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군에게 포위된 335,000명의 영국과 프랑스 군인들을, 영국으로 무사히 철수시킨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프랑스 북부의 “덩케르크 철수작전”입니다. 이 작전은, 성공적인 작전으로 높이 평가받으며, 지난 2017년에는 영화로 상영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덩케르크에서, 독일이 자랑하는 기갑부대의 공격과 독일공군의 맹폭격에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바다에서는 독일의 자랑인 유보트 잠수함으로 인해, 영국 함대가 근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만나 진퇴양난에 처한 상황과도 같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덩케르크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 군인들의 선택은, 독일군에게 죽던가 포로가 되는 양자택일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당시의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대국민 발표를 했습니다. 내용은, 온 교회와 성도들을 비롯하여, 영국의 모든 국민들에게, 독일에게 포위된 335,000명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윌리엄 템플 대주교 역시, “여러분이여, 지금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때입니다. 예배당 종소리가 울리면, 어린 아이까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배당에 가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때입니다. 예배로 승리해야 합니다”라며, 처칠의 발표에 힘을 실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국민들은 예배당에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코로나19로 인한 상황도, 이들처럼 우리가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기도를 요청하는 지도자와 예배에 목숨거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다윗이 그 일행과 마온 황무지의 동굴에 숨었을 때, 사울이 대군을 이끌고 점차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습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사울에게 생포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이때, 다윗이 어찌했습니까? 시 27편을 보면,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 결과, 사울은 다윗을 포위하여 쫒던 것을 중단하고, 이스라엘을 침범한 블레셋을 물리치고자 철수했습니다. 영국의 모든 국민들이, 예배당에 모여 전심으로 기도할 때, 덩케르크 주변의 기후에 급속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바다에는 파도가 높이 일었고,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또, 육지에서는, 갑작스럽게 장대같은 소나기가 쏟아짐으로, 독일이 자랑하던 대전차와 잠수함 유보트는 철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겨진, 히틀러의 “3일 동안의 공격중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겁니다. 이로 인해, 덩케르크에 있던 335,000명의 군인들은 모두 안전하게, 영국으로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처칠 수상은, 이 작전의 성공으로 모두가 안전하게 철수하자, 의회를 열어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하나님이시여”의 가사를 보면,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로다 / 나의 몸과 마음 주를 갈망하며 / 이제 내가 주께 고백하는 말 /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니 /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 여호와는 생명의 피난처시니 /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 내 입술이 여호와를 찬양하리 / 내 평생에 주를 찬양하며 / 주의 이름으로 내 손 들리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에게는 누구나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인한 체험, 삶의 상황에서 만난 체험, 성경말씀으로 인한 체험 등 다양한 상황에서, 한 번 정도의 체험은 있을 겁니다. “하나님, 당신을 갈망합니다”라는 책의 저자인 미국의 “토미 테니”는,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자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에게 달려가게 된다며,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날카로운 통찰력과 강한 메시지로 증거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을 쫓아가야 한다면서, 하나님의 그림자, 하나님의 발자국을 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갈망해야 하고, 하나님께 목말라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토미의 이 말에서 현대교회가 안타깝게도, 우선시 되어야 할 하나님의 임재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주는 나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셨기에, 나는 하나님께 합법적인 소유이며, 통치자이시고, 하나님과 우리가 맺은 언약에 의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라는 고백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1 – 22절을 보시면,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입니다.
본문에서 시인이 왜? 하나님께 감사합니까?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퉁이의 머릿돌”은, 건물을 지지하는 주초돌이나, 큰 기둥을 지지하는 돌로서, 이 돌이 어긋나면, 건물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초식 때, 연월일등 기념하는 내용을 새김으로, 먼 훗날이라도, 이 머릿돌을 통해, 그 건물의 내역을 알 수 있기에, 참으로, 중요하며, 건물을 대표하는 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의 “머릿돌”은 주로 “시작과 근원”을 말합니다. 이렇게 중요하기에, 아무런 돌이나 마음에 든다고 하여, 마구잡이로 머릿돌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다시 보시면, “건축자가 버린 돌”이라고 합니다. 건물을 짓는 건축자가 버렸다면, 그 돌은 아무 곳에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저, 길 가에 버려질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돌을 머릿돌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는, 마 19: 30절과도 같습니다. 여기를 보시면,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 다음 구절인 23절을 보시면,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행하시는 일들을, 우리로서는 예측할 수 없기에,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을 신약 교회의 머릿돌로 삼으셨고, 오늘날에는, 성도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막 12: 42을 보시면,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과부”라 함은, 사회에서 가장 나약한 자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예배당에 와서, 동전 두 개로 헌금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가운데 부자들은, 거액으로 헌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과 그 기준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왜? 다윗의 큰 형 엘리압을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세우지 않고, 가족에게조차 존재감이 없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세우셨습니까? 하나님은 왜? 수많은 인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두 수선공이었던 무디를, 세계 최고의 전도자로 세우셨습니까? 삼상 16: 7을 보시면,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이 되어야 할 자격이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외면하며, 모른다하여도, 또, 세상이 우리를 버렸다 하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영원한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험하고 모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 머릿돌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4 – 25절을 보시면,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과 형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25절을 보시면,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좌우에 서 있던 군중들이 외치던 “호산나”와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로마로부터 벗어나길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귀신을 물리치고, 오병이어를 베풀고, 죽은 자를 살리며, 불치병을 치료하신 예수님께, 자신들의 간절한 소망을 요구하며, 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이 상황이 본문의 상황과 똑같습니다. 가끔, 퀴즈로 나오는 문제들 가운데, 비슷한 배경의 일출과 일몰 사진을 놓고, 어느 쪽이 일출사진이고, 어느 쪽이 일몰 사진인지 맞추는 것이 있습니다. 저도 궁금해서, 이에 대해 알아봤지만, 듣거나 볼 때는 그럴 듯해도, 지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얼마 전, 인터넷에서 찾았습니다. 그것은, 사진 촬영 장소가 동해인지 서해인지를 확인하는 겁니다. 그래서, 동해이면 일출이고, 서해이면 일몰이라는 겁니다. 저에는, 유례없는 “유레카”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시간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저마다 살아가는 모습이 다릅니다. 어떤 이는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채우지만, 어떤 이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채웁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서 있는 곳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예로 든 시 27편을 보면, 다윗은 힘차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울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오는 긴박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 앞에 서 있었기에, 위험하고 긴박했던 그 자리가, 감사와 기쁨의 자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근심과 걱정, 염려를 떨칠 수 없습니다.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지 벌써, 2년이 다 되어갑니다. 이제는, 백신 접종으로 해결되는구나 했는데, 또 다시 긴박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어찌해야 합니까? 마온의 황무지에 있던 다윗이, 사울의 추격으로, 생명이 긴박한 상황에 있었듯, 오늘의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참으로 위험하고 긴박한 상황에 있습니다. 이럴 때, 성도된 우리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호산나”를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이 상황 속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나를 돌아보소서, 이 나라를 구원하소서, 이 세계를 구원하소서”라며, 외쳐야 합니다.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구하시고, 그의 세 친구들을 용광로의 불길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려, 반석 위에 세우도록 외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지는 날이, 본문의 시작에서 말하는, “이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날”입니다. 우리에게 구원과 형통을 주심으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그 날까지, 온 힘을 다해, 하나님께 “호산나”를 외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7 – 29절을 보시면,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그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으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가끔,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는,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에 동의하는 성도들도 봅니다. 그들은, 구약의 전쟁사를 언급하며, “여호와는 진노의 신이고, 복수의 신이며, 전쟁의 신이고, 잔인한 신이다”라고 합니다. 또, 구약의 “여호와”와 신약의 “예수”는 다르다며, “예수”는, “사랑과 긍휼과 희생의 신이다”라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들의 주장이 맞습니까?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 별개의 내용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구약과 신약을 함께 보는, 성경의 통찰력이 없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험하고, 우매한 생각입니다. 신약에서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나 사도들의 증언에서나 사도 바울의 증언에서나 구약과 신약은 하나이며, 서로 상통함을 볼 수 있습니다. 개미가 하늘을 나는 새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이해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에서 마칩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시각화가 요한 계시록의 내용이며, 우리가 세상에서의 아름다운 소풍을 마치고, 귀천할 때 경험할 내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씻고 용서하기 위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하신 그 사랑을 보면서도, 어찌, 여호와는 진노의 신이며, 잔인한 신이라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 속에 가두는 어리석고, 불경한 생각입니다. 죄범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을 기억하며, 선하고 인자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며 고백하는 가운데,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등불이 비춰지고, 홍해를 가름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 손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