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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구나무로 서서 바라보는 세상
이형권(문학평론가)
1. 시인의, 시인에 관한 사유
이 시집의 문턱에 두 편의 시가 한 쌍의 장지문처럼 걸려 있다. 하나는 “4월에 오는 비/ 봄비// 4월에 우는 비”(봄비」 전문)이고, 다른 하나는 “시인은 물구나무로/ 지구를/ 들어 올리는 사람이네”(「물구나무서다」 전문)이다. 아주 짧은 이 두 편의 시는 이 시집의 전체적인 지향점을 암시해 준다. 앞의 시에서 “4월”에 내리는 “봄비”를 “우는 비”라는 표현은 매우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보통 “4월”의 “봄비”는 세상에 생명수를 뿌려주어 만물이 소생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시인은 왜 그런 “봄비”를 “우는 비”라고 표현했을까? 그것도 시집의 첫 작품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을까? 이 궁금증에 대한 대답은 이 시집을 끝까지 읽어보면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이 시집에는 너무나 비속하고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세상사에 대한 부정적, 비판적 인식이 빈도 높게 드러난다. 이러한 인식이 마음속에 가득한 시인이 바라보는 봄비는 울음의 표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엘리어트가 「황무지」에서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엘리어트가 삭막한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 시선으로 그렇게 노래했다면, 박만진 시인은 진실한 세상을 꿈꾸는 마음으로 울음을 노래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두 번째 장지문처럼 걸려있는 「물구나무서다」는 “4월”의 “봄비”를 “우는 비”라고 노래하는 시적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 “시인”을 “물구나무”로 서는 사람이라고 한 것은, 시인이 견지하고자 하는 ‘다른’ 시선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무릇 시인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시선을 간직한 사람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것에서 ‘다른’ 모습을 찾아내는 능력의 소유자이다. 시인을 “물구나무로 지구를 들어 올리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능력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물구나무”로 서면 세상이 거꾸로 보이기 마련이고, 세상이 거꾸로 서 있다면 “물구나무”로 서야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된다. 생각해 보면 세상(“지구”)은 상식과 진리에 어긋나는 것들, 비루하고 부정적인 것들, 즉 정상을 벗어나 거꾸로 된 것들이 너무도 많은 곳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러한 세상을 무심히 지나쳐 가지만, 시인은 그것을 비판적으로 인식하여 진실을 발견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시인을 일컬어 “물구나무로 지구를 들어 올리는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모습은 당연히 박만진 시인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인은 “물구나무로/ 지구를/ 들어 올리는 사람”이라는 박만진 시인의 시인론은 아주 흥미로운 경구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주 공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모두 거꾸로 서 있다. 그렇다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거꾸로 서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다. 문제는 문명이나 자본가 욕망으로 인해 세상이 타락할수록 인간이 거꾸로 서기(실은 똑바로-순수하게 서기)를 거부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은 이처럼 거꾸로 서기를 거부하는 사람, 혹은 거꾸로 선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하늘을 바닥 삼아 지구를 밟고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이다. 하여 “물구나무로/ 지구를/ 들어 올리는 사람“이라는 의미심장한 시구는 사람을 사람답게, 지구를 지구답게 살리고 싶은 시인의 소망을 담고 있다. 박만진 시인의 시 쓰기는 일평생 이러한 소망을 이루기 위한 지난한 과업이었다. 그 구체적인 양상은 이 시집에서 언어의 결핍감과 자각, 속악한 세상에 대한 풍자, 시간의 소멸성에 대한 부정 등으로 구체화된다. 시인은 이들을 통해 언어의 진리 혹은 삶의 진실을 찾기 위해 기꺼이 물구나무를 선다.
2. 웃보와 옹달새, 새로운 언어의 탄생
시는 최고(最古/最高)의 언어 예술이다. 시는 주술적 언어의 시대, 신화적 언어의 시대부터 오늘날 첨단과학의 시대까지 인간의 삶과 영혼의 깊은 곳을 드러내는 형식이었다. 예술적 차원에서도 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전위적 상상과 사유의 매개 역할을 충실히 해 왔다. 그런데 문제는 언어가 사회적 규약의 일종으로서 불완전하고 불연속적이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언어의 다양한 조합으로 그 결핍감을 해소하고자 하나 복잡다단한 세상을 온전하게 개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가령 ‘빨갛다’라는 색감의 실제는 미세하게 구분하면 수백 수천 가지, 아니 그 이상일 터인데, 인간의 언어는 고작 몇 가지 단어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기존의 언어만을 습득하여 사용해도 결핍감이나 부족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다르다. 시인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는 존재이기에 언어가 더욱 불완전하다고 느낀다. 복잡 미묘한 시상을 표현하고자 언어를 부려보지만 언제나 흡족하지 않다. 그래서 시인은 그러한 결핍감을 환기하면서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지난한 일을 수행하는 것인데, 시인을 일컬어 세상의 발견자이자 언어의 창조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울보는 있는데
웃보는 왜 없나
울보의 반대말이
웃보 아닌가
서러움을 울보로
다 감쌀 수 있나
밥보라는 말에서
바보라는 말도 생겼는데
언제나 없이
잘 웃는 아내를
웃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기꺼움을 웃보로
다 감쌀 수 있나(「웃보」 전문)
이 시는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흥미롭게 드러내 준다. 시인은 “울보”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생각하면서 언어에 대한 의문을 가진다. “울보”라는 말은 ‘울다’라는 동사의 어간 ‘울’에 정도가 심한 사람에 붙는 접미사 ‘보’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말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바보”뿐만 아니라 뚱보, 먹보, 잠보 등도 그러한 형식으로 만들어진 말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러한 “울보”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세 가지 의문점을 갖는다. 첫째는 “울보”라는 말이 없는 점에 대한 것이다. “웃보는 왜 없나”라는 의문 속에는 언어의 결핍감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둘째는 “울보”라는 말이 지닌 한계이다. 시인은 “울보”라는 말이 “서러움을 다 감쌀 수 있나”라고 의문을 가진다. 사실 사람이 운다는 것은 그 원인이 여러 가지다, 슬퍼서 울 수도 있고, 서러워서 울 수도 있고, 고독해서 울 수도 있고, 심지어는 기뻐서 울 수도 있다. “울보”라는 말은 이렇게 복잡한 인간의 심리를 온전하게 드러내기 어렵다. 그래서 슬픈 울보, 서러운 울보, 고독한 울보, 기쁜 울보라고 수식을 사용해야 그 원래의 의미를 어느 정도 드러낼 수 있다. 울음의 원인이 더 복잡미묘할 경우 수식어가 더 많이 필요하다. 시인은 이러한 언어의 한계를 생각하고 있다. 셋째는 “웃보”라는 말이 가질 한계이다. 물론 “웃보”라는 말은 표준어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않는 것이다. 시인은 이 말의 존재를 가정하여 그 한계를 인식하기도 한다. “기꺼움을 웃보로/ 다 감쌀 수 있나”라는 의문 속에는 언어의 결핍감을 보완하기 위해 더 많은 말을 만들어서 사용해도 언어는 언제나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시인은 “웃보”와 같은 신조어를 만드는 사람이면서, 기존의 언어에 대한 갱신의 의미를 지닌 사람이다.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는 언어를 갱신하여 새로운 감각을 창조하는 것이다. 기존의 언어에 대한 갱신의 의지는 가령 다음과 같다.
서로가 바꿔 부르면
좋을 듯싶은 이름이 있다
지저귀는 종달새를
옹달새라 부르고
맑고 깊은 옹달샘을
종달샘으로 부르면 어떨까
재잘대는 종다리를
종아리라 부르고
아이들의 종아리를
종다리로 부르면 어떨까
곱다시 고쳐 부르면
좋을 듯싶은 이름이 있다
들녘 개불알꽃이란
꽃 이름이 아닌 것 같고
길가 며느리밑씻개란
풀이름이 그렇고 그렇다(「이름」 전문)
언어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명명의 기능이다. 언어는 사물이나 존재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것을 인간의 인식과 삶 속에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이 시에서 “서로가 바꿔 부르면/ 좋을 듯싶은 이름”을 제시하고 있다. 즉 이미 명명된 “종달새”와 “옹달샘”을 갱신하여 “종달샘”과 “옹달새”라고 부르고 싶다고 한다. 단어의 합성을 바꿍어 봄으로써 기존의 언어 이미지나 감각을 갱신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종다리”와 “종아리”의 지시 대상을 바꾸어 보고 싶다고 한다. 사실 “종다리” 새는 다리가 아니라 날개로 다니는 것이니 종‘아리’라고 부르고, 아이들의 다리를 종‘다리’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언어 감각이 문제가 있으므로 그것을 갱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곱다시 고쳐 부르면/ 좋을 듯싶은 이름”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개불알꽃이란/ 꽃 이름”과 “며느리밑씻개란/ 풀이름”이 그것인데, 이들의 이름은 꽃이나 풀을 지시하는 것으로서 어색한 것이 사실이다. 순수한 자연물을 비속한 언어로 명명하는 것에 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언어의 명명 기능에 대한 문제 제기는 기존의 언어에 대한 이의로 이어지기도 한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자의성을 지닌 것이어서 사물이나 존재와의 결합이 필연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인은 별의 이름에 이의를 제기한다.
은하수 같은 사람들 별이 되기를 소망하는 지구촌에 예쁜 꽃, 푸르른 나무, 신비로운 새 이름도 많은데
뭇 별 가운데 어찌 동물의 이름들이 반짝이는가
하늘의 별자리조차 바꾸어 놓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세월의 마차부라 해도 좋지 싶다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조금도 멀미를 하지 않으니 천만다행이다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여기던 초롱초롱한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밤하늘을 파도 소리 잔잔한 원산도에서 본다
어줍은 나는 뭇 별 가운데 어릴 때 울 엄니께서 정화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리던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을 잘 알고 있다
초저녁 서녘 하늘 개밥바라기랑 밤하늘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다리꼴 사자자리쯤 겨우 알고 있다
다른 별자리에 도무지 캄캄한 나는 동물 이름의 별들을 손가락 꼽아 헤아려본다
염소, 양, 황소, 외뿔소, 큰개, 작은개, 사냥개, 살쾡이, 전갈, 큰곰, 작은곰, 기린, 사자, 작은사자, 고래,
아하! 뱀별에 땅꾼별도 있구나
여섯 줄을 뜯는 거문고별이며 양떼를 모는 목동별을 만나고 싶다
파도 소리 잔잔한 원산도에서 본다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여기던 초롱초롱한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밤하늘을(「뭇 별 가운데」 전문)
이 시는 “원산도”에서 별무리를 바라보면서 별 이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뭇 별 가운데 어찌 동물의 이름들이 반짝이는가”라는 시구가 그것이다. 실제로 별(자리) 이름은 시인이 지적한 대로 유난히 동물의 이름을 빌린 것이 많다. “염소, 양, 황소, 외뿔소, 큰개, 작은개, 사냥개, 살쾡이, 전갈, 큰곰, 작은 곰, 기린, 사자, 작은 사자, 고래,// 아하! 뱀별에 땅꾼별도 있구나”라는 시인의 탄식은 별(자리) 이름에 동물과 관련된 것이 많은 것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담고 있다. 별은 희망과 순수와 기쁨과 소망과 같은 긍정적인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것인데, 본능적이거나 포악하거나 상극적인 동물의 이름을 붙인 것에 대해 문제가 많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여섯 줄을 뜯는 거문고별이며 양떼를 모는 목동별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이는 자연과 우주와 인간이 어우러진 순수한 세계에 대한 소망과 관련된다. 혹은 “초롱초롱한 별들”의 세계에서 시심을 얻으려는 시인의 소망을 드러낸 것이다. 이 소망은 언어가 곧 세계관의 반영이므로, 순수한 언어를 회복하여 포악하고 삭막한 세상을 평화로운 세상으로 갱신하고자 하는 의지와 관련된다.
한편, 고유어가 부족하고 외래어가 범람하는 현상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이즈음 우리의 언어 형상은 날이 갈수록 외래어 내지는 외국어 선호 현상이 강화되고 있다. 심지어는 외국어를 써야만 세련된 감각을 소유한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이러한 세태를 염두에 둔 듯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그러나 곤포는 한자말이고 사일리지는 영어 아닌가// 잘 몰랐을 때는 몰랐을 때고 부아처럼 슬그머니 부끄러워지는 것이// 농부들은 차치물론하고 도대체 우리나라 국어학자들이며 시인들은 뭘 하는지 벌레를 씹은 듯 자괴감이 들다”(「곤포梱包 사일리지」 부분). 이 시구는 “곤포”나 “사일리지”라는 말에 해당하는 고유어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추수가 끝난 가을 들녘에 둥글게 말아놓은 볏짚 뭉치를 뜻하는 “곤포”는 보통 흔하게 쓰이는 말이 아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짚 뭉치’ 정도가 될 터인데, 이 말은 아직 하나의 합성어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시인이 이런 현실에 대해 “우리나라 국어학자들”과 “시인들”을 탓하며 “자괴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 대목은 박만진 시인의 언어 의식 내지는 국어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속 깊다는 것을 알려준다.
3. 비치파라솔과 모자, 다른 생각의 발견
언어의 불완전성 혹은 언어의 결핍감을 느끼는 것은 복잡미묘한 감성을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시인의 숙명이다. 아니 시인은 언어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인식을 동력으로 삼아 더 나은 언어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시를 쓴다. 언어의 결핍감이나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은 시인들에게 다양한 실험 정신을 갖게 한다. 실험적 시는 다다시, 초현실주의시, 해체시, 무의미시 등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나지만, 이 시집에서 보이는 것은 구체시(具體詩)와는형식이다. 구체시는 보통 일반적 구문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시상을 언어의 형상적 배열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전위적 형식이다. 박만진 시인은 전체적으로 전통적인 시학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적지 않은 작품들에서 이러한 구체시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만
리 포
해수 욕장
파
라
솔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천
리 포
해수 욕장
파
라
솔 (「비치파라솔」 전문)
이 시는 천리포와 만리포 해변에 놓여 있는 “비치파라솔”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에서 두 연의 형상은 같지만, 그 형상에 담긴 내용은 부분적으로 다르다. 우선 그 지리적 배경이 1연에서는 만리포이고 2연에서는 천리포이다. 그리고 “비치파라솔”의 지붕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7음계인 “도레미파솔라시도”와 7색조인 “빨주노초파남보”를 각각 배열하고 있다. 두 시구절이 모두 7음절로 구성되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천리포와 만리포는 여름 휴가철에 사람들이 즐겨 찾는 유원지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지붕을 형상한 언어 배열이 만리포는 청각적 이미지를, 천리포는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특별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비치파라솔”이라는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감각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구체시의 일반적 양식인 청각시와 시각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언어 혹은 기존의 문학적 관습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언어가 의미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을 만드는 새로운 용도로 사용되는 셈이다. 이로써 시인은 언어의 불완전성을 극복하여 새로운 시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했다고 하겠다.
그런데 구체시는 언어의 의미를 반드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구체시는 형상성만을 추구하면서 기존의 언어와 시적 관습을 부정하기도 하지만, 시어의 형상성과 그 의미를 결합시켜 일정한 주제 의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모자 위에 새들이 날아가고
흰 구름 흘러가고
달이 뜨고
해가 지고
하늘 드높고 드넓지
신발 아래 흙먼지 날리고
샛길이 생기고
시냇물 흐르고
강물이 흐르고
바닷물 출렁이지
머리가 작고
다리와 목이 긴
타조 알의 노른자위처럼
지구는 둥글고
지구는 돌고
강원도 양구군 봉화산 기슭이
한반도의 배꼽,(「생각의 모자」 전문)
이 시는 “모자”의 형상성을 바탕으로 “지구”에 관한 “생각”를 드러낸다. 1연과 2연의 첫행은 모자의 챙이 길게 나온 형상을 드러내면서 그 아래로 우주에 관한 다양한 생각들을 나열하고 있다. 1연은 “모자 위”의 하늘에 관한 상상을 자유롭게 펼치고 있다. “새들”과 “흰 구름”과 같은 대기권의 존재에서부터 “달”과 “해”와 같은 우주적 세계까지 상상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늘 드높고 드넓지”라는 천지현황(天地玄黃)의 진리를 깨닫고 있다. 이에 비해 2연은 “신발 아래” 즉 모자 아래의 세계를 형상하고 있다. “흙먼지”나 “샛길”과 같은 육상의 존재에서부터 “시냇물”과 “강물”, “바닷물”과 같은 물의 세계까지 상상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의 모자”는 “지구는 둥글고/ 지구는 돌고”라는 시구에 이르러 지구 전체를 통람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런데 “지구”의 중심이 “강원도 양구군 봉화산 기슭” 즉 “한반도의 배꼽”이라고 함으로써 우주적 상상에 구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모자의 형상과 “모자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결합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의 형상을 통한 시적 상상의 방식은 “네모난 아파트/ 네모난 10층 바닥은/ 네모난 9층 천장이고/ 네모난 10층 천장은/ 네모난 11층 바닥이네/ …(중략)… 네모난 세월에 갇혀/ 네모난 삶을 사는 사람아!/ 그대의 바닥이/ 누군가의 천장일 수도 있으리니/ 세상 걱정 다 짊어진 듯이/ 제발 밑바닥 인생이라/ 한숨짓지 마시게나”(「네모난 바닥」 부분)와 같은 시에서도 흥미롭게 드러난다. 이 시는 언어 자체가 만드는 형상성은 약하지만, “네모난”의 반복과 “네모”의 형상은 외형과 다르게 아이러니한 인생을 흥미롭게 표상하고 있다. 이 시에서 “네모난 삶에 갇혀/ 네모난 삶을 사는 사람”에 드러나듯이 “네모”는 일차적으로 규격화된 삶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대의 바닥이 누군가의 천정일 수 있”다는 점에서 남을 위해 희생하는 이타적인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네모”를 상상력의 매개로 삼아 특이한 시상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박만진의 시 가운데 문자가 가진 형상성을 통해 사회비판적인 의식을 드러내는 형식을 취하는 것도 있다.
LH 부동산 사태가
LH가 아니라
내 사태로 읽히는 것은
내 탓이요
내 탓이요
LH 큰 탓이로소이다
아니, 곰곰
참따랗게 되짚어 보니
문문
LH 탓이요
LH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문문」 전문)
이 시는 영문 이니셜인 “LH”를 교묘하게 활동하여 시상을 전개한다. “LH 부동산 사태”는 최근 우리 사회의 이슈로 떠올라 국민적 공분의 대상이 되었다. 공공주택 건설을 위해 만든 기관의 임직원들이나 관련 공무원들, 혹은 정치 지도자들이 사적인 이익을 위해 부정을 저지른 것이다. 이러한 일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그들을 비난하고 고발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사태에 대하여 “내 탓”이라고 하고 있다. “LH”와 “내”의 형상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부동산 문제를 ‘내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유희로 시작된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자기 성찰이라는 소중한 시적 사유를 얻은 셈이다. 그리고 3연에서는 언어유희가 정치적 비판 정신을 드러내는 데 활용된다. 즉 “LH 사태”의 원인을 “곰곰/ 참따랗게 되짚어 보니/ 문문”에서처럼 현직 “문” 대통령의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사실 이번 사태의 행정적 책임은 최종적으로 그 수반인 대통령에게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비판이다. 이렇듯 박만진 시인은 언어유희를 통해 일반적 언어의 용법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시에서 “꼬꼬 댁 꼬꼬 우는/ 저 닭은 물론이고/ 다른 암탉들의 고향도/ 꼬꼬다/ 춘천 댁, 김천 댁, 해남 댁은/ 안성 댁의 이웃이다”(「꼬꼬 댁」 부분)라는 표현도 비슷한 표현 방식을 보여준다.
4. 온전한 세계, 생태 낙원을 찾아서
이 시집에서 언어의 불완전성은 곧 세상의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시인은 그러한 언어의 갱신을 통해 비속한 세상의 갱신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생각하는 비속한 세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앞서 살핀 시편들을 참조하건대, 개인마다의 이기적 욕망으로 파편화된 세상이다. 시인은 이러한 세상을 갱신하고자 언어를 갱신하는 것인데,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생태 낙원이다. 시인이 생각하는 생태 낙원은 상극적 원리를 거부하고 자연의 가치와 상생의 원리가 살아있는 곳이다. 이 시집에는 순수한 자연을 노래하는 시편들이 빈도 높게 나타나는데, 그런 시편들이 단순한 자연주의를 넘어 생태주의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태안 앞바다에 가면 주꾸미와 낙지가 이따금씩 수묵화를 그리기도 하고, 몇 년 전에 주꾸미가 하늘빛 고려청자를 건져 올린 적도 있습니다
태안 앞바다 유조선 기름 유출 사고
티브이 뉴스를 걱정스레 지켜보니, 그 검은 재앙이야말로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본 오일볼을 놀이 공으로 알고 등 굽혀 입사를 하던 왕새우들이 놀라 뿔뿔이 달아나고, 외끌이 쌍끌이 고깃배가 스무날 넘도록 바닷물고기가 아닌 타르 덩어리를 애면글면 건져 올렸습니다
자원봉사자 100만 명 돌파
죽어가는 파도들이 일렁이며 출렁이며 철썩철썩 주저앉는 바닷가, 그 기름방제 작업을 나 역시도 몇 차례 참여했습니다만 그야말로 태안의 기적은 콧마루가 찡하도록 눈물이 나는 일이 었습니다
다음다음 해에 찾아간 태안 앞바다는 파도들이 다시 살아나 갈매기 몇 마리 무동을 태우고 출렁출렁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태안의 기적」 전문)
이 시는 “유조선의 기름 유출 사고”로 “태안 앞바다”에서 벌어졌던 심각한 생태계 파괴 사건을 떠올리고 있다. “태안 앞바다”는 원래 “주꾸미와 낙지가 이따금 수묵화를 그리”는 아름다운 자연 공간이었다. 그러나 “기름 유출 사건” 이후 “검은 재앙”의 공간으로 변해 버렸다. “오일볼”과 “타르 덩어리”가 바다의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인간의 삶마저 심각하게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그러나 생태계 복원에 대한 의지는 “자원 봉사자 100만 명”을 불러들였고, 그 결과로 “태안 앞바다”는 “갈매기 몇 마리 무등을 태우고 출렁출렁 춤을 추”는 공간으로 재생의 공간이 되었다. 시인은 이러한 인간의 생태 의지와 자연의 복원력에 감탄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생태 의식은 최근 원산도 개발에 대해 “원산도에서 정말 좋았던 것은 총총한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밤하늘이었다//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못내 그리워하던 초롱초롱 영롱한 별들이었다”(「원산도에 다녀와서」 부분)는 인식에서도 드러난다. 연육교를 놓아 이미 자연의 섬이 아닌 “원산도”에 대한 생태적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시인은 반생태의 현실에 불만을 드러내는 동시에 생태적 세계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기도 한다. “황소개구리 몸집이 제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물큰한 쇠똥 한 무더기쯤도 안 되는 것을”(「은석 저수지 풍경」 부분) 강조한다. 이는 생태계 파괴의 현실을 비판하면서 자연의 순리를 강조하고 있다. “서로서로 울음을 밟지 않으려고/ 긴 숨 삼키듯 조심하며/ 번갈아 차례로 가락을 뽑는/ 수탉들의 울음의 질서라니,/ 겨울 하늘 무리지어/ 날아가고 날아오는/ 겨울철새들처럼/ 그 서열이 있나 보다”(「울음의 질서」 부분)라고 노래한다. 이때 “질서”는 자연의 원리 혹은 생태의 원리와 다르지 않다. 건강한 생태 의식은 자연의 원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일 터, 이 시에서 신새벽에 닭들이 보여주는 “울음의 질서”는 그러한 원리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
생태의 원리에 대한 인식은 시간관에서도 나타난다. 시인은 세속의 시간을 넘어 온전한 시간을 찾아 나선다. 시인은 자신의 나이를“일흔세 살이 아니라 73층/ 어찌어찌 하늘 가까워지고/ 잠을 자고 꿈을 꾸고”(「봄비, 듣다」 부분)라고 하여 세속의 시간관념과 다르게 인식한다. 자신의 나이가 흘러간 세월이 아니라 쌓이는 지혜임을 강조하면서, 아직 “꿈”과 멀어지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이 시집의 표제작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하릴없는 세월에 붙일 우표를 무엇으로 할까 잠시간 골똘했어요
너나없이 학창 시절에 은행잎, 단풍잎, 네 잎 토끼풀을 책갈피에 끼워 두기를 좋아했었지요
풋풋한 풀잎들 가운데 네 잎 토끼풀이 마땅하기는 하지만 보물찾기도 아니고 영 찾기가 힘들어서요
역시 눈치 빠른 당신은 단풍잎이라는 것을 벌써 알아차리셨군요
단풍나무와 우체통, 빨간색과 또 다른 빨간색은 잘 어울리지 않아요
발삼나무 창창울울한 캐나다는 가본 적 없어 알 수 없지만요
우리나라 어느 우체국도 단풍나무 바로 옆에 우체통을 세워 둔 곳이 없어요
그러저러 허송세월했노라고 안개처럼 부옇게 한숨짓지 마세요
세월에 단풍잎 우표 붙여 구름 집배원 아니면 강물 집배원의 발품을 좀 빌릴까 해요
어느 세월쯤에 도착할지 몰라도 수취인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어요
늦가을 비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세월에 붙일 단풍잎 우표 몇 개 냉큼 주워들었지요(「단풍잎 우표」 부분)
이 시에서 “하릴없는 세월”은 세속의 시간이다. 그 시간은 속악한 세상에서 경쟁과 상극과 이기심으로 살아가는 반생태적인 삶을 의미한다. 시인이 그러한 “세월”을 편지에 넣어서 보내고 싶은 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세계이다. 이때 “하느님”의 세계는 신앙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세월” 너머에 존재하는 생태적 낙원이다. “세월에 단풍잎 우표 붙여 구름 집배원 아니면 강물 집배원의 발품을 좀 빌릴까” 한다는 데에 그러한 뜻이 함의되어 있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발간색”을 칠한 “우체통”을 부정하는 데서도 그러한 뜻이 암시되어 있다. 따라서 “단풍잎 우표”는 인간의 우표가 아니라 자연의 우표이고 생태의 우표이다. 이 우표는 인간이 지닌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여 세계의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상생하는 생태 낙원으로 안내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이 세계는 당연히 시인이 절감했던 언어의 불완전성 혹은 인생의 불완전성을 극복한 곳이다. 이 세계를 상상하는 것만으로서 박만진 시인은 이미 세속적 “세월” 너머를 꿈꾸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는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