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록6막47장 (4부)
이제는 아내의 남편친구"조규 ○"나 매제의 건은 접어두기로 한다.
추후 나를 풍지박살 내는 일이 발생하나 , 그것은 다음에 이야기 하기로 한다.
너무 내가 당하는 일만 기록하니 읽는 이가 거부감이 생길수 있고 , '회고록'이 아니라 '신세타령'으로 보일지 몰라 고리따분한 이야기는 그만 두기로 한다.
슆게 이야기해서 잘먹고 잘살라 하고 마음을 추수려 본다.
아내와 나는 여행을 몰랐다.
험한 시절을 보내느라 변변치 않은 여행 한번 다녀보질 못했다.
여름의 바캉스는 고사하고 가을 단풍 놀이나 봄의 벚꽃놀이도 다녀보질 못했다.
IMF이후 삶의 밑바닥에서 허우적 거니느라 세상구경도 못하고 산것이다.
그런데 "후"의 전남 광주 "조선대"입학은 우리 부부에게는 "후"의 뒷바라지를 위해 종종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광주를 가게 되였고 자연스럽게 호남의 절대 절경과 명소를 방문하게 되였다.
만약 "후"의 조선대 입학이 없었다면 그많은 호남의 명소를 전부 볼수 있었겠는가?
"후"는 9월 중순경이면 동아리에서 주최하는 "음악 연주회"를 개최하여 매번 아내와 나는 음악회에 참석하였다.
바이올린을 어깨에 걸치고 연주할시면 생소한 광경에 우리는 넉이 나갔고, 연주는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수 없으나 , 대중음악이 아닌 고풍스러운 클라식음악을 연주하고 있다니 대견스러웠다.
강당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동아리 회원들은 지휘자의 봉을 주시하며 음율의 박자를 맞추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것 같았다.
들어볼법한 음악이 연주되고 그런데로 열성적인 그들의 하모니는 계속되였고 그들의 연주회가 끝날시에는 관중들이 일어서 기립 박수를 하고 말았다.
짝 짝 짝.
짝 짝 짝.
오늘 따라 그때가 그리운 것은 왜일까?