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구 진관동 소재 사비나 미술관에서 에콰도르 국민화가 오스왈도 과야사민(1919~1999)의 회화전이 열리고 있다. 2021년 1월 22일까지라 시간을 쪼개어 방문했는데, 관객의 호응으로 2월 2일까지 10일을 연장한다는 발표가 났다. 코로나19로 사전 예약이 필수하다. 그의 해외 전시를 위한 작품 반출은 에콰도르 정부 허가가 머스트이다.
과야사민 회화를 보기 전에 사비나 미술관 건축과 설계 당시 협업 프로젝트로 탄생한 몇몇 상설 작품들에 대한 고찰을 한다. 아래 사진이 사비나 미술관의 입구이다.
입구 정면에서 위를 올려다 보면 건물이 아래와 같이 생겼다. 건축물 정면이 삼각형이다. 이는 미술관을 건립한 토지 형태가 삼각형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항상 네모 반듯한 공간이어야 한다는 신도시 질서에 의문을 던지는 개념이 합쳐졌다고 한다. 공간그룹 대표 이상림이 건축 설계를 맡았다. 나는 2018년 개관 전시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건축에 다소 무심했었다. 여러번 보면 또 새로운 곳이 보인다.
또한 입구 측면에서 위를 올려다 보면 이런 모습이다. 세모꼴로 뾰족이 나온 곳이 테라스로 보였다. 잠시 후 관람하다가 저기를 가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리 정면에서의 건축물을 쳐다보면 아래와 같은 모습이다. 주변은 우리나라 재개발 현장 답게 아파트와 진관내천으로 둘러싸여 있다. 은평 한옥마을이 가까이 위치한다. 본래 종로구 관훈동에 있던 기획 전문 갤러리 사비나 미술관이 2018년 은평구에 재개관했다.
2층에 집중된 과야사민의 회화를 관람하고 3층으로 오르는 층계로 나가니, 아래의 세모 각진 테라스가 눈 앞에 등장했다.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관람객이 자연스레 이곳을 들르게 동선이 짜여져 있구나 했다.
위의 세모꼴 테라스에서 쳐다본 바깥 세상이다 진관내천과 아파트, 그리고 저기 뒤의 병풍은 북한산이려나 ^^ 대한민국 경관은 모니모니해도 아파트이다. 동일한 박스 안에 동일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남과 다르면 불안한 나머지 다른 자들도 비난하는 우리이다. 그런데 돈 벌려면 그런 아파트를 사놔야 한다.
미술관 내부 층계 모서리이다. 삼각형의 건축 구조에 따라 이러한 뾰족한 공간이 생겨났다. (void)공간이라고 부른다. 아래 왼쪽은 작가 황선태의 <빛이 드는 공간>이라는 작품이고 오른쪽은 창이다.
왼쪽의 가짜 창문보다는 역시 실제 바깥이 보이는 오른쪽 인테리어 창문이 훨씬 멋들어진다.
삼각형 건물의 층계에는 모빌 작품이 걸려 있다. 작가 노세환의 <저울은 금과 납을 구분하지 않는다>(2019)이다. 그래서인지 모빌에 가로 저울이 달려 있다. 무게가 같다고 다 같은가? quality와 quantity는 엄연히 구분된다.
과야사민 관람을 마치고 '명상을 길'로 향한다. 그 길은 옥상으로 이어진다.
건물 외관에서도 볼 수 있는 초승달 철판이다. 개관 당시 전시했던 레오니드 티쉬코브의 <Stairs to the Moon 달에 오르는 사다리>이다. 밤에불을 밝힌다고 한다.
5층 사비나 플러스, 루프탑 전시가 이어집니다^^ 박기진 작가의 2가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옥상에 전시되어 있는 작가 박기진의 <흩어지는 바다 Uncoupling Ocean>(2020)이다. 2018년 개관 당시엔 없었던 신작이다. 바다는 하나로 이어져 있지만, 아래 작품에서의 바다는 색색가지 달라서 갈등이 빚어지는 글로벌리즘의 공동체 해체를 담았다고 한다. 같은 바다, 같은 공동체라도 저렇게 다른 색깔을 품고 사는구나 한다. 관점주의이다. 결국 물은 연결되어 있지만.
작가 박기진의 <명상의 방-통로 A Path>(2018)이다. 개관때부터 있었던 작품이고 옥상 공간에 맞게 기획된 작품이다. 삼각형 루프탑 모서리에 사각의 문들이 세워져 있다. 각자 관람객이 문을 통과하면서 명상을 하는 여정이다.
아래 사진 중간에 부서진 콘크리트도 연출이다. 인생 여정에 굴곡을 암시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래와 같은 또 다른 형태의 문도 있다. 인생을 가면서 그냥 통과할 수 있는 문이 있는가 하면, 옆으로 살짝 비켜서 공간을 통과해야 지나갈 수 있는 문도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오스왈도 과야사민의 전시를 소개한다. '남미의 피카소'라고 하지만, 글쎄 정작 본인이 그런 닉네임을 좋아했을지는 의문이다.
그는 에콰도르 수도인 키토에서 라틴아메리카 선주민 케추아족 부모로부터 1919년 태어났다.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5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비엔날레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1957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에날레에서 1등을 하며 남미 최고 화가로 부상했다.
그의 그림을 보면 느껴지듯이 사람들의 고통에 절절한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히틀러에게 퇴폐주의 미술로 낙인찍혔던 독일 표현주의 작가들의 느낌이 든다
<산의 머리 >(1974)
남미의 문학이나 회화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들의 굴곡진 역사 속에서 핍박받는 사람들의 불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왜 입체주의 화가 피카소라고 했는지 그의 작품들을 보고 판단할 수 있으리라. 어차피 호불호는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기다림>(1967)
<절박한 사람들>(1966)
<눈물 흘리는 여인들>(1965)
<어머니>(1972)
2층의 전시실 전경이다. 건축 측면에서 천장은 노출 콘크리트에 배관들을 보이게 설계했다. 노출 공법은 훨씬 힘들고 세련된 기법이다. 다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것들을 다 감싸서 가려버리면 깔끔하지만, 속은 지저분할 수 있다. 입주 아파트에 인테리어를 하려 보니, 벽 속에 쓰레기가 가득했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가운데 빨간 판넬 위의 회화<눈물, 두려움, 분노>(1963~1965)
금번 전시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회화작품이다. 제목도 '펜타곤에서의 회의'이다.
<펜타곤에서의 회의>(1970)
<절규>이다.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와 동일 타이틀로 관통하는 동일점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과야사민을 표현주의 작가라고도 하고, 아래 아래 사진의 <눈물 흘리는 소녀> 그림 때문에 입체주의라고도 한다.
<절규 I, II, III>(1983)
2층 전시 관람을 마치고 3층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왼쪽 벽에 걸린 회화는 <네이팜 머리>이다. 베트남 전쟁에 사용되었던 '네이팜탄'에 희생된 사람들을 묘사했다. 층계를 오르는 길 중간에 있는 창문도 작품이다. 그 공간이 세모꼴 보이드 공간이다.
아래 소녀의 작품 속 눈물과 얼굴의 다채로운 색깔에서 피카소가 잠시 연상되기도 했다^^ 그래서 과야사민을 표현주의 입체주의 화가라고도 부른다.
<눈물 흘리는 소녀>(1984)
3층에서는 관련 동영상을 틀어준다. 편하게 앉아 그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된다. 왼쪽으로는 '어머니와 아이' 회화들이 걸려 있다. 작가들은 수십년을 활동한다. 그러다 보면 작품들이 바뀐다. 초창기 분노의 시대에 격렬한 붓질에서, 결국은 온유의 길로 들어선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어머니와 아이>(1982), <온유>(1989)
4층은 에콰도르 대사관과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남미 에콰도르의 정보를 알 수 있는 공간이다.
에콰도르 국가를 4곳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인 갈라파고스제도이다. 20년전 가고자 계획을 했으나 이러저러한 사유로 실패했던 기억이 난다...
관람을 마치고 나왔다. 입구에 있는 아래 표지판도 작품이다. 아무것도 그냥 지나치면 안된다는..
작품명 플라스틱이 어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그냥 아래 풀 속에 떨어져 있었다.
주차장에서 출발하려 운전대에 앉으니, 정면에 작품스러운 것이 보여 내려서 확인했다. 두 얼굴은 다정스런 연인이라기 보다는 놀라는 느낌이 들었고, 코만 맞닿아 있고 입은 떨어져 뭐라뭐라 하는 듯하다. 제목이 '무제'이니 해석은 내 마음이다~
작가 이일호<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