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한글 편지로 본 조선 시대
"윗사람 접대, 노비 값 어떻게 할까요?" 남녀가 집안일 논의
입력 : 2023.10.05 03:30 조선일보
한글 편지로 본 조선 시대
▲ '김호연재 사후 300년이 된 어느 날'을 배경으로 호연재의 환생을 소재로 만든 연극 '호연환생뎐' 공연 장면. /아트컴퍼니제로
최근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이 늘어나고, 방송에서도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외국인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국력이 신장함에 따라 한글의 영토도 넓어지고 있어요. 한글 창제 이후 양반 남성은 한글을 잘 사용하지 않으려 했어요. 하지만 양반 여성은 한글 편지로 멀리 떨어진 가족과 소통했고, 그 한글 편지가 많이 전해지고 있죠.
특히 한글 편지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송준길 가문이에요. 송준길 가문의 한글 편지는 13세대 300여 년 동안 428건에 이르고 편지를 주고받은 인물은 61명이나 되죠. 61명 중 김호연재는 여성 문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어요. 오늘은 김호연재·송요화 부부의 한글 편지를 통해 조선 시대 가족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김호연재의 혼인과 시댁에서의 삶
김호연재(1681~1722)는 어촌인 충남 홍성 오두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 김성달(1642~1696)과 어머니 이옥재(1643~1690)는 서로 시를 주고받았고, 13남매 모두 문학적 소양이 아주 높았어요. 13남매가 주고받은 한시를 모아 엮은 '연주록(聯珠錄)'을 보면 문학가 집안의 면모가 잘 나타나요.
호연재는 19세에 충남 회덕(현재의 대전 대덕구) 송촌에 사는 18세 송요화(1682~ 1764)와 혼인했어요. 송요화는 당시 정치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노론 집권층 송준길 가문 구성원이었으니, 명문 집안 간 결혼이었죠.
호연재는 학문과 문학에 뛰어난 여성이었고, 한시 200여 편을 남겼어요.
호연재의 한시 '자상(自傷·'슬퍼서'라는 뜻)'에는
'아까워라, 이내 마음 /
탕탕한 군자의 마음… 스스로 규방 여인의 몸 된 것을 슬퍼하노니 /
맑고 푸른 하늘은 가히 알지 못하리라 /
아, 할 수 있는 일 그 무엇이랴! /
다만 각각의 뜻 지킬 뿐이지'
라는 표현이 있어요. 여성으로 태어나 사회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현실을 한탄하고 있지요. 그래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역할과 도리를 다하겠다는 마음이 시에 나타나 있어요.
호연재의 한글 편지는 남편 송요화, 남편의 형(시아주버니) 송요경, 친정 조카 김겸행에게 보낸 3건이 남아 있어요. 조카 김겸행에게 보낸 편지에는 '요사이 부모님 모시고 잘 있느냐? 한글로 편지 쓰기 싫어 진서(한문)로 쓴 것이 밉고 괘씸하다. 어른이 된 너희들이 모여서 방탕하게 보내지 말고 글을 읽어라. 명행(明行)의 일이 애처롭고 불쌍하여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다. 나는 겨우 지낸다. 전염병이 그칠 기약이 없으니 절박하다'라는 내용이 있어요.
이 편지를 보면 전염병 때문에 친정과 시댁 가족이 위험한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송준길 가문의 편지에는 많은 사람의 죽음이 기록돼 있는데, 특히 10세 이전에 죽는 아이가 많았어요. 양반가의 어린아이도 질병을 피하기는 어려웠겠지요. 또 예나 지금이나 글공부가 참 중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한글 편지에는 거의 모두 '공부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오고, 특히 자식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 궁금해했어요.
당시 편지는 인편(人便)으로 전달됐고, 편지를 받으면 답장을 반드시 해야 했어요. 여성이 한글로 편지를 쓰면 남성은 한글로 답장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의였어요. 그런데 김겸행이 고모에게 한문 편지로 답장을 보내자 '밉고 괘씸하다'는 표현을 사용했어요. 양반가 남성들의 우월 의식을 꼬집은 것이지요.
호연재는 1705년 제천 현감으로 근무하고 있는 남편의 형 송요경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편지에는 '보내주신 상어는 잘 받아 반찬에 쓰고, (감사한 마음을) 이루 다 아뢰지 못합니다. 아뢰기 매우 어려우나, 장이 떨어져 절박하니 콩 서너 말만 얻어 조장이나 담아 먹으려 하되, 아뢰기를 두려워합니다'라는 내용이 있어요. 양반가에 재산이 많아도 흉년이 드는 경우 벼슬한 친척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었겠지요. 또 시아주버니와 제수처럼 어려운 사이에서도 반찬과 장 담그는 일을 의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송요화의 한글 편지와 일상
송요화는 호연재와 결혼한 후 관직에 종사하는 형 송요경 집에서 주로 살았습니다. 당시 회덕 송촌에는 잠시 머물다 형이 근무하는 곳을 따라다녔어요. 호연재가 41세 젊은 나이에 죽은 후 재혼했으나 아내가 일찍 죽었어요. 이후 중요한 가정사는 며느리 여흥 민씨가 처리했고, 송요화는 며느리에게 편지 27건을, 또 손부(손자며느리) 함양 여씨에게 편지 31건을 받았어요.
송요화는 관직에 나가지 못해 불우한 시절 아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에는 호연재의 병세가 어떠하냐고 안부를 물은 뒤 '어머님께서 다음 달 그믐이나 초순 사이에 갈 것이니 그리 아소. 이부자리와 베개가 다 낡았을 것이니, 그 가운데 마지못하여 고칠 것이 있으면 알려주소'라는 내용이 있어요. 자신의 어머니가 회덕 송촌을 방문하려는데, 잠자리에 쓸 이부자리와 베개가 걱정된다는 편지예요. 이부자리를 마련할 비용을 보내지 못하면서 아내 호연재에게 어떻게든 해보라는 부탁입니다.
며느리 여흥 민씨가 시아버지(송요화)에게 보낸 편지에는 '어사가 어제 와서 간식거리 대여섯 가지를 접대하였고 오늘은 아침밥을 지었다'라고 기록돼 있어요. 여흥 민씨는 남편의 윗사람인 어사가 관아를 방문했을 때 어사를 어떻게 접대했는지 시아버지에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했다고 할 수 있어요.
손부 함양 여씨가 시할아버지(송요화)에게 보낸 편지에선 노비 매매에 따른 돈 문제를 자세히 의논하기도 했어요. 송요화가 재산을 불리는 과정에 집안 여성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글 편지에 나타난 양반가 여성의 역할
조선 시대 가족과 멀리 떨어져 사는 경우 편지는 유일한 소통 수단이었습니다. 특히 여성들은 한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소소한 일상이 기록돼 있어요. 서로 안부를 전하고 친족 간 개인사를 공유하고 소통했어요.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사회는 '남존여비' 차별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로 이해하고 있지요. 그러나 한글 편지를 분석해 보면 가정사를 남성 홀로 결정하지 않고 남녀가 서로 의논했음을 알 수 있어요. 나아가 명문 가문을 제대로 유지하려면 남성만큼 여성의 역할도 중요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고모 김호연재가 친정 조카 김겸행에게 보낸 한글 편지 사본. /한국학중앙연구원
▲ 손부 함양 여씨가 시할아버지 송요화에게 보낸 한글 편지 사본. /한국학중앙연구원
▲ 호연재 김씨 시비. /대전문화재단
이환병 관악고 교감 기획·구성=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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