗29 癸未)創建.
- 제 향 : 황효공(黃孝恭: 號龜巖 司諫).
라이준(羅以俊: 號梅軒 贈吏叅).
숙종 29년에 별묘(別廟)를 세웠다가 뒤에 서원으로 승원 되었으며 영주 1동 망궐면(望闕面)에 창건 뒤에 안정면 대룡산(大龍山)으로 이건(移建)
황효공(黃孝恭)
1496(연산군 2)∼1553(명종 8).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경보(敬甫), 호는 구암(龜巖). 영천출생. 아버지는 군자판관(軍資判官) 진(璡)이며,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현감 평(#평07)의 딸이다.
1521년(중종 16) 문과에 병과로 급제, 1522년 승문원부정자가 된 뒤 1525년 성균전적, 1526년 형조좌랑을 거쳐 형조정랑·황해도사·교리·지평 등을 지내고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532년 금산군수, 1534년 한성부서윤·종부시첨정을 거쳐 사간원사간이 되었다.
이때 생질이 권신들의 미움을 받아 함께 탄핵, 파직되자 영천으로 낙향하여 정사(精舍)를 짓고 ‘구암’이라 자호하여 독서와 후진양성에 전심하였다.
1537년 복작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서 독서로 일생을 보내며, 《역학계몽》·《황극경세》·《태극도》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황(李滉)과도 교유하였으며, 도상학(圖象學)과 역학에 밝았다.
영주의 사계서원(泗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구암일고》가 있다. 〈趙駿河〉
첫댓글 경상북도 영천(永川) 출생 =>영천(榮川) 이 아닐까요...? 맞을깜 ? 요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