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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문화산책] <29> 문학 (6) 여름 휴가, 예수 생애 다룬 책과 함께
혁명가, 희생자, 구원자.... 예수는 '사랑'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 나자렛에서 목공 요셉의 아들로 자라난 예수.
2년 3개월 동안 하느님의 아들로서 공적인 전도 활동을 했던 예수.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주장했다고 십자가 처형을 당해 죽은 예수.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한 뒤 하늘에 올라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 성자 예수.
가장 짧게 요약하면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번에는 여름 휴가기간을 맞이해 여행지에서 한두 권 꼭 읽어보기를 권하며, 예수의 생애를 다룬 13권의 책을 한꺼번에 소개한다.
소설가에게 상상력 불러일으킨 예수
예수의 생애는 지극히 짧았지만 그 생애는 불꽃보다 찬란했고 태양만큼 뜨거웠다. 그래서 소설가들은 예수의 생애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스의 세계적인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최후의 유혹」에서 예수를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에게 자유를 선물하고자 한 혁명가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열심 당원의 일원인 유다는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일본의 대표적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는 「예수의 생애」에서 고통받는 인간과 함께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예수를 그리고 있다. 이타적인 삶을 살다 자기 구원조차 못 하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그럼으로써 인류를 구원하는 외유내강형 인물로 예수를 이해하고 있다.
김동리는 「사반의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한 두 범죄자 중 한 사람인 사반에게 초점을 맞춰, 하늘나라(영원의 세계)를 향한 구원과 지상(실존의 세계)에서의 구원이라는 대립적인 문제를 놓고 심각한 고민을 했다.
정찬의 「빌라도의 예수」는 예수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정치적 배경이 어떤 작용을 했고, 특히 정치권력이 왜 예수를 죽이게 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예수를 시대 상황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고만 인물로 보고 있다.
예수를 누가, 왜 죽였을까? 프랑스 소설가 엘리에트 아베카시스는 현대에 일어나는 연쇄 살인사건을 예수의 죽음과 이스라엘 쿰란 사해문서와 연결시켜 「쿰란」이라는 추리소설을 썼다. '성경에 근거해서 예수의 재림을 다룬 소설'이라는 부제를 붙인 어니스트 앵그리의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길, 휴거」도 있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성경 속 예수 이야기가 아니어서 필자를 당혹하게 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으나 곧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탈출해 비밀리에 결혼한 뒤 프랑스 남부 해안까지 배를 타고 도피했으며,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딸 사라가 프랑스의 귀족과 결혼해 그 후손이 지금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다는 황당한 이야기는 독자의 흥미를 유발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예수의 생애를 연구한 여섯 사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863년에 나온 에르네스뜨 르낭의 「예수의 생애」일 것이다. 르낭은 성직자의 길을 걷는 대신 예수의 생애를 과학적인 엄밀성을 갖고 사실적이고 총체적으로 연구해 이 책을 썼다. 복음서들 간의 차이와 성경 저자들의 착오를 바로잡은 것은 르낭의 집요한 분석적 연구 자세 덕분이다. 전에는 성경의 내용을 무조건 믿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르낭은 당시 시대상황의 전후 맥락을 퍼즐 맞추기처럼 맞춰 성경을 신화 차원에서 비종교인도 믿을 수밖에 없는 현실 차원으로 끌어내렸다. 이것은 오히려 비신앙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계기가 됐고, 르낭 자신 또한 신앙심을 버린 적이 없었다.
르낭의 전기를 읽은 독일 신학자 루돌프 슈나켄부르크 신부는 철저하게 네 복음서에 근거해서 예수를 살펴보았다. 저자는 역사적 인물인 예수와 하느님이 약속한 구원의 사도로서의 예수를 잘 조화시켜 우리 가슴에 살아 있는 예수를 각인케 한다. 이 책이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다.
나폴레옹, 비스마르크, 괴테, 링컨, 클레오파트라, 루스벨트 등의 전기를 쓴 독일의 전기 작가 에밀 루드비히는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이고 사회사적인 관점에서 기술하기 위해 이적을 행하는 내용이 많이 나오는 요한복음을 배제했다. 그는 인간 예수를 살펴보자는 관점에서 「사람의 아들」을 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문열의 같은 제목 소설이 있어서 「예수의 전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세계 역사 전개에 있어서 로마제국과 로마의 식민지였던 유다와 시리아, 그리고 기원전 44년부터 서기 70년까지 유럽과 중동, 예수가 살았던 시대의 세계 정치상황과 지리, 그 시대의 풍습 등을 세밀하게 살펴보면서 결국은 예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살펴본 책은 미국 작가 콜린 듀리에즈가 쓴 「AD 33」이다.
영국 BBC 방송국에서는 예수 행적을 더듬어 이스라엘과 인근 몇 나라를 취재했다. 톰 라이트는 영국 성공회 주교이자 신학자인데,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흥미를 느낄 주제로 프로그램을 제작한 뒤 책 「예수」를 엮어 발간했다. 산상수훈, 하느님의 얼굴, 복음서 시대의 유다사회 등 여러 가지 주제를 많은 사진자료와 함께 담은 흥미로운 책이다.
예수의 최후에 대한 상세한 기록
미국의 저널리스트 겸 작가 짐 비숍은 「예수 최후의 날」이란 책을 냈는데 부제가 '기원 30년 4월 6일과 7일의 기록'이다. 예수의 공적 행적을 잘 추적해 면밀히 다룬 전기 작가로 르낭, 슈나켄부르크, 루드비히 등이 있었지만 극적인 재미와 함께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선물한 책이 바로 「예수 최후의 날」이다. 비숍은 예수를 신격화하기보다는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앞서 언급한 작가들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최후의 날을 앞둔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시간대별로 나눠 사실적으로 묘사한 점에서 이 책은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책은 소설처럼,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그들은 끝나가는 여행길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처럼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그들 열한 사람은 몸에 흰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들의 샌들은 길바닥에 널려 있는 분필 같은 푸석돌로 말미암아 보얀 가루를 뒤집어썼으며, 옷자락은 먼지와 때에 절어 거무스름하고, 얼굴에는 어딘가 근심스러운 빛이 감돌고 있다. 그들은 과월절 축제를 위해 성벽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으로 길을 재촉하는 인파 속의 마지막 한 무리였다."
특히 최후의 만찬에 대한 자세한 묘사나 유다가 배신하는 과정에 따른 내면 묘사, 대사제 카야파의 계략, 빌라도의 예수 심문, 헤로데 왕의 예수 조롱, 골고타 언덕에서의 일, 십자가에 매달리는 과정 등에 대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는 영화를 보는 느낌을 준다.
비숍은 기자 정신을 발휘, 네 복음서에 조금씩 다르게 설명되고 있는 마지막 이틀의 상황을 주도면밀한 현장분석 능력과 감식안으로 재현해낸다. 이 책을 쓰기 위한 자료가 장장 1200쪽에 달했다고 하니, 얼마나 열심히 역사적 자료와 신학적 자료를 모아 분석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쓰게 한 힘은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 예수가 삼위일체의 두 번째라는 사실과 진실로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그것을 입증했다는 데 대한 신념이었다. 저자의 어머니는 비숍이 세 살 때부터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의 전능하심과 타인을 용서하는 힘, 사랑의 정신을 말이다. 책을 쓰는 동안 격려를 아끼지 않던 어머니가 이 책을 완성할 무렵 실명하고 만 일은 독자인 필자를 안타깝게 했다.
[가톨릭 문화산책] <25> 문학 (5) 너새니얼 호손의 장편소설 「주홍글씨」
법의 심판보다 더 중요한 건 내면의 소리 '양심과 도덕'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이라는 미국 작가의 이름은 잘 모를지라도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라는 제목의 소설은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는데 제일 최근작인 1995년 영화에서는 헤스터 프린 역을 데미 무어가, 딤즈데일 목사 역을 게리 올드만이 맡았다. 같은 제목의 한국 영화와 TV 드라마는 호손의 소설과 별 상관이 없다.
「주홍 글씨」는 대속(代贖)의 의미로 쓰였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친일파 후손의 조상 땅 되찾기 소송이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는 우리나라와는 정반대되는 일이다.
조상의 죄를 내가 대신 갚고자
영국 청교도 후손으로 미국에서 다섯 번째 세대인 너새니얼 호손은 동인도와 무역을 전문으로 하는 부유한 항구도시 세일럼(매사추세츠주 보스턴 북부)에서 태어났다.
미국으로 이주한 조상 중 제일 윗대인 윌리엄 호손은 치안판사로서 퀘이커교도 여성을 공개 태형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보다 더 강직하고 고집 센 그의 아들 존 호손은 세일럼에서 마녀사냥 소동이 일어났을 때 19명을 교수형에 처한 재판관 중 한 사람이었다.
서인도제도에서 미국으로 팔려온 한 여성 노예가 있었다. 이 여성이 아이티에서 믿는 민간 신앙인 부두(Voodoo)교를 세일럼에 전파하는 과정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여성이 북 리듬에 맞춰 추는 신비한 춤이나 정령 로아(Loa)에 홀렸을 때 엑스터시 상태를 본 사람들이 악마에 들린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이 소동은 주민들 사이에서 엉뚱하게도 저 여자가 마녀다, 저 여자도 마녀다 하며 상호 고소 고발로 이어졌는데 재판부는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19명을 마녀로 판결, 교수형을 내렸다. 한 여성이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존 호손에게 "신이 너의 가문에 저주를 내릴 것이다!"라고 부르짖었다. 1692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몇년 뒤 재판의 불공정성이 드러났고, 재판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단체로 단식하며 참회했지만 마녀 누명을 쓰고 죽은 19명의 목숨을 되살려낼 순 없는 일이었다.
이 일을 알게 된 호손은 보스턴 세관에서 일하면서도 조상의 죄악을 고백하고 싶은 마음과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선조의 죄와 대속, 타락과 구원의 문제를 주제로 한 장편소설을 써보기로 결심한다. 몇 편의 실패작 이후 19세기 미국 소설의 최고봉에 오른 소설 「주홍 글씨」를 완성한다.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다.
용서받지 못할 사랑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 후손들이 세운 도시 보스턴은 17세기 무렵, 완고한 윤리의식이 지배하고 있었다. 젊고 씩씩한 딤즈데일 목사는 교구의 아름다운 유부녀 헤스터 프린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다. 헤스터는 사랑 없이 결혼했던 나이 많은 남편이 죽은 줄 알고 조용히 과부로 살아가던 차에 그만 젊은 목사와 사랑에 빠졌던 것이고, 그 사랑은 펄이라는 생명체를 결실로 맺게 한다.
- 미국 세일럼 시내에 있는 너새니얼 호손 동상.
이 일을 발설하면 목사는 공개적으로 처형 당할 테니 헤스터는 동네 사람들의 집단 따돌림에도 함구한다. 그런데 영국에서 결혼한 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헤스터의 늙은 의사 남편은 살아 있었다. 불원천리 아내를 찾아왔더니만, 아내는 재혼하지 않았는데 자기도 모르는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었다. 전 남편은 칠링워스라는 이름으로 바꿔 자신을 숨기고, 아내를 범한 자를 찾아내 아내와 함께 복수할 결심을 한다.
딤즈데일 목사는 목회를 하면서도, 기도를 하면서도 계속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한다. 헤스터 프린은 존경받는 목사의 앞길을 망칠 수 없다는 생각에 비밀을 지키는 어려운 과정을 견뎌내며 아기를 낳는다. 그로 인해 옷에 간음(Adultery)을 의미하는 'A'라는 글자를 크게 새겨 붙이는 벌을 받고 동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며 투옥된다. 감옥에 옛 남편 칠링워스가 찾아와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실토하라고 하지만 헤스터는 단호히 거절한다. 그러자 칠링워스는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내겠다고 하면서 자신이 옛 남편이라는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고 헤스터에게 부탁한다.
헤스터는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곳에서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며 딸 펄을 키운다. 그 사이 7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 사이에선 헤스터에 대한 멸시의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다. 마을에서 존경받는 딤즈데일 목사가 병약하다고 걱정하던 사람들은 유능한 의사라고 소문난 칠링워스를 목사의 집에 머물게 하면서 주치의 역할을 맡긴다. 겉으로는 유능한 의사지만 속으로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던 칠링워스는 아이의 아버지가 목사라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치밀한 복수의 계획을 세워 서서히 목사를 압박해 나간다.
양심의 가책이 스스로를 단죄케 하다
헤스터는 목사가 갈수록 수척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결국 목사관에 와 있는 주치의가 자신의 옛 남편임을 실토한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황한 목사가 어찌할 바 몰라 하는 사이 헤스터는 목사에게 고향인 영국으로 몰래 도망가자고 제안한다. 목사는 그 제안에 동의하고, 이틀 뒤 지사의 취임식 날 성찬식 연설을 끝낸 뒤 사랑의 도피를 실행하기로 한다. 하지만 목사는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양심선언을 하고 처형의 길을 택한다. 성대하게 열린 성찬식에서 연설을 마친 목사는 다른 사람들과 길을 가던 도중 헤스터와 아이 펄을 오라고 하고는 마을 사형대에 올라가서 자신이 이 여자아이의 아버지라고 대중 앞에 자백하고 처형을 당한다. 그 순간 칠링워스는 자신의 복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알고 분노한다. 시간이 지나서 칠링워스는 펄에게 많은 유산을 남기고 죽고, 헤스터는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와 주홍 글씨를 가슴에 달고 남은 생을 살아간다.
선과 악의 기묘한 관계
호손은 이 소설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선과 악의 기묘한 관계다. 젊고 잘생긴 딤즈데일 목사가 선을, 늙고 교활한 칠링워스가 악을 대변한다고 봐선 안 된다. 칠링워스가 아내의 부정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범인(凡人)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헤스터가 마을 근처에 계속 머물며 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간 것은 사랑을 성취한 자의 자신감에서 나온 행위였다. 그리고 그 자신은 사랑하는 딤즈데일 곁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호손은 A자를 새긴 옷을 입고 살아가게 한 마을 사람들을 당당하게 대하는 헤스터를 통해 죄책감을 못 느끼는 인간의 양면성을 부각시켜 우리가 선과 악을 함부로 구분 지을 수 없게 한다.
법과 처벌의 문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법은 부정한 여인 헤스터에게 그리 큰 벌을 주지 않았다. 법의 심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양심의 소리임을 호손은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KKK단 활동 등 사사로우면서도 무서운 처벌인 '린치'(lynch)가 횡행하는 미국 사회의 모순은 이 소설에서도 재연된다. 호손은 미국이 총기 소지가 비교적 자유로운 나라가 될 것을, 연간 수만 명이 총에 맞아 죽어가는 나라가 될 것을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미식축구 선수 O.J. 심슨이 무죄로 풀려나는 나라가 미국이다.
진심으로 뉘우치면 구원을 얻으리라
딤즈데일 목사가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반면 헤스터는 하룻밤이지만 사랑을 성취했다는 생각에 별달리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딤즈데일은 자백하는 길을 택하지만 헤스터는 전 남편에게도 마을 사람들에게도 용서를 구하지 않고 끝끝내 당당하게 살다가 죽는다.
도덕관념의 문제도 생각해볼 법하다.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며 신세계를 찾아온 영국 청교도 후예들은 무척 검소하고 엄격했다고 한다. 그런데 소설에 나타난 그들의 도덕관념은 왠지 배타적이고 가학적인 것 같다.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진정한 사랑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도덕과 윤리는 사상누각인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이는 칠링워스가 아닐까. 자기가 없는 동안 목사와 바람을 피워 아이를 낳은 아내가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기미를 안 보이자 복수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영화에서는 칠링워스가 악당 이미지로 나온다. 그는 사실은 딤즈데일 목사보다 더 고뇌하는 인물이었다.
헤스터 프린은 참회하지 않았지만 잘 살아갔고, 딤즈데일 목사는 목숨을 던져 참회함으로써 결국 영혼의 구원을 얻었다. 하늘 나라의 질서가 인간 세계에서는 잘 적용되지 않는가 보다. 호손은 자기 조상의 죄에 대해서도 고민했을 것이고 법만으로는 죄와 벌이 옳게 저울질되지 않는 것을 보고도 고민했을 것이다.
권선징악은 동양적 사고요, 인과응보는 불교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호손은 이런 사고에 머물지 않고 우리 모두가 양심, 즉 도덕적 진실성을 지녀야 한다고 역설하고 싶었던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죄를 지었으면 참회해야 한다. 고해성사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하는 것이 아니랴.
[가톨릭 문화산책] <20> 문학 (4)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원했던 시인 - 한평생 학생이었던 윤동주
수치심, 죄의식의 십자가에서 피어난 불멸의 시
- 광복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이었다. 동녘이 터오기 전인 새벽 3시 36분, 윤동주는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 형무소 독방에서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한겨울인데 몸은 불덩이였다. 아! 외마디 비명을 높이 지르고는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바로 그 순간 숨이 멎었다. 만 29세, 이제 막 봉오리를 맺은 한 송이 꽃을 일제는 뚝 분질렀고, 화장터에서 몇 줌의 뼛가루로 만들었다. 용정의 묘지에 묻혀 있는 것은 후쿠오카 화장터에서 윤동주 아버지 윤영석씨가 건네받은 유골함이다.
광복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이었다. 동녘이 터오기 전인 새벽 3시 36분, 윤동주는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 형무소 독방에서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한겨울인데 몸은 불덩이였다. 아! 외마디 비명을 높이 지르고는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바로 그 순간 숨이 멎었다. 만 29세, 이제 막 봉오리를 맺은 한 송이 꽃을 일제는 뚝 분질렀고, 화장터에서 몇 줌의 뼛가루로 만들었다. 용정의 묘지에 묻혀 있는 것은 후쿠오카 화장터에서 윤동주 아버지 윤영석씨가 건네받은 유골함이다.
필자가 윤동주의 발자취를 더듬어 중국의 명동과 용정 등지를 찾아본 것은 1999년이었다. 이때 그의 묘소를 못 보고 와서 다시 가서 보고 온 것이 2003년이었다. 두 번의 답사를 회상하면서 시인의 생애와 시 세계를 더듬어본다.
한ㆍ중ㆍ일 세 나라에서 기리는 시인
대한민국 사람치고 윤동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본의 고등학교 검인정 교과서에 1990년부터 윤동주의 '서시'가 실려 일본인들도 상당수 알고 있는 시인이다. 일본에는 윤동주 시를 연구하는 학회와 민간인 단체 수가 한국보다 많다고 한다. 오오무라 마스오 같은 일본인 학자는 우리가 중국과 수교하기 전인 1985년, 북간도 용정에 윤동주의 묘와 비문이 있음을 한국 언론계와 학계에 처음 소개했고, 「윤동주와 한국문학」 같은 책도 펴낸 바 있다. 윤동주의 성장기와 행적을 중심으로 한 연구는 중국 연길의 연변대학을 중심으로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등이 발족돼 윤동주문학상을 제정하는 등 여러 가지 사업을 하고 있다. 작년에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윤동주문학관이 세워졌다. 윤동주는 연희전문(연세대학의 전신)에 다니고 있을 때 소설가 김송의 집에 하숙했는데 바로 인왕산 근처였다. 하숙한 기간은 4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별 헤는 밤'과 '자화상' 등을 썼기에 문학관과 함께 '윤동주 시인의 언덕'도 조성돼 있다.
늘 자신을 부끄러워했던 시인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아홉 살 때 명동소학교에 입학한 이래 많은 학교를 다녔다. 일본경찰에 체포될 무렵 교토 도시샤(同志社)대 영문과 학생이었는데 명동소학교 → 은진중학교 → 평양 숭실중학교 →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 연희전문 문과 → 동경 릿쿄(立敎)대 영문과 → 도시샤대 영문과를 다녔으니 3개국 7개 학교를 다닌, 평생 학생이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왜 그토록 자신을 부끄러워했던 것일까.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또 태초의 아침), "쳐다보면 하늘이 부끄럽게 푸릅니다"(길),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별 헤는 밤),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서시),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참회록),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사랑스런 추억)…. 수치심이야말로 윤동주의 가장 기본적인 심성이었다. 일본 유학시절인 1942년 6월 3일에 쓴 '쉽게 씌어진 시'에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가기 위해 히라누마 도오슈(平沼東柱)라고 창씨개명을 했는데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학병과 징용으로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기거나 죽어가고 있을 때 본인은 이름까지 고쳐가며 일본 유학을 가서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 대학 노-트를 끼고 /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가고 있으니 몹시 부끄러웠을 것이다. 핍박받는 민족을 위해 떨쳐 일어나지 않는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고, 하느님 앞에 죄인이라는 죄의식도 뿌리칠 수 없었다. 개신교 장로교의 유아세례를 받은 윤동주의 '십자가'를 보자.
"쫓아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 전문)
총을 들고 독립운동에 자진해서 뛰어들지 못하고 있었지만 자기 나름대로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시에서 묘사한 예수는 '괴로웠던 사나이'다. 전지전능한, 엄벌을 내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고뇌하는 한 명 지식인의 초상으로서 예수를 그려내고 있다. 윤동주는 인간에 대한 연민 때문에 괴로워한 예수를 따르겠다는 뜻으로 이 시를 쓴 게 아닐까. 시장에서 물건을 엎으며 가난한 사람과 함께했던 예수는 어찌 보면 혁명가였다. 예수는 자기 욕망대로만 살면 안 된다고 군중을 향해 맹렬히 꾸짖었던 사람인데, 그런 예수가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고 있다. 이 시에는 예수가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나 또한 가겠다는 각오가 담겨 있다. 십자가상, 혹은 예수의 최후에 대한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졌던 십자가를 나도 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죽음
윤동주보다 석 달 먼저 태어난 고종사촌 송몽규는 은진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중국 락양군관학교를 자기 발로 찾아간 애국지사였다. 도쿄로 유학 간 윤동주가 교토제국대 서양사학과에 다니던 송몽규의 "여기서 같이 공부하자"라는 말에 응해 교토로 가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비운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를 옮긴 뒤 요시찰 인물인 송몽규와 함께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자 일본경찰은 미행과 감시를 했고, 결국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다.
두 사람 모두 독방에 갇혔다. 매끼 식사가 꽁보리밥 한 덩어리에 단무지 몇 조각과 묽은 된장국이 전부였다. 그런데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실험용 주사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윤동주의 아버지와 같이 형무소에 가서 유해를 가져왔던 당숙 윤영춘은 '명동촌에서 후쿠오카까지'라는 수기를 발표한 적이 있다.
"몽규가 반쯤 깨진 안경을 눈에 걸친 채 내게로 달려온다. 피골이 상접하여 처음에는 얼른 알아보지 못하였다. 어떻게 용케도 이렇게 찾아왔느냐고 여쭙는 인사의 목소리조차 저세상에서 들려오는 꿈같은 소리였다. 입으로 무어라고 중얼거리나 잘 들리지 않아서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더니,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 하고 말소리가 흐려졌다."
송몽규도 얼마 뒤인 3월 10일 형무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한다. 윤동주와 같은 시기에 같은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던 또 한 명의 독립유공자 김흥술이라는 분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5~10cc의 주사를 일주일 이상 맞으면서 암산 능력을 테스트 받았다고 한다. 간수가 수인번호를 부르면 큰 목소리로 복창을 해야 했는데 윤동주는 너무 가냘픈 목소리로 대답해 윤동주의 수인번호를 기억할 수 없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국의 차가운 독방에서 윤동주는 크게 부르짖고는 운명했다. 이 세상에 27년 2개월을 산 한 청년이 일본 형무소에서, 그것도 한겨울에.
윤동주의 생가와 묘소
윤동주 고향집 안쪽에는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비문의 표제가 '윤동주 생가 옛터'다.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1932년 4월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솔가하여 룡정으로 이사하고 이 집은 매도되어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 허물어졌다. 1994년 룡정촌은 그 력사적 의의와 유래를 고려하여 룡정시 정부에서 관광점으로 지정하였다. 이에 지신향 정부와 룡정시 문련은 연변대학 조선연구중심의 주선으로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지원을 받고 국내외 여러 인사들의 정성에 힘입어 1994년 8월 력사적 유물로서 윤동주 생가를 복원하였다."
생가는 이미 허물어졌고, 이후 생가와 흡사하게 생긴 집을 여기다 옮겨놓은 것이라 했다. 생가 터에서 볼 만한 것은 낡은 우물이었다. 우물 정자 모양의 나무로 되어 있는 데다 깊이가 상당해 시인의 '자화상'에서 본 그 우물과는 거리가 있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의 우물은 물이 거울처럼 보이는 우물이어야 하는데 윤동주 생가 터의 우물은 달과 구름이 비치기에는 너무 깊었다.
용정의 묘소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공원묘지를 한참 헤매다 '詩人尹東柱之墓'라는 비석을 발견했다. 일행 중 누군가 "술을 가지고 올걸"하고 말했지만 죽는 날까지 학생이었던 윤동주의 묘에 술을 뿌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모두 고개 숙여 묵념을 했다. 시인의 묘지가 수백 기 이국인 묘와 함께 공동묘지에 있는 것이 가슴 아팠다. 하지만 윤동주는 사후에 영광을 누리고 있고, 그 영광은 한국 시문학사와 더불어 영원할 것이다.
[가톨릭 문화산책] <15> 문학 (3) 거듭된 시련 속에서 영근 인간 구원의 문학 - 구상(요한 세례자)의 시
인생사 격랑마저 품은 구도적 문확의 바다
3ㆍ1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난 시인 구상(具常)은 2004년 5월 11일에 작고했다. 시인의 8주기가 며칠 안 남았다. 한 시인의 생애가 타락과 패륜으로 점철돼 있을지라도 시가 주옥같은 경우가 있다. 보들레르ㆍ랭보ㆍ베를렌 같은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이 그랬고 전과 10범의 장 주네가 그랬고 마약에 의지하다 자살한 게오르크 트라클이 그랬다. 그들의 타락한 삶에는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지만 남긴 작품은 세계문학사에 뚜렷한 별이 됐다.
한 시인의 생애에 시련의 파도가 이렇게 쉴 새 없이 엄습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시에서만은 구도적 사색을 통한 철학적 깊이와 영성이 깃든 사상적 넓이로 감히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원대한 세계를 이뤘으니, 그가 바로 시인 구상이다.
거듭된 시련
구상 시인이 서울을 떠나 원산에서 성장하게 된 것은 아버지가 원산교구 한 성당의 부설학교 교사로 발령이 난 덕분이다. 아버지가 쉰에, 어머니가 마흔넷에 시인을 낳아 어릴 때 별명이 '만득이'였다. 8남매 중 다섯이 전염병 등으로 죽고 셋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세 명 중 큰형이 일본에 가서 공부하다 관동대지진 때 희생됐다. 지진으로 땅에 묻혀 죽은 것이 아니라 폭도들 손에 타살돼 시체를 찾을 수도 없었다. 이 일이 준 충격은 작은형을 신부의 길로 이끌었다. 막내 구상은 일본대학 종교학과에서 공부했다. 생의 구경적(究竟的) 의미를 탐색해보고 싶어서다.
유학을 마치고 원산으로 돌아와 북선매일신문 기자를 하다 광복을 맞게 됐다. 광복의 기쁨에 넘쳐 원산 일대 시인들을 규합해 동인지 「응향」을 만든 일이 생의 시곗바늘을 크게 돌려 놓았다. 평양의 문학예술동맹은 구상 시인의 작품에 대해 '반인민적 반동시'라고 낙인을 찍은 뒤 조사단을 원산으로 급파했다. 인민재판을 앞둔 시인에게 그 사실을 귀띔해준 사람이 있어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 남한으로 오게 된 구상은 어머니와 형의 안부를 자나 깨나 걱정하는 이산가족이 됐다. 아래는 문제가 된 시 '여명도'의 일부다.
"말굽 소리 / 말굽 소리 / 창칼 부닥치어 / 살기를 띠고 / 백성들의 아우성 / 또한 처연한데 // 떠오는 태양과 함께 / 피 토하고 / 죽어가는 사나이의 미소가 / 고웁다."
공산당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북한 당국의 눈에 백성들의 아우성이니, 죽어가는 사나이의 미소가 곱다느니 하는 사회 비판의 시는 용인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일단 몸을 피해 있다 당국의 분노가 수그러들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있던 터에 6ㆍ25전쟁이 일어났다. 종군작가단에 들어간 구상은 인천상륙작전 후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원산까지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오려 했는데, 그만 기회를 놓치고 만다.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펴며 내려올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구상은 뒤늦게 두 가지 끔찍한 소식을 듣는다. 배교를 강요한 공산군의 협박에 굴하지 않은 형의 총살과 어머니의 죽음을. 휴전 이후 구상은 명절만 되면 북녘 하늘을 우러러보며 가슴을 쳤다.
"어머니 / 신부 형이 공산당에 납치된 뒤는 / 대녀 요안나 집에 의탁하고 계시다 / 세상을 떠나셨다는데 / 관에나 모셨는지, 무덤이나 지었는지 / 산소도 헤아릴 길 없으매 / 더더욱 애절탑니다." -한가위, 제2연
어머니의 시신이 어디에 안치돼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아가게 된 것이다. 시인은 이산가족이 된 이후 언론인으로 살아가며, 원산에서 만났던 의사 서영옥과 경북 왜관에서 재회해 결혼한다. 묘하게도 시인이 걸린 폐결핵이 두 사람을 부부지간으로 만든다.
시인의 사랑과 질병
시인이 폐병에 걸려 요양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서영옥은 다니던 병원도 그만두고 한 번 보고 가슴에 담아뒀던 사람을 찾아 나섰다. 길을 물어가며 한 번밖에 본 적이 없는 남자를 찾아 깊은 산길을 헤맨 것이다. 인가가 없으니 제때 끼니를 먹을 수도 없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깊은 산 속에서 사흘 밤낮을 헤맨 끝에 그녀는 구상이 사는 초막 앞에 이르러 쓰러지고 만다. 남자를 병간호하겠다고 찾아간 서영옥은 오히려 그로부터 간호를 받아야 했고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나 평생을 같이하게 된다.
두 사람은 베네딕도수도원이 있는 왜관에 머물렀는데 서영옥은 그곳에서 '왜관순심의원'이란 개인병원을 열어 환자를 돌봤다. 전쟁 후엔 서울로 올라와 순천향병원 이비인후과 의사로 근무하며 평생을 의료생활에 투신했다.
시인의 폐병은 고질이었다. 3기에 이르렀다. 1960년대 국내 의사 중엔 한쪽 폐를 도려내는 수술을 성공한 이가 없었다. 구상은 일본에 가서 폐병의 세계적 권위자 오리모도 의사의 집도로 큰 수술을 한 끝에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슬하의 2남 1녀 중 두 아들이 폐 질환으로 목숨을 잃는다. 작은아들은 1987년 폐결핵으로, 큰아들은 1997년 폐렴으로 작고했으니 시인은 두 아들을 다른 병도 아닌 폐병으로 앞세우는 참척(慘慽)의 슬픔을 겪는다. 1993년에는 아내도 앞세운다. 이런 중첩된 고통 속에서 영근 구상의 시는, 한마디로 말해 위대하다.
인본주의에서 인간 구원까지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 미움으로 맺혔건만 /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 바람 속에 깃들여 있도다 //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 구름은 무심히도 / 북으로 흘러가고 /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 몇 발 //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 목놓아 버린다." - 초토의 시 8, 적군 묘지 앞에서 끝부분
자신에게 많은 시련을 안겨준 공산군 묘지 앞에 와서 목놓아 우는 시인이다. 이후 구상은 이승만 정권을 비판한 사회평론집 「민주고발」을 내는 바람에 두 번째 필화(筆禍)를 당하게 된다. 8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하면서 현실 문제에 참여할 것인가, 문학의 길로 걸어갈 것인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때 평생 문학의 길로만 걸어가기로 굳게 결심하고는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입각 제의를 받고도 경향신문 동경지국장으로 자원해 가 있기도 했다. 각 대학 이사장의 총장 제의에도 단 한 번 응한 적이 없었다. 제5공화국 실세들의 연이은 방문을 거절하며 피해 다니는 통에 수염을 깎지 못하고 기르게 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만큼 그는 올곧은 시인의 길을 걸었다. 그 길은 권력과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뇌와 인고의 길이었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 그분이 홀로서 가듯, 제2연
구상은 한국 시단의 큰 별이었다. 제자에게는 자상한 선생님이었고 대자에게는 인자한 대부님이었다. 구상은 늘 제자와 대자들, 그리고 자신이 문단에 내보낸 시인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잘되기를 기도했다.
"그리스도 폴! / 나도 당신처럼 강을 / 회심(回心)의 일터로 삼습니다. // (중략)// 당신의 그 단순하고 소박한 / 수행을 흉내라도 내 가노라면 / 당신이 그 어느 날 지친 끝에 / 고대하던 사랑의 화신을 만나듯 / 나의 시도 구원의 빛을 보리라는 / 그런 바람과 믿음 속에서 / 당신을 따라 강에 나아갑니다." - 그리스도 폴의 강, 프롤로그에서
때로는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의 길을, 때로는 그리스도 폴 성인의 뒤를 따를 것을 결심하면서 시를 썼다. 구상은 모든 주변 사람들 특히 장애인과 사형수와 무기수 등 음지의 사람에게 각별히 관심을 쏟았다. 한국장애인문인협회에서 근근이 꾸려가던 「솟대문학」에 2억 원을 쾌척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예일뿐, 그는 세인들이 잘 모르는 곳에서 사랑을 실천했다. 그 정점에 시가 있었다. 시인은 언론사를 나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대우교수를 20년 동안 하고 정년퇴임을 했다. 구상 시인은 나의 스승이자 대부님이다. 이분의 제자와 대자인 것이 자랑스럽다.
[가톨릭 문화산책] <10> 문학 (2) 성경이 가르쳐준 인류 구원 방법 -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타락의 삶 가운데서 구원자 그리스도를 갈망하다
도스토예프스키가 25살 때 쓴 중편소설 「가난한 사람들」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다. 가난하고 볼품없는 중년의 하급관리 마까르와, 고아 신세로 갖은 고난을 겪으며 부유하고 탐욕스런 지주와 마음에도 없는 결혼하는 가엾은 처녀 바르바라가 주고받은 편지들로 이뤄진 서간체 소설 「가난한 사람들」은 그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이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섬세하고도 간절한 묘사에 감격한 당대의 유명 평론가 벨린스키가 그를 와락 껴안으며 "이 소설을 정말 당신이 썼단 말이오!" 하고 말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러시아 문단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도스토예프스키는 2년 뒤 또 다른 러브스토리 「백야」를, 다음해엔 「첫사랑」을 발표한다. 모두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성경과 만남'이라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세계 소설문학사의 최고봉'이라는 별칭을 얻지 못하고 연애소설을 쓰는 평범한 작가에 머물렀을 것이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 빼앗아간 8년 세월
역사학자 E. H. 카가 쓴 「도스토예프스키 Dostoevsky 1821~1881」란 책이 있다. 이 책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이상주의적 생각을 갖고 있던 독서토론회 '페트라셰프스키'에 가입한 것이 죄가 돼, 총살형 선고를 받아 사형 집행장에 끌려갔다 황제 특사로 감형돼 8년 형을 받는 과정이 상세하게 나온다.
투옥된 것은 1849년, 28살 때로 「첫사랑」을 발표한 직후였다. 당국은 페트라셰프스키 회원들을 사형시킬 의도는 애당초 없었고, 이들처럼 작당해 책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갖지 말라는 경고를 전 러시아에 하려는 의도였다. 유죄판결을 받은 23명 중 사형수가 된 20명을 집총한 병사들 앞에 서 있게 한 뒤, 황제의 은전으로 갑작스레 감형해 시베리아 유형지로 보낸다는 것이 시나리오였다.
페트라셰프스키 회원 사건으로 독서토론회 같은 단체를 만들어 자유주의 사상을 흠모했다가는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간다는 사실이 러시아 전역에 퍼졌다. 사람들은 '자유'와 '해방'에 대해서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됐다. 카는 전기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일에 대해 이렇게 썼다고 한다.
"강도에 의해 죽게 될 사람, 이를테면 밤에 숲속에서 그의 목이 잘리게 될 사람도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사형의 경우, 마지막 희망은 사라지고 명확성만이 남는다. 명확한 선고가 있고 도망칠 수 없다는 확신으로 온통 두렵기만 한 고통이 깃든다. 이보다 더 큰 고통이란 세상에 없다. 미치지 않고 이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이 있다고 누가 말했던가. 이처럼 상상할 수 없고 아주 쓸모가 없는 굴욕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사형 선고가 낭독되고 이 고통을 맛보게 한 뒤 '자, 너는 사면되었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 그렇게 당해본 자는 아마 알 것이다. 이러한 고통, 이러한 공포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말했다. '인간을 그렇게 취급한다는 것은 위법이다'라고."
- 베로프가 그린 도스토예프스키 초상.
성경을 손에 쥐고 읽고 또 읽다
조사받는 과정에서 8개월 동안 독방에 감금됐던 도스토예프스키는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사형집행이 정지된 날부터 4년 동안 발목에 족쇄를 차고 살아가게 된다.
시베리아 유형지로 끌려가는 도중 후 토블스크란 도시에서 6일간 머무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중간 기착지인 이곳에서 인생 전환을 이룬 하나의 사건을 겪는다. 이 사건은 사형 선고와 집행 직전의 감형보다 더 극적인 일이었다. 24년 전에 일어난 사건인 데카브리스트 난(12월의 난, 나폴레옹 시대에 자유사상을 접한 귀족출신 청년 장교들이 농노제 폐지와 전제 군주제를 반대하며 일으킨 반란)의 생존자들이 그때까지도 형을 살고 있었는데, 그들의 부인이 이곳에 와서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이 여인들은 동토요 오지인 시베리아로 떠나는 죄수들에게 돈과 음식과 옷가지를 선물하면서 책도 한 권씩 주었다. 바로 성경이었다. 죄수들이 소지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인 성경을 받은 일행은 사흘을 더 여행한 뒤 옴스크의 감옥에서 4년을 살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독서토론회에 가입하지 않았더라면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일도, 성경을 숙독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노름빚을 갚으려 소설을 쓰다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성경만 수십 번 읽는 동안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큰 변화가 온다. 그 덕에 그는 고통을 통해 영성을 얻고, 하느님께 대한 경배와 이웃에 대한 사랑을 동시에 행해야 구원이 이뤄진다는 그리스도 가르침을 문학적으로 구현하게 된다.
시베리아에서 군복무를 할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술주정뱅이의 아내인 마리아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하게 됐다. 술주정뱅이가 죽자 아들까지 있던 마리아와 결혼하는데, 그녀는 폐결핵에 걸려 자리보전을 한다. 그 무렵 그는 사면 복권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됐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유럽 어디를 가나 도박을 했고, 빚을 지면 형에게 돈을 부쳐달라고 애원하는 편지를 썼다. 빚을 갚으려고 소설을 쓰다 간질이 오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망나니 삶의 나날이었다. 사랑하던 여인에게 버림받고 다시 두 여인을 사랑했으나 차이고 만다. 세 여성 모두 처음에는 유명한 소설가라는 말에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관심을 기울이다 상습 도박꾼에다 간질병 환자임을 알고는 떠나가는 식이었다.
생활은 엉망이었지만 노름빚을 갚기 위해 「죽음의 집의 기록」(1862), 「지하 생활자의 수기」(1864), 「죄와 벌」(1866), 「백치」(1868) 등을 써나갔다. 작품의 주제는 궁극적으로 타락한 자의 신성 획득이었다. 죄를 짓고 반드시 뉘우쳐야 한다는 것을 작품으로 설파했으니 어찌 보면 자기구원의 방법이 소설쓰기였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그리스도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길고 가장 중요한 작품이 1879년부터 1월부터 다음해 11월까지 연재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카라마조프가의 둘째 아들 이반이 동생 알료사에게 얘기해주는 식으로 전개되는 '대심문관'편은 「백치」의 주인공 미시뀐 공작의 간질발작 장면과 함께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백미이다.
이반은 16세기 때 지상으로 내려와 기적을 행하는 예수를 옥에 가둬놓고, 아흔 살의 수도승 대심문관이 예수를 심문하는 장면을 설명해주며 그리스도교 본질에 대해 묻는다. 우리는 눈앞에 안 보이는 신을 사랑해야 하나, 헐벗은 이웃을 사랑해야 하나…. 도스토예프스키 전기를 쓴 또 한 사람인 콘스탄틴 모출스키는 소설의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신의 본성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세상 구원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내놓은 신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그리스도는 구원자, 구세주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유일한 해방자였다. 대심문관은 어두운 생각과 불타는 열정으로 감옥에 갇힌 그리스도를 폭로한다. 그리스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폭로에 입맞춤으로 대답한다. 그는 굳이 자신을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그분의 존재 자체로 그의 적의 주장은 위력을 잃고 만다."
타락한 삶 가운데서도 구원의 빛을 찾으려 했던 자신의 인생역정을 문학으로 잘 승화시켰음을 모출스키는 밝히고 있다.
사랑의 승리
도스토예프스키는 마흔다섯살 때 악덕 출판업자에게 돈을 빌리면서 장편소설을 정해진 날까지 못 주면 위약금과 함께 앞으로 9년 동안 쓰는 작품의 저작권을 넘긴다는 내용에 서명한다. 그때 급히 구한 속기사 안나는 스무 살이었다. 쓸 시간이 없어 구술하면 받아 적는 식으로 소설을 완성시켜 나갔다. 안나는 천재작가의 위대한 소설에 감동해 그를 내심 사랑하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자기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 준 어린 처녀를 사랑해 새로운 소설의 줄거리를 말하는 수법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이렇게 험한 생을 살아온 사람의 사랑 고백에 그녀는 '네'라고 답했을까요?" 안나는 벅찬 가슴으로 이렇게 답했다. "나라면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생명이 다하도록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하고 대답할 겁니다." 청혼이었고 결혼 승낙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도스토예프스키 생애 최대의 도박이었는데 희한하게도 그때 완성한 소설 제목이 '도박자'였다. 이 도박은 노름꾼 소설가를 구해준다. 안나는 어떠한 고난과 가난 속에서도 남편이 소설을 쓰게 뒷바라지해 결국 인류에게 구원의 빛을 전하는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완성케 했다. 소설을 탈고한 3개월 뒤에 그는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다.
이 소설의 첫 페이지는 헌정사다. "안나 그리고 리예브나 도스토예프스카야에게 바친다." 그는 생애 최후의 소설을 아내에게 바쳤다. 두 번째 페이지에는 요한복음 12장 24절이 나온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는 또 생애 최고의 소설을 그리스도에게 바쳤다.
[가톨릭 문화산책] <5> 가톨릭 문학 (1) 중세 어둠을 밝힌 찬란한 문학 - 단테의 '신생'과 '신곡'
악을 물리친 사랑의 실천, 구원의 지름길로 안내
이탈리아의 위대한 시인이자 중세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평가받는 단테는 「신생」과 「신곡」을 썼다. 서정시를 덧붙인 산문 「신생」에서 단테는 첫사랑 베아트리체를 만나는 과정을 설명한 뒤 그녀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해 열렬히 찬미한다. 「신곡」은 정치적 이유로 피렌체에서 추방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운명과 방황과 구원의 과정을 가톨릭적 시각으로 그린 작품이다.
단테 등장의 역사적 배경
피렌체는 단테가 태어난 1265년 무렵, 일종의 도시국가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상업이 발달해 해외무역의 폭을 넓혀가고 있었다. 35살 때인 1300년, 그는 피렌체를 다스리는 6인의 행정위원(지금의 장관) 중 한 사람이었다. 이탈리아의 두 세력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전개할 때 마침 단테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피렌체를 떠나 있었다. 그 덕에 목숨을 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네리 파의 승리로 싸움이 끝나 그는 고향 피렌체로 돌아갈 수 없었다.
네리 파는 조국을 떠나 있던 단테에게 공금횡령죄를 뒤집어씌우는 등 벌을 내린다. 그리고 빨리 귀국해 법원에 출두하라는 명령까지 내린다. 단테는 그 처분이 부당하다고 항의하는 서한을 보낸 뒤, 법원 출두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재판부는 단테에게 영구추방령과 전 재산 몰수라는 엄벌을 추가로 내린다. 자연히 1302년부터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망명길에 오르게 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글을 쓰는 것뿐, 그래서 탄생한 작품이 「신곡」이다.
이 도시 저 마을을 방랑하며 그는 필생의 대작 「신곡」을 구상하고 1307년(42살)부터 집필을 시작, 13년에 걸쳐 완성한 뒤 곧바로 숨을 거둔다.
베아트리체와 짧고 슬펐던 사랑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외롭게 자라던 소년 단테는 9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이웃 마을의 지체 높은 귀족 집안 잔치에 초대를 받아 간다. 단테는 베아트리체와 첫 만남의 순간을 1291년에 펴낸 「신생」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신생」은 자전적 내용인데, 주로 베아트리체와 사랑의 전말을 산문과 운문을 섞어 쓴 것이다. 베아트리체는 눈에 띄게 예쁜 소녀였던가 보다. 기품 있어 보이는 고상한 자주색으로 테두리를 한 옷을 입은 소녀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니 단테는 조숙한 소년이었음이 틀림없다. 한 살 아래인 베아트리체와 만나는 순간, 소년 단테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전율을 느끼며 소녀의 모습에 매료된 것이다. 이날 이후 단테는 소녀와 마주칠 것을 기대하며 길을 걸었지만 좀체 만날 수 없었다.
단테는 아버지의 명으로 산타크로체 수도원의 기숙학교에 가게 되는데 특히 수사학에 관심을 쏟게 된다. 단테는 라틴어 외에 프랑스어와 프로방스어에 정통했고 춤과 노래, 그림 같은 예술 외에 법률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이것은 뒷날 「신곡」 집필에 큰 도움을 준다. 그는 로마시대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존경해 그의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꿈을 키워간다. 수도원에서의 공부를 마친 시점은 1282년이었다.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공부는 이것으로 끝"이라면서 고향 피렌체로 향했다.
고향에서 지낸 단테는 어느 날 피렌체를 가로지르는 아르노 강가에 두 여인과 함께 산책 나온 베아트리체를 우연히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시간은 오후 3시경이었다. 이날 상황은 「신생」을 보면 자세히 묘사돼 있는데, 이 재회 상황은 대단히 유명해 헨리 홀리데이란 화가가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다. 이날 이후 단테는 상사병을 심하게 앓았다. 단테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새어머니는 결혼을 시키면 기운을 차리리라 생각하고는 집안 어른들을 설득해 단테의 결혼을 서두른다.
단테는 12살 때 이미 젬마 도나티와 혼인 약속이 돼 있었다. 그 시절 이탈리아에서는 집안 어른끼리 약속하면 자식은 그것에 따라야지, 연애해서 결혼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젬마는 통상적인 지참금의 2배나 되는 돈을 단테의 집으로 보냈다. 일이 여기까지 진행됐기에 단테는 차마 파혼할 수 없었다. 만약 단테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저는 젬마와 결혼할 수 없습니다"하고 말할 경우, 큰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젬마의 아버지는 단테 집안의 어른에게 결투를 신청할 수도 있었다. 집안 어른들이 나이가 얼추 맞는 단테와 젬마를 약혼시킨 것은 당시 관례로 보면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베아트리체와 강가에서 재회하고 나서 2년 뒤, 단테는 젬마와 결혼한다. 두 사람 사이에 4명의 자식이 태어나지만 단테는 자신의 어떤 작품에서도 아내의 이름을 거론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결혼생활이 위기에까지 이르거나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운명의 여신은 단테의 소망에 또다시 어깃장을 놓는다. 베아트리체 역시 집안에서 정해놓은 사람과 1287년 결혼을 한 것이다. 운명의 여신은 두 사람이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하더니 심술을 한 번 더 부린다. 베아트리체가 24살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단테가 16년 동안 남몰래 쌓아올린 간절한 사랑의 탑은 그날로 산산이 무너져 내린다. 「신생」에서는 베아트리체가 세 번째 만남 이후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는 것으로 처리한다.
단테는 몇 번 쳐다보기만 하고서 베아트리체를 그렇게 사랑했던 것일까? 두 사람 사이에 다소나마 '교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단테의 전기 「단테의 삶」을 쓴 보카치오는 이 점을 부인, 별다른 교제가 없었다고 했다. 아마도 서로 깊이 사귀면서 사랑을 나눴더라면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구원의 여성'으로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가를 잘 정리해 말한 상티스는 단테에게서 베아트리체는 "미, 덕, 지혜의 상징이고 영원한 여성의 이미지를 가진 아름답고 새로운 천사이자 아직 인간화되지 않은 신성을 지녔으며 실현되지 않은 이성이었다"고 했다.
「신곡」에 대한 후세의 평가
베아트리체의 영상은 「신곡」에서 천사로 구현된다. 「신곡」은 모두 100곡, 1만 4233행으로 된 방대한 시다. 줄거리는 단테가 부활절을 맞아 지옥ㆍ연옥ㆍ천국을 일주일 동안 여행하는 도중에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쓴 여행기 형식이다. 숲 속에서 단테가 헤매고 있을 때 현자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단테를 지옥과 연옥으로 안내해 구원해줄 것을 약속하는데, 이 베르길리우스는 사실 베아트리체의 간청으로 타락한 단테를 구원하러 온 것이다. 천국 편의 안내자는 베아트리체다. 단테는 자신이 타락한 생활과 죽음의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늘나라의 베아트리체가 구원의 손길을 뻗쳐준 덕분이라고 생각해 「신곡」을 이와 같은 형식으로 썼다.
단테는 1321년 라벤나의 영주인 노벨로의 보호를 받으며 「신곡」의 마지막 부분을 완성한다. 단테는 노벨로의 부탁을 받고 베네치아에 사절로 갔다가 돌아오던 중에 말라리아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라벤나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안장돼 있다. 첫사랑을 만났던 고향 피렌체에는 끝내 가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이다.
영국 시인 엘리엇은 "근대 세계는 셰익스피어와 단테가 나눠 가졌다. 제3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중세와 르네상스기 문인 중 단테에 필적할 사람은 셰익스피어밖에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한 바 있다. 공산주의혁명 이론가 엥겔스도 종교적 상상력의 산물인 「신곡」의 가치를 인정, "봉건적 중세기의 종결과 근대적 자본주의의 단초는 한 위대한 인물을 표지로 삼을 수 있다. 그 인물이 바로 이탈리아의 단테다. 그는 중세기 최후의 시인인 동시에 신시대 최초의 시인이다"는 최고의 찬사를 바친다.
「신곡」의 겉은 애절하고도 처절한 사랑이야기지만 속은 좀 다르다. 지옥에서 벌을 받고 있는 자들의 죄는 크게 나눠 무절제, 폭력, 사기다. 지상에서 권력을 갖고서 그것을 휘두르며 남을 괴롭힌 자는 저승에서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쓴 부분이기에 사실 지옥 편은 단테 자신의 한풀이 성격이 강했다.
한편 연옥은 희망을 갖고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자 죄를 정화하는 영혼들 세계다. 하느님이 언젠가는 구원해줄 것이라 믿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이들이 있는 곳이다. 연옥 편의 의의는 인간이 자유의지 소유자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진심으로 회개하면 저승에 있더라도 하느님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 것이라고 단테는 주장했다.
천국에는 어떤 사람들이 가는가. 단테는 확실한 믿음을 갖고서 하느님 나라에 들기를 늘 소망하며, 살아 있을 때 사랑을 실천한 이라면 광명의 세계에서 영원하고도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하느님 약속을 상기시켰다. 그런데 조건없는 믿음이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니라 악과의 투쟁을 통해 승리한 자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라고 해 인간의 선의지를 강조했다.
기도만 열심히 한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바로 그것을 알려주는 이가 베아트리체다. 사랑의 실천, 「신생」과 「신곡」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망명지를 떠돈 외로운 정객 단테는 끊임없이 젊은 날의 사랑 베아트리체를 떠올렸고, 그녀를 통해 악을 물리치는 선의 힘을 보여줘 두 작품을 불후의 명작이 되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